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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최엘비 인터뷰

‘영혼 없는 힘내라는 말이 더 힘든 걸 알아
또 고작 그거 가지고 그렇게까지 힘들어하냐고’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中)

청춘은 왜 아파야만 하고,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가. 이해와 공감이 결여된 사회는 많은 사회 초년생들을 점점 구석으로 내몰고 있다. 빛나는 힙합 스타들의 주변을 맴돌던 래퍼 최엘비 역시 여러 아픔을 겪으며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다. 하지만 그는 귀를 막고 밴드 브로콜리너마저의 음악을 택했다. 세상의 어떤 말보다 노래 가사 한 줄이 주는 울림을 몸소 깨달았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음악도 위로가 될 수 있기를 꿈꿨다.

그 염원은 작년 11월 정규 3집 < 독립음악 >으로 결실을 맺었다. 열등감으로 물들어 일그러진 과거는 물론 냉혹한 현실에 수긍하며 살아가는 조연들의 모습을 낱낱이 기록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 냈다. ‘죽음까지 막는 음악가’의 의지를 이어받은 최엘비는 더 이상 엑스트라가 아닌 주인공으로 우뚝 서있었다. 2021년의 끝자락, 어느 때보다 행복한 연말을 보내고 있던 최엘비와 함께 그의 마지막 20대를 정리해 봤다.

최근 발매한 정규 3집 < 독립음악 >의 반응이 상당히 뜨겁다. 인기를 실감하는지.

여태까지 냈던 것들과 확실히 다르다. 음원 사이트에 댓글도 많이 달리고 SNS 개인 메시지로 장문의 감상평을 보내주시기도 한다. 지극히 개인의 경험과 생각을 녹인 자전적 앨범이지만 세상의 수많은 조연들, 즉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으려 노력했기 때문에 많은 공감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커뮤니티나 평론 사이트에서도 언급을 많이 해줘서 사람들이 내 음악을 자연스럽게 많이 접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변화를 하루빨리 무대 위에서 체감하고 싶을 뿐이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주요 장치로 극적인 요소들이 자주 등장한다. 영화적 연출의 배경이 궁금하다.

처음부터 독립영화를 생각하고 작업했다. ‘최엘비’라는 배우가 오디션장에서 주인공 배역을 따내려는 장면을 상상했고 그렇게 처음 탄생한 곡이 ‘아는 사람 얘기’다. < 독립음악 >의 시작은 무조건 내가 오디션 보는 걸로, 대본을 읽는 걸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중간중간 감독이 하는 평가는 따로 정해둔 것 없이 프리스타일로 녹음을 했다. 큰 틀만 정해두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진행했다.

첫 곡 ‘아는 사람 얘기’부터 < 쇼미더머니 5 > 예선 탈락처럼 가장 초라했던 시절을 드러내고 스스로를 패배자라고 단정 짓는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야 후련할 것 같았다. 앨범 작업할 때 보통 그 당시의 나를 데리고 와서 다시 꺼내곤 한다. 이번 앨범에 그때의 모습을 기록해야 이 답답한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을 것 같았고 이왕 하는 거 최대한 솔직하게 다 표현했다.

‘최엘비 얘기를 하는 최엘비를 연기하는 최엘비’가 화자로 나선 것도 같은 이유인지.

정확하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 때 내 얘기는 아니라면서 대화를 끌어가서 열등감의 밑바닥을 온전히 드러내고자 했다. 그리고 한 번 더 비꼬아서 들려주면 사람들이 듣기에 몰입감도 있고 재미있는 포인트가 될 거라 판단했다.

열등감과 비교의 중심엔 친구 비와이와 씨잼이 있다. 두 친구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는지.

고등학교 시절 비와이는 같은 반, 씨잼은 옆반이었다. 그 둘은 항상 같이 붙어 다닌 반면 나는 혼자 있는 걸 좋아했다. 내가 쉬는 시간에 앉아서 가사를 쓰고 있으면 둘이 옆으로 다가와 서로 랩도 들려주며 어울렸던 기억이 난다.

학생 때도 그 둘은 잘 했다. 작업량도 상당했지만 무대 위에서의 끼가 장난이 아니었다. 학교 축제 무대에 같이 선 적이 있는데 내가 제스처를 소극적으로 하는데 비해 걔네들은 웃통까지 벗고 난리가 났었다. 얘네는 나중에 진짜 크게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속으로 그들과 어느 정도 격차를 두었던 것 같다.

가사에도 나오지만 둘과 음악 취향도 달랐다. 크루를 함께 하면서 의견 차이는 없었는지.

애들이 피프티 센트나 릴 웨인을 들어보라고 했는데 조용한 음악을 좋아하는 나에겐 잘 와닿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내가 어떤 음악을 해야겠다는 구체적인 그림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타협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냥 랩하는 게 재미있었다. 단체곡을 할 때도 내가 제안한 적은 한 번도 없고 잔잔한 재즈 비트에 내 노래를 따로 만들어 보는 게 전부였다. 사실 섹시 스트릿이란 이름도 맘에는 안 들어서 처음 들어갈 때 고민을 많이 했었다. (웃음)

스스로 그들과 거리를 두고 열등감을 느끼긴 했지만 유명한 친구들 덕분에 이름을 알리기 쉬웠던 것도 사실이다. 최엘비를 항상 ‘누구누구 친구’로 기억하는 세상 속에서 나 자신부터 바뀌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나 사건이 있었는지.

한 번은 행사에 가서 기리보이 형의 백업 더블링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 여럿이서 무대에 오르면 언제나 함성이 가득하다. 나는 그 환호를 즐기면서 랩을 하는데 그날 문득 정신 차리고 관객들을 바라보니까 전부 기리 형을 찍느라 바빴다. 내가 랩을 하고 있는 중에도 다른 사람이 집중 받는 상황을 접한 후에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내가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스스로 변화의 필요를 느끼고 작업을 결심했다.

기리보이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초기 활동명 ‘레이지본즈’에서 지금의 ‘최엘비’로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큰 일조를 한 걸로 알고 있다. 기리보이와 크루 우주비행은 어떤 존재인가.

사실 < 쇼미더머니 5 > 예선 탈락 이후 열등감이 극에 달했던 24살 즈음 음악을 관두려고 했었다. 랩은 그만하고 원래 하던 그림을 그리자고 다짐했을 때 우주비행에 래퍼가 아닌 아트 디렉터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리 형이 요즘엔 랩 안 하냐고 물어보면서 피처링 한번 해보자고 제안을 했다. 마음은 접어둔 상태였지만 가사 쓰고 서울 가서 같이 녹음도 해보니까 또 재미있었다. 기리 형은 내가 다시 음악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은인이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기리보이의 열렬한 팬이었다.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소박한 감성을 우리나라 힙합 음악에 가장 처음, 그리고 제일 많이 접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니까 기리 형도 나처럼 인디밴드를 좋아했다. 심지어 즐겨 듣는 팀까지 많이 겹쳐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나에게 음악적 아버지이기도 하다.

인디밴드를 좋아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

예전에 아는 교회 집사님께서 mp3에 노래를 넣어주셨는데 따뜻한 분위기의 음악이었다. 인터넷으로 알음알음 검색해 보니까 인디밴드들의 노래에 그런 향취가 묻어있었고 그때부터 유명한 팀들을 하나씩 찾아 들었다. 꼭 인디밴드가 아니더라도 잔잔한 음악들을 많이 들었다. 

주로 어떤 밴드의 음악을 많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타이틀곡 ‘도망가!’의 피처링을 맡아주신 브로콜리너마저는 나에게 많은 음악적 영감을 안겨준 밴드다. 그리고 내가 추구하는 찌질함의 극치와 맞닿아 있는 팀이 십센치다. 1집의 ‘그게 아니고’가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캐스커, 한희정, 롤러코스터, 디어클라우드, 요조,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파고, 못처럼 많은 인디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며 자랐다.

1년 전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에서도 브로콜리너마저에게 애정을 표한 바 있다. 언제부터 좋아하게 된 건지.

입시 미술을 준비하던 고2 때부터 2년 동안 브로콜리너마저만 계속 들었다. 1집 < 보편적인 노래 >, 특히 ‘속좁은 여학생’이란 노래를 굉장히 좋아했었다. 내가 여학생이 된 것 같은 착각까지 들 정도로 음악이 전하는 이야기가 눈앞에 선명하게 묘사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앨범을 들으면 당시 미술 학원의 물감 냄새, 걸레 말리는 냄새까지도 다 떠오른다.

동경하던 밴드를 실제로 만난 건 언제인지.

한 유통사 인터뷰에서 깜짝 이벤트로 덕원 님이랑 전화 연결을 해 주셨고 나중에 콜라보 할 일 있으면 같이 하자고 말씀해 주셨다. 처음엔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우리 공연하는데 같이 할 수 있겠냐?’라고 연락을 주셔서 인연을 쌓게 되었다.

사실 잘 알지도 못하는 래퍼가 갑자기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이란 노래를 들고 나와서 찬양하고 있었으니까 혹시나 부담스러워하시면 어쩌나 하고 고민도 했었다. 실제로도 처음에 듣고 살짝 부담스러웠다고 하셨다. (웃음) 그래도 지금은 다 같이 단체 방에서 꾸준히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전작과 동일한 위치에 있는 마지막 곡 ‘도망가!’에서 밴드가 실제로 모습을 드러내며 ‘죽음까지 막는 음악가’의 의지를 그들과 함께 실현했다. 같이 작업한 소감이 남달랐을 것 같다.

거의 10년 넘게 스피커나 이어폰을 통해 듣던 목소리가 내 눈앞에 실존한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직접 만난 것도 믿기지 않았지만 작업 의뢰를 드린 이후도 적잖이 놀랬다. 특별히 내가 주문한 게 없었다. 정해진 멘트 없이 곡 내용만 설명해 드렸는데 단번에 의도를 파악하셔서 녹음도 바로 오케이가 났다. 브로콜리너마저로 출발했던 내 음악에 그들이 도착한 순간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선망하는 아티스트임은 틀림없지만 분명 독립이라는 취지에 맞춰 피처링을 완전히 걷어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협업을 해야겠다고 다짐한 이유가 있을지.

원래 전부 혼자 하려고 했었다. 근데 작업을 하면 할수록 누군가가 마지막에 등장해서 ‘하나 둘 셋 하면 도망가’라고 밀어주는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내가 브로콜리너마저의 음악을 듣고 자랐으니까 내 우상의 격려로 마무리를 지어주는 게 이 앨범의 완성이라고 생각했다.

앨범 전반에 부모님을 향한 존경과 애정도 느껴진다.

‘독립음악’의 노랫말에도 쓰여있지만 나는 특이한 아이였다. 어릴 때부터 행동 강박이란 걸 앓았는데 그것 때문에 내가 상상하는 모든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움직이는 끈을 보고 뱀을 떠올리고, 그 뱀이 똬리를 틀고 있을 때의 포근함까지 연상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학교에서는 애들이 멀리하던 편이었다.

하지만 엄마, 아빠는 믿고 기다려 주셨다. 내가 혼자 빠져있는 그 세계를 즐기도록 놔뒀고 오히려 그 공상을 발전시켜서 그림 같은 걸로 표현하도록 힘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때 받은 사랑이 아직까지도 내 음악의 영감이 되고 내 화법으로 자리 잡는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집중력 있는 행동이 곡 작업할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어떤 상황을 볼 때 멀리서 보는 게 아니고 돋보기로 보는 것처럼 최대한 가까이 관찰하려 한다. 상황을 세세하게 묘사하다 보니까 들었을 때 그 장면들이 상상되고 가사, 연주의 색깔과 온도로도 드러난다. 음악을 하게 되면 브로콜리너마저처럼 소박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고 싶었는데 이런 점들이 고스란히 내 노래에 녹아들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

가장 도드라지는 곡을 뽑아보자면.

처음 담배 피울 때의 기억을 더듬어 만든 ‘구름구름’이란 노래가 있다. 만화를 그릴 때 속으로 하는 생각을 말풍선에 담곤 하는데 구름처럼 피어나는 담배 연기가 꼭 말풍선 같았다. 그래서 담배 피우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두고 그 말풍선 속에 표현들을 채워나갔다. 다른 곡들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을 만화처럼 몇 개의 컷으로 구체화하는 편이다.

그림이나 학업에 대한 미련은 없는지.

앨범 커버 작업할 때도 어느 정도 밑그림을 그려서 디자이너에게 전달하기 때문에 큰 미련은 없지만 요즘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그림으로 표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부쩍 많이 든다. 사진을 찍든 그림을 그리든 하나하나 내 손을 거쳐서 하나의 아트워크 단편집을 만들어보고 싶다.

과거 퍼그 모양의 복면을 눌러쓰고 활동했을 만큼 강아지 ‘율무’도 굉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애완견을 넘어 또 한 명의 가족인 ‘율무’는 어떤 존재인가.

감정이 메말랐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다. 항상 옆에 있길 바라다보니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닌 동물이 되었고 실제로 키우게 된 건 성인이 된 이후다. 씨잼과 행사를 뛰면서 5만원씩 벌었고 그렇게 모은 40만원으로 데리고 온 친구가 강아지 율무다.

퍼그는 얼굴에 주름이 져있어서 기분이 좋을 때도 인상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웃고 있지만 슬픈, 웃픈 모습을 보면 꼭 나를 보는 것 같았고 내 음악도 퍼그와 닮아 있다고 생각해서 데리고 왔다. 처음엔 엄마가 반대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나보다 더 아들처럼 생각하고 있다. 일종의 분신이다.

‘율무’는 물론이고 용궁으로 떠난 물고기 ‘삼칠이’와 현재 키우고 있는 햄스터 ‘콜리’만 봐도 동물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키우기 전에 한 다섯 달 정도는 공부를 한다. 나한테 온 친구들은 최고의 환경에서 살게 하자는 생각이 있어서 애착이 좀 남다르긴 하다. 그 동물의 역사까지 찾아보고 하니까. (웃음) 조만간 내가 키운 동물들의 기억을 모아 하나의 얘기, 하나의 앨범으로 제작하려 한다.

< 독립음악 > 이후에 세워둔 계획이 있는지.

당장 대면 행사로 진행하긴 어렵겠지만 상황이 나아지는 대로 단독 콘서트를 꼭 열고 싶다. < 오리엔테이션 >부터 < CC > 그리고 < 독립음악 >까지 엮어서 하나의 연극으로 만들고 싶다. 짧은 연기 사이사이에 랩을 하는 식으로 스토리가 있는 공연을 구성하고 싶고 코로나가 풀리면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준비 중이다.

그럼 이번 앨범으로 대학교 시리즈가 마무리된 것인가.

내가 계획한 건 4부작이다. 아직 < MT >가 남아있다. < 독립음악 >이 혼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면, < MT > 즉 멤버십 트레이닝은 전곡 피처링으로 채워 멤버들과 랩으로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여태까지의 작업 중에 제일 즐거운 감정으로 임하고 있다. 학교를 다닌 지 하도 오래돼서 나중에 재입학 해서 엠티를 한번 다녀와 볼까도 생각했다. (웃음)

그 전에 앞서 얘기했던 동물들이 커버를 장식하는 앨범을 먼저 발표할 예정이다. 제목은 < 푸른바다38 >이 될 것 같다. 예전에 만들었던 노래들을 상자에 담아 나룻배를 타고 미지의 섬으로 찾아가는 스토리를 기획하고 있는데 결말은 안 정했다. 그걸 두고 올지 아니면 그대로 다시 가지고 나올지는 모르겠다. < 독립음악 >처럼 내 경험을 담아 또 한 편의 서사를 써보려 한다.

최종적으로 < 독립음악 >이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고 그 대상은 누구인가.

빛나는 주연 뒤엔 현실에 맞춰 조연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당신들이 결코 패배한 게 아니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 꿈을 향해 나란히 같이 걷고 있는 모두가 결국엔 각자의 삶에서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 노래를 듣고 스스로를 많이 아껴줬으면 좋겠다.

< 똥파리 >라는 영화가 있는데 극의 주인공은 흔히 우리가 피하고 신경도 안 쓰는 그런 사람이다. 근데 그런 사람도 결국 자기 모습을 조명하는 영화 안에선 주인공이 된 거다. 저마다의 스토리가 있는 거고 그래서 나도 조연들의 마음을 대변한다는 생각으로 만든 것 같다.

인간 최재성의 20대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 이유는.

최근에 보고 있는 웹툰의 제목이기도 한데 내 20대는 ‘찌질의 역사’다. 패배감에 젖어 있고 연인과의 이별에도 힘들어하며 찌질하게 살았는데 이제 그 역사가 끝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 한다. 그래도 < 독립음악 >을 통해 열등감으로 물들었던 내 과거를 어느 정도 털어낸 기분이 든다. 실제로 씨잼, 비와이는 알지만 나를 몰랐던 분들도 이제 너도 주인공이라고 말을 많이 해주신다. 사람들이 보내주는 글을 보면서 위안을 얻은 만큼 감사한 마음을 담아 꾸준히 곡 작업을 이어갈 것이다.

눈앞에 다가온 30대, 앞으로의 ‘최엘비 유니버스’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가길 바라는지.

어린 티만 살짝 벗어도 만족이다. < 오리엔테이션 >이든 < CC >든 다 대학생, 젊을 때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나도 이제는 좀 어른의 얘기를 해보고 싶다. 그러니까 앨범 속에 투영하는 ‘나’도 같이 성장하는 느낌으로 가져가고 싶다는 말이다. 서른이 된 만큼 또 말도 안 되는 거 막 시도하고 만들어 볼 예정이다. (웃음)

재차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을 그의 한 마디. 지는 걸 부끄러워하지 말고, 우는 걸 창피해하지 말자. 우리는 이미 각자의 인생에서 주인공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더 아껴주자. 아픈 과거를 드러내면서도 인터뷰 내내 수줍게 미소를 머금은 그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청춘의 얼굴이 아닐까.

그때그때 떠오르는 ‘내 얘기’를 음악으로 다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선언한 최엘비. 또 어떤 평범한 이야기로 가장 보통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지 기대하며, 그의 선한 영향력이 널리 퍼지길 기원할 뿐이다.

인터뷰: 정다열, 장준환, 김성욱
촬영: 김성욱
정리: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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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하이(Epik High) ‘Face ID (Feat. 기리보이, Sik-K, JUSTHIS)’ (2021)

평가: 3/5

사람 만나기 쉽지 않다. 지난 2년간 세상은 급속도로 바뀌었고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 대신 비대면 소통을 보편화했다. 마스크 없이 활짝 웃는 얼굴을 꿈꾸는 데서 시작한 에픽하이의 신곡은 방향을 틀어 익명성에 기대 더욱 기승을 부리는 악플러를 겨냥한다. 가시가 돋친 듯 날카로운 가사는 팬데믹이 야기한 위험 요소와 맞닿아있고 오는 12월에 발표될 < Epik High Is Here 下 >의 톤이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을 짐작하게 한다.

2014년 작 ‘Born hater’의 동생곡처럼 들린다. 곡의 스케일은 상대적으로 작지만, 베이스가 강조된 강력한 비트가 전반적으로 날 것의 록 사운드를 구현하며 직설적인 가사의 뒤를 받친다. 정교하게 설계된 타블로의 버스(verse)와 후렴 뒤 등장하는 저스디스의 스킬풀한 12마디는 묵직하고 반복적인 비트를 날카롭게 파고들며 곡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다만 미쓰라의 랩은 라이밍과 박자감 측면에서 단조롭고 밋밋하다. 오토튠에 트랩비트를 버무린 식케이의 훅은 그 자체로는 불균질하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곡의 흐름 덕에 큰 단점으로 작용하지 않고 투컷의 편곡과 비트 메이킹 능력이 다시 빛을 발한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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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보이 ‘시공간’ (2021)

평가: 3.5/5

일상적인 감성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그의 특기가 전면에 드러나 있는 트랙이다. 어찌 보면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남녀관계를 태양계를 비롯한 여러 소재에 빗대어 흥미롭게 표현했고, 랩-싱잉 기반의 풍부한 선율감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그 미묘한 감정의 흔들림을 명확히 캐치하고 있다. 곡 전반을 감싸는 신시사이저의 멜로우함, 여기에 미니멀하게 얹히는 딱 필요한 만큼의 비트가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그것이 일정한 장르를 넘어 ‘보편적인 음악’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이 곡의 장점. 꾸준함도 모자라 갈수록 상향 평준화되는 그의 노래들, 그야말로 ‘믿고 듣는 기리보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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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보이 ‘9컷’ (2020)

평가: 3/5

기리보이 음악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어눌한 발성에서 태어난 독창적인 래핑, 다른 하나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유동성’이다. 비록 그를 바라볼 때 우주비행(WYBH) 크루의 대표 이미지와 방송 매체에 비친 장난기 어린 캐릭터에 시선이 갇히는 경향이 있지만, 순수 개인 커리어의 영역을 파고든다면 단박에 수긍할 문장이다. 치명적이고 육감적인 감각의 내음부터 고도화된 기술로 가득한 기계 소리까지, 하나로 정의하기 힘든 세계관을 자행하면서도 매번 준수한 퀄리티를 입증해온 기리보이에게 ‘유동성’이란 단어는 마땅한 훈장처럼 보인다.

작년 10월 발매된 EP < 영화같게 >에 수록곡을 추가해 완성한 정규 8집 < 9컷 > 역시 탐험 정신의 연장이다. 본작의 테마는 절절한 발라드 넘버. 전작 < 치명적인 앨범 III >의 ‘별이지고있다’와 ‘제설’ 등을 전신으로 둔 뒤 OST 풍의 카테고리를 따라간다. 쌓아 올린 방대한 커리어에서 얻은 배경지식 역시 건재하다. 작풍을 암시하는 직관적인 제목, 정해진 기준 아래 단편이 묶인 구성. 그리고 드라마틱한 상황을 논하되 절대 우아하지만은 않은, 특유의 현실적인 연애의 치부를 다룬다는 점 역시 그가 꾸준히 주장해온 ‘찌질’ 미학에 포함된 내용이다.

물론 여러 장르가 혼재하던 형식과 달리 진중함과 감성의 조합만을 전문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차이를 언급할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 접근할 때 평소 사용하던 몽글몽글한 신시사이저 재료 대신 주제에 걸맞게 록 사운드와 현악 세션으로 교체했다는 점 역시 개성을 부여하는 영리한 요소다. 초반부 ‘사랑이었나봐’와 ‘휴지’가 이러한 스타일을 대변하는 좋은 예시인데, 연애 다툼을 올림픽에 비유하는 등 재치 있는 비유로 본인 색채를 주입함과 동시에 더욱 간단하면서도 명확해진 멜로디와 가사 배치로 대중의 접근성까지 확보한다.

과거를 회상하는 ‘내자리’의 가사와 밴드 사운드를 활용한 전반적인 연출법에서는 2016년 작 ‘하루종일’이 밴드 버전으로 편곡되기까지 걸린 2년간의 시간적 흐름이 떠오르기도 한다. 결국 뻗어 나간 작법의 갈래는 작법뿐 아니라 어느정도 본인의 성장도 가리키는 셈. 다만 새 페이지를 펼친 감각을 전부 끌어 올리기에 시간이 부족했던 탓일까, 피아노를 이용한 연결처 ‘인터루드’ 이후 어쿠스틱 질감이 강조되는 후반부는 평범을 탈피하지 못하고 기시감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인다. 번뜩이는 지점이 적다. 피처링 진은 의도대로 곡에 자연스레 녹아들지만 신선함을 피력하지 못하고, 결국 예전 작법의 그림자가 호출되는 ‘라식’에게 킬링 트랙의 역할을 내어주고 만다.

시중에 존재하는 스타일과 양상을 기리보이 식으로 정립한 모범적인 발라드 힙합이다. 다만, 대중성에 초점을 맞추고 무난함을 택한 탓에 커리어의 비약을 가져다줄 분기점보다는 여전히 도약을 꿈꾸며 안정적인 활주로를 달리는 듯 하다. 일관된 기조 가운데 진행된 앨범의 통일성만큼은 발전적이나 이 역시 정리의 인상이 강하다. 물론 다작 아티스트가 짊어진 편견을 돌파하고 보컬과 래핑, 그리고 감각이라는 무기를 번갈아 꺼내 들며 또 한 번의 준수한 작업물을 만들어 냈다는 점. 그의 프로듀싱이 보증수표라는 데 반기를 들 사람은 도저히 없어 보인다.

– 수록곡 –
1. 사랑이었나봐
2. 술없이는아무것도못하는놈 (Feat. THAMA)
3. 휴지
4. 내자리 (Feat. Zion.T)
5. 인터루드
6. 찰칵
7. 연기 (Feat. 헤이즈)
8. 라식 
9. 우리서로사랑하지는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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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보이 ‘사랑이었나봐’ (2020)

평가: 3/5

다수의 머릿속에 쉽게 들어갈 요소를 두루 갖췄다. 전주 없이 바로 노래를 시작해 듣는 이들에게 신속하게 다가간다. 빠른 것을 선호하는 시대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구성이다. 멜로디도 간단하고, 기타 리프 또한 받아들이기에 까다롭지 않다. 후렴 초반 “사랑이었나 봐”, “그땐 몰랐지만” 이 부분에 넣은 간략한 스캣 덕에 노래는 더욱 부드럽게 느껴진다. 연인 간의 다툼과 후회를 다룬 가사는 보편성으로 많은 이의 공감을 이끌어 낼 만하다. 음역이 낮은 데에다가 가창도 특출하지 않아서 꽤 편안하게 들린다. 남자들이 환영할 노래방 애창 모던 록 한 편을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