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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장호일 인터뷰

그룹 공일오비는 톡 쏘는 가사와 진보적인 사운드가 떠오르는 1990년대 X세대의 아이콘이었다. 그룹의 전신은 ‘그대에게’의 무한궤도로 신해철을 제외한 조형곤, 조현찬이 1990년에 데뷔한 공일오비에게 흡수되었으나 대중에겐 장호일과 정석원, 듀엣 포맷의 잔상이 강하다. 음악적 두뇌인 동생 정석원이 은둔자였다면 형 장호일은 연예인적 끼가 넘치는 인물로 두 사람의 묘한 시너지가 그룹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장호일 하면 동시다발적으로 공일오비가 떠오르지만, 이외의 경력도 다채롭다. 공일오비 이전의 첫 시작이었던 서울대학교 밴드 갤럭시와 신성우와 함께한 프로젝트 밴드 지니 등 음악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최근엔 솔로 1집 < Retro >에 수록되어 있던 주곡 ‘Aneka’를 재발매했고, 장호일밴드를 결성했다.

하우스와 일레트로니카 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한 공일오비지만, 장호일의 DNA엔 헤비메탈이 흐르고 특히 딥 퍼플과 밴 헤일런에 강한 자극을 받았다. 기타 연주가의 축제 < 골든기타핑거 기타페스티벌 >에 첫회부터 내리 5회 연속 참여할 정도로 기타리스트로서의 정체성이 강한 그는 기타만큼은 절대 질리지 않는다고 했다.

여전히 공일오비의 장호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은데, 근황은 어떠한가요.

요즘 저희가 윤종신의 < 월간 윤종신 >처럼 월간 싱글을 내고 있습니다. 곡마다 객원 가수를 선별하는 체계죠. 정석원은 그룹의 안 살림을 도맡는 메인 프로듀서 역할이고 저는 예전부터 그랬지만 팀의 대변인 역할들 하며 공연 및 방송을 도맡고 있습니다. 코로나19 떄때 급격히 줄어들었던 공연을 슬슬 다시 시작하게 될 것 같네요.

코로나가 완전히 해제된 건 아니지만 거리두기가 완화되었는데 공연 계획을 잡고 있나요? 라인업이나 공연 진행 방식도 궁금합니다.

당장의 단독 공연은 계획에 없지만 각 지방의 문화센터 등 다른 공연들은 많이 잡혀 있습니다. 따로 준비한다기보다는 상황에 맞춰서 공연하게 될 것 같습니다. 밴드 이젠(EZEN) 당시 보컬이었던 헥스와 하고 정석원은 단독 공연에만 출연합니다.

정석원과 친동생인데 왠지 모르게 공식적으로,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거리감이 있어 보입니다.

정서적으로는 거리감은 전혀 없습니다. 워낙 팀을 오래 해오다보니 화해의 과정에서 생긴 규칙 혹은 묵계가 딱 정해져 있고, 그 선은 안 넘어가기 때문에 아마 그렇게 느끼실 것 같습니다.

혹시 그 묵계 중에 하나만 공개해주신다면?

음악에 대한 전권은 정석원이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끔 기타 연주를 요청하거나 ‘이 곡 모니터링 한번 해줘’해줘’라고할 때는 제 의견을 얘기하얘기하지만, 일반적으로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음악과 예술적인 측면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겠군요.

간섭하지 않는 거죠. 대신에 공일오비가 바깥으로 공연하러 다니거나 외부 활동을 할 때도 정석원이 전혀 관여하지 않습니다. 딱 선이 정해져 있어요. 그래도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인생의 파트너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형은 외부로, 그다음에 동생은 내부로 딱 나눠지는군요. 그래도 정석원을 그리워하는 팬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원래 정석원과 공일오비의 베이시스트 조형곤이 방송과 외부 활동을 기피하는 아웃사이더적인 성격이고 공일오비 당시에 단독 공연도 몇 번 안 했습니다. 그래서 정석원은 프로듀싱만 하고 외부 활동은 제가 하겠다고 공언한 거죠.

드물긴 하지만 단독공연을 하면 정석원이 나오기 때문에 팬들이 반가워합니다. 단독 공연과 행사성 공연과의 차별화라고나 할까요. 일반적으로는 헥스가 보컬을 맡지만, 지방에 다닐 때는 가끔 원년 객원 가수 중 한 명인 이장우가 동행해서 향수를 채우기도 합니다.

*이장우: 공일오비 2집 < Second Episode >의 수록곡 ‘떠나간 후에’에 참여한 객원 가수.

< 장호일 음악 인생의 세 가지 순간 >

장호일의 음악 인생에 가장 결정적이었던 세 가지 모멘트가 있었다면, 언제입니까?

공일오비의 결성입니다. 결성 당시엔 동아리 모임처럼 기념만 하고 흩어지는 일회성 프로젝트로 여겼거든요. 저희가 프로 뮤지션이 된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 했는데 이렇게 30년을 넘게 음악을 하다니 운명인가 봅니다.

사실 동물원 같은 팀엔 대학생들의 풋풋한 느낌과 아마추어리즘이 있었는데 공일오비의 음악은 그렇게 아마추어적인 느낌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당시 출현한 악기의 영향이 큽니다. 2집 때는 시퀀서가 등장하고 저희가 30대쯤 되면 샘플러가 나오게 됩니다. 사실 리얼 밴드로만 녹음한 1집은 저희가 들어도 어설플 수밖에 없었지만, 미디가 나오면서 프로그램으로 기본적인 틀을 잡고 가니 연주의 빈틈을 보완할 수 있었죠.

*시퀀서: 연주 데이터를 재생하여 자동 연주하는 프로그램 장비
샘플러: 음을 디지털화하거나 저장하며, 그 음을 소리 신호로 바꾸는 장비.

2집에서 시퀀서가 등장하면서 프로그래밍과 리얼 밴드가 공존하는 상황이 되었군요.

사실은 모든 앨범에 걸쳐 공존을 하죠. 기본 틀을 미디로 설계하고 그 위에 건반이나 색소폰 같은 실제 악기들이 같이 더해지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음악 스타일이 이미지에 더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요즘 레트로가 유행인 것과 달리 당시에는 디지털이 트렌디하고 세련된 느낌이었죠. 대학생 오빠들이 최첨단 미디 프로그램으로 찍은 음악에서 미국 음악에서나 듣던 톤 메이킹과 편곡이 나오니까 요즘 말로 ‘너무 힙한 거 아니야?’ 약간 이런 느낌을 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순간은?

음악에 대한 마인드가 바뀐 카투사 시절입니다. 당시 국내 대중음악계엔 ‘이건 안되고 저건 되’라는 자기들만의 이상한 법칙이 있었고 그게 창의성을 저해했습니다. 미군들과 연주하며 ‘이렇게 하면 왜안되?’ 라는 자유로운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미군들하고 밴드를 같이 했던 건데 거기서 얻은 건 무엇입니까?

음악에는 틀이 없다는 걸 배웠고 늘 관습에 반기를 들었던 공일오비의 음악적 마인드와도 통하는 지점입니다. 한 가지 특별한 기억이 있습니다. 흑인 친구가 펑키(Funky)한 키보드 치는데 거 너무 잘 치더라구요. 연주에 감동 받아 몇 년이나 쳤냐고 물어보니 일주일이라고 답하더군요. 타고난 리듬감으로 소리를 느껴가며 연주하는 거죠.이후에 ‘음악은 배워서 되는 게 아니구나,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느끼는 대로 하는 게 음악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모멘트는 무엇인가요.

1999년 말 장호일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1집 < Retro >를 냈던 것입니다. 직접 노래를 부르는 것의 어려움을 비롯해 벽을 많이 느꼈습니다.

장호일이라는 이름으로 솔로 활동을 시작할 때 마음가짐은 무엇이었습니까?

어차피 가야 할 길이 아니냐는 생각을 좀 했었어요. 이미 그전에 신성우와 지니를 조직한 경험도 있고, 대부분의 밴드가 영원히 함께 가기엔 쉽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는 혼자 해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컬 능력의 부족을 느끼며 차라리 방송이나 아니면 연기 쪽으로 가볼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1집 외에도 솔로 앨범 몇 장 내셨나요?

제 명의로 된 솔로 앨범은 1999년에 나온 1집 < Retro > 한 장입니다. 공일오비 때 각 멤버가 한 장씩 솔로 앨범을 냈고 저는 < Kloma >를 발표했는데 정확하게 장호일 이름을 걸고 발매한 것은 그 한 장이에요.

< 객원 가수 체제의 배경 >

공일오비의 두 축 정석원과 장호일은 정통 보컬과는 거리가 멉니다. 정석원 씨 같은 경우는 아마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 같은 경우를 보고 음악에 대한 희망을 얻었을까요?

그것은 아까 얘기했던 ‘Why not?’ 정신과 통합니다. 내가 노래를 못하는데 음악을 해야 하겠고, 작곡에는 자신이 있다면 말씀하신 대로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라든지, 아니면 이레이저(Erasure)처럼 멤버가 2명인데 프로듀싱만 하는 그런 모양새를 그대로 저희가 닮아간 거죠.

객원 가수의 아이디어는 정석원이, 아니면 장호일이 제시했나요?

아무래도 정석원 씨 같습니다. 그는 무한궤도 정식 멤버였고 저는 초기엔 세션 멤버에 가까웠기 때문에 발언 기회가 적었습니다.

결국 공일오비는 정석원의 음악과 장호일의 퍼스널리티가 융화되는 팀이라고 볼 수 있는데, 지금 돌이켜 봤을 때 강조하고 싶은 장호일의 공헌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공일오비의 미싱 링크(전체를 이해하거나 완성하는 데 필요한 정보)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장호일이 없었으면 공일오비도 그저 음악 잘하는 여러 팀 중 하나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장호일이라는 멤버가 들어오면서 아이돌 적인 특성을 부여했기 때문에 음악성 중심의 팀들과는 무언가 다른 느낌을 준 것 같아요. 약간 날라리 오빠들 같은 모습을 좋아해 주신 것 같습니다.

< 기타를 잡게된 계기 >

두 형제는 계산된 음악, 머리로 하는 음악 같지는 않았고 약간 몸적인 음악을 한 것 같아요. 음악을 오랫동안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는데, 음악을 향한 관심이 형성되었을 어린 시절 풍경이 궁금합니다.

저는 잠깐 피아노를 배우다가 접었는데 대타로 간 정석원 씨가 재능을 발견한 거죠. 어차피 전공할 건 아니니까 당시 유행이었던 팝 피아노를 몇 개월 배우다가 선생님께서 더 가르쳐줄 것이 없다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쯤에 록 음악에 눈을 뜨게 되었고 기타라는 악기에 푹 빠졌습니다. 대구 MBC에 계셨던 아버님의 엘피를 통해 음악을 쉽게 접했던 것 같습니다. 제 인생이 이제 바뀌게 되는 순간은 딥 퍼플의 베스트 앨범 < Deepest Purple: The Very Best Of Deep Purple >을 들었을 때입니다. 딥 퍼플이라는 팀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들은 앨범인데 첫 곡에 ‘Highway star’가 나왔어요. 곡 중간 전설의 기타 솔로를 듣고 충격을 받았죠. 그렇게 기타의 세계에 빠져들면서 월간 팝송을 읽고 딥 퍼플과 레드 제플린이라는 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타를 쳐야 하겠다 결심하게 된 순간인 거죠.

*월간팝송: 1971년 창간한 국내 최초 팝 음악 잡지

그렇게 기타 연습을 시작하셨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일본어를 번역해 놓은 엉터리 타브 악보로 기타를 배웠습니다. 일렉트릭 기타가 주요 악기인 록을 보고, 용돈 받아서 기타도 사면서 점점 기타에 빠져들게 된 거죠. 그렇게 정석원과 다른 길을 가게 된 거예요.

음악을 평생 직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이 없었는데(카투사 복무를 마치고 그는 나라기획이라는 광고 회사에 몸담기도 했다.) 무한궤도에서 다른 밴드가 파생되는 과정에서 어쩌다 보니 함께하게 되었고 정신 차려보니까 어느덧 공일오비의 30주년이 되었습니다.

무한궤도와의 인연은 어떻게 되나요?

제대하고 나니 정석원은 무한궤도에 들어가 있었고 신해철도 집에도 자주 놀러 오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제 라이브 세션으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신해철이 기타를 쳤지만, 라이브 할 때는 노래를 해야하니 기타 세션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 장호일이 뽑는 공일오비 베스트 5 >

7집 정규 앨범 < Lucky 7 >까지 했으니까 일곱 장에 다 참여하셨습니다. 그 가운데서 장호일이 꼽는 공일오비 베스트 다섯 곡은 무엇입니까?

1. 텅 빈 거리에서

그 곡이 없었으면 지금의 공일오비도 없었을 겁니다. 밴드 역사의 시작점이라서 지금도 연주할 때마다 가슴이 약간 짠한 느낌이 있어요. 원래 타이틀 곡도 아니었고 노래를 한 윤종신도 다른 곡들의 녹음을 마치고 마지막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래서 초판에는 아마 B면 제일 마지막에 있었다가 인기에 힘입어 나중에 나온 판들에는 타이틀로 올라옵니다. 9개월~10개월가량 역주행한 곡이라 어떻게 보면 팔자를 스스로 개척한 곡이라고도 할 수도 있습니다.

‘텅 빈 거리에서’는 공일오비가 일회성 프로젝트라는 느낌을 사라지게 했죠. ‘이젠 안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2. 이젠 안녕

그래서 노래도 팔자가 있다고 합니다. 정규 2집 < Second Episode >에 들어있는 ‘이젠 안녕’도 알아서 잘 팔자를 개척했는데 원래 이게 제목 그대로 밴드 활동에 작별을 고하는 노래였습니다. 정규 1집 < 공·일·오·비 >를 내고 멤버들이 흩어졌다가 앨범이 잘 팔리는 바람에 사장님의 부름을 받고 낸 2집이거든요. 우리는 각자 취직하고 복학해야 하니 그래 여기까지 ‘이젠 안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노래 인기가 높아져 한동안 노래방 보너스 타임의 단골이 되고 이제는 졸업식을 대표하는 곡이 되었습니다.

이게 왜 졸업 노래가 됐나를 유래를 좀 살펴보니까 저희 팬 중 선생님이 되신 분들께서 졸업 노래로 ‘이젠 안녕’을 골랐고 그게 마치 구전 가요처럼 퍼지고 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3.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애증의 곡입니다. 유재학 대영 AV 사장님께서는 소속 뮤지션들에 큰 간섭은 안 하셨는데 이 곡만큼은 ‘랩을 해보자’라고 제안하셨죠. 저희 입장에서는 서태지를 비롯한 몇몇 뮤지션이 빠른 랩을 구사했으니 반대로 느린 랩을 시도해보려고 했지만, 사장님 마음에 안 드셨나 봐요. 그래서 리듬 없는 내레이션을 해봤는데 이번엔 저희 마음에 안 와닿았고 원래 의도대로 진행했죠. 내정된 2집의 타이틀 곡은 ‘4210301’이었는데 팬 음 감회에서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의 불호가 많아서 청개구리처럼 이 곡을 선택했죠.


*대영 AV: 1990년대의 대표적인 레이블로 김동률, 신해철과 공일오비가 소속되어 있었다.

4. 아주 오래된 연인들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데모가 참 좋았는데 1차 녹음이 생각대로 안 나왔죠. 보컬도 따로 없는 상태였다가 윤종신의 친구였던 김태우가 급작스럽게 투입되었어요. 다행히 김태우의 목소리 톤이 너무 좋아서 정석원도 바로 녹음에 들어가자고 했죠. 다만 첫 녹음은 생각 밖으로 별로여서 비상 회의 끝에 새벽 4시까지 숙소에 모여서 결국 멜로디를 바꾸고 수정된 버전을 내게 되었습니다. 그 곡으로 덕분에 언더그라운드에 있던 공일오비가 오버그라운드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김태우: 1969년 출생으로 그룹 뮤턴트 및 솔로로 활동

이 곡에 힘입어 후속곡들도 인기를 얻었는데 타이밍 좋게 < 내일은 늦으리 > 콘서트에 나가게 되었죠. TV 출연 한 번도 안 하다가 방송에 나오게 된 셈인데 사람들은 공일오비 하면 서울대 출신 모범생을 예상하였나 봐요. 그런데 김태우가 야생마처럼 무대를 휘젓고 무슨 날라리 같은 애들이 나와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니까 약간 문화적 충격을 줬던 것 같습니다. 소위 말하는 오버 나잇 센세이션이라고 하룻밤 만에 스타가 되었죠. 마니아에서 대중으로 팬의 범위가 넓어진 거죠.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늘 김태우를 기준으로 다른 보컬들을 판단하는 것 같아요. 그 정도의 가창력과 무대 장악력을 가지고 있긴 쉽지 않습니다.

*내일은 늦으리: 1992년부터 1996년까지 대한민국에서 개최된 환경보전 슈퍼 콘서트.

5. 신인류의 사랑

원래 정규 4집 < The Fourth Movement >의 타이틀 후보곡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 영화사에서 X세대 남녀 간의 사랑에 관한 음악을 요청해왔고, 감독님께서 모던한 스타일을 원한다고 하셔서 ‘신(新)인류의 사랑’을 가지고 갔더니 거절당했죠. 욱하는 마음에 이 곡을 타이틀로 밀었는데 대박이 나서 전체 앨범 판매량은 4집이 가장 높았습니다. < 응답하라 1994 >에 나왔던 가요 톱텐 연속 5주 1위와 골든컵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곡이죠.

*KBS 가요 순위 프로그램 < 가요톱텐 >에서 5주 연속으로 1위를 하면 골든컵이라는 명예 졸업 제도가 있었다.

가사가 상당히 화제 되었습니다.

여성단체에서 최악의 가사 중 하나로 뽑을 만큼 당시에도 논란의 여지가 있었죠. 조금 억울한 게 전체적으로 찌질한 정서의 남자 얘기고 ‘신(新)인류의 사랑’이라고 한 것 자체가 이미 비꼬는 제목이거든요. 논란이 있었지만 ‘맘에 안 드는 그녀에게 계속 전화가 오고’처럼 다들 속으로 말 못하는 데 공감하는 그런 내용들을 담았죠.

정석원이 기본적으로 소심한 마인드기 때문에 가사도 억지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 본인에게서 나오는 소심남의 정서를 표현하는 거죠.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아도 속으로 생각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너를 생각하며 집 앞에서 기다린다.’ 이런 심상들이 공일오비 발라드에 공통으로 흐르는 거죠. 여기에 약간 기술적인 방식이 추가되는 건데 구체적 날짜나 장소명을 가사에 넣어서 대중의 공감을 끌어냅니다.

정규 5집 < Big 5 >에서는 리메이크 곡인 ‘슬픈 인연’과 ‘단발 머리’가 히트했습니다. 유재학 사장이 이전에 조용필의 매니저였기에 허락을 받을 수 있었을텐데 ‘단발머리’를 고른 이유는 무엇인가요?

‘슬픈 인연’은 소리의 완성도가 높은 곡이고 ‘단발머리’는 저희가 항상 꾸준하게 추구해온 복고 사운드의 완성형입니다. 사실 지금의 복고 유행이 저희들 시선에서 재밌고 신기합니다. 옜날에 우리도 복고를 추구했는데, 2~30년 후의 대중음악도 복고를 지향한다는 지점에서요.

원래는 앨범 전체를 리메이크 곡으로 만드려고 했는데 사장님께서 결사 반대를 했죠. 한국에서는 그건 안 된다. 의견을 절충해서 두 곡을 만들기로 했고 저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조용필 선배님을 빼놓을 수 없었죠. 선배님의 여러 곡 중 ‘단발머리’로 낙점했고 힘들게 허락 받다보니 부담감이 커져 녹음을 약 10차례 진행했습니다. 타이틀 곡으로 밀었는데 인기는 ‘슬픈 인연’이 더 많았죠.

돌이켜 보면 5집 < Big 5 >를 정점으로 공일오비가 하향세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레트로로 가는 선택은 지혜로웠으나 창작곡으로 승부를 겨뤘다면 앨범 두어 장은 더 발표하지 않았겠느냐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개념이 공일오비의 음악 인생을 관통하는 모토군요.

말씀처럼 뮤지션은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길로 가면 잘 되는 게 너무 뻔하게 보이는 거죠. 밴드 초기에는 이것저것 고민도 많이 했지만, 이제는 많이 경험이 쌓였으니 ‘가고 싶은 데로 가자’ 라고 생각했습니다.

< 장호일 기타 연주의 핵심- 범용성 >

장호일의 기타 연주의 핵심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범용성이라고나 할까요. 록밴드 갤럭시로 시작한 만큼 하드락이나 헤비메탈 DNA가 있지만 공일오비는 정반대의 발라드를 했거든요. 저한텐 제일 어려운 장르가 발라드예요. 발라드 편곡법이 굉장히 어려운데 반강제로 연습하다 보니 실력이 쌓이고 스펙트럼이 되게 넓어진 거죠. 그래서 웬만한 장르는 이제 자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우스갯소리긴 하지만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덕에 한국 힙합의 시조새이기도 합니다. 힙합책에도 적혀 있어요. 신성우와 한 프로젝트 그룹 지니의 1집 < Cool World >가 한국 펑크(Punk)의 시조가 되더라고요. 1995년 작이니 크라잉 넛보다 1년 먼저 나왔거든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도움이 됐던 일이 하나 있어요. 서울대학교 밴드 갤럭시에 2기로 들어가 선배들에게 사랑과 평화 스타일의 펑크(Funk) 음악을 사사하였죠. 소위 말하는 ‘쨉쨉이’ 연주 스타일을 반강제로 주입받게 되었는데 나중에 엄청난 도움을 준 거죠. 장기간 수련이 돼 있기 때문에 또 제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가 이 펑크 장르입니다. ‘아주 오래된 연인들’ 같은 경우도 피아노가 워낙 분리해서 잘 일이지만 사실은 펑키 기타가 꽤 많이 들려요. 

이번 ‘Aneka’의 재발매도 기타리스트로서의 장호일은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기타 축제 <골든핑거기타페스티벌>에도 수년째 참여하고 있구요.

보컬 멤버가 그룹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공일오비의 앨범에는 항상 연주곡이 하나씩 들어 있었고, 그 전통이 제 솔로 앨범에도 이어져 1번 트랙은 기타 연주곡 ‘Aneka’입니다. <골등핑거기타페스티벌>에서 제 곡을 들려드리면 의미가 더 깊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 곡을 연주할 때마다 좋아해주시더라구요.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의미가 있는 곡이고 대중들로 하여금 기타리스트로서 장호일을 생각해보게 만들어주는 곡이라서 뿌듯합니다.

< 장호일 인생의 결정적인 앨범 >

오늘날 장호일을 만든 결정적인 앨범은 무엇이 있나요? 

1. < Deepest Purple: The Very Best of Deep Purple > – 딥 퍼플

2. < 한동안 뜸했었지 > – 사랑과 평화

1번은 앞서 언급한 < Deepest Purple >입니다. 가장 중요한 ‘인생 기타리스트’는 리치 블랙모어고 가장 결정적인 곡은 ‘Highway star’겠죠. 기타라는 악기를 잡게 된 터닝 포인트가 되었으니까요. 국내 앨범은 사 ‘한동안 뜸했었지’ 들어간 사랑과 평화의 1집 < 한동안 뜸했었지 >입니다. 이 앨범을 들으며 펑크(Funk) 음악을 수련했죠.

3. < Van Halen > – 밴 헤일런

리치 블랙모어 때문에 기타를 잡았지만 가장 많이 좋아하고 따라했던 기타리스트는 에드워드 밴 헤일런입니다. 최근 우연히 밴 헤일런 음악을 쭉 듣다 보니 제가 그들의 리프를 거의 다 칠 줄 알더라구요. 옛날에 연습했던 감각이 남아있는거죠. 태핑 주법을 대중화한 ‘Eruption’은 일대 충격이었습니다.

4. < Are You Experienced > –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오히려 최근 한 10년 사이에 지미 헨드릭스를 되게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한참 기타를 배울 1980년대에는 밴 헤일런과 잉베이 맘스틴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등장하다보니 지미 헨드릭스는 올드한 스타일이다라고 인식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 이미 기타를 완성한 사람이구나’라는 걸 깨달은 건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습니다. 제가 만약 1970년대 사람이고 지미 헨드릭스의 연주를 본다면 ‘저 사람은 진짜 외계인으로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전에는 엘피로 소리만 접했는데 요즘은 수많은 라이브 영상들을 보다보니 느낌이 새로워요.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가 않고 공연 사진들 보면 옛날 흑인들 무시당하던 시대에 관객이 전부 백인이에요. 지미 헨드릭스는 기타의 조상신이죠. 

최근에 주목한 뮤지션이 있습니까?

잔나비. 대중들에게 많이 뜨기 전부터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는데 취향 저격입니다 반복해서 듣는 음악이 몇 없는데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가 수록된 < 전설 > 앨범이 무척 좋아서 반복해서 들었어요. 혁오도 좋아하는 밴드입니다.

진행: 임진모, 손민현, 염동교
사진: 염동교
정리: 손민현, 염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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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데뷔 30주년 공일오비, 빛나는 현재진행형 뮤지션

대중음악은 대중과의 교감을 기본 덕목으로 갖는다. 기쁨, 슬픔, 외로움,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나 설렘 등 보통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여러 감정을 노래함으로써 대중과 친분을 맺는다. 여기에 많은 이가 공통적으로 접하는 세상의 이모저모를 다루는 일도 공감대 형성의 중요한 면을 차지한다. 정서와 사고를 너르게 나누는 음악가가 많은 이에게 오랫동안 사랑받는다.

뮤지션이 길이 기억되기 위해서는 음악성도 필수다. 작품이 견고하고, 매번 산뜻함을 내보여야 음악 애호가들의 관심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여기에 다채로움도 장수를 위한 불가결한 조건으로 따른다. 여러 형식을 두루 소화할 때 많은 지지자를 확보하기가 수월하다. 이 세력은 활동에 추진력을 부여한다.

정석원과 장호일이 이끄는 공일오비(015B)는 일련의 사항을 만족하는 대표적인 뮤지션이다. 그룹의 노래들은 획기적인 변화를 도모한 6집을 제외하고 항상 대중적이었다. 그러면서도 곳곳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살폈다. 앨범들은 튼실했고, 호화로웠다. 올해로 데뷔 30주년을 맞이한 공일오비는 뛰어난 교감 능력과 탄탄한 작품으로 대중음악계에 선명한 자취를 남겼다.

애틋함을 증대하는 신선한 서정미

공일오비 노래의 으뜸 매력은 참신한 서정성이다. 여느 가수들과 마찬가지로 사랑 얘기를 주로 풀어냈지만 고리타분하지 않았다. 1990년 데뷔 앨범의 타이틀곡 ‘텅 빈 거리에서’는 사랑하는 이를 잊지 못한 나머지 몇 번이나 전화를 걸려고 하지만 주저하는 화자의 모습을 “야윈 두 손에 외로운 동전 두 개뿐”이라는 가사로 에둘러 표현한다. 당시 공중전화 통화 요금이었던 20원이 용기를 내지 못하는 화자의 상태를 극적으로 나타냈다. 손에서 사라지지 않는 동전이 처연함을 훌륭하게 연출했다.

2집 < Second Episode >의 ‘변해 간 세월 속에서’는 다른 사랑으로 옛 연인을 잊으려 했지만 “결국 너의 틀에서 비교할 뿐이잖니”라며 지나간 사랑을 갈구하고 있음을 전한다. 5집 < Big 5 >의 ‘그녀의 딸은 세 살이에요’는 이제는 다른 사람과 결혼한 옛 사랑의 아이를 매개로 이별 후 흘러간 시간을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과거의 연인을 기억에 붙잡아 두려는 한 남자의 연모를 묘사한다. 다소 지질해 보이긴 하지만 아이를 가사에 들인 덕에 털어놓는 소회가 담담하게 다가온다.

변함없는 일상에 대비해 이별 후의 상실감을 극대화하는 4집 < The Fourth Movement >의 ‘모든 건 어제 그대로인데’, 헤어진 연인이 불행하길 바란다는 말로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함을 역설적으로 말하는 7집 < Lucky 7 > 수록곡 ‘I hate you’도 공일오비 사랑 노래의 뻔하지 않은 모습을 설명해 준다. 그럼에도 이들 가사는 사랑과 이별 때문에 생겨나는 갖가지 감정을 폭넓게 포섭해 많은 이의 공감을 샀다.

사회의 문제점을 녹여 낸 유의미한 메시지

사회와 밀착한 내용도 공일오비 노래들의 특징이었다. 이 역사는 2집의 첫 곡 ‘4210301’로 시작된다. 노래는 소음, 매연, 등 굽은 물고기 등을 언급하면서 날로 심해지는 환경오염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키우던 개가 산성비를 먹고 죽었다는 간주의 영어 내레이션은 픽션 치고는 지나치게 앞서 나가긴 했지만 노래 덕분에 음악 팬들은 환경 문제를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룹은 3집 < The Third Wave >의 ‘적(敵) 녹색인생’에서 다시 한 번 환경 문제를 다뤘다. 하지만 딱딱하지 않았다. 무스와 일회용 용기 같은 화학제품의 만연, 궁상맞게 보이기 싫어서 식당에서 음식을 어느 정도 꼭 남기는 행위 등 누구나 일상에서 접하는 일들을 기록해 친근하게 느껴졌다. ‘적(敵) 녹색인생’은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실천 가능한 환경보호 캠페인송으로 남았다.

4집 중 ‘제사부(第四府)’는 계층 간 괴리를 부추기는 미디어와 진실에 무책임한 황색언론을 비판하고, ‘교통 코리아’는 일부 운전자들의 폭력적인 운전 습관을 꼬집는다. 5집 < Big 5 >에 수록된 ‘Netizen’은 정보화 사회에서 인터넷만 바라보는 탓에 사람들과는 단절되는 상황을, ‘결혼’은 좋은 스펙을 가진 사람을 배우자로 두려고 하는 천박한 결혼 문화를 지적한다. 이때 공일오비가 던진 화두가 긴 세월이 지난 지금도 한국 사회의 문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퍽 씁쓸하다.

사회현상에 대한 고찰이 매번 무겁지는 않았다. 2집의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장관리’를 하듯이 거리를 두며 대하는 젊은 여성을 소재로 다룬다. 2011년에 낸 EP < 20th Century Boy >의 ‘고귀한씨의 달콤한 인생’은 허세와 포장된 자랑에 집착하는 SNS 삶을 들춰낸다. 4집의 ‘요즘 애들 버릇없어’는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의 간극을 논하며 서로 이해가 필요함을 주장한다. 공일오비가 전한 사회적 메시지는 우리가 생활에서 흔히 마주하는 일들이기에 까다롭지 않게 들렸다.

싱싱하고 다양한 음악

음악은 항상 다채로워 감상을 즐겁게 했다. 전신이었던 무한궤도 때와 마찬가지로 1집은 아마추어 느낌이 나는 풋풋한 팝 록, 발라드가 다수였다. 그러나 2집의 ‘4210301’,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에서는 국내에 흔하지 않던 랩을 선보이며 트렌드의 선두에 섰다. 같은 앨범에 수록된 연주곡 ‘동부 이촌동 새벽 1:40’으로는 이지 리스닝 재즈를 소화하며 편안함을 제공했다.

이후 변화와 새로운 스타일의 모색은 더욱 활발해졌다. 3집 중 1분 20초에 달하는 긴 길이의 전주로 파격을 행한 ‘아주 오래된 연인들’로는 하우스 음악을, ‘적(敵) 녹색인생’에서는 아카펠라를 들려줬다. 4집도 서프 음악(‘신(新) 인류의 사랑’), 힙 하우스 성격을 띤 댄스 팝(‘남자들이란 다’), 하드록과 랩을 결합한 댄스음악(‘교통 코리아’) 등을 시도함으로써 음악 스펙트럼을 넓혔다. 5집은 인더스트리얼 음악(‘바보들의 세상’), 포스트 디스코(‘단발머리’), 뉴 잭 스윙(‘마지막 사랑’), 펑크(funk)(‘결혼’), 인텔리전트 댄스음악과 록의 퓨전(‘Netizen’) 등을 아우르며 전보다 더 화려한 면모를 보였다.

1막 마지막이 된 1996년의 6집 < The Sixth Sense Farewell To The World >도 어마어마했다. 테크노(‘인간은 인간이다’, ‘구멍가게 소녀’), 인더스트리얼(‘마르스의 후예들’, ‘Nuclear energy’), 얼터너티브 록(‘콩깍지’), 뉴에이지(‘Femme fatales’) 등 다양한 장르로 꾸몄다.

2006년 7집으로 10년 만에 컴백했을 때에도 유행을 포착하는 민첩성은 그대로였다. ‘처음만 힘들지’로는 비디오게임 음악에 착안한 칩튠을, ‘그녀에게 전화 오게 하는 방법’에서는 피치를 올린 샘플링 기반의 힙합을 들려줬다. ‘잠시 길을 잃다’로는 R&B를, ‘성냥팔이 소녀’로는 라틴음악을 접목한 하우스를 시도하는 등 새로운 양식을 향한 탐구심은 변함없이 강했다.

객원 가수를 통한 독자성 확립

공일오비를 언급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객원 가수 시스템이다. 지금 흔한 피처링 방식이 이들로부터 정착됐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들이 객원 가수를 둔 국내 최초 뮤지션은 아니었지만 1집부터 게스트 보컬리스트들을 기용해 작품에 개성을 부여해 왔다. 음색과 가창이 저마다 다른 인물들이 노래를 부르니 앨범이 한층 풍성하게 느껴질 수 있었다.

터줏대감은 현재에도 공일오비와 활발하게 교류하는 윤종신이다. 이후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김태우, ‘5월 12일’의 이장우, ‘신(新) 인류의 사랑’을 부른 김돈규 등 재능 충만한 가수들을 배출했다. 김태우, 이장우, 김돈규는 솔로로서 각각 ‘날 떠나보내려는 너에게’, ‘훈련소로 가는 길’, ‘나만의 슬픔’ 같은 노래로 큰 사랑을 받았다.

공일오비의 객원 보컬은 3집 중 윤종신과 박선주가 듀엣으로 부른 ‘우리 이렇게 스쳐 보내면’을 제외하고 여가수가 맡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당시 음악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장필순, 신윤미 등도 보컬로 참여했으나 백업 보컬만 맡았다.

남성 보컬리스트만 찾던 관례는 컴백을 알린 2006년의 리믹스 앨범 < Final Fantasy >에서 깨졌다. 이곳에서 여성 멤버가 리드 싱어인 블루 샤벳(‘수필과 자동차’), 캐스커(’21C 모노리스’)를 초청해 여성의 목소리를 들였다. 같은 해 출시한 7집에서도 요조(‘처음만 힘들지’), 호란(‘성냥팔이 소녀’), 신보경(‘잠시 길을 잃다’) 등을 초대해 소녀, 숙녀의 감정을 표출했다. 2017년 시작된 3막부터는 여성 가수와의 협업이 더욱 늘어났다. 신현희, 심규선, 유라, 열두달의 나율, 장재인, 와인 등 많은 여성 보컬리스트가 공일오비의 노래에 목소리를 제공하고 있다.

공일오비는 게스트들을 왕창 모은 ‘단체곡’ 포맷으로도 돋보였다. 9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응당 아는, 친구들과 노래방을 갔을 때 우정을 다지며 꼭 부르던 2집의 ‘이젠 안녕’이 대표적이다. 이 노래가 많은 사랑을 받자 유영석과 송경호의 푸른하늘도 1993년 ‘이젠 안녕’을 흉내 낸 ‘마지막 그 아쉬움은 기나긴 시간 속에 묻어 둔 채’를 발표했다. 그룹의 단체곡 형식은 3집의 ‘수필과 자동차’, 4집의 ‘우리들의 이야기’에서도 만날 수 있다.

데뷔 30주년, 지금도 정력적인 활동

2012년 하반기 들어 갑자기 종적을 감춘 공일오비는 2017년 본인들의 노래를 리메이크하는 < Anthology > 프로젝트에 착수하며 3막을 열었다. 이듬해부터는 직접 레이블을 설립하고 젊은 뮤지션들과 협업해 신작을 만드는 < New Edition > 시리즈를 병행하고 있다. 이 과업은 7월로 22회를 맞이했다. 2018년 이후 발표해 온 신곡들의 장르 역시 예스러운 솔뮤직(‘나의 머리는 녹색’), 포크(‘서울의 눈’), 사이키델릭 록(‘동백꽃’), 뉴 잭 스윙 스타일의 R&B(‘Murky time’), 얼터너티브 록(‘Random’) 등으로 무척 다양하다.

강한 대중성과 높은 완성도를 함께 나타낸 역사가 30년이 됐다. 연차가 오래된 뮤지션은 대개 느슨해지고 나태해진다. 그런 이들과 달리 공일오비의 음악은 조금도 낡지 않았다. 여전히 젊은 감각을 유지하고 있으며, 짜임새도 좋다. 야무진 작품 세계를 확립한 거장이 이제는 부지런함까지 갖췄다. 데뷔 30주년이 더없이 찬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