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러답다. 음악도, 데이먼 알반의 나른한 보컬도, 무난한 팝 록 스타일도, 모든 면에서 블러다. 하늘에 먹구름이 낄지라도 수영장에서 여유로운 한때를 즐기는 모습을 포착한 앨범아트는 지극히 1990년대 브릿팝의 정서와 닮았다. 당황스러울 정도의 유쾌함과 스산함이 공존하는 전작 < The Magic Whip >과는 결이 다르다. 거칠게 뛰노는 ‘Song 2’, 통통 튀는 ‘Girls & boys’, 나른한 ‘Coffee & tv’와도 다른 모양새다. 그럼에도 낯설지 않다.
데이먼 알반의 음악 세계는 실험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어쩔 때는 강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The narcissist’는 편안하다. 조급한 마음, 특별한 걸 만들어야겠다는 압박감은 전혀 없다. 그 대신 밴드의 정석만을 들려준다. 무심한 듯 감정을 쌓는 보컬, 그 뒤에서 같이 무던하게 얹는 코러스, 기억하기 쉬운 멜로디, 노이즈를 키워 천천히 공간감을 넓혀나가는 세션, 휘몰아치는 후반부, 짧은 여운까지, 평범한 밴드 음악을 범상치 않게 해낸다.
이제 블러는 블러를 실험실로 쓰지 않는다. 그들이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음악의 고향이다. 이제 블러는 새로움보다 익숙함이 더 중요하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어떻게든 앞으로 뻗어 나갔던 멤버들은 30여 년이 지나서야 < Leisure >의 수영장에 다시 모였다. 어린 날들의 어설픔과 불안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 관록이 새롭게 뿌리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