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PD들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 #18 조정선 PD

조정선pd

내년 개설 20주년을 앞두고 이즘은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편을 연재 중입니다. 라디오는 음악과 동의어라는 편집진의 판단에 따라 기획한 시리즈로 모처럼 방송 프로듀서들이 전해주는 신선한 미학적 시선에 독자 분들이 좋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 PD의 ‘인생 곡 톱10’입니다. 열여덟 번째 순서는 MBC 조정선 프로듀서입니다.

성재희 ‘보슬비 오는 거리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 1965년 무렵이다. 친척들이 집에 모이면, 아이들에게 어깨너머로 배운 유행가를 한 번 불러 보라고 시키거나, 아니면 당시에 유행하던 트위스트를 좀 춰보라고 해서, 흥을 유발시키던 문화 빈곤의 시절이었다. 당시에 즐겨 불렀던 노래가 바로 ‘성재희’의 ‘보슬비 오는 거리’였으니, 내게는 첫 번째 유행가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이 노래를 할 때마다, 환호의 강도가 꽤 커서, 나조차 어느 순간, 마치 지존인 양 착각하게 됐던 모양이다. 요즘 말하면 미스터트롯의 정동원 어린이가 된 것처럼 말이다. 명절이 끝나고 친척들에게 받은 돈이 꽤 두둑했던 어느 날, 동네에 노래자랑이 열린다는 소식이 내 귀에도 들어왔다. 1등상은 바로 ‘금반지!’ 장소는 지금의 중랑구 신내동 어딘가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 때부터 가족과의 실랑이가 시작됐다. 금반지를 타 오겠다는 나를, “다 사기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라며 다들 말렸다. 그것도 실실 웃어가면서. 아마 그 웃음 속에 ‘어리석은 놈’이란 뉘앙스가 들어있어서, 내가 더 떼를 썼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힘으로, 논리로, 당장 주머니에 없던 참가비 문제로(친척에서 받은 돈은 일단 몰수인 시절이었으니), 결국 노래자랑에 나갈 수 없게 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마냥 목 놓아 우는 일 뿐이었다. 그 이후에 얼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게는 ‘금반지 사건’이 제일 듣기 싫은 과거가 됐다. 금반지의 ‘금’자만 나와도 내빼기 바빴다.

이 노래는 라디오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고, 가끔 가요무대에서나 나오는데, 당시의 가슴 아픈 추억(?)을 소환한다. KBS라디오악단을 이끌던 김인배 단장이 관악기 주자라서 그런지, 서주와 간주를 장식한 트렘펫 솔로가 멋들어지다.

이미자 ‘섬마을 선생님’
나는 베이비붐 세대의 한 가운데인 1960년에 태어났다. 전쟁 이후에 한 가정에는 최소한 아이가 네댓 명은 있었고, 예닐곱인 경우도 흔했다. 우리 집도 여섯이나 됐으니, 공무원이던 아버지의 벌이로는 아무래도 가족을 건사하는 게 힘들었을 거다. 그에 대한 단기적인 해결책이라면 아이 중 하나쯤은 친가나 외갓집에 맡기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젖먹이나 학교에 입학한 자식을 내려 보낼 수 없었을 터이니, 자연스럽게 6, 7세의 아이가 제격이었을 것이며, 영광스럽게 내가 선발된 거다.

이렇게 해서 1966년 9월 무렵부터 이듬해 2월까지 나는 경기도 용인의 외갓집에서 지냈다. 당시에도 시골에는 아이가 많지 않아서, 나는 꽤 심심하게 보내야 했는데, 그나마 위로가 됐던 게, 외할머니와 함께 듣는 라디오드라마였다.

그 중에서 ‘섬마을 선생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시작과 끝에 나오는 주제곡이 특히 좋았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선생님. 열아홉 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떠나지 마오”

지난 11월 친구와 동해안 해파랑길 750km를 함께 걸으며, 해당화를 참 많이 봤다. 늦가을이라 꽃은커녕, 야들야들한 잎사귀마저 말라있거나,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홍자색이기는 하나 꽃빛깔이 연하고, 단풍이 짙게 들지 않으니, 장미과의 열등생이지만, 곁에 두기에 부담 없는 친구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었다. 북한 땅 원산의 명사십리 해수욕장의 해당화가 특히 유명하다고 하는데, 꼭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다.

샤를르 트레네(Charles Trenet) ‘라 메르(La Mer)’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프랑스의 샹송, 이탈리아의 칸초네가, 영미의 팝과 황금비율로 라디오음악 프로그램을 장식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중에서 La Mer(라 메르=바다)라는 샹송은 아련한 심정으로 접했던 음악이다. 특히 이 곡을 작곡하고 부른 아티스트 Charles Trenet(샤를르 트레네)의 오리지널 음반이 아주 오래된 것(1946년)이라, 음질은 필터가 걸린 듯 먹먹했으며(심지어는 찌걱찌걱 축음기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 듯하다), 먼 듯 가깝고 가까운 듯 멀게 들릴 만큼 음량 또한 전혀 고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묘하게도 넘실대는 파도를 연상하게 하고, 저 멀리 해안선 밖의 꿈의 장소로 나를 안내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기타 코드나 피아노 코드를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곡을 연주하면서 화성이 계속 바뀌는 것에 불편해하면서도 큰 재미를 느낄지 모른다. F Dm Gm C7 F Dm Gm C7 F A7 Dm C7 F Dm Bb D7 Gm C7 F Dm G G7 C C7 … 정말 쉴 새 없이 새로운 코드를 잡도록 채근하는 이 곡을, 무려 75년 전에 만들어 불렀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La Mer는 1950년대에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가 Beyond The Sea라는 다른 제목의 영어버전으로 여러 가수의 노래로 히트한 바 있다. 바비 다린(Bobby Darin),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 조지 벤슨(George Benson)도 리메이크 했으며, 최근에는 로비 월리엄스(Robbie Williams)의 노래가 히트했다.

항해가 자유롭지 못 했던 시절에 사람들은 해안가에서 바다 저편을 보며 많은 상상을 했을 것이다. “저 바다 건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기다리고 있을 거다. 언젠가 배를 타고 가서 그녀를 만나야지. 그리고 날 거기에 데려다 준 선장에게, 난 더 이상 배를 탈 일이 없으니, 당신만 떠나면 되! 이러고 말 할 거야” 세상에 이렇게 낭만적인 노래가 다 있다니!! 오리지널 샹송가사는 좀 다르겠지만, 나는 샤를르 트레네의 노래를 들으며, 영어가사를 음미하곤 한다.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버닝 러브(Burning Love)’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72년으로 기억한다. 우리 집에 독수리마크가 선명한 성우전자의 스테레오 전축이 들어왔다. 덩치가 웬만한 장식장 크기는 족히 됐을 전축이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카세트 녹음이 가능한 데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AM와 FM 수신, LP음반을 들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요즘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조악한 제품이었다.

통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던 큰 형은 음악에 꽤 관심이 있어서, 매일 밤 라디오 다이얼 이곳저곳을 돌리며, 어떤 때는 자못 심각하게 또 다른 때는 낄낄거리며 음악과 진행자의 얘기를 듣곤 했다. 당시에 가장 즐겨 들었던 프로그램은 MBC-FM <박원웅의 밤의 디스크쇼(후에 <박원웅과 함께>로 바뀜)>였다.

어느 날 형이 내게 부탁을 하나 하고 외출을 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Burning Love’를 엽서로 신청해 놨으니, 노래가 나올 낌새가 보이면 재빨리 녹음을 해 두라는 얘기였다. 물론 노래보다는 자신의 이름이 불러지기를 원했던 거다. 전축에 동시 녹음기능이 없었던 지라, 마침 집에 있었던 일본제 납작 녹음기를 준비해 놓고, 포인트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 ‘엘비스가 그 날도 <밤에 디스크쇼>에 출연하여 ‘사랑을 불태웠음’에도 불구하고, 형의 이름은 끝내 나오지 않았고, 나는 동작이 굼뜨다는 이유로 두고두고 억울한 원망을 들어야 했다. 이렇게 한동안 이 FM 음악프로그램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거의 빼놓아서는 안 될 잠자리의 파트너가 되었다.

하지만 Burning Love를 통해 알게 된 <밤의 디스크쇼>가 결정적인 위력을 발휘해준 것은 바로 MBC입사의 계기를 마련해 준 일이 아닌가 한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까지 나는 그저 어지간한 기업의 무역관련 업무나 사무직의 평범한 직장생활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간지에 실린 MBC 공채시험 공고를 봤고, 라디오PD란 직종에 호기심을 느꼈던 거다.

“MBC-FM을 듣고 자랐습니다. 좋은 음악 프로그램을 하고 싶습니다” 이런 면접시험에서의 당당한 태도가 내게 합격의 영광을 가져줬으니 말이다.  

폴 모리아(Paul Mauriat) ‘Love Is Blue’
지금은 BTS의 열풍이 세계를 휩쓸고 있어서 K팝의 기세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여러 해 전에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미국 빌보드차트에서 2위까지 오르며 돌풍을 일으킬 때 문득 프랑스의 악단 지휘자인 폴 모리아를 떠올리게 됐다.

젊은 댄스가수와 이미 세상을 떠난 대중음악 연주자가 어떻게 오버랩이 됐는가 하면, 이 둘은 공통되게 고유의 언어와 표현수법으로 누구도 예측하지 못 한 성공을 미국에서 거두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경음악이라는 일본식 표현에 어울릴 만큼,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 계열의 무드음악으로 멸시 받던 폴 모리아가 어떻게 미국에서 차트 1위(Love Is Blue가 1968년 2월 10일, 빌보드 No.1)에 올랐는가 하면, 그것은 거대 미국시장 진출을 노리고 그들이 정서에 맞추려는 작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1970년 무렵부터 라디오에서 폴 모리아의 음악을 접해왔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동양적인 선율에다 탐미적인 연주 표현수법이라고 생각하며 감동했다. 그러니 수많은 라디오 프로그램이 폴 모리아의 음악으로 문을 열었고 문을 닫았을 것이다.

동아방송의 <밤의 플랫폼>에 흘렀던 이사도라(Isadora), 동양방송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 나왔던 ‘시바 여왕(La Reine De Saba)’, <박원웅과 함께>의 ‘한여름 밤의 세레나데(Serenade To Summertime)’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의 테마송 ‘돌아와요 부산항에’까지 아마 폴 모리아가 없었더라면, 70~80년대 우리나라 라디오 방송은 과연 무엇으로 타이틀 음악을 했을지 의문이다. 물론 그 대표곡이자, 그의 인기에 불을 당긴 것은 Love Is Blue일 거다.

뜬금없이 드는 또 한 가지 생각이 있다. 1970년대 말 무렵에는 웬만한 가정에 전축이 한 대씩 있었다. 당시로 봐서는 획기적인 컬러풀한 색상의 LP전집에서 흘러나오던 폴 모리아의 산뜻한 음악이 실은 거의 해적판이었다는 사실이다. 1975년부터 네 차례나 한국을 다녀갔던 폴 모리아는 자신이 한국에서 인기가 그렇게 높았지만, 음반인세는 제대로 받지 못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나는 알았으리라 본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음악이 동양 저 변방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했을 것 같다. 그러니 천길 마다않고 한국을 다녀가지 않았을까.

이문세 ‘파랑새’
1984년 1월, MBC에 라디오PD로 들어와 수습기간을 거쳐 제일 먼저 맡았던 프로그램이 <이종환의 디스크쇼>였다. 입사한지 8개월 밖에 되지 않는 내게, 당시로 봐서는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떨어졌던 건, 실은 프리랜서 DJ로 있던 이종환 선배와 담당PD의 다툼 때문이었다.

이선희가 ‘J에게’란 노래로 대상을 받았던 1984년 강변가요제 때의 일이다. 결선 전야제로 <디스크쇼>가 공개방송을 가졌는데, 진행방식을 놓고 둘이 크게 다퉜다. 지금 같았으면 둘의 잘잘못을 가려서 한 쪽은 징계, 한 쪽은 속투(續投) 쪽으로 결론이 났으련만, 당시에 FM부장이 내린 결정은 둘은 떼어놓고, 신참PD인 나를 붙이기로 한 거다. 졸지에 입봉을 하게 된 나는, 대선배에게서 일찍 라디오PD로서의 감각을 익히게 됐고, 지금 생각해도 그게 37년 PD생활에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느낀다.

그해 가을에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주말마다<FM스페셜 이종환의 디스크쇼 공개방송>을 만들어 큰 인기를 누렸다. 그 때 자주 나왔던 가수가 이문세였는데, 청중의 반응도 반응이려니와, 마침 그가 옆방(MBC표준FM)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의 별밤지기로 있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섭외가 편해서 자주 출연시켰던 거다.

이종환 선배와 이문세는 티격태격 입씨름으로 화제를 낳았다. “이문세씨가 TV에 못 나오는 이유가 얼굴이 길어 화면에서 위아래로 잘리기 때문이라면서요?” 이러고 시비를 걸면, 이문세는 “이종환 선배는 화면 밖으로 코가 튀어나온다면서요?” 이런 식의 응수다. 당시에는 ‘난 아직 모르잖아요’라는 걸출한 히트곡이 나오기 전이라, 이문세에게 노래를 시키면서 이종환 선배는 또 한 방 먹이곤 했다. “이문세씨가 또 삐리삐리 파랑새를 부릅니다. 이 노래 밖에는 부를 만한 노래가 없습니다” 참 즐겁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디온 워윅(Dionne Warwick) ‘A House Is Not A Home’
우리나라에서 가요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건 1980년대부터가 아닌가 한다. 외국에는 결코 쓰지 않을 ‘발라드’라는 장르가 생기면서 가요가 본격적으로 영미의 팝송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이런 가요들은 멜로디가 아름답고, 연주 실력이 뒷받침 되면서 음악팬들을 모았지만, 거기에 빠뜨려서는 안 될 게 ‘가사’다. 가요의 장점은 팝과 달리, 들으면 가사가 바로 이해가 된다는 점, 한 편의 시로 내놔도 손색없는 가사들 덕택에 가요는 업그레이드 됐다.

나는 라디오PD가 되기 전에 팝송을 들으면서, 거기에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음악을 트는 일을 직업으로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팝송의 가사를 파악하게 됐다. 하기야 뭔 주장을 펼치는 지, 어떤 애틋한 사랑얘기를 담았는지 알아야, 청취자에게 정확히 소개할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몇몇 작사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할 데이비드(Hal David)다. 그가 어딘가에 써놓은 작사 잘 하는 법까지 읽어 봤는데, 나도 한 번 작사가로 나서볼까 슬쩍 유혹도 받아봤다.

가사는 세 가지 요소에 충실하면서 쓰라고 한다. ‘그럴듯함(Believability)’ ‘단순함(Simplicity)’ ‘정서적 충격(Emotional Impact)’가 그것이다. 1964년 Dionne Warwick이 노래한 ‘집은 집이 아니랍니다’(A House Is Not A Home)은 할 데이비드의 작품 중에서 백미가 되는 가사로 내용이 감동적이다.

“의자는 여전히 의자일 뿐이지요. 거기에 아무도 앉아 있지 않더라도. 그러나 의자는 집이 아니지요. 그리고 집은 집이 아니랍니다. 그곳에 당신을 안아줄 사람이 없을 때, 그리고 당신이 굿나잇 키스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때. (중략) 그러니 이 집(House)을 집(Home)으로 바꾸어주세요. 제가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면, 제발 거기 있어주세요. 당신이 아직 나를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조이(Joy) ‘Touch By Touch’ 그리고 비틀스(Beatles)의 ‘Yesterday’
1986년 가을 무렵, MBC라디오가 정동에서 여의도로 이사를 오고 얼마 안 있어 있었던 일이다. 당시에 회사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이란 여론조사를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아마 MBC-FM 개국 15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FM 음악방송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서 기획했을 것이다.

실은 어느 앙케이트든 대강의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바로 ‘너’)라는 게 있지 않은가 말이다. 팝송 프로그램에서 청취자에게 받는 올타임 리퀘스트 순위가 바로 조사결과일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했다. Beatles의 Yesterday나 Let It Be, Simon And Garfunkel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나 Sound Of Silence, Queen의 Bohemian Rhapsody, Deep Purple의 Soldier Of Fortune, 그리고 비교적 신곡이라면 마이클 잭슨의 노래들 따위 말이다.

이를 기획한 PD들 모두가 회심의 미소를 띠며 앙케이트지를 수거했는데 다들 크게 놀라고 말았다. 누구도 예상 못 하게 Joy의 Touch By Touch가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부른 다른 노래들이 상위를 싹 점한 거다. 다시 한 번 확인하건대 당시의 행사 타이틀은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이었다. 한국인이 ‘최근에 좋아하게 된’이랄지, ‘좋아하는 팝송 신곡’이 아니었단 말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부서 PD들 모두 크게 당황해서 회의에 회의를 거듭한 결과, 궁여지책으로 이렇게 결론을 봤다. 애초에 우리가 기획한 건, ‘한국인의 올타임 리퀘스트곡 베스트’였지만, 이렇게 신곡들이 상위를 차지했으니, 부문을 둘로 나눌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올드팝> <한국인이 좋아하는 최신팝>으로 분리하자. 이렇게 하고 보니 애초의 의도와는 달랐지만 단숨에 해결은 됐다. 결국 Joy는 Touch By Touch와 Beatles의 Yesterday가 나란히 1위에 올랐다. 이 사건이 내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나 더 남긴 셈이다.

폴 사이먼(Paul Simon) ‘Duncan’
내가 대학에 다니던 때는 ‘기타를 못 치는 사람을 간첩’으로 여기던 무서운 시절(?)이었다. 최소한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랄지 버블껌의 ‘연가’, 윤형주의 ‘우리들의 이야기’ 같은 포크송 몇 개는 꿰고 있어야 사람취급(?)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남녀가 유별한 시절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내내 겪어온지라, 이성을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도 적었으니, 여학생과 소통하는 기쁨을 누리기에는 통기타만 한 매개거리도 없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무렵부터 기타를 치기 시작했으니 좀 이른 편이었지만, 형이 치다 팽겨 쳐둔 걸 제대로 된 교본 없이 독학했으니 실력이 그다지 늘지 않았다. 다만 음감이 좋아졌다고 할까? 대중가요의 화성이 별로 복잡한 게 없으니, 어느 곡이라도 악보가 없이 코드만큼은 대충 잡아 칠 수준은 됐다.

그 실력은 대학의 MT에 가서 큰 빛을 발했고, 나는 자주 주목을 받았다. 통기타 잘 치는 아티스트로 내가 꼽는 사람이 바로 폴 사이먼이다. Simon And Garfunkel 시절부터 많은 곡들의 기타 반주를 보노라면, 다양하고 멋진 코드를 접하게 된다. 아름답고 신기한 하이코드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의 노래 중에서 쓰리핑거링(Three Fingering) 주법의 대표곡이 바로 Duncan이다. 팝 차트에 높은 순위에 오르지는 못 했지만, 그가 공연을 통해서 자주 선보였으며, 나도 한 소절 빠지지 않고 다 외우며 기타를 치며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곡이다.

* MBC라디오 조정선PD
1984년 1월 MBC라디오PD로 입사
<이종환의 디스크쇼> <한경애의 영화음악> <배철수의 음악캠프>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두시의 데이트> 등을 연출했으며 <조PD의 새벽다방> <조PD의 비틀즈라디오> <조PD의 레트로팝스>의 DJ 겸 PD로 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