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즘이 내년에 개설 20주년을 맞습니다. 이를 앞두고 여러 특집 기획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그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 내 인생의 음악 10곡 >을 마련해서 현재 연재중입니다. 라디오는 음악과 동의어라는 편집진의 판단에 따라 기획한 시리즈지요. 모처럼 라디오 방송의 프로듀서들이 전해주는 신선한 미학적 시선에 독자 분들이 좋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시리즈에 선뜻 응해주시고 선곡에 대한 좋은 글을 써주신 프로듀서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즘 독자 분들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 PD의 ‘인생 곡 톱10’입니다. SBS 라디오 오지영 프로듀서가 아홉 번째 순서를 맡습니다.

휴대폰에 있는 ‘플레이 리스트’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지금 나의 플레이 리스트엔 프로그램 선곡을 위한 곡들이 채워져 있어, 나의 노래가 아닌 청취자의 신청곡이 대부분인데, 내가 골라보는 내 인생의 노래는 무엇일까 이 자리를 빌어서 골라본다. 나로서는 처음 해보는 지극히 개인적인 플레이 리스트가 되겠다.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 Billie Jean
초등학교 시절 < 서울국제무역박람회 >(지금은 ‘엑스포’) 견학을 갔다. 지금 삼성동 무역센터 자리가 벌판이던 시절 거대한 천막 같은 걸 쳐 놓은 전시장이었다. 미래의 세상엔 세끼 밥 대신 알약을 먹는다, 집에 있는 엄마랑 화면으로 통화를 할 수 있다.. 외출해서 집에 있는 전기밥솥을 켤 수도 있다…는 당시로서는 공상과학 영화 같았던 미래전시관을 지나 큰 공터에서 마이클 잭슨의 뮤직비디오가 상영되고 있었다. 음악이 좋았던 건지 거대한 화면과 큰 스피커에서 나오는 스테레오 음향에 압도된 건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쿵쾅대는 비트에 날렵하고 섬세하게 춤추던 마이클 잭슨의 ‘빌리 진’이 내 음악 덕질 인생의 짜릿한 오프닝이었던 건 확실하다.
아버지는 그 전축으로 여러 종류의 음악을 들으셨다. 클래식이 많았고 최신 가요 음반도 종종 사 들고 오셨는데 팝 음반은 별로 기억에 없다. 그런데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팝송을 즐겨 부르신 걸 보면, 분명 열심히 들으셨겠지.
아버지 친구 분 가족들과 함께 버스를 대절해서 어딘가 놀러갔을 때, 버스 안에서 아버지가 차내 마이크를 들고 불렀던 곡은 폴 앵카의 다이애나(Diana)였다. I’m so young and you’re so old.. 내가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알게 된 ‘팝송’이었다. 아버지의 노래는 나름의 ‘겉멋’이 잔뜩 들어간, 당시의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의 발산처럼 느껴졌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좀 멋진 아버지 같기도 하다. 지금은 아버지도 나도 젊지 않고(아버지는 몇 년 전 돌아가셨다), 노래 속 폴 앵카만 영원히 열 여섯 살이다.

안전지대 / Friend
중학교 시절에는 J-POP에 미쳐있었다. 요즘처럼 여중생이 빠질만한 아이돌이 없었던 그때, 일본의 소년대는 BTS 이상이었다. 히가시야마 노리유키의 사진을 구하러 압구정동 어느 골목 좌판에 갔다가 주인아저씨가 권해준 테이프까지 사왔다. 정식 앨범이 아니고 튜브, 안전지대, 사잔 오르 스타즈(Southern All Stars), 쿠도 시즈카 등의 노래들을 엮어놓은 리어카 테이프였다. 테이프 표지엔 알지도 못하는 일본어로 노래제목과 가수가 개발 새발 쓰여 있고 곡의 순서와 맞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음질은 또 왜 이렇게 안 좋은지… 그 와중에 테이프 B면 중간에 있었던 ‘사요나라 다케..’로 시작하는 이 노래를 돌리고 돌려가면서 다시 들었다. 워크맨 이어폰을 통해 타마키 코지는 속삭이며 노래를 불렀고 그렇게 나는 소년대를 탈덕, 안전지대의 타마키 코지로 입덕을 시작해 J-POP의 세계에 더 깊이 빠져든다.

자드(Zard) / 키미가 이나이
이어지는 J-POP 얘기. PD생활을 하던 때 일본문화 개방이 돼서 운좋게도 ZARD의 콘서트에 초대를 받았다. 비행기 티켓과 체재비, 부장님 눈치가 보이는 휴가가 필요했지만 방송활동도 거의 없는 ZARD의 팬이었기에 동료 몇 명과 1박 2일의 일정으로 호기롭게 떠났다. 공식적인 전국투어로는 처음이었던 이 공연에서 ZARD는 혼자 서서 미동도 없이 노래만 불렀다. 오프닝 곡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생각은 나지 않지만, 암전된 무대에서 ‘키미가 이나이~’하고 그녀의 청량한 목소리로 인트로가 나오고 조명이 켜지던 순간 잊고 있었던, 나의 20대가 소환되어 가슴이 떨렸다.
그날 밤 함께 간 동료들과 신주쿠 어디에선가 들뜬 목소리로 떠들어대며 맥주를 마셨고 그 다음날 숙취에 늦잠을 자고 비행기를 놓치기까지 했다. 몇 년 후 그녀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그 날의 동료 PD와 그 밤 신주쿠 선술집의 텐션을 함께 추억했다. 작년 언젠가 딸내미와 ‘명탐정 코난’ 극장 판을 보다가 엔딩에 주제가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관심도 없는 딸에게 ‘쟈도’에 얽힌 나의 추억담을 한 바가지 들려줬다.

박광현 / 한 송이 저 들국화처럼
중학교 시절 MBC 라디오 < 이수만의 팝스 투나잇 >을 열심히 들었다. 그 프로그램의 백일장 이벤트에서 장원을 한 여자 분이 전화연결이 됐는데 자신이 가수 박광현의 누나(여동생?)라고 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의 PD 라는 사람이 나와 백일장의 심사과정 등을 들려줬다. < 이수만의 팝스 투나잇 >이라면 이수만 DJ 혼자 다 하는 줄 알았는데… PD가 있고 작가가 있고 국장님이 있는 거였다. 그때부터 라디오 PD에 대한 동경이 생겼던 것 같다.
글렌 메데이로스(Glenn Medeiros)의 음반을 가장 먼저 받아볼 수 있고 , 내가 좋아하는 박광현 가수의 누나랑 통화도 하는 멋진 사람. 백일장 행사의 대장정을 마치며 들려준 박광현의 ‘한 송이 저 들국화처럼’은 코를 처박고 들었던 ‘라디오 트랜지스터’ 너머 ‘라디오 방송국’ 세계의 문을 살짝 열어본 그 순간의 배경음악이다.

유재하 / 우울한 편지
여고생 시절, 세련되고 이쁘고 좀 노는 친구가 있었다. 영화나 음악도 아는 게 많아서 부러웠는데 이 모든 게 대학생 언니가 있어서 그런 거라고 나는 믿었다. 어느 날 자기 언니가 다니는 학교 오빠의 음반이라며 유재하의 음반을 빌려줬는데 지르거나 뽐내지 않는 담백한 목소리가 정말 대학생 오빠 같았다. 이 친구와 유재하 얘기를 하려고 이 친구 수준에 맞춰 동네 햄버거 집에서 콜라도 많이 사줬다. 그러다가 어느 날 유재하의 사고 소식을 듣고 둘이 통화하며 어찌나 울었던지…울면서 “나는 ‘우울한 편지’가 제일 좋아..” “난 ‘지난날’이 좋더라..” 이러면서 둘이 꺽꺽댔던 기억이 있다.
그 후 <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 음반도 빠짐없이 사서 들었는데 이 대회의 기획자이자 유재하의 친구인 한봉근 PD는 < 이수만의 팝스 투나잇 > 담당PD로 나를 라디오키드로 만드는데 큰 공을 세우신 분. 후에 < 수요예술무대 >를 연출하실 때 이촌동 어느 상가 지하 식당에서 만나 뵙고 큰 절 올리고 인사를 드렸다. 그 때 “라디오 재밌지요? 열심히 해요~” 하고 수줍게 말씀해 주셨는데…
그냥 재밌게 하고 있습니다. 선배님!

김현철 / 오랜만에
< 월간 팝스 >를 옆구리에 끼고 허세 꾀나 부리던 내게 같은 학원에 다니던 남학생이 잉위 맘스틴(지금은 잉베이 라고 부르는)의 앨범을 던져주듯 주고 뛰어갔는데 난 그걸 김현철 1집으로 바로 바꿨다. 참새방앗간처럼 들르던 동네 음반가게 < 페니 레인 > 언니가 이 음반을 보더니 깔깔 웃으며 잉위 오빠 음반이 너에게 갈 선물이었냐 한다. 언니는 동아뮤직에서 나온 괜찮은 신인의 음반을 추천해주었고 나는 이 음반에 홀딱 빠져 그 해 가을.. CD가 닳도록 들었다. 잉위를 버리고 내가 택한 김현철! ‘동네’, ‘비가와’, ‘춘천 가는 기차’ ..3곡을 좋아하긴 했지만 음반의 첫 곡 ‘오랜만에 ‘ 흐흐흥~ 빠암~하는 도입부분은 여전히 심쿵 포인트.

밀리 바닐리(Milli Vanilli) / All or nothing
팝을 주로 듣던 시절 큰 충격이었던 가요음반이 김현철 1집이었다면 그해의 충격적인 팝음반은 밀리 바닐리 1집이었다. 잘 생긴 두 청년이 토끼춤을 추는 뮤직비디오와 세련된 리듬의 노래로 여고생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나의 팝송 메이트 지영이(그녀는 전지영)에게 당당하게 소개할만했다. 언제나 멋진 음악을 나보다 먼저 듣고 소개해줬던 지영이도 그들의 음악(비주얼?)에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들이 립싱크 가수였다는 폭로가 터진다. 찰떡 호흡 두 지영이들이었지만, 서로 선호 가수가 달라 휘트니 휴스턴 VS. 머라이어 캐리 , 마돈나 VS. 신디 로퍼 , 티파니 VS. 데비 깁슨…등으로 갈려 신경전이 있기도 했던 참에, 간만에 이룬 대동단결이었건만…별 시덥지 않은 가짜들에 혼이 나갔던 그간의 열정이 부끄러워 지영이들은 그 얘기를 대놓고 하지도 못하고 데면데면하다 멀어진다.

빛과 소금 / 그대 떠난 뒤
너무 아끼던 테이프였다. 친구에게 빌려줬다가 받아오는 길에 주머니에서 열쇠꾸러미와 엉켜 다 망가지고 말았다. 다시 살까 망설이다 못 샀는데 나중에 대학생이 되고 남친이 이 얘기를 듣고 CD로 선물해줬다. 이 남친과 헤어진 나를 내 친구가 불쌍히 여겨 대학로에서 하던 빛과 소금 콘서트에 데리고 가주었는데 이 노래를 들으며 얼마나 울었던지… 나의 행복한 현재 생활과는 전혀 상관없는 울적한 이야기이니 짧게 남기겠다.

MC몽 (ft.박정현) / 죽도록 사랑해
많은 DJ와 프로그램을 만들었지만 내가 원하는 DJ와 , 하고 싶은 색깔의 프로그램을 론칭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당시 나를 믿어주었던 구경모 CP가 나의 기획에 힘을 실어주었고 MC몽은 너무나 바빠서 생방송을 할 일정이 안 됐지만 긴 고민 끝에 수락해줘서 ‘MC몽의 동고동락’은 시작됐다. 신인 시절부터 알아온 서로에게 믿음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라디오를 사랑한 MC몽의 의지가 컸다.
TV 예능과 라디오 스케줄까지 빡빡했는데 그 와중에 앨범 < Show’s Just Begun >을 냈다. 취재 명목으로 녹음 스튜디오까지 따라가서 이 노래를 들었는데 말캉말캉한 박정현의 목소리까지 섞인 노래의 제목이 ‘죽도록 사랑해’란다. 함께 간 제작진과 제목이 이게 뭐냐고 놀려대긴 했지만 , 언제나 그랬듯 세련되지 않은 그의 노랫말들이 꾸밈이 없어서 내심 참 좋았다.

산울림 /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 아름다운 이 아침 >의 새 DJ로 결정된 김창완 님과 첫 미팅을 앞두고 음반실에서 산울림의 CD들을 빌려와 며칠을 공부하듯 들었다. 소장하고 있던 CD들도 있고 좋아하는 곡들도 많았지만 공부하듯 들으니 잘 들리지 않았고 이런 엄청난 뮤지션을 DJ로 맞이해 잘 할수 있을까 겁이 나기 시작했다. 제대로 듣지 못하고 CD더미를 한켠으로 밀어놓았다.
첫 미팅의 날, DJ를 기다리며 시그널 음악을 들려드리기 위해 가져갔던 디스크맨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는데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른하면서도 싱그러운 사운드를 들으며 긴장이 풀렸다. 저 앞에 걸어 들어오고 있는 저 아저씨와 왠지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김창완 아저씨와는 20년이 되어간다.
함께 시작하고 한참을 헤어졌다가 <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 20주년이 되는 해에 다시 만났다. 아저씨랑 함께 술을 마실 수 있어 행복했고, 이 대단한 분이랑 함께 만든 역사가 있다는 게 행복하다.
*프로필
오지영 (OHPD@sbs.co.kr)
SBS 라디오 PD
< 최화정의 파워타임 >, < MC 몽의 동고동락 >, <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 > 외 다수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