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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10곡 특집 Feature

라디오 PD들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 #8 지웅 PD

평생 음악을 듣고 살았는데, 열 곡을 고르는 게 쉽지 않다. 그러고 보니 음악을 고르는 것도, 인생을 닮았다.

내년 개설 20주년을 앞두고 이즘은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편을 마련한다. 이즘 필자들과 독자들의 글을 공개하면서 이즘 편집진은 음악과 동의어라고 할 라디오 방송의 PD들이 갖는 미학적 시선과 경험을 들어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이 뽑은 ‘인생 곡 톱10’을 순차적으로 공개한다. 여섯번째 순서는 SBS 라디오 구경모 프로듀서다.

평생 음악을 듣고 살았는데, 열 곡을 고르는 게 쉽지 않다. 좋아하는 음악이 그렇게도 많았지만, 골라서 타이틀을 붙이는 건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닌가 보다. 열 곡 안에 들어가지 못한 곡들에겐 미안하고, 한편에선 내가 고른 열 곡에 대해서, 확신이 없다. 며칠 후에는 어쩌면, 이 곡은 어쩌자고 여기에 올려놨을까, 그리고 그 곡은 왜 열 곡에 안 넣었을까, 스스로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음악을 고르는 것도, 인생을 닮았다.

Paul Anka / Diana

어렸을 땐 아버지의 ‘전축’으로 음악을 들었다. 턴테이블과 앰프, 스피커가 일체형으로 만들어진, 보기 힘든 ‘목제 프레임’ 스테레오였다. 묵직한 그 전축의 가운데 아래쪽에 턴테이블이 들어앉은 구조였는데, 톤 암을 들어올리면 그 옆 조그만 주황색 램프가 따뜻한 빛으로 켜졌던 게 인상적이다. 턴테이블을 위한 공간이 동굴처럼, 전축의 아래쪽에 움푹 들어간, 참 불편한 구조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 당시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비슷한 구조의 물건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그 전축으로 여러 종류의 음악을 들으셨다. 클래식이 많았고 최신 가요 음반도 종종 사 들고 오셨는데 팝 음반은 별로 기억에 없다. 그런데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팝송을 즐겨 부르신 걸 보면, 분명 열심히 들으셨겠지.

아버지 친구 분 가족들과 함께 버스를 대절해서 어딘가 놀러갔을 때, 버스 안에서 아버지가 차내 마이크를 들고 불렀던 곡은 폴 앵카의 다이애나(Diana)였다. I’m so young and you’re so old.. 내가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알게 된 ‘팝송’이었다. 아버지의 노래는 나름의 ‘겉멋’이 잔뜩 들어간, 당시의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의 발산처럼 느껴졌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좀 멋진 아버지 같기도 하다. 지금은 아버지도 나도 젊지 않고(아버지는 몇 년 전 돌아가셨다), 노래 속 폴 앵카만 영원히 열 여섯 살이다.

영화 / Something good

누구에겐가 음악에 대해 열을 올리며 설명한 건 ‘국민’학교 2학년 때가 처음이다. 집에 놀러왔던 친구 창길이에게 <사운드 오브 뮤직> LP를 들려주며 그 얼마 전 봤던 영화 장면들을 ‘눈에 보일 듯이’ 설명해 줬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재주는 없어서, 창길이는 그런 영화와 노래 설명 따위, 별 관심이 없었다. 줄리 앤드류스에게 빠져들었던 내 최초의 ‘덕질’은 그 즈음 시작됐다. 영어로 편지까지 써서 보내고, 사진이 들어있는 답장도 받았지만, 요즘은 그녀의 꿈을 꾸지 않는다. 가끔 <아름다운 당신에게>에서 그녀의 노래를 틀 뿐이다. 꿈꿨던 장면은 ‘Something good’이지만 청취자들은 ‘에델바이스’를 제일 좋아하는 거 같다.

김세환 / 아름다운 사람
내가 기억하는 우리 집 첫 가요 음반의 주인공은 김세환이었다. ‘사랑하는 마음’, ‘길가에 앉아서’, ‘목장길 따라’ 같은 착하기만 한 노래들이 잔뜩 실려 있던 이 1974년 음반에서, 내 귀를 잡아 끈 곡은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때까지 듣던 노래들과는 분위기도 달랐고, 가사도 요령부득이었다. 그렇지만 좋았다.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아주 나중에 알고 보니, 김민기의 노래였다.

레나타 테발디(Renata Tebaldi) / 오페라 <라 보엠>
어렸을 때부터 지독하게 많이 들었던 LP다. 아버지의 오페라 취향을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물려받은 경우인데, 50년 전부터 한동안 매일같이 집에서 들었으니 지겨울 만도 하건만 여전히 좋아한다. 특히 ‘그대의 찬 손(Che gelida manina)’, ‘내 이름은 미미(Si, mi chiamano Mimi)’ ‘오 사랑스러운 아가씨(O soave fanciulla)’로 연결되는 1막은 버릴 것이 없다. <아름다운 당신에게> 애청자들은 방송에 <라 보엠>의 아리아들이 너무 많이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올리비아 뉴튼존(Olivia Newtonjohn) / Slow dancing
음반을 처음 산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아바의 Knowing me knowing you, 퀸의 We are the champions 등이 들어있는 ‘불법’ 캄필레이션 LP였는데, 내 돈으로 산 만큼, 열심히 들었고 많이 배웠다. 정식 라이센스 앨범 중 처음 모셔온 분은 올리비아 뉴튼존, 당시 최고 인기의 청춘 스타였다. 나오는 족족, 그녀의 앨범은 다 사들였고 그만큼 열심히 들었는데, 지금은 기억나는 곡이 많지 않다. 이 앨범에서는 Slow dancing을 많이 들었다. 꿈 많은 소년 시절이었다.

Fleetwood Mac / You make loving fun
1978년. AFKN TV에서나 그래미 시상식을 볼 수 있던 때였다. 그나마 너무 늦은 시간 생중계라 볼 생각도 못했던 다음 날 아침, 아버지가 한 마디 하셨다. “플리트우드 맥이 다 타더라.” 42년이 지난 지금 다시 찾아보니, 플리트우드 맥이 받은 건 ‘Album of the year’ 하나뿐이었다. 제일 중요한 상이긴 하지만, 아버지는 왜 ‘다 탔다’고 하셨던 걸까. 42년이 지난 지금 다시 들어봐도 세련된 사운드, ‘다 탈 만한’ 것만은 사실이다.

알프레도 캄폴리(Alfredo Campoli) / Mendelssohn ‘Violin concerto in e minor’
한 학년 위였던 형이 한창 사춘기를 앓던 시절에 많이 듣던 곡이다. 형이 어느 날, 어떤 놀랄 만한 방정함을 보였던지 아버지는 그러셨다. “네 형이 요즘 멘델스존을 듣더니, 사람이 달라졌다.”
음악이 인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때부터 오랜 연구와 고민이 시작됐다. 그래서 지금까지 음악을 듣는지도 모르겠고. 얼마 전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이 LP를 다시 구입했는데, 아직 턴테이블은 구하지 못했다.

ELO / Confusion
이른바 ‘빽판’을 사서, 홈이 닳도록 들었다. 그 유명한 ‘Midnight blue’나 ‘Last train to London’보다도 ‘Confusion’과 ’Need her love’가 좋았다. ‘수학의 정석’ 풀며 듣기 좋은 음반이다.

유재하 / 사랑하기 때문에
여자에게서 음반 선물을 받았다. 군대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할 일이라고는 그녀를 만나는 것과 음악을 듣는 것뿐. 군에서 회식 때 이 노래를 불렀다가 뻘쭘해졌다. 이렇게 가슴에 품을 노래 하나 없이, 요즘 젊은이들은 군대 생활들을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소니 클라크(Sonny Clarke) / Cool struttin’
1995년 CBS 음악FM이 개국할 때 국내 최초로 재즈 프로그램이 생겼다. <이정식의 0시의 재즈>. 매일 밤 생방송으로 한 시간씩 재즈를 틀었다. 신혼인 PD는 좀 괴로울 수 있는 시간대였지만, 새로운 음악을 방송으로 함께 한다는 것은 즐거웠다.
시그널 음악으로 골랐던 이 곡은 제목 그대로 ‘쿨하게, 뽐내며 걷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수많은 재즈 음반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바로 그 재킷이다.

*프로필

지웅 rainystreet@hanmail.net
1991년 CBS 입사. <저녁 스케치> <오정해의 영화음악> <이정식의 0시의 재즈>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강석우의 아름다운 당신에게> 등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