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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10곡 Feature

라디오 PD들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 #7 배준 PD

어느 음악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음악 듣기를 ‘순례자의 여행’에 비유한 적이 있다.

내년 개설 20주년을 앞두고 이즘은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편을 마련한다. 이즘 필자들과 독자들의 글을 공개하면서 이즘 편집진은 음악과 동의어라고 할 라디오 방송의 PD들이 갖는 미학적 시선과 경험을 들어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이 뽑은 ‘인생 곡 톱10’을 순차적으로 공개한다. 일곱번째 순서는 MBC 라디오 배준 프로듀서다.

20년도 전 어느 음악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음악 듣기를 ‘순례자의 여행’에 비유한 적이 있다. 팝송으로 시작된 음악 여행이 클래식, 가요, 재즈, 월드뮤직까지 들락날락, 기웃기웃 대며 흘러갔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과장된 표현이다. 순례자만큼 열정도 소망도 없이 그저 되는 대로 끌리는 음악에 귀를 갖다 댔을 뿐인데.

그래도 오늘까지 그 음악들 덕분에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꽤 나이를 먹은 지금 어디로 또 흘러갈지 모르겠다. 클래식 좋아하는 이들은 결국 바하로 회귀할 거라 하고 송가인을 좋아하는 친구 따라 트로트로 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오늘도 어떤 음악이든 좋아하는 것을 듣고 싶을 뿐이다.

The Beatles - I Want To Hold Your Hand (1984, Vinyl) | Discogs

비틀즈 (Beatles) / I Want To Hold Your Hand

초등학교 5학년. 남미로 이민 간 사촌 형들이 남긴 팝송 대백과 음반 전집과 함께 겨울방학을 보냈다. 팻 분(Pat Boone)도 있고 도리스 데이(Doris Day) 나 패티 페이지(Patti Page)도 있었지만, 가장 강렬하게 다가 온 것은 역시 비틀즈였다. 어린 내가 새로운 팝송의 시대를 권유하는 그들의 손을 뿌리치기는 정말 어려웠다.

The Number Ones: The Beach Boys' “Good Vibrations” - Stereogum

비치 보이스 (Beach Boys) / Good Vibrations

어릴 적 꿈은 반바지에 스니커즈를 신고 야자수 해변에 나가 책을 읽으며 비치 보이스를 듣는 것이었다. 잠깐 호주에 살 때 기회가 있었지만 오래 가진 못했다. 지금도 이 꿈을 꾼다. 브라이언 윌슨(Brian Wilson)이 아무리 진지해져도 내게 비치 보이스는 여전히 해변의 소년들이다. 무인도에 음반 한 장만 갖고 가야 된다면 비치 보이스 베스트를 들고 가겠다.

Vladimir Ashkenazy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 WBg UK ...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Vladimir Ashkenazy) /
Tchaikovsky ‘Piano 협주곡 제1번’

중학교 2학년. 어머니는 아버지의 생일날 당시로선 괜찮아 보이는 전축을 선물했다. 클래식에 관심 많던 아버지는 라이선스 음반을 몇 장 사왔다. 그 중의 하나가 이 곡이었다. 지금도 기억한다. 차이코프스키가 내 어린 영혼을 심히 건드렸다는 것을.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내 팔에 소름이 돋던 것을.

Enrico Macias - L'amour C'est Pour Rien / Ma Patrie (Vinyl) | Discogs

앙리코 마샤스 (Enrico Macias) / L’amour C’est Pour Rien

윤복희의 남편이었던 유주용의 ‘추억의 솔렌자라’를 듣다 이 노래에 입문했다. 뜻도 잘 모르는 샹송을 왜 그렇게 따라 부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내 기억에 70,80년대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노래를 시키거나 부르곤 했다. 대학 써클(동아리)에서는 술만 마시면 장난스레 ‘나무새 뿌리 (어느 후배가 나름 해석했다)’를 부르라고 시켰다. 2000년 대 초반 스위스 몬트뢰 재즈 페스티벌에 갔다가 앙리꼬 마샤스의 콘서트 벽보를 봤다. 그의 사진을 보며 나도 모르게 추억의 뿌리를 더듬었다.

Kim Min Ki - 김민기 (1972, Vinyl) | Discogs

김민기 / 친구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고3. 광화문 어딘가에 있던 레코드 가게에선 김민기의 1집 음반을 카세트에 복사해주었다. 그 작은 카세트테이프는 재수로 이어질 때까지의 내 암울한 세계를 더욱 암울하게 해주었다. 걱정하던 아버지는 상여 나가는 소리 같다고 했지만 그 암담하고 검푸르던 세계에서는 하늘로 데려다 주는 소리로 들렸었다. 이 글을 쓰며 그 노래들을 다시 듣고 있으려니 아버지의 심정이 이해된다.

Zino Francescatti, Edmond De Stoutz, The Zurich Chamber Orchestra ...

지노 프란체스카티 (Zino Francescatti) / Vitali ‘Chaconne’

라디오 피디가 됐다. 한동안 레코드실 이란 곳을 쉽게 떠날 수가 없었다. 그곳에 말로만 듣던, 사진으로만 보던 수입 명반들이 있었으니. 지노 프란체스카티가 연주하는 비탈리의 샤콘느 음반은 듣기 전에 몇 번 쓸어봤을 정도였다. 하마터면 절이라도 할 뻔 했다. 흉내 내기 어려운 그 애절한 연주를 듣고 있으면 누구라도 그런 마음이 들겠지만.

Offramp by Pat Metheny Group on Amazon Music - Amazon.com

팻 메시니 (Pat Metheny) / Au Lait

드디어 팻 메시니의 음악과 만나게 되었다. 80년대 후반, 연출하고 있던 새벽 프로그램에 나온 ‘어떤 날’의 조동익과 이병우는 이 곡을 소개해주었다. 덕분에 DJ와 나는 PMG(팻 메스니 그룹)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대중성과 예술성을 이렇게 겸비한 연주자도 드물겠지만, 어디론가 떠나는 기분을 느끼고 싶거나 멍 때리고 싶을 때 이만한 곡이 어디 있겠는가. 그의 음반들을 요가 수업에 쓰는 선생도 만났었다.

Paul Desmond - Take Ten | Releases | Discogs

폴 데즈먼드 (Paul Desmond) / Take Ten

폴 데즈먼드는 재즈사에 길이 남을 히트 곡 ‘Take Five’를 작곡했지만, 같이 연주하던 데이브 브루벡 (Dave Brubeck)의 그늘에 가려진 편이다. ‘Take Five’의 속편 같은 이 음반은 내게 쿨 재즈를 가르치고 빠져들게 해줬다. 평생을 특유의 지성과 유머감각으로 살아간 폴. 그는 내 인생관을 음악으로 표현해준다. 힘 빼고 살자!

The Red Garland Quintet Featuring John Coltrane And Donald Byrd ...

레드 갈랜드 (Red Garland) / Soul Junction

쿨 재즈만큼이나 좋아하는 장르는 하드 밥(Hard Bop) 재즈이다. 1950년대는 쿨 재즈와 하드 밥이 공존하며 재즈의 전성시대를 구가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하드 밥에는 명곡이 넘쳐나는데 왠지 이 곡을 좋아한다. 연주시간은 15분이나 되지만 늘 짧은 드라마 하나를 본 느낌이다. 영혼의 교차로. 레드 갈랜드 (피아노), 존 콜트레인 (테너 색소폰), 도날드 버드 (트럼펫)의 영혼이 교차되는 그 길.

Prelude In E Minor/Gerry Mulligan(게리 멀리건) - 벅스

제리 멀리건 (Gerry Mulligan) / Prelude in E minor

인생의 음악만큼이나 인생 영화가 된 밥 라펠슨 (Bob Rafelson) 감독의 <잃어버린 전주곡>(Five Easy Pieces)’. 영화에서 잭 니콜슨이 연주하던 쇼팽의 전주곡 E 단조. 그 곡이 너무나 치고 싶어 서른 넘어 동네 피아노 학원에 나갔더랬다. 몇 달 끝에 도입부만 치다 말았고 대신 피아노 치는 사람들을 존경하기로 마음먹었다. 쿨 재즈의 전설로 남은 바리톤 색소폰 주자 제리 멀리건. 위로가 필요한 밤이면 음반 < Night Lights >를 꺼내 잃어버린 전주곡을 듣는다.

(고르고 보니 지극히 사사로운 이유로 인생의 음악이 정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읽는 분들의 이해를 구합니다.)

■ 프로필

배준 | cooljazzpd@naver.com

1984년 MBC 라디오에 입사해 2019년 정년퇴직. <가요 응접실>, <젊음의 음악캠프>, <김현철의 디스크쇼>, <윤상의 음악살롱>, <배철수의 음악캠프>등을 연출했다. 현재는 <서인의 새벽다방> 재즈 코너에 출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