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개설 20주년을 앞두고 이즘은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편을 마련한다. 이즘 필자들과 독자들의 글을 공개하면서 이즘 편집진은 음악과 동의어라고 할 라디오 방송의 PD들이 갖는 미학적 시선과 경험을 들어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이 뽑은 ‘인생 곡 톱10’을 순차적으로 공개한다. 네번째 순서는 MBC 라디오 남태정 프로듀서다.

얼마 전 대대적으로 집 정리를 했다. 한때 욕망과 허세를 대변하던, 많은 음반과 만화책은 아이들 책에 자리를 내주고, 방 한 켠의 보잘 것 없는 종이 박스 속에 밀려난 지 오래. 이제는 그곳에 자리한 짐마저도 버거워, 나의 삶 한 켠을 또 비워내기 위하여 먼지 쌓인 상자를 열게 되었다.
뚜껑을 열자 이들과 함께 잠들어 있던 지난 시절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버릴 것’, ‘살릴 것’으로 구분을 하다 보니, 어느새 기준은 음반과 책들에 스며든 추억이 되어버린 터, 재활용 쓰레기장으로 향할 것과 누런 종이 상자 속에 다시 넣어둬야 할 것의 갈림길에서 추억이 짙게 묻어 있기에 일단 함께하기로 결심한 몇 곡을 소개한다.

파이어 Inc (Fire Inc) / Tonight Is What It Means To Be Young
월터 힐(Walter Hill) 감독의 영화 ‘스트리트 어브 파이어(Streets Of Fire)’는 악당으로부터 납치된 공주를 왕자가 구출한다는 전형적인 이야기를 변용한 현대판 서부 활극이다. 팝스타 다이안 레인(Diane Lane)이 악당 윌렘 대포(Willen Dafoe)에게 납치당하고, 그녀의 전 남자친구였던 마이클 파레(Michael Pare)가 다이안 레인을 구출한다는 스토리와 거기에 멋진 음악들이 더해져 MTV식 ‘Rock And Roll Fable’이 완성된다.
화려한 곡 구성을 내세우는 프로듀서 짐 스타인먼(Jim Steinman)이 참여한 영화 오프닝과 엔딩 음악은 이야기 전개의 ‘기’, ‘결’에 부합한다. 대중적으로는 오프닝 곡 ‘Nowhere Fast’가 많은 인기를 얻었으나, 당시 10대 초입을 지난 나의 감성을 사로잡은 음악은 영화의 엔딩에 흐르던 ‘Tonight Is What It Means To Be Young’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홀연히 떠나는 남자주인공을 안타깝게 보내야만 했던 심정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온갖 현란한 자극들이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지금 이 시대에, 이곡은 가장 솔직하고 순수한 자극으로 나의 마음을 여전히 뒤흔들고 있다.

아하(A-Ha) / Take On Me
역사에는 영상 음악의 시대가 1980년 MTV의 개국과 함께 등장한 버글스(Buggles)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부터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내게 있어 영상 음악 시대의 시작은 A-Ha의 ‘Take On Me’와 만난 순간부터이다. 아마 ‘쇼 비디오 자키’와 같은 오락 프로그램의 엔딩 크레딧에 흐를 때 접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음악은 그저 카세트 테이프를 사서 듣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 실사와 만화를 뒤섞은 ‘런어웨이’ 이야기는 만화와 음악을 좋아했던 나의 취향을, 그야말로 저격하고 말았다. 물론, 세련된 멜로디와 사운드, 맑으면서도 힘 있는 보컬까지 가세한 음악만으로도 시대를 관통하는 명작이다. 자유자재로 영상을 찍고 쉽게 편집하는 시대에 이제는 어설프게 느껴질지 모르나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이 곡을 찾고, 수많은 커버 버전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이 음악의 가치를 증명해 준다.

조용필 / 단발머리
PD가 되기 전과 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취향을 설명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그 영화 어때?’ ‘진짜 재밌어.’ ‘그 음악 어때?’ ‘죽여주지!’ 이렇게 지극히 주관적인 호불호 정도로 취향을 이야기하던 것에서 ‘아, 그 영화는 미장센이 어쩌고저쩌고……’, ‘그 곡의 베이스 라인과 사운드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나름의 근거들을 설명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에 휩싸이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나한테 조용필의 음악에 대해 물어온다면?
그냥 좋다. 어려서 들었을 때도 좋았는데, 나이 들어 들으니 더 좋다. ‘단발머리’는 어렸을 때 동네 오락실에서나 들릴 법한 ‘뿅~뿅~뿅~’ 사운드가 재미있고 신기하게 느껴져 오래 전부터 나의 애창곡이자 애청곡이었다.
2년 전, 조용필 50주년 특집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여러 뮤지션들과 평론가들을 통해 이 곡이 얼마나 훌륭한지 객관적인 근거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생전에 조용필의 팬이셨던 어머니와, 그리고 항창 트와이스에 빠져 있는 초등학생 딸아이도 흥얼거릴 정도로 시대를 아우르는 음악적 접점이 되고 있다는 데서 이 곡의 위대함을 절감한다.

데프 레파드(Def Leppard) / Hysteria
픽션에서는 개연성이 떨어져 보이는 뻔한 감동이 현실이 되면 그 감동은 어떤 드라마나 영화보다 커진다. 데프 레파드(Def Leppard)의 드러머 릭 앨런(Rick Allen)은 3집 앨범 ‘Pyromania’의 성공 후 팔이 절단될 정도의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어느 누가 봐도 밴드의 비참한 결말을 예측할 수밖에 없던 상황, 그러나 앨런이 남은 두 다리와 남은 한 팔로 4집 앨범 ‘Hysteria’에서 위대한 드러머로 부활한다.
위기와 절망의 순간을 극복한 릭 앨런과,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그를 기다리며 지지했던 동료들의 우정은 음악의 감동을 배가한다. 뛰어난 음악과 함께 감동적인 스토리가 합해져 이 앨범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팝스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 비슷한 시기에 발매한 앨범, ‘Bad’의 판매고를 훌쩍 뛰어 넘는 기록까지 세웠다. 앨범의 동명 타이틀곡 ‘Hysteria’는 3년에 걸친 그들의 인고의 시간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는 듯한 느낌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삶이 무거워진다고 느끼는 이 때, 그들의 음악과 음악 이야기는 여전히 나를 위로하고 응원해 준다.

오사나(Osanna) / Canzona(There Will Be Time)
8,90년대 10대 시절을 보낸 팝 음악 애호가들에게 프로그레시브 음악, 아트락은 거쳐갈 수 밖에 없는 하나의 통과의례였다. 영화팬들이 헐리우드 오락 영화에 열광하던 시절 소위 유럽 예술영화, 독립 영화를 통해 새로운 자극을 얻는 것처럼, 영미권의 팝음악이 지배했던 시절의 유럽, 특히 이태리 아트락을 통해 음악의 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뉴 트롤스(New Trolls), Latte E Miele(라떼 에 밀레) 등 수많은 이태리 아트락 가운데 처음으로 구매했던 아트락 음반이 Osanna의 ‘Milano Calibro 9’였다. 당시에는 라디오 방송에도 많이 소개되지 않아 그저 유명 평론가의 추천에 의지해 구입한 음반이 기대치와 달라 본전이 생각나던 적도 많았다. 그러나 이 음반의 ‘Canzona’ 만큼은 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들었으니, 이미 금전적인 가치를 넘어 선 셈이다.
윤상과 티란티노 감독처럼 음악의 마니아라면 들어봤음직한 ‘일 포스티노(Il Postino)’의 영화 음악의 거장, 루이 바칼로프(Louis Enrique Bavalov)와 콜라보도 더욱 이 음악을 가치 있게 한다.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 / Childhood Memories
음악을 듣다보면 ‘내 맘대로 3대 음반’을 버릇처럼 꼽곤 한다. 내가 좋아하는 3대 록 앨범, 3대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음반, 3대 가요 명반 등. 이런 의미에서 애장하는 영화 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의 3대 음반을 고르자면 영화 ‘미션(Mission)’,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 그리고 바로 ‘원스 어펀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이다. 거친 팬풀루트 도입부가 인상적인 ‘Childhood Memories’는 당시 광고와 방송용 배경 음악으로도 사용되었던 엔니오 모리코네의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 개봉 당시에는 2시간 가까운 잔인한 가위질로 영화와 그 음악의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대학 입학 후 4시간 버전으로 다시 봤을 때, 현대 미국의 대서사시인 영화의 맥락이 연결되면서 영화에 함께 음악은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되었고, 비로소 나만의 최고의 음반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참고로 나만의 엔네오 모리코네 3대 음반에 아깝게 탈락한 음반은 브라이언 드 팔마(Brian De Palma) 감독의 영화 ‘언터쳐블(The Untouchables)’ OST 음반이다.

김현철 / 동네
뮤지션 김현철을 생각하면 취권의 성룡이 떠오른다. 허허실실 마음씨 좋은 아저씨의 모습에서 그가 한때 강호를 평정했던 무림의 고수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리기 힘들다. 조용필이 속세와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음악계의 ‘도인’이라면, 김현철은 자전거와 술을 좋아하는, 언제 어디서나 마주칠 법한 동네 아저씨마냥 우리의 곁에 함께 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함께 한 술자리에서 긴장의 끈을 놓고 있다가 문득 화제가 ‘음악’이 되었을 때, 취기를 꿰뚫는 그의 날카로운 분석을 마주할 때면 경외심마저 들곤 한다.
‘동네’는 그가 무려 20살에 발표한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그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음악적 소재와 형식미를 조화롭게 갖춘 곡으로, 20대 김현철은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만나기만 하면 ‘술 한잔’ 약속부터 잡는 그의 칼이 이제는 세월의 무게에 무뎌지지 않았을까 싶었던 적도 있다. 그러나 최근에 발표한 음반 ‘돛’을 통해, 그가 사람 좋은 웃음 속에 여전히 음악의 칼날을 노련하게 벼려오고 있는, 이 바닥의 고수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차게 & 아스카(Chage & Aska) ‘On your mark’
‘미래소년 코난’, ‘루팡 3세’ ‘천공의 성 나퓨타’ 등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매이션에 열광하던 시절이 있었다. ‘On Your Mark’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단편 작품으로 동명의 타이틀곡을 당시 일본의 국민 듀오 차게 앤 아스카(Chage And Asak)가 불러 화제를 모았다. 2000년 한일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 열린 공연에서도 애니메이션과 함께 소개되었다. 과거의 아픔을 같이하고 함께 미래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통해 한일 관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순간이었다.
시간이 흘러 차게 앤 아스카는 여러 가지 구설수에 휘말리며 해체되었고, 한일 관계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의 음악,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한국의 팬들이 있고, 이제는 한국의 대중문화에 열광하는 일본인도 그에 못지않게 많아졌다. 어쩌면 지금의 경색된 한일관계는 서로의 문화를 더 적극적으로 나누고 소통하는 데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할 듯하다.

그랜트 리 버팔로(Grant Lee Buffalo) / Rock of ages
소위 펄 잼(Pearl Jam), 너바나(Nirvana) 등의 시애틀 그런지와 그린 데이(Green Day), 오프스피링(Offspring) 등의 네오 펑크가 대세이던 90년대 중반, 잠시 미국에 머물렀던 순간 우연히 접하게 된 밴드 그랜트 리 버팔로(Grant Lee Buffalo)의 두 번째 앨범 ‘Might Joe Moon’의 마지막 트랙이다. 국내 라이센스 음반으로 발매되지 않았고, 인터넷 정보 검색이 본격적이지 않을 때라 아무런 사전 지식이나 편견 없이 음악 그 자체를 감상할 수 있었던 곡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빌보드 등 차트 중심의 음악이 주도하고 있지만, 그것의 바깥 세계에도 좋은 음악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음악이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을 믿지 않지만 이 음반만큼은 첫 만남에 이유도 모른 채 끌렸다. 아마도 돌이켜 보건데, 리드 보컬과 기타를 담당하고 있는 그랜트 리 필립스(Grant Lee Phillips)가 때로는 읖조리 듯, 때로는 토해내듯 하는 노래와 기타 연주가 청춘의 허허로움을 대변한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승환 / 변해가는 그대
이승환의 음반과 공연은, 그 당시에 해낼 수 있는 최고치를 이뤄내고야 만다. 20세기 말미에 발표된 이승환의 라이브 앨범 ‘무적전설’은 음반으로 접하는 음악과 공연으로 체험하는 음악의 차이를 여실히 느끼게 해준다. 그중 ‘변해가는 그대’는 라이브 실황은 현장감을 극적으로 표현한 곡이다.
곡을 만든 유희열이 라이브용 편곡에도 참여하였으며, 공연에서 자신이 가진 것 이상의 에너지를 충분히 쏟아내고야 말도록 러닝 타임도 원곡의 두 배로 늘렸다. 공연의 엔딩곡으로 그롤링까지 해가며 가수가 지닌 모든 힘을 소진해야만 부를 수 있는 곡이기에 몇 회를 제외하고는 이후 공연에서 불리지 않았다.
2019년 12월 1일,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 ‘무적전설’의 마지막은 ‘변해가는 그대’였다. 한동안 공연장에서 이 노래를 들을 수 없었던 팬들에게 이승환은 더 풍부하고 깊어진 에너지를 발산해 냈고, 그의 오래된 팬들은 무대를 불사르는 투혼에 눈물과 환호성으로 답했다. 이승환은 역시, 언제 어디서나 그가 할 수 있는 최고를 이루고야마는, 이 시대의 전설이다.
■ 프로필
남태정 | stevenam@naver.com
1996년 MBC 라디오국에 입사해 그간 < 유희열의 All That Music >, < 이소라의 FM음악도시 >, < 오늘 아침 이문세입니다 >, < 푸른밤 종현입니다 > 등을 연출했고, 2019년에는 U2의 내한공연을 유치했다.
현재는 < 배철수의 음악캠프 > 를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