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개설 20주년을 앞두고 이즘은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편을 마련한다. 이즘 필자들과 독자들의 글을 공개하면서 이즘 편집진은 음악과 동의어라고 할 라디오 방송의 PD들이 갖는 미학적 시선과 경험을 들어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이 뽑은 ‘인생 곡 톱10’을 순차적으로 공개한다. 두번째 순서는 SBS 라디오 남중권 프로듀서다.

음악을 듣고 있으면 항상 부모님은 쓸데없는 짓 말고 공부나 하라고 하셨지만 나는 이 쓸데없는 짓으로 밥벌어 먹고 살고 있다. 옆방에 살던 삼촌의 카세트에서 몰래듣던 인기가요 테잎부터 방송반 선배가 소개해준 메탈음악, 그리고 라디오에서 우연히 접한 음악들까지.
지금껏 내 플레이리스트에서 사라지지 않고 쓸데없이 남아 밥벌이를 도와주고 있는 감사한 곡들 중 10곡을 무순으로 소개한다.

너바나(Nirvana) ‘Smells like teen spirit’
아직도 이메일 아이디로 남아 계속 나를 쫓아다니는 커트 코베인은 내게 청춘의 지표같은 것들을 스윽 남기고 불꽃처럼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 하자면 그가 죽기전에 남긴 것들을 내가 뒤늦게 온몸으로 받아들인 것이겠지. 씹던 껌을 다시 꺼내 씹듯이 매가리없이 부르다 갑자기 짜증내듯 터져나오는 보컬에 마구 때려부수던 것 같은 기타. 그리고 앨범 제목은 < Nevermind > 굳이 번역하자면 ‘신경꺼’라니. 얼마나 멋진가 말이다. 이 앨범을 포함해 단 세장의 정규앨범을 남기고 간 커트 코베인은 그 흔한 말처럼 ‘그는 갔어도 음악으로 남아’ 아직도 내 청춘들을 휘젓는다.
당시에도 비평가들은 곡 구성이 지나치게 단순하다, 만들다 만 것 같은 음악이다. 등등 열을 올렸었는데 한편으론 배우기 쉬워서 많은 학생들이 기타에 입문하게 된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때 기타나 배워 놓을 걸, 난 괜히 패션만 따라하다가 누더기 옷만 잔뜩 걸쳐입고 다닌 기억뿐이다. 이래저래 한심한 시절이었다.

신해철 ‘나에게 쓰는 편지’
신해철의 음악은 대부분 훌륭하지만 가끔은 자의식이 과할때가 있다. 그래서 부담스러울때가 간혹있는데 초기 음악들은 아직 그 정도가 약해서 훨씬 좋다. 그 중에서도 ‘나에게 쓰는 편지’는 타자화된 나에게 보내는 메세지라는 영화적인 설정(?) 때문인지 중학생이었던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고흐의 불꽃같은 삶과 니체의 상처가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은행구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 삶은 살지 않기로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달라서 어제 받은 카드값 독촉전화 때문인지 아침부터 은행 잔고 액수를 생각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

메탈리카(Metallica) ‘Master of puppets’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들어간 방송반에는 음악을 좋아하는 선배들이 많았는데, 특히 남자 선배들 중 두명이 메탈 덕후였다. 그 중 한명이 나에게 최고의 메탈 밴드라면서 소개해줬는데, 마구잡이로 때려부수듯이 내리꽃는 기타 사운드에 곧바로 매료되어, 그때까지 듣던 뉴키즈온더블락이니 마이클 잭슨이니 하는 음악들은 하찮게 느껴질 정도였다. 특히 이곡은 수십번을 들어도 완벽한 곡 구성에 멜로디, 스래쉬 메탈에 최적화된 제임스 헷필드의 보컬, 커크 허밋의 기타 속주까지 8분 30초여의 시간이 말그대로 속주처럼 지나갔다.
어헝헝 어헝헝하면서 따라부르다 보니 더욱 더 이곡이 좋아졌는지 결국엔 다음학기 내 첫 프로그램의 첫곡으로까지 선곡하게 됐다. 하지만 담당 선생님은 이 곡이 맘에 안 드셨는지 몽둥이를 들고 뛰쳐올라오는 해프닝으로 마무리됐다. 난 매우 속상했지만 한편으론 훈장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조용히 메탈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봄여름가을겨울 ‘영원에 대하여’
고등학교 방송국에서 만난 해원이는 음악을 나보다 훨씬 많이 알았는데, 이곡은 그 녀석의 소위 애창곡이었고 그 덕에 나는 이 앨범을 ‘영접’하게 됐다. 특히 이 노래는 가사가 엄청났는데, 그대와 함께 ‘영원에 대하여’ 얘기를 나눈다니 얼마나 허세로운 로맨틱인가. 해원이는 이 노래를 갓 배운 담배와 함께 부르곤 했는데 난 간주 점프없이 이곡을 끝까지 들어주곤 했다.
‘I photograph to remember’라는 부제가 붙은 4집은 아마도 봄여름가을겨울 앨범중에서 흥행에서는 가장 떨어지지만 개인적으로는 최고의 음반으로 뽑는다. 타이틀 곡이었던 ‘영원에 대하여’ 뿐 아니라 ‘페르시아 왕자’나 ‘전도서’ 같은 연주곡들도 좋았는데 특히 정원영이 작사작곡한 ‘안녕 또 다른 안녕’은 숨겨진 명곡이다.
음악을 많이 알던 해원이는 대학에 가서는 연극을 하다가 졸업후엔 차를 팔았는데, 몇 해전 본인상 부고를 문자로 보내고는 진짜 ‘영원’으로 가버렸다. 이 곡을 들을때마다 해원이 생각을 많이 한다.

한영애 ‘불어오라 바람아’
이병우의 멜로디에는 공통점이 있다. 묘한 희망감에 눈물이 난달까. 어떤날의 ‘출발’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이곡에도 있다. 거기에 한영애의 탁한 보컬과 가사 덕분에 노래는 묘하게 호전적이기까지하다. 난 그때 쉽사리 성적이 오르지 않는 고3 수험생이었는데 빈 기숙사에서 불확실한 미래로 두려울때마다 이 노래를 즐겨 들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이 가사들을 기도문처럼 따라부르면서.

전람회 ‘마중가던 길’
전람회에서 김동률에 가려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던 서동욱이 거의 유일하게 보컬로 전곡을 소화한 노래다. 목가적 분위기에 마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던 성가대 오빠의 느낌으로 담담하게 이 곡을 마무리한다. 그녀를 마중가던 길에 ‘난 이제 잊혀지겠지’라고 얘기하는 정서란 어떤 것일까. 옛사랑, 외사랑, 짝사랑 등 사랑의 어두운 면을 그리는데 탁월했던 김동률의 곡은 서동욱의 불완전한 보컬과 만나 이 노래에서 한없이 쓸쓸한 가을 정경을 그린다. 자존감이 최저점이던 시절 수백번을 돌려들었던 노래. 그 지점을 빠져나오고는 잘 듣지 않게 됐다.

언니네 이발관 ‘푸훗’
주말이면 집으로 다들 가는 바람에 고3 기숙사는 텅빈적이 많았는데 그럴때 볼륨을 빵빵하게 올리고 이곡을 들었다. 청명한 아침 바람에 울려퍼지는 기타소리와 함께 이건 노래를 부르는건지 마는건지 대충 읖조리는 이석원의 보컬, 무엇보다도 왠지 대충만든거 같은 곡 짜임새. 가사도 이건 아무리 읽어봐도 애매모호한게 ‘가질 수 없는 걸 알기에 더욱 갖고 싶은 나에게 화가 나’다가 ‘천번을 만났던 천번을 만나왔던 두사람’이라고 막 얘기하다가 서정적인 멜로디로 끝이나는. 그런데 그게 너무 신선했다. 얼터너티브나 모던록의 정신은 이렇게 ‘푸훗’ 하면서 그냥 막한번 해보는거 아닌가 싶은.

배리 매닐로우(Barry manilow) ‘Even now’
라디오에서 선곡대결은 거의 구한말 시대부터 있던 코너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느 라디오 코너에서는 패널들이 앉아서 비장한 각오로 준비한 곡들을 꺼내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곡도 그런 코너에서 처음 들었다. 아마도 김현철의 밤의 디스크쇼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한 패널이 이곡을 골라왔다. 헤어진 사람을 지금까지도 (Even now)도 잊지 못하는 구구절절함. 배리 매닐로우의 버터 듬뿍바른 목소리가 더해져 없던 옛추억도 만들고 싶어질 정도로 낭만적이었다.
그때 기억나는 한 패널은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Alan Parsons Project)의 곡들을 주로 선곡했는데 그는 주로 타이틀이 아니라 ‘나만 알 것 같은 음악’을 앨범 구석구석에서 털어왔다. 어느날은 ‘Don’t let it show’라는 특이한 싱글을 들고 왔는데 주구장창 ‘Old and wise’만 듣던 내게 꽤 충격을 줬었다. 이래저래 선곡대결이라는 코너는 내게 낭만적으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다.

김현철 ‘그런대로’
김현철 1집은 유일하게 그의 2집으로만 뛰어넘을 수 있다. 이곡이 들어있는 앨범 ’32도씨 여름’이 나오고 ‘그런대로’를 계속해서 들었다. 갑갑할 정도로 단순한 가사의 반복으로 진입하는 노래는 ‘그녀는 안녕이라 말하네’를 계속해서 얘기하다가 뭐 그냥 별다른 대책없이 ‘그런대로 살아가기 마련’이라고 또 밝게 얘기하다가 학교 앞 길이 젖었네’라고 계속하더니 또 ‘그런대로 살아가기 마련’이라고 처연하게 노래하는게 뭔가 술취한 아무렇게나 불러버린다. ‘달의 몰락’이 들어있는 3집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만 나에겐 아직도 술취한 듯 불러버린 이곡과 같은 이 정서를 되찾지 못하는거 같아 아쉽다.

제니퍼 원스(Jennifer warnes) ‘And so it goes’
이곡은 아침창 라디오에서 고민석 선배가 직접 출연해서 들려줬는데 난 아직도 그 아침의 공기가 또렷하게 기억난다. 라디오가 빛날때는 바로 그럴때가 아닌가 싶다. 누군가 내게 손내밀듯 툭 던지는 노래들. 빌리 조엘의 곡을 리메이크한 이곡은 고민석 피디의 목소리로 전달되어 김창완 DJ의 손에서 플레이 됐다. 그러면서 전혀 다른 느낌의 곡이 되어 버렸다.
난 아직도 라디오에서 음악이 중요하다고 믿는 (구세대이자 동시에) 확신범이다. 그리고 내가 선곡한 음악보다는 남이 선곡한 음악에 더 큰 희열을 느낀다. 전혀 기대치 못한 선곡. 그날의 공기와 DJ의 숙취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음악.
■ 프로필
남중권 PD / cobain999@sbs.co.kr 17년차 라디오 PD 겸 애아빠.
< 송은이 신봉선의 동고동락 >, < 최백호의 낭만시대 >, <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 > 등의 프로그램을 연출하다 뜻한 바 있어 편성기획팀에서 3년째 뉴미디어 사업 중. 아직도 선곡의 손맛을 잊지 못하고 프로그램으로 복귀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