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개설 20주년을 앞두고 이즘은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편을 연재 중입니다. 라디오는 음악과 동의어라는 편집진의 판단에 따라 기획한 시리즈로 모처럼 방송 프로듀서들이 전해주는 신선한 미학적 시선에 독자 분들이 좋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 PD의 ‘인생 곡 톱10’입니다. 열네 번째 순서는 tbs 교통방송 이상연 프로듀서입니다.

10곡을 골라 달라는 부탁을 받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내게는 10곡의 명곡을 추천할 권위가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나는 ‘임진모 평론가’가 아니다. 하지만, 이내 안도하며 곡을 고를 수 있었다. 개인으로서의 ‘인생 곡’ 10곡을 요청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잠이 들던 어린 시절의 희미한 기억이 아련하다. 흘러나오던 음악은 한 사람의 가슴 속에 영원한 추억을 새겨주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커트 코베인이 세상을 떠나던 어느 해였다. 그가 머물던 감성의 도시 시애틀에서의 길지 않았던 음악적 탐험기는 나에게 과분한 음악적 경험을 선물하였다.
라디오 PD의 가장 큰 장점은 직업으로서 음악을 다룬다는 것이다. 음악이 없는 지난 20년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게 음악은 기쁨이자 슬픔, 사랑이자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직업으로 음악을 다루고 청취자들을 만난다는 것은 개인적 음악 감상과는 또 다른 범주의 일이다. 지향하는 청중의 취향을 존중하며, 그들을 행복하게 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의무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10곡은 지극히 개인적 경험과 편견에 기반한 선곡이다. 지극히 주관적 느낌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카멜(Camel) ‘Long goodbyes’
“그녀는 왜 떠나야 했을까.
더 나은 무엇을 위해 떠난다는 말.”
마치, 사랑하기에 떠난다는 흔한 사랑 노래의 가사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녀의 이별에는 동과 서로 갈라졌던 독일의 아픈 역사적 배경이 자리 잡고 있다. 입김이 올라오는 추운 어느 겨울날의 정취가 가득한 앨범 재킷은 고독함의 정점으로 인도한다.
이 곡에는 사연이 있다. 오래 전, LP를 매일 한 곡씩 방송하던 어느 날이었다. 생방송을 위해 올라온 스튜디오에는 LP를 틀던 플레이어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었다. 이유는 방송 디지털화. 모 엔지니어 선배는 수 년 내 CD 플레이어도 사라질 것이라 그 날 자신 있게 공언하였다. 슬픔과 비통에 잠겼던 그 날, 방송 플레이를 위해 들고 갔던 LP 앨범이 바로 카멜의 < Stationary Traveller >였다.

이상은 ‘비밀의 화원’
아티스트 이상은은 지난 해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 노래를 ‘봄’에 비유하였다. 그렇다. 이 곡은 바로 ‘봄’이다. 추운 겨울의 아픔을 녹이는 봄과 같은 노래. 바로 ‘비밀의 화원’이다. 이 노래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Eliot의 ‘황무지’를 떠올리게 된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자라게 하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면서
봄비로, 정신없는 뿌리를 뒤흔든다.
겨울은 우리들을 따뜻하게 해주었지,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뒤덮고
마른 구근으로 작은 생명을 길러왔다.”
그렇게 그녀의 ‘비밀화원’은 한 인간의 무너진 멘탈을 상실의 나락에서 구원하였다. 다음에 다시 만나면 꼭 감사함을 전해야겠다.

케런 앤(Keren Ann) ‘Not going anywhere’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이오공감’의 곡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의 가사 중 일부다. 아마 많은 이들의 아픈 부분을 터치하는 가사였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만나고 헤어진다. 헤어짐의 고통은 사랑의 크기에 비례할 것이다.
‘어디도 가지 않는다’는 가사가 너무나 마음에 드는 노래. 그녀는 사람들의 일상적 작별인사 조차 듣기 싫어 그럴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속삭인다. 이별에 대한 아픔과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항상 그 곳에 듬직하게 서 있는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해주는 노래.

비틀스 ‘Yesterday’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팝송을 한 곡 고르라면 이 곡이 1등을 차지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너무도 친숙한 이 곡. 폴 매카트니가 너무나 담담하고 아름답게 불어낸 이 곡에는 그의 천재적 영감과 집요하고 정교한 노력이 담겨있다.
흔하디흔한 ‘Yesterday’를 선정한 이유 역시 주관적 경험에 기인한다. 음악을 공부하던 미국 시애틀에서의 짧은 기간. 이 곡은 내가 속한 아마추어 밴드의 첫 번째 레퍼토리였다. 당시 이 곡을 선곡한 유일한 이유는 이 곡이 가장 대중적이며 누구에게나 친숙하다는 것이었다. 매카트니가 느리지 않은 템포로 너무도 담담하게 불러낸 이 곡. 사실, 이 곡을 부르고 연주하는 것은 듣는 것만큼 쉽지 않다.
“I’m not half the man I used to be…”
사랑을 하면 두 사람이 하나가 된다던가. 더 이상 그 반쪽이 아니라고 담담하게 절규하는 가사는 애처로움의 정수다.

이오공감 ‘나만 시작한다면’
영원한 어린 왕자 이승환과 감성 작곡가 오태호의 프로젝트 <이오공감> 앨범 B면 첫째 곡.
이 곡은 오태호가 만들고 직접 부른 곡이다. 많은 이들이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을 이 앨범에서 기억할 것이다.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듣던 이 앨범의 B면에는 오태호가 만든 보석들로 가득하다. 이승환의 다소 격정적인 분위기의 A면이 지나고 나면, 서정적인 피아노 소리에 수줍게 울려 퍼지는 오태호의 음성은 그렇게 나의 마음에 내려앉았다.
“그 누가 무슨 말을 내 삶에 던져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내 삶의 주인은 나임을 알고…
나만 시작한다면 달라질 세상
나 진정 원하는 그 일을…
그 누구도 모르는 내일
커다란 인생의 무대 위에서 지금부터 시작이야”

이정선 ‘외로운 사람들’
어느 대학로 LP바에 이 노래를 듣고, 지독한 외로움의 정서에 붙들려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보즈 스캑스(Boz Scaggs)의 1976년 곡 ‘We’re all alone’과 더불어 ‘외로움’을 노래한 대표적 걸작. 웃는 얼굴의 털털한 모습에 순대국을 맛있게 드시는 이정선 선생님의 기억을 떠올리면 감정을 몰입하기 어려워진다. 어떻게 이런 외로움의 정서를 음악에 담아내셨는지.

앙리코 마샤스(Enrico Macias) ‘La France de mon enfance’
회현동 알리앙스 프랑세즈의 벽 한켠에는 “프랑스어는 사랑의 언어입니다” 라는 글귀가 쓰여져 있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프랑스어를 들으면 비록 그 뜻을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감성적으로 변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아름다운 프랑스어로 울려퍼지는 이 노래는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의 제국주의와 그 영향을 받은 한 사람의 애틋한 사연이 담겨있다.
앙리코 마샤스의 영혼이 담긴 목소리가 별처럼 아름다운 곡.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 ‘Goodbye to romance’
기괴한 분장과 기행으로 사람들을 당황시켰던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 이른바 메탈 발라드라 불리는 장르의 이 곡은 그의 기괴한 외관과는 다른 너무도 체념적이고 서정적인 멜로디를 선사한다. 사랑놀이에 지쳐 그 부질없음을 깨닫고 달관해버린 듯한 오지 오스본의 담담한 보컬은 감히 ‘낭만의 종결’을 극한의 낭만으로 고한다.

프로콜 하럼(Procol Harum) ‘A whiter shade of pale’
연무로 가득한 호숫가를 거닐다 만나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오르간의 멜로디는 먹먹한 가슴을 가르며 이내 이성을 마비시킨다. 영국의 록 밴드 프로콜 하럼(Procol Harum). 그 이름의 어원과 의미조차 명확치 않은 밴드의 이름처럼, 노래의 제목 또한 문학적 모호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바흐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곡답게 그 화성은 완전체에 가깝다. 인생무상. 어린 시절의 꿈은 어디로.

데비 깁슨(Debbie Gibson) ‘We could be together’
1989년에 LP로 발매된 데비 깁슨의 < Electric Youth > 앨범 뒷면- That Side라 명명된-의 4번째 곡으로 수록되어 있는 곡이다. LP를 꺼내 오랜만에 가사를 보니 유치함이 온몸을 휘감는다. 1970년생 데비 깁슨의 열아홉 감성이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앨범 속지에는 가사가 이렇게 번역되어있다.
“어떤 보장도 없지만
가능성이라도 보인다면 어떤 대가든,
모든 것을 포기하겠어요.
예전에도 실수를 했었죠.
이번도 또 다른 막다른 길 인지도 모르죠.
하지만 잠시나마 우린 함께 할 수 있잖아요.”
유치한 가사. 그때는 왜 그리 가슴이 먹먹하고 설레던지. 카멜의 ‘Long goodbyes’와 더불어 프로그램 종방 날 자주 선곡하던 한 곡.
누구나 그러하듯, 나에게도 곡을 구분하는 주관적 기준이 있다. 그리고 음악은 모호하고 직관적 기준에 따라 ‘좋은 곡’과 그렇지 않은 곡으로 구분되어진다. 그 지독한 편견의 주관적 관점에서 10곡을 선정해 보았다.
멜로디에 가사를 담아낸 ‘가요’ 장르는 앞으로도 오랜 세월 동안 ‘인생’을 담아내고 기쁨과 행복, 그리고 위로를 인류에게 선사할 것이다. 청중과의 접점에서 음악의 힘과 기쁨, 사랑을 공유하는 ‘라디오쟁이’로 좀 더 오래 남아있기를 간구한다.
*이상연 PD (syonly@empal.com)
2000년 8월 TBS 라디오국 입사
박원웅의 < 사랑이 가득한 밤에 >, < 음악편지 >, 이종환의 < 마이웨이 >, 임진모의 < 마이웨이 > 등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