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문 인터뷰

이희문은 ‘국악계의 이단아’로 불린다. 우리 소리에 외국 음악 장르를 뒤섞어 독특한 무대를 선보이기 때문이다. 27살의 나이로 뒤늦게 ‘민요’에 입문 했지만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다. 경기민요를 이수했고 출전한 대회에서 온갖 상을 휩쓰는가 하면 2017년에는 프로젝트 그룹 ‘씽씽’으로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국내보다 국외에서 먼저 반응했다. ‘민요’라는 구성진 가락을 록, 댄스와 결합해 펼쳐냈고 무엇보다 차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형형색색의 가발과 짙은 화장 그리고 구두. 이를 두고 그는 “제2의 자아를 장착”한다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한 시대를 풍미한 소리꾼 고주랑이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 대중 가수를 꿈꿨다. 마돈나를 듣고 마이클 잭슨을 팠으며 민해경의 파워풀한 목소리에 열광했다. 기획사에 들어가 혹한의 연습생 시절을 견디기도 했다. 미래는 뜻대로 흐르지 않았다. 군대를 다녀와 일본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났고 음악의 대안으로 뮤직비디오 감독을 택했다. 실제로 몇 작품에서 조감독으로 활약하며 음악에 대한 열정을 대신 채웠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 국악인 이춘희 선생님의 제안으로 다시 소리를 시작하던 때를 그는 “더 이상 갈 데도,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었다. 절박했다”고 회상한다.

민요는 내 역사이기도, 주눅 들고 싶진 않다

며칠 전 공연을 끝낸 걸로 안다. 컨디션은 괜찮나?
이 시국에 당장 어제도 곱창전골(홍대의 라이브 클럽)에서 공연을 하고 왔다. 사람이 없을 것 같아 취소하려 했는데 단골손님들이 꽤 자리를 채워줬다. 얼마 전까지 2016년부터 매년 진행 중인 경기 민요 무대에 서기도 했다. 새해부터 바쁘다.

경기 민요 무대는 무엇인가?
어머니가 소리를 하셨기 때문에 내 역사를 이야기 하다보면 그 중심에 민요가 자연스럽게 자리한다. 지금은 민요, 특히 내가 전공한 ‘경기 민요’에 대한 관심이 많이 적어지지 않았나. 개인적인 역사와 민요의 역사를 정리하고 싶었다. 2016년 공연이 시작이었고 이번에는 지난 3년간 진행했던 무대를 종합하는 느낌으로 일주일간 막을 올렸다. 민요 아카이브 정도로 보면 된다.

매진됐다고 들었다.
매진 됐‘었’다. (웃음) 그래도 생각보다 빈자리가 많진 않았다. 한 명만 와도 준비한 시리즈를 완주하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그대로 밀고 나갔는데 잘한 일 같다. 코로나를 뚫고 와준 거 아닌가. 어찌나 고맙던지 한 회도 빼놓지 않고 감사의 큰절을 올렸다.

주 관객층은 어떻게 되나?
중년 여성분들이 제일 많다. 요즘에는 남성분들도 꽤 오시고. 20-30대는 간혹 온다.

젊은 층을 포섭하고 싶지는 않나?
10대 20대가 오면 일단 기분이 좋다. 민요에 관심이 없는 연령층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시작부터 어떻게 그 세대의 공감을 사고 만족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염두는 잘 하지 않는 편이다. 대중 예술을 하는 사람들 같은 경우 타겟을 만들어 놓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거라면 나 같은 사람은 그 반대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되 운 좋게 그게 대중의 눈에 들어가면 탱큐다.

위의 공연 중 일부에서 여자 소리꾼의 삶을 다루고 있고 과거 어머니인 고주랑 선생님의 일대기를 그린 극을 올리기도 했다. 꾸준히 여성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면.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의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냥 내 일부였던 거다. 또한 민요가 부흥했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그 중심에 여성이 있다. 여성이 내는 소리였고 그래서 인간문화재도 다 여자 선생님들이시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여성 중심의 장르인 민요를 하고 있고 과거부터 그 안에서 자라난 것이다. 관심이 가는 건 당연하다.

남성 소리꾼으로서 드는 책임도 있을 것 같다.
책임감 보다는 어디 가서 민요를 한다고 할 때 주눅 들지 않는 장르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다. 이춘희 선생님의 제안으로 뒤늦게 소리판에 들어왔는데 막상 겪어보니 우리만의 리그 같았다. 걸쇠를 풀어야 밖으로 나가는데 계속해서 안에서만 머무는 느낌이랄까? 1년 한 번씩은 무조건 내 작업을 보여주며 판을 넓히자 다짐했다. 그렇게 10년을 버티니 뭔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씽씽(SsingSsing)으로 만든 전환점, 비쥬얼 콘셉트를 완성했다

프로젝트 그룹 씽씽도 그 변화의 일부인가?
맞다. 씽씽은 내가 처음으로 만든 밴드다. 어어부 프로젝트의 장영규(베이스)와 이철희(드럼), 이태원(기타, 키보드)이 연주했고 신승태, 추다혜 그리고 내가 보컬을 맡았다. 2014년도에 나 혼자 진행하던 ‘快(쾌)’라는 작품을 통해 이 그룹을 만들었다. 당시 박수무당의 이미지를 구현하려 하이힐도 신고 망사도 입었던 건데 그런 비쥬얼적 요소가 이후 내 커리어에서 한 축을 담당하게 됐다.

미국에서 먼저 주목했고 이후 국내에도 많이 알려졌다.
지금도 어디 댓글을 보면 씽씽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파급력이 강했다. 운 좋게 미국의 공영 라디오 프로그램 NPR의 전파를 탔고 그게 추진력이 되어 이름을 많이 알렸다. 외국에서 보기에 사운드는 자신들이 듣던 것과 비슷한데 창법은 동양적이고 무엇보다 비쥬얼이 쇼킹하니 눈에 띄었을 꺼다.

씽씽 활동이 음악 여정의 전환점 혹은 기폭제가 된 건가?
전통 음악은 확실히 벽이 두껍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사람과 사람 간의 교류가 있어야 새로운 일들이 발생하고 또 그래야 그런 현상에 관심 갖는 ‘사람(대중)’이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각자 뚜렷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미완의 불씨라도 지펴 결과물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만족한다. 기존에 없던 활동 만들고 시작점을 찍었으니까 말이다.

작년에는 유아인 도올 김용옥과 함께 < 도올아인 오방간다 >(이하 오방간다)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해외 공연을 끝으로 씽씽 활동을 마무리하던 차에 연락이 왔다. 처음에는 거절했다. 방송에 욕심도 없었고 무엇보다 씽씽으로 출연 제의가 왔던 건데 당시 우리는 해체 과정을 밟고 있었으니 나갈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계속) 부탁을 하길래 내 마음대로 판을 짜 움직일 수 있게 해주면 출연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알겠다더라. 그렇게 나간 거다.

새로운 그룹 오방신과, 라이브로 승부수를

최근 발매한 음반 < 오방神과 >는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
< 오방간다 >에서 한 회에 3-4곡 정도를 들려줘야했다. 재즈밴드 프렐류드와 ‘한국남자’라는 그룹을 하고 있었기에 그 노래들로 한 달 치 분량을 짰고 남은 기간은 ‘오방신과’라는 새 팀을 만들어서 채워나갔다. 레게를 주로 다루는 뮤지션 노선택의 도움이 컸다.

앨범 소개에 ‘뽕삘 나는 댄스 음악을 들려주겠다’더니 타이틀 ‘허송세월말어라’에서 제대로 판을 벌렸다.
사실 음반에서 유일하게 그 곡만 < 오방간다 > 녹화 때 만든 노래가 아니다. 소스를 계속 바꾸는데 딱 마음에 꽂히는 한 방이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이은하(1980년대 인기 있던 디스코 가수 –편집자)의 ‘네가 좋아’를 다시 들었는데 바로 이거였다. (웃음) ‘사랑가’라는 경기 민요를 펑키한 디스코 곡으로 탈바꿈 시켰다. 마음에 든다. 하하하.

반면 타이틀을 제외한 곡들은 록 베이스, 재즈 그리고 무엇보다 레게의 향취가 짙다.
총괄 프로듀서가 노선택이었으니 그의 색이 많이 들어갔다.

불만은 없었나?
음반만 들으면 생각보다 ‘정적인데?’라고 느낄 수도 있을 꺼다. 라이브에서는 다르다. 씽씽 때는 방송에서 노래를 틀 것이다 라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하고 싶은 걸 그대로 녹여냈다. 곡 길이를 늘렸고 욕심껏 담았다. 반면 이번 작품은 싱글에서 중심만 집고 실제 라이브에서 승부수를 띄운다. 나는 춤추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같은 곡을 공연장에서 보면 완전 다른 생생함을 느낄 수 있을 거다. (웃음)

이희문의 색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곡을 고른다면?
‘노래, 가락’이다. 원곡은 ‘노랫가락’인데 이는 ‘창부타령’과 함께 손꼽히는 경기 민요의 백미다. 재즈와 레게를 섞어 빠른 비트를 만들고 보컬에 욕심을 좀 냈다. 국악 용어로 말하자면 시김새 즉 테크닉에 힘을 준 거다. 부를 때 발음을 어떻게 씹느냐에 따라서 듣는 맛이 다르다. 그걸 찾아내려고 무진장 애썼고 그걸 구현 했을 쾌감이 끝내줬다. 문제는 그 차이를 나만 안다는 거다. (일동 웃음)

대중적인 멜로디로 각색한 ‘바람이 분다’ 같은 곡은 10-20대도 즐기기 좋아 보인다.어릴 때 팝, 가요와 민요를 동시에 들었다. 내 안에는 그것들이 다 체화되어 있다. 이걸 어떤 식으로 포장했을 때 사람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질까 하는 그런 기획적인 측면에 대해 늘 고민하고 있다. 관심을 가지고 직접 소비를 해야지만 길이 열린다. 모두가 전통만 지킬게 아니고 누구는 부수고 누기도 깨기도 해야지만 알맹이를 보존할 수 있다.

그렇게 만든 작품에는 만족하나?
씽씽은 장영규와 한국남자는 프렐류드의 최진배와 놀다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아마 완성도만 따졌다면 앨범을 못 냈을 꺼다. 내겐 작품이 가진 완벽함보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의미가 더 중요하다. 특히나 예전에는 내가 막 혼자 부산스레 무언가를 준비했다면 이번에는 디자이너 박승건 등의 합류로 더 뜻깊었다. 커버 사진을 보면 내가 초록색 머리를 하고 있는데 그게 젊음, 반항의 키워드를 담고 있다더라. 승건이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접근이다. (웃음)

○ 음악으로 극복한 결핍, 좋은 무기가 되다

민요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 이 지점에서 회의감이 들진 않았나?
전혀. 오히려 전통 소리를 배우고 부르는 게 좋아 주겠는데 이를 어떻게 알려야 할까 하는 측면에서의 고민이 더 컸다.

늦은 나이에 음악을 시작한 것도 그렇고 본인의 길에 확신이 있어 보인다. 성장 동력이 있다면?
어머니다. 어려서부터 유독 어머니를 따랐고 지금도 늘 그의 영향 아래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소리를 하시던 시절에는 음악이 곧장 생계와 연결됐다. 나는 여기서 조금 더 자유로웠다. 아무래도 어머니의 경제적 후원이 있으니까. 이 외에도 내게 소리 공부를 제안해준 이춘희 선생님, 지금의 내 퍼포먼스를 완성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안무가 안은미 선생님까지. 나는 복이 많다.

음악이란 어떤 존재인가?
좋은 무기와 같다. 나는 콤플렉스도 많고 결핍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문제를 풀 수 있게끔 도와준 게 민요였고 그렇기 때문에 민요가 내 무기이자 필살기가 된 거다. 이게 없었다면 꼬인 마음들을 어떻게 풀고 살았을까. 분명 음악이 엉킨 것들을 잘라줬기 때문에 이정도로나마 사람이 된 거다. (웃음)

끝으로 학창시절에 어떤 음악을 들었나?
한 곡을 질릴 때까지 듣는 타입이다. 그래도 민해경 노래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들었던 것 같다. ‘그대 모습은 장미’, ‘보고 싶은 얼굴’,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 (…) 또 마이클 잭슨을 좋아했고 마돈나 무대는 언제 봐도 끝내준다. 일본 유학하면서는 미스터 칠드런을 많이 들었는데 …. 더 말해도 되는 건가? (웃음)

*이희문이 보내온 젊은 세대를 위한 민요 추천곡

1. 노들강변 (신민요)
어릴 적 어머니의 LP로 자주 들으며 외로움을 달랬던 곡. 세상의 한을 물에 띄워 보내고 싶어 하는 심경을 담고 있다. 1930년대 새로 등장한 민요인 신민요의 하나로 그 당시 인기 있던 대중 히트곡이다.

2. 긴아리랑 (경기민요)
소리꾼이 된 계기가 되었던 곡. 내게 소리 공부를 제안해준 스승 이춘희 명창 앞에서 처음 부른 곡이기도 하다. ‘아리랑’ 가운데 가장 길고 폭 넓은 음계를 소화해야하는 곡이며 특유의 비장미가 매력적이다.

3. 청춘가 (경기민요)
흔히 경기민요는 ‘잘 해야 본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부르기 어려운 축에 속한다. 특히 이 곡은 소리의 제대로 된 맛을 내기 가장 어렵다. 흔히 있는 후렴 대신 한 소절의 가사를 빠른 리듬 안에서 주고받아야하기 때문. 조선 말기 ‘이팔 청춘가’로 불리던 곡이 지금의 ‘청춘가’가 되었다.

4. 창부타령 (경기민요)
‘노랫가락’과 함께 경기민요의 백미로 꼽히는 곡. 전통음악의 근간이 되는 무속 음악의 장단이 대두되는 곡이기도 한데 그래서 가사의 내용과 길이가 불규칙하다는 특징이 있다. 곡 자체의 난이도도 굉장히 높으며 그만큼 부르는 소리꾼마다의 개성을 잘 느낄 수 있다.

5. 맹꽁이타령 (휘몰이잡가)
내 18번이다. 스승님이 ‘이 노래는 네 노래다’라고 인정해주기도 했다. 민요가 아닌 잡가에 속한 곡이며 가사를 빠른 템포로 엮어가는 지금의 랩과 비슷한 장르라고 보면 된다. 맹꽁이를 사람에 빗대어 사회상을 고발하고 풍자한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