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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드(Jerd) ‘Bomm’ (2023)

★★★★
이 예술가의 초상(肖像)을 가만히 바라보고 받아들이자.

평가: 4/5

어떤 예술가들은 다가가기 어려운 소재인 ‘나’에 흥미를 느껴 이를 화폭에 옮긴다. 일찌감치 표현의 도화지로 음악을 택한 저드 역시 < Too Many Egos >와 ‘All My Persona’를 뜻하는 < A.M.P > 순서로 내면의 역사를 그려왔다. 하이라이트 레코즈에 입단했으나 얼마 안가 해체 수순, 전자 음악에 입문하는 등 신변에 굵직한 변화가 있던 와중에도 주제는 일관되게 유지한 것이다. 윤곽만 남겨둔 채 백색 조명을 신체에 투영한 < Bomm > 역시 완벽을 향한 자화상 중 일부를 이룬다.

메인 테마는 옹골차게 내면을 내보이던 전작과 유사하다. 타인에게는 다소 사적인 일지처럼 느껴질 수 있으나 저드는 가장 내밀한 공간인 음반 속에서 늘 초연하고 당당하다. 손수 만든 곡 안에 장르의 리듬감을 녹여 통통 튀는 우울감과 세상을 옅게 비웃는 염세적인 태도를 가감 없이 담아낸다. 덕분에 욕을 입에 달고 산다고 외치는 ‘X됐어’나 알앤비 트랙 ‘Blondie’의 처연한 서정성처럼 작품을 관통하는 정서가 쉽게 드러난다.

순수한 자기 창작을 위해 불순물의 개입도 극도로 제한한다. 기존의 나른한 알앤비와 힙합이 중심 축을 이루는 가운데, 스윔래빗과 합작한 ‘Heal’처럼 일렉트로닉까지 흡수한 그는 스스로 꾸민 멀티버스의 창조주로 임한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지휘와 연주, 연출까지 모두 맡은 저드는 순도 100%의 준수한 작업물을 내놓았고 들을 재미도 풍부해졌다. 클래식을 재해석한 ‘Aria’, 중간에 일렉트로니카 비트가 난입하는 ‘Bridal shower’, 생생한 올드스쿨 힙합 리듬을 차용한 ‘홍시’까지 다루는 스펙트럼이 확연히 넓다.

랩의 어법에 충실한 기본기와 능수능란한 언어 활용이 빛나는 지점이다. 각자의 주장이 뚜렷한 곡들은 사운드와 언어 사이 관계를 치밀하게 고민한 프로듀싱과 요소마다 적합한 단어나 효과음을 삽입하는 감각 덕에 충분한 통일감을 획득했다. 경계 없는 언어로 꾸린 독특한 가사는 저드의 개성을 이루는 핵심으로, 몇 날을 고심해 작성한 말이 있는가 하면 ‘영업 안 합니다’의 후렴구처럼 거친 욕설을 난무하기도 한다. 진짜 ‘나’다운 모습을 보이기 위한 노력, 애써 멋지게 보이지 않으려 신경 쓴 구절마저도 인상적이다.

날것의 문장들과 다소 노골적인 자의식 표출은 음악을 매개로 한 관습적인 관계를 자연스럽게 허문다. “나는 나를 설명하기 위해 살아, 다음 트랙에서도”라는 문장으로 ‘각설’의 끝을 내, 이어지는 ‘홍시’에서는 “한 입 베어 물면 나는 꽤 떫지, 익어가야만 아는 맛일 테니”라 속삭이며 듣는 이에게 주제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식이다. 개인적인 서사가 필연적으로 내포한 두꺼운 벽을 청자를 아티스트의 내면으로 순식간에 이동시켜 당돌하고 독특하게 해결한 것이다. 

본인의 세계관만 담기에도 창작의 시간이 한없이 부족했던 저드는 우울한 봄의 기억을 덧칠해 자기 정체성을 표하는 데 집중했다. 공감대나 친화력을 용납하지 않았음에도 서서히 빠져든다. 이 밑그림에 매력적인 색감과 설득력을 부여할 선율도 물론 다채롭고 아름답다. 이 예술가의 초상(肖像)을 가만히 바라보고 받아들이자. 그럼 파편화된 자아가 아닌 완전에 가까운 ‘나’를 선율에 이식한 저드가 곧 인사를 건넬 것이다.

– 수록곡 –
1. Aria
2. Bridal shower
3. X됐어 
4. Blondie 
5. 비처럼 음악처럼
6. 각설 
7. 홍시 
8. Bomm
9. 영업 안 합니다 (feat. 짱유)
10. Va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