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난영 ‘목포의 눈물'(1935)
음악을 듣기 위해 라디오를 처음 틀었던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이 음악인생의 시작이라고 밥 먹듯 얘기한다. 이후 서구 로큰롤, 팝으로 냅다 달려갔지만 그렇다고 그 이전 프리 틴 때 나를 건드린 노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부모 음악을 따라가던 이 시절의 대세는 트로트와 미국식 스탠더드 팝. 소멸된 것 같다가도 이 음악들은 새봄에 다시 싹이 트듯 내 삶에서 잠재와 현재(顯在)를 반복했다. ‘목포의 눈물’은 최초의 (일제에 대한) 저항가요일지 몰라도 내게는 ‘학교 밖의’ 첫 노래였다. 초등 6학년 봄 소풍 때 학부모 대표로 나서 이 곡을 부르신 한 급우 어머님의 그 구성진 가락을 잊지 못한다.
황금심 ‘외로운 가로등'(1939)
세상이 무서워 방에 있는 게 좋았다. 대신 외로웠다. 이 노래는 실로 외로움이 실연 통(痛)을 더 높이는 블루스 비극미의 극치일 것이다. 내 스타일이었다. ‘희미한 가로등이여/ 사랑에 병든/ 내 마음속을/ 너마저 울려주느냐..’ 황금심의 목소리는 증폭기가 필요 없을 만큼 커서 더 둔중하게 가슴을 내리누른다. 나중 차인표 송윤아 주연의 드라마 <왕초>(1999)에 이 곡이 나왔을 때 마음속에 뭔가가 불쑥 솟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박신자 ‘땐사의 純情'(1959)
질긴 생명력으로 따지면 이 곡을 넘지 못한다. 어릴 적 못났다는 말을 듣고 자란 터라 이상하게도 처량함, 막막함, 구슬픔 등등의 ‘비탄’쪽 정서에 이끌렸다. 게다가 노랫말은 ’10대가 들어선 안 되는’ 내용이라 더 깊숙이 들어왔다.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처음 본 남자 품에/ 얼싸 안겨..’ 나중 동네삼촌이 그랬다. 예뻤던 박신자는 미인은 박명이라고 스물셋 꽃다운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갔다고. ‘울어라 색스폰아∼∼’ 금지 처분이 풀리던 1987년 시점에 나온 이순길 버전도 기억에 남는다.
박재란 ‘밀짚모자 목장아가씨'(1964)
개발시대 그 못살던 시절에 밀짚모자는 뭐며 포플라, 양떼, 목장은 뭔가. 상상할 수 없는 미지의 언어들이라서 혹했던 건가.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를 통해 우리가 긴급 동의한 것은 오랜 핵심정서, 바로 서구에 대한 동경과 선망이었다. 마치 애들한테는 고구마말랭이와 쌀엿을 내동댕이치게 한 초콜릿, 아이스콘의 습격과 같은 맥락. 첫대목 ‘시원한 밀짚모자’와 후렴구 라라라를 지겹게 따라 불렀다. ‘이런 게 양키 구라파 음악이구나!!’ 하지만 지금의 젊은이가 이 곡을 들으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이런 게 북한 노래구나!!’
이미자 ‘섬마을 선생님'(1966)
최고의 콤비가 된 박춘석과 이미자 콜라보레이션의 서막. 1964년 ‘동백아가씨’의 센세이션으로 데뷔 5년이 지나서 마침내 정상에 오른 ‘엘레지의 여왕’은 라디오연속극 주제가에 또 한 번 일절 장식과 기교가 없는 미니멀리즘 창법으로 선풍을 재현한다. 그럼에도 순정의 힘 때문인지 후반 ‘서울 ∼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는 수백 번 꺾기가 구사된 듯 절절하다. 괜히 이미자 이미자 하겠는가. 형들은 조금은 이기적인 가사로 바꿔 불렀는데 기억은 나지 않는다. 지금도 60대 이상 어른들한테 꿈이 뭐였냐고 물으면 섬마을 선생님이라고 답하는 분들이 있다.
최희준 ‘종점'(1966)
작은집의 한 삼촌이 내게 그랬다. ‘이런 노래는 애들이 들으면 안 되는데…’ 영화 주인공의 산업스파이 행각이 들키면서 자살로 막을 내리는 19금 소재와 그 처절한 사운드트랙 노랫말을 전제해서였을까. 그런데도 ‘광복20년’ ‘팔도강산’과 같은 건전가요보다는 비참가요를 선호했던 나는 안 되는 쪽으로 갔다. ‘싸늘하게 싸늘하게/ 식어만 가는/ 아아아아 내 청춘/ 꺼져가네..’ 어린 애였는데도 꺼져가는 것에 왠지 마음이 갔다. 고 최희준은 부드러운 냇 킹 콜 창법에다 클라이맥스의 폭발성도 겸비한 당대 극강 보컬이었다.
배호 ‘두메산골'(1966)
각 시대의 고유정서라는 중요한 함수가 개입하기 때문에 꼭 내가 들어온 음악들이 대물림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과거의 음악이 흘러간 것들이지만 그중 더러는 이후 세대의 필요에 의해 부활하기도 한다. 과거시제가 역사성을 획득하는 순간인데 이 대목에서 첫 손가락에 꼽힐 가수가 배호다. 최희준이 굵음이라면 배호는 가녀림이다. 아픈 몸이어서 그랬을까. 쑤욱 치솟는 고음, 이건 한마디로 절세 가창(佳唱)이다. 이 곡에서 한번 ‘아니 가련다/ 풀피리 불며불며’와 ‘아니 떠나리/ 수수밭 감자밭에’ 부분을 들어보라.
남진 ‘어머님 얼굴'(1967)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를 달군 남진 나훈아 라이벌전 때 대체로 나훈아 편에 섰지만 곡 하나만 고르라면 배우 뺨치는 미남이 애타게 부른 이 노래였다. ‘어머님/ 참사랑에/ 목이 타는/ 어린 자식..’ 일반적 트로트가 아니라 모던 팝이라 할 만큼 세련된 곡조였다. 남진 선생님을 만났을 때 “그 노래를 어떻게 알아요?” 하면서 비슷한 곡 ‘어머니’가 더 떠서 이 곡이 묻혀버렸다고 설명했다. 늘 색다르고 혹하는 노래를 찾았다. 돌이켜보면 다양성 욕구가 그때 이미 싹텄던 것 같다.
이장희 ‘그건 너'(1973)
지금도 말과 글에서 고매한 문어체가 아니라 속화된 구어체를 사랑한다. 이 곡은 정형화된 가사패턴으로 노래를 하는 게 아니라 마치 형이 원색적 톤으로 마구 지껄이는 느낌이었다. ‘동창생 녀석이/ 너 미쳤니 하면서…’ ‘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네/ 종일토록 번호판과 씨름했었네’는 딴 가요에는 없는 가사였다. 언어는 그렇지 않음에도 왠지 모르게 엉김, 반항, 비타협이 넘실거렸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심대한 타격이었다. 이후 나도 모르게 씩씩해졌다.
신중현과 엽전들 ‘미인'(1974)
나중에 이런 걸 기타리프라고 한다고 알게 됐지만 처음 들었을 때 기타 전주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비슷한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한국 록의 대부’라는 수식처럼 거문고 가야금을 뜯는 듯한 기타연주는 물론, 가락 전체가 한국적이었다. 아들이자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의 평. “그 누구에게라도 단 5음계만으로 이렇게 멋진 곡을 써 보라고 해보시라. 기념비적인 곡으로 언젠가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100년 후엔 ‘아리랑’과 같은 반열에 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