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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29 권인하

음악만큼은 머리가 아닌 가슴, 자존심 하나로 해야 한다.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스물아홉 번째 주인공은 우렁찬 목소리로 가슴 깊은 곳까지 울리는 파워 보컬리스트 권인하다.

천둥 같은 포효로 좌중을 압도하는 뮤지션 권인하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언더그라운드 스타다. 1984년 이광조 ‘사랑을 잃어버린 나’의 작사·작곡을 맡아 우리나라 다운타운 카페 시대를 화려히 열어젖혔고, 음악이 흐르던 그 카페엔 프로젝트 그룹 마로니에의 ‘동숭로에서'(1989), 강인원, 김현식과 함께 한 ‘비 오는 날의 수채화'(1989), 솔로 곡으로 발매한 ‘계절처럼 음악이 흐를 때'(1990) 같은 노래들이 나긋이 전해졌다.

시대를 풍미한 명곡만 지금까지 울려 퍼지는 건 아니다. 라디오 DJ부터 연기자, 교수까지 넘나들던 엔터테이너 권인하는 나아가 가요계 동료들의 작품을 본인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며 음악이란 캔버스에 꾸준히 덧칠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 그와 조우한 9월의 어느 날, ‘천둥호랑이’의 방문을 알리듯 하늘은 비를 쏟아냈다. 40년 가까운 그의 음악 인생을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에 풀어 또 한 편의 수채화를 조심스레 구상해 봤다.

권인하만큼 젊은 세대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베테랑 가수가 없는 것 같다.
20여 년 전 TV 라이브 콘서트에서 (박)효신이랑 ‘그것만이 내 세상’을 부른 적이 있었는데 누군가 그 영상을 편집해서 SNS에 공유해 줬고 주변 분들이 젊은 세대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고 알려줬다. 그래서 댓글을 봤더니 목소리가 천둥소리 같다, 호랑이 같다는 반응이 많더라. 그때부터 ‘천둥호랑이’라는 별명이 생겼고 다른 무대들도 회자되면서 내 이름을 아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태연의 ‘만약에’를 비롯해서 정말 많은 후배들의 곡을 커버했다.
50대 초까지만 해도 가수라면 자기 노래를 불러야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런데 2011년 컬러스(the Colors)라는 팀을 하면서 보니까 가수가 노래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전설들도 리메이크 곡으로 활동한 것처럼 말이다. 그동안 한심한 생각하며 살았구나 뉘우쳤고 무슨 노래든 내 스타일로 표현할 때 가수로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다.

남의 노래를 부르며 배운 점은 없는지.
젊었을 때는 강약의 밸런스, 특히 약(弱)에 대한 조절이 잘 안됐는데 세월이 흘러 감정적인 측면에서 그 중요성을 깨달았다. 젊은 후배들의 여린 감성도 조금씩 흡수하다 보니 같은 노래를 불러도 그들의 강약과 내가 표현하는 강약의 깊이가 다르다는 걸 많이 체감한다.

기억에 남는 커버가 있다면.
닐로의 ‘지나오다’는 아들이 추천해 줘서 부르게 됐다. 발매한 지 조금 지난 노랜데 요즘 차트에서 역주행하고 있다면서 1위 올라가기 전에 빨리 불러야 한다고 조언해 줬다. 그래서 비 오는 날 차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촬영한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는데 반응이 꽤 좋았다.

권인하 음악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은.
‘계절이 음악처럼 흐를 때’나 마로니에로 발표한 ‘동숭로에서’도 제법 히트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비 오는 날의 수채화’가 아닐까. 결혼 후에 아이까지 가졌을 때라 가족 부양을 위해 음악을 그만두고 큰 형의 사업체를 맡아 운영했었다. 그러다 강인원 씨가 동명의 영화를 제작하는데 같이 OST를 불러보자고 제안했고 거기에 (김)현식이도 참여한다고 하니까 너무 반가웠다. 노래를 다시 부를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도 행복했는데 그게 내가 가수로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가수가 아닌 작곡가로 먼저 데뷔했다. 이광조의 ‘사랑을 잃어버린 나’는 어떤 곡인지.
군 제대 후 훗날 그룹 위(WE)에서 함께 몸담은 정수연의 소개로 포크 트리오 풍선의 엄인호 형이 작업하던 스튜디오에 같이 드나들며 연습하게 됐다. 얼마 뒤엔 피아노를 치던 이영훈도 들어왔는데 옆에서 영훈이가 부지런히 작곡하는 걸 보고 나도 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하루는 인호 형의 동료인 광조 형이 방문하셔서 우리 둘이 써둔 곡을 가져와 달라고 했다. 그때 나는 ‘사랑을 잃어버린 나’와 ‘상처’를 들려드렸는데 바로 본인이 가져가서 부르겠다고 하셨다. 당시 음악 하던 사람들끼리도 노래로 알아주는 형이 불러준다는 사실만으로 너무 행복했다.

많은 분들이 로커로 기억하지만 차분한 팝이나 리듬감 있는 재즈에도 강점이 있다.
비틀스의 ‘Yesterday’를 초등학교 때 라디오에서 처음 접했는데, 중학교 때 레이 찰스의 리메이크를 접하고 ‘이렇게도 부를 수 있구나’하며 감탄했다. 그리고 또 20대에는 마이클 볼튼이 부른 걸 들었는데 현대적인 편곡 덕분에 세련된 질감이 느껴졌다. 세 개 버전에서 각기 다른 감상이 떠오르는 걸 보고 30대부터는 여러 스타일을 권인하화 시키려고 노력했다. 코드까지는 못 바꾸더라도 리듬 패턴을 만져가며 다양한 장르적 접근을 도모했다.

존경하는 선배가 있다면.
학교에서 강의하다 보면 우리나라 음악사가 김정호 이전과 이후로 나눠진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존재는 위대하다. 과거엔 장르 구분할 것 없이 대부분 카피 음악에 가까웠는데 1970년대 김정호와 남성 듀오 어니언스의 등장 이후 드디어 한국적인 발라드의 기본 틀이 짜였다. 뒤따라 쏟아져 나온 해바라기, 이영훈, 유재하가 발라드를 완성한 것도 다 그의 영향이라고 본다.

서울에서 성공한 사람 치고 인천을 거쳐가지 않은 이가 없다. 당시 인천에 대한 기억은 어떤가.
1960년대에는 미8군 부대 주변, 특히 동두천 쪽에서 많은 그룹들이 인근 창고를 아지트 삼아 연습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서는 서울하고 가까운 부천, 소사, 부평으로 몰리게 됐고 그때부터 인천의 음악적 수준이 올라가지 않았나 싶다. 학창 시절을 더듬어 보면 지방에서 싼 하숙집이 많은 오류동 근처로 유학 오는 애들도 많았다.

인천이 파고다 공원 쪽만큼이나 록이 셌던 지역이지 않았나.
확실히 서울과 가깝고 클럽 문화가 발달되어 있어서 근처 지방 도시보다도 음악을 흡수하는 빠르기 자체가 남달랐다. 다른 지역에선 트로트 같은 음악을 불러야 호응이 좋고 다소 무거운 록에는 밋밋한 반응을 보였다. 인천 객석의 느낌은 정반대에 가까웠다. 록을 중심으로 팝에 친숙한 지역이라 선곡할 때도 음악의 폭을 다채롭게 구사할 수 있었다.

주로 불렀던 팝송 레퍼토리엔 어떤 곡들이 있었는지.
저니(Journey)의 ‘Separate ways’나 ‘Open arms’, 시카고(Chicago)의 ‘Hard to say I’m sorry’ 같은 곡들을 즐겨 불렀다. 그때는 로큰롤을 부르면 다들 좋아할 시기라 로드 스튜어트의 ‘Da ya think I’m sexy?’, ‘Sailing’ 같은 곡들도 인기를 끌었다.

오래 활동한 만큼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다.
1991년 < 가요톱텐 >에서 10개 분야를 대표하는 가수들을 초청하는 특집을 기획했는데 나도 여기에 언더그라운드 대표로 섭외됐었다. 밴드로 해달라는 요청이 와서 라이브로 하면 참여하겠다 협의했고 이색지대라는 팀과 함께 공연을 준비했다. 그런데 당일 현장에서 멀티 오케스트라를 다 따다 보니까 채널이 부족해 MR로 가야 한다고 말을 바꾼 것이다. 약속과 달랐기 때문에 안 한다고 했지만 우리 사무실 직원들이 하도 사정해서 어쩔 수 없이 무대에 오르기로 했다.

기분이 많이 상했을 텐데 무대는 어떻게 마무리했는지.
그러고 말았으면 다행인데 관계자들이 끝내 불을 키웠다. 당시에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렸는데 북한의 연형묵 총리가 KBS에 시찰을 온다는 소식을 듣고 방송국에서 그분이 도착할 때까지 계속 리허설을 돌렸다. 어디쯤 왔다는 연락을 받고 맞춰서 해도 될 텐데 참 답답했다. 어쨌든 연 총리가 내 앞 순서에 도착해서 내 차례 즈음 나갔는데, 내가 한창 클라이맥스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반주가 끊겼다. 무슨 멘트라도 해줄 줄 알고 기다리다 저 위를 봤는데 VIP 떠났다고 자기들끼리 수고했다며 박수 터지고 난리가 났더라. 그 자리에서 욕하면서 마이크를 바닥에 메다꽂고 나왔다.

그때만 해도 PD의 권력이 세던 시절이라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나가는 걸 스태프 한 명이 붙잡긴 했는데 이런 홀대받으면서 가수할 바엔 출연 안 하면 그만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얘기를 해야 동료들은 물론이고 후배들도 편해지지 않겠는가. 그 후에 회의가 열렸다는데 주변에서 내가 이유 없이 그럴 사람이 아닌 걸 아니까 1년 출연 정지로 일단락됐다. 그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 했어도 이해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나도 사건·사고는 좀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내 잘못을 부인하거나 인정하는 시기를 미룬 적은 없다. 전부 내 책임이고 나로 인해 마음 상하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올렸다. 이렇게 해야 기자들도 물어볼 게 없고 뒷말이 안 생겨서 듣는 분들도 비교적 너그러이 용서해 주신다. 뭐든 그렇겠지만 음악만큼은 머리가 아닌 가슴, 자존심 하나로 해야 한다.

음악 하면서 가장 어려웠을 때는 언제인가.
그룹 음반을 준비할 때 돈이 넉넉하지 못해서 아버지께 용돈을 받아 생활하곤 했다. 그러다 대학교 마지막 학기에 복학하게 됐는데 등록금을 학교에 납부하지 않고 개인 생활비와 밴드 운영비로 돌려썼다. 학교에서 등록하라고 계속 고지서가 왔는데 그때마다 거짓말을 해가면서 돈을 받았다. 세 번째 되니까 등록 안 하면 제적된다는 최후통첩이 날라왔다.

인생 삼세번이라지만 너무하긴 했다. (웃음)
아버지가 ‘뭐 하고 다니냐’며 엄청 꾸짖었지만 그 세 번째 돈마저도 다 썼다. (웃음) 결국 제적되었다가 1990년대 중반 구제 기간에 맞춰 재입학했고 근 17~18년 만에 졸업하게 됐다. 다행히 학제가 바뀌면서 이수해야 할 학점이 크게 줄어 큰 부담 없이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를 음악가로 이끈 아티스트나 노래를 꼽는다면.
앞서 얘기했듯이 레이 찰스의 ‘Yesterday’를 들으면서 내가 알고 있던 원곡과 너무 달라서 충격을 먹었던 게 음악에 발을 내디딘 첫 계기라고 본다. 그리고 한 번은 고등학교 채플 시간에 어떤 흑인 여성 소울 가수가 정동교회에서 피아노 하나에 마이크도 없이 ‘Amazing grace’를 불러준 적이 있었다. 덩치가 큰 아주머니께서 건물 전체를 울려대는데 완전히 멜로디 라인에 쇼크를 먹고 나중에 꼭 저런 음악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졸업하고 나서 가스펠이라는 걸 알았지 그때는 그냥 찬양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 두 번의 소울 음악이 나한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다.

진행: 임진모, 임동엽, 정다열
정리: 정다열
사진: 임동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