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대중연예사를 듣는 듯했다. 원로 사회자 겸 코미디언 원일은 1960년대부터 미8군을 제외한 수많은 ‘일반’ 극장 쇼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트위스트 김과 쟈니 리의 무대를 잊을 수 없다고 회고하는 그는 남진과 이미자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뿐만 아니라 지금은 잊힌 많은 연예인을 목격한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반세기도 더 지난 기록들은 명료한 음성을 통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대중문화 흐름과 변천에 늘 촉각을 곤두세운 원일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랜 동료 방일수와 함께 각 지역 순회 공연을 도는 원일은 엄연한 현역 코미디언이다. 인터뷰 말미 힘차게 공연 포스터를 펼쳐들며 “꼭 한번 놀러오라”며 초대를 건넸다. 대한민국 방송 코미디언 협회 이사직을 역임하며 권리 신장을 위해 힘쓰고 있는 그는 노인을 위한 콘텐츠, 정통 개그 프로그램 부재에 대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연예계에서의 발자취를 담은 < 인맥 >이란 책을 집필 중인 원일은 백마장과 대한극장에 대한 기억 등 부평과의 인연도 두터웠다.

활동 초기는 어떠셨나요?
백설희, 백난아, 금사향, 김정구 고복수, 황금심 같은 가수들이 인기를 끈 1950년대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들이 대거 유입되었고, 동두천과 의정부, 부평과 오산 등 각지에서 미군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그룹사운드가 결성되었다. 주식회사 화양, 동일 등 전문적인 공연 기획사가 있을 정도였다. 당시 국내 볼거리 형태는 순극(정극), 신파극, 국극(국악)(창극), 악극(유랑극단), 서커스 다섯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부터 극장 쇼 시스템이 정착했다.
1960년대 극장 쇼에서 활약한 가수를 알려주신다면?
쟈니 리와 ‘땅벌’의 이태신, 안일, 지미 리, 차리 김, 차리 박, 카니 홍, 로렌 케이 등 많은 가수가 활약했다. 현미와 한명숙, 윤항기도 일반에서 먼저 활동하다가 나중에 미8군 무대에 선 것이다. 서구적인 이미지를 위해 외국 이름을 붙여다가 썼다. 바니걸스와 김시스터즈, 이시스터즈도 같은 맥락이다.
최근 세상을 떠난 현미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어떠한가요?
현미는 ‘밤안개’와 ‘보고 싶은 얼굴’, ‘몽땅 내 사랑’같은 곡이 히트한 뒤에 만났다. 분명 절륜한 기량의 소유자였다. ‘노란 샤쓰의 사나이’로 동남아를 휩쓴 한명숙과 더불어 기억에 많이 남는 가수다.
당시 국내와 미8군 연예인의 차이점은 어땠나요?
미8군 연예인들은 스탠더드 팝과 재즈를 구사했지만, 국내 연예인은 트로트를 불렀다. 애초에 방향성이 다르기에 비교하기 어렵지만 양쪽 다 실력이 탄탄했다. 몇몇 가수들은 미8군 출신이라는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이봉조, 박춘석 같은 스타 작곡과들과의 협업으로 곡을 취입했다. 이런 곡들이 크게 히트한 덕분에 가수의 인지도가 올라갔다. 최희준의 ‘하숙생’, 현미 ‘밤안개’가 대표적이다.
1960년대 접어들어 미군들이 대거 철수했다. 미8군에서 활동하던 보컬 그룹들이 일반 무대로 나와 서구적인 팝과 재즈를 공연했다. 양색시들과 함께 온 미군이 땅콩이 든 과자를 말하는 ‘콩과자’를 던지며 무대에 호응했던 기억이 난다.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당시 극장 쇼가 사실 체계적인 볼거리는 아니었다. 국악과 연극의 수준도 그리 높진 않았다. 그나마 관중들이 선호하던 악극도 2시간 내내 몰입감이 이어지진 않았다. 1960년대부터 등장한 버라이어티쇼는 무용단의 캉캉, 재즈 곡 연주, 유명 가수의 등장으로 박수와 앙코르를 얻어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극장 쇼 인기가 점점 떨어짐과 동시에 영화의 인기는 높아졌다. 문희와 윤정희,남정임 등 여배우 트로이카가 한창 급부상한 시기였다. 그래서 쇼 단장들이 배우를 기용하기 시작했다. 신성일과 남궁원도 가끔 무대에 섰다.
그렇다면 미8군 출신들이 국내에서 공연할 땐 반응이 어땠습니까?
한명숙, 최희준, ‘키다리 미스터김’의 이금희와 ‘눈물을 감추고’의 위키리(이한필) 같은 가수들이 실력 발휘했다.

선생님이 경험하신 최고의 무대는 무엇입니까?
‘뜨거운 안녕’의 자니 리다. 자니 리와 ‘허무한 마음’을 부른 정원 콤비가 잘 나갔고, 영화에서도 큰 인기를 얻은 트위스트 김(김한섭)이 춤으로 무대를 휘어잡았다.
다양한 공연을 진행하셨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 쇼 진행을 많이 맡았다. 동대문운동장 서독 서커스, 시민회관 인도마법단, 대만 아크로바틱쇼, 현재 충무로 신세계백화점에 특설링을 제작해서 돌고래 쇼를 하기도 했다. 구봉서가 주축이 된 월하의 무법자, 김희갑의 팔도 강산 귀국 쇼도 기억에 남는다.
그때 당시에 극장 쇼 많이 했던 진행자는 누가 있었나요?
백금녀와 콤비로 활약했던 서영춘, 송해와 박시명 콤비, 임희춘 배수남 / 서영수 이기동 / 최성일 이대성 / 심철호 남성남 (후에 남철 남성남) 선배들이 계셨다. MBC가 개국하면서 구봉서, 배삼룡 같은 스타 희극인들이 다 그쪽으로 갔다. 자연스레 극장 쇼가 약화되었지만 난 사명감을 갖고 그 자리를 지켰다.
미8군 부대와 인접했던 극장과 그렇지 않은 극장은 어떤 점에서 달랐습니까?
용주골과 문산, 파주, 의정부, 동두천처럼 미군들이 주둔하고 있는 극장엔 극장 주인들이 팝과 재즈를 포함했다. 큰 차이는 없었다.
극장 쇼에서 특히 노래를 잘 불렀던 가수는 누가 있습니까?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중반까지 요즘 가요무대 많이 나오는 박재란이 인기 끌었고, 1964년 ‘동백 아가씨’부터 이미자의 존재감이 높아졌다. 최숙자도 빼놓을 수 없다. 그 후 미8군 출신인 현미, 한명숙, 최희준이 인기 대열에 동참했다.
어린 시절 부천 소사에서 본 가수 박재란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의 무대는 어땠나요?
박재란의 인기는 대단했지만 나와 함께할 때는 인기가 약간 하락할 때다. 최숙자의 인기가 높았고, 이미자와 김세레나(국민 동생이라 불리며 인기 엄청 많았다), 조미미, 김부자가 인기를 구가했다. 곧이어 월남전이 터졌고 나도 위문 공연에 다녀왔다. 현재 그 일과 관련하여 국가유공자 지정을 정부에 건의하고 있다.
윤항기나 신중현 같은 로큰롤 세대도 목격하셨나요?
신중현이 일반 무대에 사이키델릭 록을 들고 왔다. 신중현과 퀘션스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섰는데 번쩍이는 조명과 환각적인 음악에 절로 춤사위가 나왔다. 나도 그래서 사이키델릭 춤을 연구했다.
1960년대 후반엔 다크 아이스와 키 보이스 같은 밴드들이 인기를 끌었다. 신중현과 엽전들의 매니저기도 했던 박영걸 사단 라스트 챤스는 히피다운 분위기로 팬들을 사로잡았다. 후에 ‘안녕’으로 사랑받은 김태화가 라스트 챤스 출신이다.
월남엔 어떻게 가게 되신건가요?
지금 문화체육관광부인 문화공보부에서 간 거다. 전쟁이 맘처럼 되지 않았고 군인들의 사기도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지원사령부에서 국방부에 위문 공연을 위해 인기 연예인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고 국방부와 문공부가 협조했을 것이다. ‘불나비’, ‘불개미’의 가수 김상국도 같이 다녀 왔다.
월남 위문공연 중 공습으로 공연이 중단된 적도 있습니까?
포탄이 날아와서 무대 밑으로 들어간 적도 있다. 말 그대로 목숨 걸고 했다.
남진, 태원, 진성남 같은 가수들은 월남전에 군인으로 참전했습니다. 그들이 공연도 했나요?
공연도 했다. 남진은 이미 ‘가슴아프게’와 ‘울려고 내가 왔나’의 히트 가수였기에 무대 매너가 화려했다.
김상국은 스탠더드 팝에 기반한 서구적 풍모와 ‘쾌지나 칭칭나네’의 전통적 느낌이 혼재된 독특한 가수였습니다.
김상국은 루이 암스트롱의 ‘When the saint go marching in’도 잘 불렀다. 월남전 미군들을 상대로 공연한 적이 있다. 배일집과 내가 진행을 맡았지만 둘 다 영어가 짧아 미군과 소통이 어려웠다. 그래서 김상국이 대신 사회를 보고 나와 배일집은 판토마임을 구사했다. 김상국이 영어 노래 불렀고 김하정은 춤을 췄다.
김하정도 당대 인기 가수였습니다.
출중한 외모에 ‘살짜기 옵서예’, ‘금산아가씨’, ‘사랑’ 등 히트곡도 많았다. 지금은 몸이 안 좋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과거 연예계와 거대 기업화된 현재 연예계 풍토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느끼시는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대한민국 경제 수준이 올라가다 보니 자연스레 여러 가지 기회가 증가했다. 의지와 노력이 있다면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분업이 대부분이었던 과거와 달리 능력만 된다면 배우와 가수 등 다양한 분야의 겸업이 가능하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부평, 인천과의 인연은 어떠한가요?
그 지역에서 극장 쇼 진행을 주로 하진 않았지만, 백마장과 대한극장같은 명소가 친숙하고, 미군을 대상으로 한 무대(애스컴)가 활발했음을 기억한다.
앞으로 어떤 활동을 계획중이신가요?
동료 코미디언 방일수와 각 지방으로 순회 공연을 다니고 있다. 연예인으로서의 60여년 삶을 담은 <인맥 >이라는 자서전을 집필중이다.
진행 : 임진모, 염동교, 신하영
정리 : 염동교, 신하영
사진 : 신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