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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더 블랭크 숍 인터뷰

세상에 하나뿐인 유일한 옷을 만들 수 있는 재단사가 된 것이다.

윤석철은 일렉트로니카, 힙합 등 다양한 음악적 요소를 재즈 중심으로 결합하며 꾸준하게 지평을 넓혀왔다. 2016년 윤석철 트리오로 발매한 < 자유리듬 > 이후 4년 만에 만난 그는 어느덧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브랜드를 런칭할 만큼 성장해 있었다. 재즈 뮤지션으로서 모습은 간직한 채 다른 아티스트에게 꼭 맞는 옷, 다만 세상에 하나뿐인 유일한 옷을 만들 수 있는 재단사가 된 것이다.

그의 빈 공간은 한계가 없었고, 음악에 대한 열정과 순수가 채워지며 끝없이 팽창하고 있었다. < Tailor >란 앨범 제목처럼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더 블랭크 숍을 빅퍼즐에서 만났다.

< Tailor >는 내러티브를 가진 콘셉트 앨범이다.
고등학교 때 배운 피아노가 재밌어서 재즈 피아니스트로 음악을 시작했지만 사실 ‘음악을 해봐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된 건 작곡자가 되고 싶어서였어요. 윤석철 트리오로 활동하며 여러 아티스트를 만나 꾸준히 인연을 만들었고, 가요의 작법을 경험하며 ‘이곳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음악이 뭐가 있을까?’란 긴 시간 동안의 구상과 고민을 거쳐 가요 프로듀서로 나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앨범을 구상하기 시작한 때는 언제인가?
2, 3년 전쯤? 하지만 먼저 나 자신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재즈 피아니스트로서는 언제든지 앨범을 낼 수 있었지만, 프로듀서로선 아직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거든요. 더구나 그 때 당시에는 제가 기획한 여러 아티스트 분들을 모아서 컨트롤 할 수 있는 상황도 여의치가 않았어요. 모든 면에서 ‘이제는 할 수 있겠다, 해도 되겠다.’란 확신이 들었을 때 제작을 진행하게 됐습니다.

앨범의 중점은 다양성과 확장이다. 그런데 진보적인 목표와 다르게 < Tailor >란 단어는 사실 고전적인 느낌이 있다.
< Tailor >란 단어 자체가 고전적이긴 하지만, 이름보단 재단사의 행위에 집중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람의 체형과 치수를 정확하게 재고, 딱 맞지만 단 한 번 도 입어본 적은 없는 개성 있는 옷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재단사의 일이거든요. 이 모습을 콘셉트로 정하고 앨범 제목을 짓게 됐습니다.

다양한 활동을 이어왔지만 프로듀서 더 블랭크 숍은 새로운 페르소나다. 정체성을 발현하는 데에는 중심적 자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더 블랭크 숍은 결국 윤석철이에요. 제가 재미있게 느낀 음악을 배우고 또 교감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장르가 뒤죽박죽 섞여서 나온 형태죠. 하지만 그걸 표현하고 세상 밖으로 내놓으려니 많은 연습과 경험이 필요했고요. 그렇게 이해도가 높아지고 경험치가 쌓였을 때, 제 음악의 100% 중  재즈가 가진 50%, 그리고 나머지 장르를 합치는 것이 다른 프로듀서들과 구별되는 중심적 자아라고 할 수 있겠네요. 윤석철이 재즈 뮤지션이라면 더 블랭크 숍은 재즈를 배경으로 하되 조금 더 가요에 가까운, 다양한 장르를 할 수 있는 프로듀서로 설정했습니다.

실제로 앨범은 가요이면서 재즈적 터치가 완연하다.
의도라기보단 제가 만들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것 같아요. (웃음) 사실 ‘게으른 아침들’은 앞에 한 마디에서 두 마디 정도가 팻 메스니(Pat Metheney)가 만든 ‘James’의 인트로 기타 중 ‘미솔라’  로 같은데, 꽤나 많은 분들이 비슷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아모네대츠카포네’의 경우는 아프리칸 리듬인 아프로 비트를 차용했어요. 뉴욕의 흑인 재즈 뮤지션들이 아프로 비트 기반으로 연주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저도 그런 음악을 좋아해서 시도해 본 곡이에요.

선우정아, 십센치, 데이식스의 원필, 안녕하신가영, 하헌진, 이진아 등 정말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앨범이다. 섭외나 진행 과정에서부터 오래 걸렸을 것 같다.
정말 오래 걸렸어요 (웃음). 다만 이번 앨범에 참여한 대다수의 분들이저와 인연이 있었어요. 그래서 작업은 특정 아티스트 분의 성향과 특징을 먼저 생각해서 곡을 만들고, 그 다음 참여를 부탁했어요. 다들 흔쾌히 승락해주셔서 생각보다 진행 과정 자체는 쉬웠습니다.

트위터 ‘슈밴’ 님의 질문이다. “피하고 싶을 때 외우는 주문, 라디오 PD, 곰팡이, 하품 등 흔히 보지 못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곡을 써서 흥미롭다. 일상 속에서 상상 이상으로 곡 영감을 받는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가 있을까?”
보통 사랑이 공감을 많이 일으키는 주제이지만, 제가 잘 못 쓰겠더라고요. (웃음) 오히려 일상을 보는 한 사람의 시각을 노래로 표현하는 게 가장 저 다우면서, 보편적인 일이라 생각했어요. 그런 부분이 대중분들께서 들었을 때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인 것 같아요.

가사 쓰는 게 어렵진 않았나?
정말 어려웠어요. 사실 저는 연주자여서 < Tailor >를 작업하기 전에는 가사를 써본 적이 없었어요. 보통 힙합은 본인들의 파트를 나눠 직접 작업을 해서 이 앨범도 가사는 ‘참여진이 써주진 않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모두 제가 해야 되는 일이더라고요. (웃음)

작사로 생각했을 때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랜선탈출’ 가사를 가장 좋아해요. 보편적인 이야기가 아닌 판타지 세계 속 이진아라는 캐릭터를 사용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 체험이었습니다. 사실 ‘랜선탈출’을 썼을 때부터 무조건 이 곡은 이진아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고전 게임에 자주 활용되는 칩튠을 주로 사용했는데 리듬은 스윙이에요. 스윙 리듬과 곡의 사운드가 잘 어울릴 거 같았죠.

‘합주중’이란 스킷과 이어지는 곡인데, 스토리 라인은 어떻게 짰나?
전작 ‘렛슨중’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거 같아요. ‘렛슨중’은 연주곡 중심의 지난 앨범에서 이 노래가 ‘즐거운 이유’와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 지’ 등 연주로만 들으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친절하게 설명하기 위해 만든 거예요. 동시에 제가 음악을 일로써 대하게 될 때 재미없어지는 순간을 위한 개인적인 곡이기도 하고요.

‘렛슨중’은 지금까지 두 곡이 나왔는데, 세 번째가 되면 지루할 거 같아 ‘합주중’으로 바꿔 봤어요.  ‘합주중’은 ‘랜선탈출’으로 이어지기 위한 완전한 콘셉트 곡이지만요. 디지털화된 데이터 이진아 씨가 합주하고 싶은 마음에 랜선을 돌아다니다가 한 연습실에 다다르게 되고, 그곳에서 나오는 우리의 음악을 들었을 때 ‘나도 같이해보고 싶다’라고 생각하기 까지의 과정을 스토리라인으로 짜봤어요. 그러니까 ‘합주 중’도 설명이 되고, ‘랜선탈출’까지 이어지는 가사를 쓰게 됐죠.

‘사랑노래’를 부른 데이식스의 원필은 더 블랭크 숍과 같은 건반 주자다. 솔로 활동이 잦은 멤버는 아닌데, 어떻게 함께하게 된 건지 궁금하다.
노래 제목과 가사를 생각했을 때 젊은 남자 가수가 불렀으면 했어요. 평소 모니터링하는 차원에서 아이돌 음악도 많이 듣는 편인데, 여러 분을 후보로 추려 뒀고 그 중 1순위가 데이식스의 원필 님이었죠. 데이식스가 대형 기획사 소속이긴 해도 ‘라이브 클럽 데이’ 등 데뷔 초 실제로 공연을 자주 하면서 성장한 밴드잖아요. 그 사실도 알고 있었고, 원필 님은 같은 건반 주자이기도 해서 제가 만든 음악에 더 이해가 있을 것 같았어요.

원필의 독특한 보컬 톤이 곡과 잘 맞아떨어졌다.
음색이 특이하죠. 미성에 가까우면서, 가성도 잘하고 완전 고음도 저음도 아닌 담백한 목소리가 매력적이에요. 실제로 보니 음악에 대한 열정이 정말 많았습니다. 녹음할 때 처음 만났는데 작업하는 내내 좋은 인상을 받았어요.

이번 앨범 자체가 연주 곡, 보컬 곡이 서로 번갈아 가면서 진행되는 느낌이다.
요새는 앨범을 통째로 듣는 경우가 별로 없죠. 하지만 저는 CD로 듣는 분들에게 노래와 노래 사이 구간마다 쉬어 가는 전환점을 넣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제가 잘 할 수 있는 게 연주곡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장면 전환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LP의 A, B면처럼 분위기가 비슷한 연주곡을 넣어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으로 곡 리스트를 선정하게 됐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헌진과 함께 한 ‘사랑 없이 어떻게 살아’ 경우는 노래가 일종의 스킷(Skit) 기능을 수행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
‘사랑 없이 어떻게 살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피아노 루프에요. 이 곡은 특성상 버스(Verse)가 있고, 브릿지(Bridge)가 있는 정형화된 곡의 형태가 될 순 없었어요. 본격적인 피아노 루프 연주가 들어가기 전, 앞 부분에 노래에 대한 설명을 담은 나레이션을 넣었고, 이어지는 진행을 일종의 훅(Hook)과 일렉트로니카 음악의 드랍처럼 구성해 완전히 주목할 수 있게 만들었어요. 언젠간 하헌진 씨와 꼭 재밌는 걸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결과물이 나온 뒤 만족했습니다. (웃음)

전자 음악에 대한 관심도 꾸준히 밝혔다. 코나(Kona)와 함께 한 ‘옷장에 곰팡’은 어떻게 진행하게 된 건가?
원래 ‘옷장에 곰팡’은 앨범에 수록될 계획이 없었어요. 그런데 코나가 대략적인 구상을 들고 찾아왔고 이후에 제가 연주하고 멜로디를 쌓으며, 가사를 붙이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앨범에 넣어도 어울리겠다고 느꼈어요. 굉장히 생뚱맞을 수 있는 곡이지만 저의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품하게 되는 노래’, ‘옷장에 곰팡’은 직접 노래를 불렀다. 어렵지 않았나?
안녕의 온도란 팀에서도 몇 번 불렀기 때문에 별로 힘들지 않았어요. 그리고 내가 부를 수 있는 곡만 만들기 때문에 · · · 제 영역을 넘어가는 무리한 노래는 만들지 않아요. (웃음)

마지막 곡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이다. ‘이 곡은 왜인지 가사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간단하게라도 설명을 할 수가 없네요.’라 썼다.
이 곡도 제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곡인데, 너무 솔직한 가사는 쓰지 못하겠더라고요. 작사로 많은 경험을 하게 되는 거 같은데, 개인적으론 제가 쓰는 가사가 비유를 비롯해 어떤 뜻을 내포하는 의미를 담는 방법이 아직 서투른 거 같아 1차원적이라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안녕의 온도에서 드럼을 치고 작사를 했던 소월이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부터 많이 느꼈지만, 가사를 정말 잘 써요.

윤석철은 왜 다양한 음악을 좋아하고 또 다루려고 할까?
재즈를 해서 그런 거 같아요. 예전부터 지금까지 재즈는 정말 많은 뮤지션이 여러 가지 장르와 리듬을 융합하면서 발전시켜왔어요. 현재 나오는 앨범만 봐도 국적과 문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존재하고요. 우리나라도 국악과 재즈의 결과물이 굉장히 주목받고 있잖아요?

허비 행콕(Herbie Hancock)같은 경우도 모던 재즈를 선호하지만, 펑크(Funk)와 일렉트로니카 앨범도 내고, 이스라엘의 베이시스트인 아비샤이 코헨(Avishai Cohen) 같은 경우도 지역의 토속적인 분위기를 녹인 문화적 색깔이 있어요. 파나마 출신의 다닐로 페레즈(Danilo Perez) 역시 고유의 색을 가지고 있어요. 재즈 뮤지션에겐 각각의 아이덴티티가 있고 저도 그런 것을 흡수하는 걸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양성을 갖기 위해 노력한 것 같아요.

더 블랭크 숍이 재단한 옷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곡 혹은 아쉬운 곡이 있을까?
만들면서 가장 재밌었던 곡은 ‘아모네대츠카포네’입니다. 스트링을 제외한 모든 녹음을 제 작업실에서 진행했는데, 직접 짠 브라스 라인을 다섯 명의 주자가 연주하며 제가 상상하던 그대로의 형태로 구현하는 것을 보고 ‘와 이게 되는구나’라고 생각했죠.  희열을 느꼈어요.

아쉬운 건 드럼도 같은 작업실에서 녹음했는데, ‘녹음실에 컴프레서만 하나 있으면 드럼 사운드를 조금 더 이해하고 더 재밌게 만들 수 있었을 텐데.’란 생각이 들었어요. (웃음) 조만간 사지 않을까요?

‘아모네대츠카포네’는 제목도 독특하다.
작사를 할 때 멜로디를 만들고 난 이후에 가사를 붙이는데, 음절을 알기 위해 가이드 녹음을 하며 중얼거렸던 단어가 바로 ‘아모네대츠카포네’였어요. 녹음 한 걸 들어보니 재밌더라고요. (웃음) 그렇게 제목을 정하면서 아모네대츠카포네를 주문이라고 생각해본 뒤 이어지는 이야기를 적으면서 작업했습니다.

윤석철이 만약 앨범의 참여 가수였다면, 프로듀서 더 블랭크 숍은 어떤 곡을 제안했을까? (인스타그램 @hee___1.05pm님 질문)
앨범의 마지막 곡인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지 않을까요? 녹음하기 전 제가 부른 가이드 곡을 들은 몇 명의 연주자와 보컬 분들이 ‘이 곡은 직접 불러요 형, 이건 형이 불러도 좋겠는데요.’란 의견을 넌지시 전달했어요. (웃음) 개인적인 경험을 담은 노래이기도 하고요.

더 블랭크 숍으로 어떤 커리어를 쌓고 싶은가?
더 블랭크 숍이 발현할 다양성 중에서도 실력 있는 연주자들과 함께 선보이는 칠(Chill)한 스타일의 음악을 하고 싶어요. 대중에게 이런 느낌의 가요가 있다고 소개하면서 좋은 점까지 알려드리고 싶어요.

동시에 신(Scene) 자체가 다양해졌으면 좋겠어요. 최근 프로듀서라고 하면 시퀀서 기반에 EDM, 힙합 장르의 이미지가 많이 떠오르잖아요. 프로듀서의 의미가 악기와 화성을 잘 다루는 연주자로도 확장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음악을 잘하고 실력 좋은 연주자분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 쇼 미 더 머니 >처럼 래퍼가 아닌 연주자 중심의 프로듀서들이 나와서 경쟁하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요? (웃음)

좋은 연주자와 함께 가요를 만들었던 선배님들처럼, 음악 감독이 되고 싶습니다. 목표를 위해 컴프레서도 하나 사고요. (웃음)

4년 전 이즘과의 인터뷰 때 재즈 뮤지션으로서 인생 곡 세 개를 추천했다. 더 블랭크 숍의 추천 혹은 앨범을 만들었을 때 참고했던 곡을 알려 달라.
자주 듣는 음악으로 말하겠습니다. (웃음) 첫 번째는 브라질 출신 트리오인 아지모스(Azimuth)의 ‘Brazil’이란 곡이에요. 2016년부터 지금까지도 잘 듣고 있어요.

두 번째는 YMCK의 < Family Music >입니다. ‘랜선탈출’에 영향을 준 앨범이면서, 칩튠의 정수이기도 하고요. 실제로 작업을 할 때는 장르의 확장을 통해 YMCK와 다른 표현 지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어요.

마지막은 제프 파커(Jeff parker)의 < Suite for Max Brown >입니다. 아직 우리나라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기타리스트인데 힙합, 모던 재즈도 있으면서 아프리카의 바이브가 느껴지는 게 몽환적이에요.  정말 좋아요. (웃음)

인터뷰 : 김도헌, 장준환, 조지현, 손기호
정리 : 손기호
사진 : 장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