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옥 인터뷰

코로나 사태로 인해 일반의 관심에서 조금은 비켜났지만 올 2020년은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40년을 맞는 해다. 항쟁 이후 그것을 계기로 만들어지고 민주사회를 열망한 인구 사이에서 유통된 ‘민중음악’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그 중심이 광주 전남 지역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일반에게 익숙한 이름은 아니지만 박문옥은 1977년 MBC 대학가요제 첫 회에 ‘저녁 무렵’이란 곡으로 출전해 동상을 받은 ‘전남대 트리오’ 중 한 명이다. 

더 중요한 그의 이력은 1980년대 말에 열악한 환경을 딛고 고향 광주에 < 소리모아 >라는 음악 스튜디오를 설립해 이 지역 노래패들과 민중음악가의 음악을 녹음해 알리는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는 점이다. 광주가 지닌 순백 영혼의 마모와 굴절을 원치 않은 박문옥은 소리모아를 통해 저항 음악의 확산과 동시에 문화적 자립의 길을 택했다. 광주의, 광주에 의한, 광주를 위한 음악! 

40년 이상의 음악 활동 이력을 쌓은 지금도 그는 로컬리즘을 신뢰하고 그것을 지키고자 한다. 광주 전남 지역의 민중음악가들은 그를 ‘광주 음악의 대부’로 일컫는다. 2017년 음악 활동 40년을 맞았을 때는 광주 후배들이 헌정 음반을 바치기도 했다. 광주에서 만난 박문옥 씨에게 먼저 소리모아의 물길을 터준 LP 앨범 < 예향의 젊은 선율 >에 대해 물었다. 그는 차분하지만 인터뷰 내내 온기를 담은 톤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흔히 < 예향의 젊은 선율 >이란 음반이 소리모아 녹음실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1984년 당시, 공무원 친구가 있었는데, 가수가 되길 바랬습니다. 근데 공무원은 가수 겸업할 수가 없으니 제작자가 되어 음반에 투자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MBC 대학가요제, 전일 가요제 (당시 광주 VOC 전일 방송 주최의 광주 전남 지역 가요제) 출신 팀들의 음악을 한번 모아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죠. 그렇게 대학가요제 1회에 참가한 ‘소리모아’(‘전남대 트리오로 출전한 박문옥 박태홍 최준호 3인조로 나중 소리모아가 된다), 2회의 ‘김정식 트리오’, 3회의 김종률 씨를 모아 옴니버스 형식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학가요제와 관계가 없는 신상균 씨와 원래 광주 출신이지만 서울 대표로 참가한 정오차(4회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 대신 들어온 김원중 씨가 더 들어오면서 5팀이 만들어졌지요. 

이 앨범에서 알려진 노래가 ‘바위섬’이지요? 제 기억으로는 소리모아의 ‘사랑은 강물처럼’도 나름 인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은 강물처럼’도 있지만 당시 결혼이나 군대 등의 사정이 있어서 활동이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앨범 홍보는 해야 하니 유일하게 활동할 수 있는 학생이었던 김원중 씨의 노래 ‘바위섬’을 밀게 되었던 거죠.

전남대 트리오의 ’저녁 무렵’은 ‘장난감 가게 앞에 호주머니를 뒤적이는 아빠의 마음, 아- 삶을 인정하는 열정이어라‘ 부분을 기억하는 당시 대학생 팬들이 많았습니다. 선생님이 작사를 했나요?
저는 작곡만 했고 따로 작사한 분(김수남)이 계십니다. 하덕규 씨가 이 노래를 듣고 가사가 좋아서 가수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랑 같이 음악 하던 분 중에 하덕규 씨와 선후배 관계였던 분이 계셔서 그분 얘기로 알게 되었죠. 전남대 트리오라는 이름으로 음악 했던 저희를 보고 하덕규 씨가 팬이 되어 그때부터 기타를 배웠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1980년 5.18 광주항쟁 때 선생님은 어떤 상황, 어떤 심경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전남대 사범대를 나온 저는 1978년 초까지 섬마을 교사로 지내다가 광주 항쟁이 지난 1980년 후반까지 군대에 있었습니다. 내무반에서, 혹은 휴가 나왔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증언을 듣곤 했습니다. 하루 종일 친구들과 후배들이 실제 겪었던 일과 세상 돌아가는 일을 들었기에 당시 나왔던 언론 보도에 대해서는 거의 믿지 않았습니다. 

당시 음악인으로서 음악을 활동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을 텐데 광주 민주항쟁으로 인해 큰 아픔을 겪지 않았습니까? 소리모아를 통해 그 분노를 음악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인가요?
그것은 아닙니다. 당시에 크게 2가지 성향의 흐름이 있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이 터지기 전부터 의식을 갖고 반정부 투쟁을 했던 운동권이 있었고 저는 이른바, 낭만파 이름의 날라리였습니다(웃음). 1980년 5월이 터지고 나선 막연한 낭만파는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 마음에 빚을 지고 죄의식을 갖게 되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캠퍼스에 기타 들고 다니면서 여학생들과 놀던 낭만파 중 한 명이었죠.

제가 운동권 학생은 아니었지만 운동권의 동력이 되고자 했습니다. 당시 운동권 학생들은 돈이 없었어요. 유일한 자금원이 테이프 판매였습니다. 테이프 원본 하나를 만들면 더블 데크에 나눠서 하루에 10개씩 복사하고 이를 팔면 상당한 돈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노래패나 운동권의 자금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1980년에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 예향의 젊은 선율 >이 1984년 발매면 대략 3년간의 시차가 있는데 그 사이에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
1981년부터 83년까지는 신안 섬마을에서 교직을 수행했습니다. 사실 주말에도 광주에 올라오기가 어려워 거의 섬에 유배된 생활을 지냈죠. 그러다 1983년 여름에 소리모아 멤버들이 다들 제대를 마치고 같이 교사가 되면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섬마을 교사로 늙어가긴 아쉬우니까 광주로 모여 음악을 하자’는 이야기를 나누고 셋이 동시에 학교에 사표를 냈습니다.  

소리모아라는 이름은 전남대 트리오 당시 내부적으로 있던 이름인가요?
아니요. 1985년도에 음반을 내면서 새로운 이름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1983년 광주에서 다시 모이게 되었을 때는 소리모아라는 이름이 없었던 것이죠. 팀 이름을 각자 부르고 싶은 대로 막 불렀습니다.  ‘빈센트’, ‘비센트’, ‘폼하우스’ 등등 이름이 여러 개 나왔지요. 팀 이름이지만 녹음실 이름도 됐네요.

“아무리 민중가요라지만 악다구니만 써서 음악이 되겠는가.”

선생님 음악 인생의 분기점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지만 ‘어쩔 수 없이 광주가 안고 가는 역사 속의 내 역할’에 충실해야 했지요. 운동권 후배들이 돈을 모으기 위해 저에게 와서 테이프 원본을 부탁하면 거기에 기타나 북 소리를 넣어 새 음원을 만들었고 밤새 운동권 학생들이 그걸 테이프를 복사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음악 하는 사람 입장에서 이런 음원 형태로 팔 수는 없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운동권 음악을 만드는 데 있어 신시사이저나 기타 등을 넣는 것이 불경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끽해야 북 정도. 그래서 제 운동권 노래가 서울 운동권 노래패들한테 욕을 먹기도 했습니다. 저는 신시사이저도 넣어 가요처럼 편곡했는데 딴따라 음악이라고 손가락질 받고 다시 클래식처럼 오케스트라 비슷한 흉내를 내니 이번엔 부르주아 음악이라 하더군요(웃음). 1984년 < 노래를 찾는 사람들 > 음반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아무리 운동권 음악이라도 예술성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인 거죠.
그래요. 저는 굉장히 활발하게 활동하던 광주 노래패 ‘친구’의 음질 안 좋고 지글거리는 테이프를 듣고 밤새 울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해야 할 ‘역할 둘’을 깨우쳤습니다. 하나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면서, 동시에 운동권의 민중가요 만들기에 동참하는 것이었습니다. 로컬리즘인데요, 하나는 예술적 로컬리즘, 하나는 사회적 로컬리즘인 겁니다. ‘아무리 민중가요라지만 악다구니만 써서 음악이 되겠는가, 음악은 마음을 일깨우는 것이다’라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돈도 없었지만 중고 녹음기도 사고 마이크도 사면서 상업 가요 녹음실 흉내를 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만들었던 노래들이 사회에 퍼져 나간 것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선생님이 녹음하신 음반 중 크게 노래패 ‘친구’, 범능 스님 정세현, 박종화가 떠오릅니다.
노래패 친구, 정세현, 박종화 이 셋이야말로 광주의 저항 음악의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이분들의 모든 음반을 제가 다 프로듀싱했습니다.

전남대 트리오 소리모아는 왜 계속 음반녹음을 안 한 건가요?
당시 제가 속한 전남대 트리오는 운동권 색깔이 아니었습니다. 대중가요도 아니고 약간은 가스펠 분위기입니다. 저 말고 다른 두 친구의 목소리도 그렇고 음악 스타일도 사이먼 앤 가펑클처럼 아름다운 느낌이라 소리모아가 가는 길과 달랐죠. 

노래패 ‘친구’의 경우 테이프 몇 장 정도가 만들어졌나요?
제 기억에는 5~6개였는데 서울에서도 인기가 좋았습니다. 노래패 친구의 핵심 멤버는 정세현이었는데 따로 나와 독집을 발매하고 ‘우리소리 연구회’라는 노래패를 따로 만들었습니다. 노래패 친구는 문자 그대로 음악을 좋아하는 직장인 모임이었고 그중 가장 창작 욕구와 음악성을 지닌 분이 정세현 씨였던 것입니다. 널리 불린 민중가요 ‘광주출전가’를 만드셨고 불가로 들어가 범능 스님(2013년 입적)이 되신 뒤에도 음악에 매진하셨죠. 단순히 자기 욕심 때문이 아니라 진정으로 외세에 대항하는 민중 그리고 민족 음악을 만들기 위해 국악을 배우러 다니셨지요. 

범능 스님의 20장 가까운 음반을 모조리 함께하셨는데, 그분과 어떤 지점에서 잘 맞았는지요.
범능 스님이 제 말을 잘 들어주셨습니다. 한 장에 5곡이 들어가니 거의 100곡 이상을 같이 작업했다는 건데 나중에 아내보다 더 속을 잘 들여다보게 되더라구요(웃음). 처음에 곡을 쓸 때부터 약간 천재성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프로듀싱할 때 듣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일반 대중들에게 국악이 멋있게 들리겠지만 묘하게 걸고넘어지는 박자를 좀 더 쉽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범능 스님은 이 정도면 괜찮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렇게 둘이 계속 밀당을 해요. 어디까지 쉽게 정리할 수 있는가에 대해 거의 2달간 싸웠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의 타협이 잘 이루어졌습니다. 

소리모아 하면 당시 한강 이남의 유일한 스튜디오라 다양한 지역의 노래패들도 찾아와 녹음을 했다고 하던데요.. 
서울 개인 노래패가 온 적이 있고 부산의 노래패 ‘희망새‘ 음반을 서너 장 만들었습니다. 

‘지리산’의 민중가수 박종화 씨와의 음반 작업은 광주 로컬리즘에 대한 결연한 태도의 산물일 것 같습니다.
종화 말이 형하고 전혀 맞지 않는데, 왜 이렇게 잘 맞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웃음). 도움이 되려고 한 겁니다. 어쨌든 저는 광주에 있으면서, 광주에서 활동하는 운동권 노래패이건, 트로트를 좋아하건, 가스펠을 좋아하건 간에 플랫폼처럼 혹은 궂은일을 하는 살림꾼처럼 음악적으로 도움이 되길 바랬습니다. 

음악가라도 광주 사람으로서 운명적으로 리얼리즘과 충돌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민주화 투쟁으로 이 땅에 평화를 쟁취하려는 투사적 사고가 개입하지 않을 수 없지요. 
저는 누구보다 강하다고 생각해요. 강한 것이 구호적인 노래로 나와야만 강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 투쟁과 현장에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도, 도움을 준 것도 하나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격렬한 운동권 출신은 아니었으나 대신 30~40년간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제가 그 자리에 주인이 된 거죠. 버티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웃음). 누군가 그러더라구요. ‘박문옥 하면 아무도 모를 수 있다. 그러나 박문옥이 없으면 광주가 쓰러질지 모른다!’ 

소리모아를 통해 광주의 획을 그었습니다. 가장 자랑스러웠던 것은 무엇인가요?
자랑스러웠던 것은 별로 없습니다. 좀 전에 말한 것처럼 오래 버텼다는 것? 히트곡이 있는 것도 아니고 TV에 나온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대신 제 나름대로 음악을 잘하는 방법을 찾아보았습니다. 잠시 내려다본 상업가요 세계는 큰 로비, 비리가 난무했습니다. 거기서 벗어나 내 페이스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꾸준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했는데 그걸 이뤘다는 점이 자랑스럽습니다. 2007년에 데뷔 30년 5대 도시 전국 순회공연을 했는데 안치환 씨가 ‘형이 어떻게 대구에서 콘서트 했어요?’라고 물어보더군요. 그래서 ‘왜 못해?’라고 하니 ‘형, 나도 대구에서 콘서트 못 해봤어’라고 하더군요. 어쨌든 꾸준히 조용히 하다 보면 언론에 의해 화려하게 가는 것 못지않게 내 음악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오래 버티고 로컬리즘을 실현해서 광주의 후배들이 저를 보며 ‘저렇게도 살아남을 수 있구나’라고 여기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중앙 집중이 심화되는 현실에서 로컬리즘은 희망이자 자랑이지요.
특별한 것을 이뤘기보다 오랫동안 버티고 로컬리즘을 실현해서 광주의 후배들이 저를 보며 ‘저렇게도 살아남을 수 있구나’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서울로 가서 방송을 타거나 혹은 언론 플레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비참하지 않은 말로를 겪었구나 하는 희망을 후배에게 주기도 했죠. 2017년에 40주년을 맞이하여 광주 후배들이 트리뷰트 음반을 제게 헌정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조용필도 아니고 나훈아도 아니지만, 이름 없는 가수 박문옥의 트리뷰트 음반은 로컬 안에서 선후배 간의 즐거움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이너리그일지라도 이 안에서 기죽지 말자라는 의미가 담겼습니다.

반대로 아쉬운 점이 있다면요.
순수하고 인디스러웠더라도 언더그라운드 음악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유명세는 도움이 됩니다. 왜 유명해지고 싶었냐 라면 저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저를 자랑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런 정도로 유명해질 필요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방법론인 거죠. 현실과의 타협이 필요하지 않았나 해요. 저는 방송국 국장이나 신문 기자를 거의 닭 잡듯이 잡았습니다(웃음). 음악 하는 사람이 좀 유명해질 수도 있는데 절 찾아오는 방송 관계자들을 매우 혼내면서 점점 고립되더라구요. 지금 생각해보니 과했습니다.

그런데 유명해지면 훼손 없이 로컬리즘을 실현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양립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제 초등학교 동창들은 제가 뭐 해서 먹고 사는지 잘 모릅니다. 한번은 친구들이 ‘너도 음악 하는데, 김현철처럼 TV도 나오고 그래라’라고 하더군요. 진심으로 응원하는 마음인 것은 알지만 예전에는 ‘그것만이 음악의 길은 아닌데…’하며 화를 냈었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 친구들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거죠(웃음).

대외적으로 광주 하면 김종률, 김원중 씨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김종률은 ‘임을 위한 행진곡’, 김원중의 경우 ‘바위섬’과 ‘직녀에게’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가수는 노래로 이야기되지 않습니까. 먼저 음악으로 평가해야지요. (나중 조관우도 부른 ‘직녀에게’는 문병란 작사, 박문옥 작곡이다)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광주의 아픈 역사를 젊은 세대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에 어떤 입장이신지..
젊은 세대가 굳이 분개하고 아픔을 같이 나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대신 정치 파벌의 이익을 위해서 폄훼하는 것은 안 된다고 봅니다. 젊은이들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관심이 없는 것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젊은 세대를 떠나서 악의적으로 5.18의 진실을 왜곡하는 것만은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소중하게 안고 가는 것은 작은 것이라도 무시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광주를 오랫동안 지키시면서 선생님이 해오신 민중 음악이 어떤 위상을 가졌으면 하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은 노래가 유통되는 과정이 어느 정도 공식화되어 있습니다. 돈하고 관계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한 사람이 소중하게 안고 가는 것은 작은 것이라도 무시하지 않았으면 해요. 우리 삼촌이 설사 동네에서 노래한다고 해도 나훈아보다 훨씬 많은 위로나 행복을 줄 수 있거든요. 저는 우리 사회가 이미 이뤄진 것을 쫓아다니고, 이뤄지는 과정의 씨앗을 홀대하는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저도 그러한 씨앗 중 하나죠. 저도 언젠가 그래미상 받을지 누가 압니까, 아직 희망이 있어요(웃음).  

선생님이 만든 음반 중에서 애정이 가는 음반은 무엇인가요?
범능 스님과의 음반에는 혼이 섞여 있습니다. 불가에 들어간 후에 명상 음악이 있었고 포크 음반도 3장이 있지요. 범능 스님의 음악이 좀 더 알려졌으면 하는 희망이 있습니다. 예전에 범능 스님께서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자신의 음악을 연구하는 학파가 만들어지거나, 국악 학교의 수업으로 개설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하셨습니다. 

인터뷰: 임진모, 임동엽, 임선희
정리: 임선희
사진: 임동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