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1년 영국에서 홈리스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잡지, ‘빅이슈(Big Issue)’가 한국에 정착한 지도 올해로 10년이다. 2010년 7월 1호부터 2020년 11월호까지, 숱한 유명인들의 재능기부와 사회 전반의 따스한 손길을 통해 만들어진 이 잡지는 지금까지 총 238호가 발간되며 도시 곳곳 ‘빅판(빅이슈 판매원)’들에게 자립과 희망의 의지를 안겼다. 그리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10월 25일 < Seat >라는 한 장의 앨범이 나왔다.
여러 모로 흥미로운 기획이었다. 코로나 19와 읽는 매체, 음악 산업의 위기론이 일반화된 요즘 기념물로 ‘앨범’을 택했다는 사실부터가 독특했다. 으레 기념작이라 하면 규모도 크고 화려한 작품을 상상한다. 하지만 앨범은 차가운 새벽 공기처럼 차분하다. 가사를 쓰고 노래하는 이들은 직접 삶의 현장에 서있는 빅이슈 판매원들이다. 이 작업을 진두지휘한 인물은 프로듀서 말립(Maalib)이다.
삼각지에 위치한 스튜디오에서 말립을 만났다. 대중에게는 생소할 수 있으나 그는 360 사운즈에서 음악 활동을 시작해 DJ 및 프로듀서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서울에서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는 아티스트다. 이태원과 강남의 다양한 베뉴에서 자주 마주쳤던 인물이 어떻게 ‘빅이슈 10주년’ 기념 앨범을 제작하게 되었는지, 그 노래들은 어떻게 쓰였는지. 판매원 분들과 함께 지하철 역 앞 새로운 삶을 꿈꾸는 이들의 일상을 담아낸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 빅이슈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은 언제인가.
연락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올해 5월쯤 내가 빅이슈 측에 연락을 드렸다. 빅이슈와는 오래전부터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는데, 이번 10주년을 기념하여 무언가 할 계획이 있나 싶어 여쭤봤더니 코로나 19 등 여러 이슈로 인해 올해는 좀 어렵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가볍게 노래 하나 만들어볼까 싶어 시작한 기획이 여기까지 왔다.
먼저 기념 앨범을 제안한 건가. 놀랍다.
빅이슈는 조심스러운 입장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코로나 19 이슈도 있었고, 앨범을 제작한다는 일에 있어서도 고민이 있었다. 쉽사리 제안할 상황은 아니었는데 내가 진행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방금도 말한 것처럼 말립은 빅이슈와 10년 이상의 인연을 맺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인연인가.
당시 나는 고3이었다. 우연히 KBS의 다큐멘터리 ‘감성다큐 미지수’에서 빅이슈를 처음 보게 됐다. 막연하게 ‘저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싶다. 저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에 빅이슈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 후부터 봉사의 개념으로 빅이슈 측과 교류하게 됐다. 그 전엔 대학을 갈 생각도 없었는데, 사람들을 도우며 예술적으로 이들에게 기여할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다 보니 대학 진학을 결심했다.
봉사 활동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앨범 제작에도 고민이 많았을 텐데.
처음 앨범을 제작할 때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누군가의 시선에선 ‘빅판들을 이용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나. 또 한 편으로는 이 분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담아낼지도 고민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신파가 될 수 있고, 그렇다고 기저에 깔려있는 슬픈 감정을 덮는 것도 어색하고 실례가 될 것 같았다. 커버 사진 찍을 때도 고민이 되더라. 너무 꾸미는 것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일상대로 담자니 그래도 작품인데 멋진 모습을 담아드리고 싶었다.
앨범은 어떻게 제작됐나.
5월부터 3개월 간 구상의 시기를 거쳐 8월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판매원 분들을 만나 뵙고, 장황하더라도 직접 글을 써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리고 그 글들을 종합하고 추려 앨범의 스토리라인을 갖춰나갔다.
언급한 대로 < Seat >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빅판’ 분들이 직접 가사를 쓰고 노래를 불렀다는 점이다.
그것이 앨범의 핵심이었다. 빅이슈 코리아의 10주년이지만 빅이슈의 10년을 있게 한 판매원들의 개인적인 서사를 담고 싶었다. 본인이 쓰신 가사를 본인이 부를 수 있게 하자.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판매원 소개 및 섭외 과정을 듣고 싶다.
오현석 빅판은 10년 전 빅이슈 코리아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 나와 알고 지낸 사이다. 빅이슈 코리아 창간 전부터 빅이슈 프로젝트의 멤버였고 지금까지 10년 간 오롯이 활동한 인물이다. 이 분은 꼭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나머지 세 분, 문영수 님, 안연호 님, 서명진 님은 빅이슈 내부에서 프로젝트 홍보를 진행했고 지원해주신 분들로 선정하게 됐다.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
주변 친구들에게도, 기자 분들께도 ‘전문 뮤지션이 아닌 사람들과 작업하면 어떤가’에 대한 질문을 몇 번 받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큰 차이는 없었다. 제작 과정에서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녹음실 분위기 적응이었는데 그 점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녹음할 때도 첫 음정만 틀렸을 뿐 나머지는 매끄럽게 진행됐다. 몇 테이크 진행하지도 않았다.
< Seat >의 경험은 일상 속 ‘담백함’에 가깝다. 전자 음악보다 리얼 세션을 주로 활용했고, 옅은 채도로 빅판들의 목소리와 삶을 담아내는데 집중했다. 말립은 “10주년은 하나의 키워드일 뿐, 그런 무게감을 최대한 뒤로 젖혀두고 작업했다”라 밝혔다. “살아오시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으셨을까. 보통의 삶과는 분명 다른 다양한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라는 설명 이후 그는 앨범을 “시간에 대한 이야기”라 정의했다.

‘기념’이라는 단어와 달리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차분하다.
지난해 밴드 워크맨십(WRKMS)과 콜라보레이션했던 앨범 < SUSTAIN > 작업 과정에서 많이 아이디어를 얻어 활용했다. 대표적으로 마이킹이 있겠다. 더 좋은 환경과 장비 대신 SM-58 마이크를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거친 느낌, 먹먹한 소리가 이 앨범이 전달하는 정서와 어울린다고 느꼈다. 드럼 같은 경우 밴드 까데호의 드러머 김다빈이 담당했는데, 오버헤드를 안 쓰고 매트한 질감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리얼 세션임에도 미디로 찍은 느낌, 그 둘이 잘 구분되지 않았으면 했다.
이야기를 정리하는 과정은 어땠나.
카테고리로 정리하고자 했다. 사람에 대한 이야기, 빅이슈를 판매하면서 들었던 감정과 정서의 이야기 등으로. 그리고 참여하신 네 분이 반드시 앨범에, 작은 부분이라도 참여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음악을 전문적으로 하지 않은 사람들이 저작권 등록을 해서 저작권료를 받고, 저작권자로 등록되는 경험을 드리고 싶었다. 전업 뮤지션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예술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다, 저작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 사례를 만들고 자신감을 북돋고자 했다.
빅판으로의 경험을 담은 ‘서 있는 남자’, 숙연한 ‘역사驛舍의 시간’, 사랑을 노래하는 ‘러버’ 등 다양한 주제의 작품이다. 모두 빅판 분들께서 직접 작성한 글인데.
제일 처음 받았던 글은 ‘서 있는 남자’의 원형이었다. 그 전 5월부터 8월까지는 혼자 고민만 하던 터였는데, 글을 보고 나니 실마리를 얻었다. “내가 이 분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담아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솔한 본인의 삶을 가감 없이 담아주셨다. 근무하며 느낀 감정,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들었던 감정 등… 깊은 이야기들을 보며 많은 영감을 받았다.
실제로 타 매체를 통해 빅판 분들께서 직접 써주신 글을 접할 수 있었다. 투박하지만 깊은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글 솜씨를 떠나 그 정도 연배에 계신 분들은 확실히 남다른 깊이감이 있다. 삶의 무게, 연륜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싶더라. 빅이슈 판매원으로의 깊이일 수도, 노숙 경험을 하며 느낀 감정의 깊이일 수도, 일반적인 한국의 5-60대 남성 분들께서 가지고 계실 수 있는 깊이일 수도 있다. 기저에 깔린 허무한 감정, 끓어오르지 않는 감정이랄까… 그런 것들이 실재한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시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설명이 궁금하다.
모든 곡들의 모티브가 시간이다. 1번 트랙부터 마지막 7번 트랙 ‘집으로 오는 길’까지 순서를 일부러 짜 맞추진 않았으나 시간의 흐름은 반드시 담아내고 싶었다. 앨범을 시작하는 ‘빛 봄’의 경우 기타 소리로 초침 소리를 묘사한 거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빅이슈가 존재하지 않던 때로 돌아가 그 자리에서부터 다시 한번 시작해보자는 뜻을 담았다. 빅이슈 이전 빅판 분들은 어떤 삶을 사셨을까, 빅이슈와 함께하며 그분들의 생활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리고 그들이 돌아갈 집은 어디일까… 그렇게 ‘집으로 오는 길’으로 종결되는 이야기다.
기쁜 노래도, 슬픈 노래도 있는 서사다.
‘집으로 가는 길’로 할까 ‘집으로 오는 길’로 할까 고민이었다. 후자를 택한 이유는 이 앨범 자체가 ‘집’으로 느껴졌으면 해서였다. 각자 할 이야기들을 모두 털어낸 이들이 돌아올 수 있는 집, 공간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실제로 러닝 타임이 20분 남짓으로 짧은 편이다.
일곱 곡도 주변에서 만류를 많이 해서 이 정도로 줄인 거다. 빅이슈 측과도 처음에는 1~2곡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 곡이 두 곡 되고, 두 곡이 일곱 곡 되고… (웃음) 판매원 분들의 업무 시간도 고려해야 했고. 작업을 더 하자고 마음먹었다면 더 할 수도 있었겠지만 최대한 이 일곱 곡에 내가 원하는 바를 녹여내고자 노력했다.

앨범에는 많은 분들이 대략 20명 이상의 인원이 참여했다. DJ 소울스케이프와 나잠수가 사운드 엔지니어링을 맡았고 레코딩 엔지니어로는 XXX의 프랭크(FRNK)와 허키 시바세키(Hukky Shibaseki)가 이름을 올렸다. 프로듀서 250, 주럼퍼그(Zoorumpug), 기타리스트 구영준과 까데호의 드러머 김다빈, 넘넘의 베이스 주자 이재 역시 힘을 보탰다. 말립은 하나하나 앨범에 힘을 보탠 인물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감사를 표했다. “겸손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는 그분들이 주신 소스를 정리했을 뿐이에요. 함께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다양한 뮤지션들을 초빙한 이유가 궁금하다.
하나의 연합, ‘유니온’을 의도하여 최대한 많은 인원을 참여시키겠다는 의도가 있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나 혼자만의 성격이 너무 많이 묻어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곡마다 다른 프로듀서와 작업하며 많이 영향을 받기도 했고, 또 새로운 느낌을 내고자 노력했다. ‘서 있는 남자’의 경우 피아노를 전공한 박준우와 함께하여 나는 할 수 없는 피아노 프레이즈가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런 규모의 협업은 처음인데, 추후에도 다시 한번 이런 형태의 작업을 해보고 싶다.
좋은 취지다. 하지만 < Seat >의 경우 빅이슈 1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라 별도의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 작품이다. 아티스트 분들께 요청하는 과정이 어렵진 않았나.
물론 어려웠다. 나에게는 좋은 의미지만 그걸 타인에게 강요할 수는 없지 않나. 초기 단계부터 앨범 전체 수익이 빅이슈에 돌아간다는 것을 주지하고 자세히 설명을 드렸는데, 감사하게도 다들 수락해주셔서 앨범이 나올 수 있었다.
그 점에서 앨범이 피지컬 형태로 발매되지 않은 것은 아쉽게 느껴진다.
재능기부 형태의 참여는 관계없는데 그렇게 판을 찍으면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음원 수익은 괜찮지만 LP, CD, 공연 등 타 콘텐츠의 경우 수익 배분과 관련하여 일이 복잡해진다고 하더라.
인터뷰 내내 말립은 겸손했다. 고교 시절부터 봉사 활동을 통해 빅이슈를 돕고 홈리스들을 지원하며 그 누구보다도 빅이슈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지만 “내가 해도 될까?”라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고 고백했다. < Seat >는 그래서 빅이슈 코리아의 음악이기도 하지만 말립의 지난 1년, 말립이라는 아티스트의 정체성을 돌아보고 다시금 확립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차기작으로 ‘멋진 힙합 앨범’을 기획하고 있다는 말립은 단단한 목소리로 ‘평생의 작업’을 소개해나갔다.

< Seat >를 ‘일생의 작업’이라 말했다.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았을 때부터 빅이슈와 무언가를 함께 하고 싶다, 그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것이 현실로 나온 결과물이 < Seat >다. 어떻게 보면 빅이슈의 1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작품, 내 서사라는 생각도 들더라. 마냥 기념 앨범을 대리 제작하는 개념으로 출발했다면 이만큼 애정을 쏟을 수 있었을까 싶다. 빅이슈의 10주년을 축하함과 동시에 판매원 분들의 이야기, 그리고 나의 이야기까지 복합적으로 풀어내고 싶었다.
빅이슈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빅이슈에서 진행하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이 있다. 이번에는 판매원 분들께 음악이라는 기회를 드릴 수 있어 기뻤다. 보다 다양한 기회가 주어져 빅이슈를 판매하시는 분들, 더 나아가 많은 홈리스 분들께 더 넓고 다양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길 바란다.
인터뷰 : 김도헌, 임동엽
사진 : 임동엽
정리 : 김도헌
자료 : 빅이슈, BANA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