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Interview

장기호 인터뷰

< 나는 가수다 >의 자문 위원으로 장기호를 알던 어린 마니아들은 이제 그가 1986년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초대 멤버, 1989년 1집을 발표한 빛과 소금의 중추, 솔로 커리어 장기호밴드와 KIO(키오)를 전개한 레전드 뮤지션이라는 사실을 안다.

2010년대 말 시티팝의 유행은 하나의 큰 성과를 남겼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와 1990년대까지, 과거 한국 대중음악계의 대표적인 음악가들을 젊은 세대에게 ‘레전드’로 각인한 것이다. 이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발적으로 과거의 이름과 곡을 발굴하며 잊힌 전설들을 다시금 무대로 소환했다. 김현철, 윤상, 윤수일의 이름이 십 대와 이십 대 음악 팬들 사이에서 오르내린다.

빛과 소금은 그 흐름 속에서도 단연 인기다. 불세출의 스테디셀러 ‘샴푸의 요정’의 멜로디를 어렴풋이 기억하던 팬들은 고급스럽고 세련된, 소위 ‘한국 감성이 아닌’ 빛과 소금의 음악에 감탄하며 음악을 찾고 LP 판을 앞다투어 구매하고 있다. < 나는 가수다 >의 자문 위원으로 장기호를 알던 어린 마니아들은 이제 그가 1986년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초대 멤버, 1989년 1집을 발표한 빛과 소금의 중추, 솔로 커리어 장기호밴드와 KIO(키오)를 전개한 레전드 뮤지션이라는 사실을 안다.

작년 12월 27일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과 함께 오랜만에 박성식과 빛과 소금의 이름으로 함께한 < Reunion > 앨범 역시 화제였다. 고 전태관의 기일에 맞춰 과거 동지들에게 바치는 음악은 제목 그대로 오랜 음악 팬들에겐 ‘동창회’이자 ‘오래된 친구’, ‘보고 싶은 친구’들에게 건넨, 반가운 인사였다. 여느 때보다 더욱 현재의 이름으로 호흡하고 있는 그는 “솔로 활동기엔 장기호의 색채를 짙게 가져가려 했다. 하지만 앞으로 빛과 소금 활동을 통해선 같이 늙어가는, 추억을 먹고사는 세대를 위해 대중적 감각을 더할 계획이다”라 설명했다.

시티팝 유행으로 젊은 음악 팬들의 지지를 얻음과 동시에 봄여름가을겨울과의 콜라보레이션도 화제다.
나 혼자보단 나와 박성식, 그리고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이 함께했다는 사실이 더 주목받은 것 같다. 지난해 12월 27일 기자간담회를 열었을 때 사실 놀랐다. 100여 명 넘는 기자들 앞에서 인터뷰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과거 가요계에선 봄여름가을겨울, 빛과 소금의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음악을 들어보고 빛과 소금의 음악을 들어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서로가 주장,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다르다. 그 원하는 바를 조화롭게 만들지 못했고. 추구하는 바가 달랐다. 음악적으로 보면 우리는 세련된 화성과 선율을 강조했다면, 당시의 봄여름가을겨울은 드럼과 기타의 리드미컬한 록 스타일에 가깝다.

물론 음악 말고도 다른 문제도 있었다. 박성식의 학업 문제도 있었고, 김현식이 건강 문제로 봄여름가을겨울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자 음악을 그만두려 했던 내 상황도 있었다. 당시 김현식 없는 봄여름가을겨울은 엔진 없는 자동차라 생각했다. 이후 김종진이 봄여름가을겨울 첫 앨범에서 김현식을 대신해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김현식의 3집을 만들 때 추천 받은 인물이 김종진, 전태관, 유재하, 그리고 장기호다. 박성식은 초기 멤버가 아닌 것으로 안다.
원래 시작 멤버는 위 멤버가 맞다. 당시 박성식은 군 복무 중이었다. 당시 나와 김종진, 전태관은 김수철의 작은 거인에서 1개월 정도 활동 중이었다. 그때 김현식은 ‘돌개바람’이라는 클럽 밴드와 함께 새 앨범을 준비 중이었다. 나와 이야기하면서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젊은 친구들과 함께 공연을 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김종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작고한 전태관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30여 년을 함께 해왔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활동이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 기록될 만한 인물이다. 이제는 우리나라에도 정말 실력 있는 대중음악인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아이덴티티 확보에 실패했다면 대중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김종진과 봄여름가을겨울은 정체성 확보에 성공한 밴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33년 만에 함께하여 전태관의 기일에 맞춰 새 앨범을 발표했다. 협업해보니 어떤가.
음악을 만들 때 집중하는 부분이 달라졌다. 예전 같았으면 분명 테크닉 적인 부분에서 마찰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게 다 소용없다고 결론 내렸다. ‘우리 모두의 추억을 위해 의기투합하자’ 하는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다. 음악적 욕심보다 음악을 통한 공감대를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어덜트 컨템포러리 사운드 창출에 집중했다.

그룹 활동 이후 KIO(키오), 장기호 밴드 활동과는 사뭇 다른 태도다.
그때의 활동은 예술 대학 전임 교수로 14년을 재직하며 만든 기록이다. 예술 대학 학생이면 그 또래 중에선 그래도 가장 잘하는 친구들 아닌가. 학생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영감을 주어야겠다, 교수로서 “교육적 가치가 담긴 음악을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작업했다. < Chagall Out Of Town > 시리즈에는 당시 수업시간에 가르치던 내용이 집약 되어있다. 학생들 취향에 맞을지는 모르지만 대중 지향적 취향에선 멀어졌다.

빛과 소금으로 함께 했지만 일각에서는 장기호와 박성식의 콜라보레이션 역시 낯설다는 반응이 있다.
박성식도 나도 교편을 잡고 있었기에 함께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선 물리적으로 그 친구는 천안에, 나는 서울에 있었다. 둘째로 시간의 문제다. 교수는 방학이라고 스케줄을 자유로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셋째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이다. 제한된 상황에서 음악을 만들고 공연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당시 내가 만들던 음악들은 대중 취향 저격용이 아니고 홍보가 제대로 된 것도 아니다 보니 투자비용을 뽑기가 쉽지 않았다. 마음은 늘 새로운 빛과 소금의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이렇다 할 결과물을 만들지 못한 변명이다.

박성식은 불세출의 명곡 ‘비처럼 음악처럼’을 만든 히트 작곡가다. 그렇다면 장기호의 걸작은 ‘샴푸의 요정’인가.
잘 모르겠다. (웃음)’비처럼 음악처럼’만큼 메가톤 히트를 기록한 건 아니지 않나. 다만 ‘비처럼 음악처럼’이 한번 크게 터졌다면, ‘샴푸의 요정’은 세월에 걸쳐 여러 번 히트했다고 본다.

현재 ‘샴푸의 요정’은 젊은 음악 팬들이 시티팝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곡으로 자리를 굳혔다. 1989년 당시에도 록의 주류 문법과 거리를 두고 있던 세련된 음악이었다. ‘가객’ 김현식과 ‘가왕’ 조용필과도 달랐다. 빛과 소금의 음악에선 한국인의 ‘뽕’, 대중적 멜로디는 물론 세련된 서구의 스타일을 동시에 찾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별종’이었다.

장기호는 당시 문화부, 연예부 기자들의 질문을 회상하며 “‘빛과 소금의 음악으로 어떻게 대중을 설득할 거냐’는 이야기를 늘 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많은 후배 가수들이 ‘샴푸의 요정’을 리메이크했고, 젊은 친구들에 의해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라며 곡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샴푸의 요정’을 곧 타임리스(Timeless)한 음악이라 말하고 싶다.
그렇게 표현해주니 감사하다. ‘타임리스’ 음악을 위해 갖춰야 할 두 가지가 있다고 늘 생각한다. 바로 음악적 정체성과 예술적 완성도다. 팝 음악들 중에는 세대를 거슬러 계속 불려지는 ‘올디스 벗 구디스(Oldies But Goodies)’라는 음악들이 있다. 그런 곡들은 공통적으로 음악가들의 선명한 정체성과 튼튼한 음악적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고 본다.

재즈와 펑크(Funk)의 느낌이 더 들어갔다면 빛과 소금은 한국의 스틸리 댄(Steely Dan)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스틸리 댄은 내가 정말 존경하는 팀이다. 철저하게 계산된, 그리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연주와 편곡, 그야말로 도널드 페이건의 완벽주의를 소리로 듣는 듯하다. 스틸리 댄은 분명 재즈 정신이 깃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즉흥적인 사운드보다 계산된 사운드가 주를 이룬다. 나도 같은 맥락의 음악을 추구한다. 물론 그 정도 음악을 만들려면 개인 음악공부만으로는 안 될 것 같다. 사회, 문화적 배경과 지식, 경험이 모두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곧 국력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런 스틸리 댄의 스타일과 감성을 한국에서 처음 구현한 곡이 바로 ‘샴푸의 요정’이다.
대가 중의 대가 스틸리 댄과 빛과 소금의 비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곡의 주 멜로디는 동요와 다를 바가 없다(웃음). 쉬운 멜로디지만 그 음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음악적 배경인 어레인지먼트, 프로듀싱에 공을 들인 작품이다. 음악 유학을 떠난 것도 그 영역을 더 광범위하게 공부하고 싶어 서였다.

1989년 빛과 소금의 첫 앨범을 다시 들었다. 장기호가 쓴 노래, ‘샴푸의 요정’과 ‘내 곁에서 떠나지 말아요’, ‘그대 떠난 뒤’ 등을 들으며 문득 ‘왜 장기호는 유재하처럼 되지 못했나’하는 아쉬움이 컸다.
생전 유재하와 밤새 음악 얘기를 하다 보면 추구하는 음악 방향도, 서로 갖고 있던 CD도 너무 비슷해서 놀라웠던 기억이 난다. 아마 내가 대중의 눈높이와 감성 저격에 눈을 늦게 뜬 것 같다. 그러나 해외 관계자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한 번은 < Chagall Out Of Town > 앨범을 홍보하던 PD가 일본의 한 프로듀서에게 음반을 들려준 적이 있었는데, 관계자가 놀라워하며 ‘한국에 이런 아티스트가 있었나. 마이클 프랭스(Michael Franks)와 콜라보를 계획하겠다’며 이력서를 받아간 적도 있다.

향후 음악 활동에 대한 계획은.
올해 빛과 소금 30주년이다. 빛과 소금의 새로운 음악이 담긴 미니앨범을 구상 중이다. 그리고 최근 발표한 “봄여름가을겨울과 빛과 소금” 의 미니앨범으로 당분간은 김종진과의 3인조 체제로도 갈 것 같다.(대중의 요구가 관건이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김종진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줬다. 사실 나는 그동안 실용음악 교육에 전념하느라 오랜 기간 연주를 하지 않았고’ 다시 무대에 서겠다’는 계획은 거의 접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김종진의 미니앨범 제의가 나에게 다시 음악활동을 생각하게 하는 점화가 되었다.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을 다 합하면 6명이다. 김현식, 유재하, 나, 박성식, 김종진, 전태관, 그중 세 명이 하늘나라로 떠났다. 하늘나라에 있는 현식 형, 재하, 태관이에게 음악을 통해 우리들의 메시지를 전달해야겠다 는 생각을 했다. 그게 서로에게 상당한 공감대를 불러왔다. 그 과정에서 종진이가 제작총괄 역할로 굉장히 애를 썼다. 연습이 완료되면 다양한 활동을 재개할 예정이다. 공연과 방송은 물론 우리의 음악이 필요로 한 곳이라면 어디든 가려 마음먹고 있다.

시티팝에 빠진 음악 팬들은 1980년대 경제 호황기의 낭만과 희망을 그리워한다. 장기호는 그때를 “그래도 뭔가 될 것 같아 보이던 때”라 회상했다. 2020년대를 맞이하는 지금은 위기다. 음악인들의 삶은 ‘비정규직’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불안하다. 인터뷰에 참여한 임진모 음악평론가는 “빛과 소금과 같은 한국 대중음악계의 레전드 아티스트가 돌아왔다는 사실이 기쁘다. 젊은 친구들에겐 존경할만한 선배가 필요하다!”라며 그들의 컴백을 환영했다.

‘존경할만한 선배가 필요하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나.
물론 맞는 말이다. 나 에게도 존경하는 음악선배들이 있었기에 여기 까지 온 것 같다. 다만 세대가 바뀌면서 음악적 존경의 패러다임이 바뀐 건 아닐까, 이런 우려도 든다. 우리 때 중요하게 여겼던 음악의 요소들이 현재는 크게 관심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완성도의 차원만 놓고 봤을 때 과거 빛과 소금의 음악이 펜티엄 컴퓨터라면, 지금은 오히려 단순한 386세대로 회귀한 기분이 든다.

‘386과 펜티엄’의 비유가 재미있다.
요즘 음악은 복잡한 내용이 별로 없는, 기계로 치면 기능이 단순한 기계로 음악을 찍어내는 것 같다. 면적은 넓어졌지만 깊이는 깊지 않은 느낌이다. 예전에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공부를 해야만 풀 수 있는 퍼즐이 있었다. 토토(Toto) 같은 밴드의 음악을 귀동냥으로, 컴퓨터로 재현할 수 있겠나. 그들의 퀄리티를 어느 정도라도 따라가기 위해선 그들만큼 공부하고 경험하고 각고의 음악적 노력이 필요하다. 음악을 하나의 언어라 생각하고, 그것을 익히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비유한 것이다.

그럼에도 빛과 소금의 이름을 2020년대 다시 꺼낸 것은 바로 그 젊은 세대 아닌가. ‘좋은 음악’의 기준은 세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지난 2019년 서울 레코드 페어에 빛과 소금의 앨범을 모두 LP로 복각하여 한정 판매를 한 적이 있다. 30년이 지난 오래된 음반을 구입한 대부분은 20대 젊은이였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현재의 젊은 청소년들에게도 30년 전 빛과 소금이 가치 있게 느껴졌다는 사실에 그동안 음악 했던 보람을 느낀다. 물론 시대에 따라 가치관이 달라지고 문화가 바뀌는 상황에서 좋은 음악에 대한 기준도 어느 정도 바뀐다고 본다. 그러나 음악 본질적인 차원에서 논한다면 명곡은 언제 어느 시대에도 명곡으로 남는다. 그건 진리다. 지금 레트로 라는 단어가 다가오고 있다. 다시 빛과 소금의 시대가 오면 좋겠다.

‘샴푸의 요정’은 물론 최근 ‘디깅클럽서울’ 등 1980년대 가요 리메이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어떻게 보나.
몇 곡은 들어봤다. 원곡을 능가한다는 느낌은 별로 못 받았다. 원곡이 갖고 있는 이미지가 여전히 강했다. 지난해 후배 가수들이 ‘샴푸의 요정’을 많이 리메이크하지 않았나. 모두 본인들의 음악적 감각과 개성으로 해석을 잘 해냈지만, 곡의 핵심에는 다다르지 못했다는 개인적 견해다. 그 중에도 유일하게 나의 의도를 꿰뚫어 본 곡이 하나 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시도했던 데이브레이크의 ‘그대에게 띄우는 편지’ 리메이크다.

언급한 대로 젊은 음악가들은 기술적으로는 향상되었으나 감동을 주지 못한다는, 핵심에 다가가지 못한다는 점을 고민하고 있다.
< 나는 가수다 > 자문위원장 시절 많이 언급했던 부분이다.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가수들과 함께하면서 느낀 점인데, 가창력이 좋다고 늘 감동을 주는 건 아니다. 반대로 가창력이 뛰어나지 않아도 감동을 주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하늘이 내린 선물과도 같다고 본다. 소위 ‘카리스마’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가르칠 수도 없는 부분이다. 그래서 진짜 최고의 가수, 또는 아티스트는 어떤 면에서 타고나는 것 같다. 음악 프로듀서들은 그런 면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장기호에게 빛과 소금의 의미는.
빛과 소금은… 나의 내면이 담긴 음악 세계를 나의 음악 언어로 풀어내는 매개체이며 그열매다. 처음 팀을 결성할 땐 ‘대중음악 의 빛과 소금이 되자’는 취지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유행을 따라가지 않고 미래지향적인 음악을 만들자는 목표를 삼았다. 비록 대중적이라는 평가는 받지 못했지만, 그러나 빛과 소금이 음악 행보를 계속 이어가는 이상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에 진정한 빛과 소금의 역할과 임무를 다 해 내리라 믿는다.

‘나의 음악’, 다시 말해 ‘Me’ 음악을 이어나간 것이 결국 빛과 소금의 성공 요인 아닐까.
나는 어린 시절부터 어떤 특별한 소리에 민감했던 것 같다. 나의 귀를 건드리고 갔던 거의 모든 음악의 공통점이 있었다. 멜로디와 하모니의 오묘한 조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음악적으로 표현하면 후기 낭만적 기법에 민감했던 것 같다. 낭만기의 음악들은 대부분 회화적이고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어떤 소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묘한 마력이 내재되어있는 음악이다. 그런 음악적 효과를 대중음악에 함축하려는 나의 시도는 분명하다. 그래서 유학기간 동안 오히려 후기 낭만기와 현대 음악에 더 깊이 관심을 가졌다.

1993년 빛과 소금의 3집에 수록된 ‘슬픈 영화를 보고 나면’에서 박성식이 쇼팽의 프렐류드를 연주한 것도 낭만주의적 대표적인 작품이다. 유학 시절 공부하며 그 낭만주의 음악이론의 계보가 이미 다 정리되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런 이유로 빛과 소금의 음악에선 크로매티시즘(반음계기법) 을 많이 확인할 수 있다. 반음계적인 기법은 듣는 이로 하여금 환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주요한 기법인 듯하다. 아직도 나는 이 부분에 관련된 음악이나 이론 공부를 하고 있다. 미래의 빛과 소금의 음악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음악 선생님으로서, 젊은 세대에게 추천할 음악을 소개해달라.
나는 클래식, 팝 재즈, 현대음악 등 다양한 음악을 즐기는 편이지만 대중적 관점에서 볼 때에 추천할 만한 음악들은 브라질의 이반 린스(Ivan Lins)와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Antonio Carlos Jobim)이다. 보사노바 재즈의 강렬한 로맨티시즘을 동경했다. 이를 미국적 정서로 담아낸 아티스트가 마이클 프랭스(Michael Franks)다. 한국에선 ‘Antonio’s song’으로 유명하지만, < Abandoned garden > 같은 앨범은 꼭 들어봐야 한다.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이 세상을 떠난 뒤의 음악세계”를 ‘버려진 정원’으로 비유하다니… 너무 멋지지 않은가. 브레드, 아메리카, 토토, 스티비 원더도 나의 쏭라이팅 관점에서의 연구대상이다.

프로듀싱, 작, 편곡 적 차원에서 비교적 완성도와 창의력이 높다고 생각되는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퀸시 존스의 ‘Ai no corrida’
마이클 잭슨의 ‘Rock with you’
알 자로의 ‘Breakin away’
어스 윈드 앤 파이어의 ‘After the love has gone’
세르지오 멘데스의 ‘Never gonna let you go’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Old and wise’ etc..

인터뷰 : 임진모, 김도헌, 임선희
정리 : 김도헌
사진 : 임동엽

By 김도헌

IZM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