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는 지면이 아니라 허공에서 명멸한다. 써서 읽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부르는 것이다. 입에서 입으로 떠도는 운명이다. 읽지 말고, 듣고 불러 봐야 안다. 그게 얼마나 좋은 가사인지를.’ – 서문 中 –
노랫말이 가지는 힘은 강력하다. 말로, 박주원이 속한 JNH 뮤직 대표이자 작사가인 이주엽은 노래 가사의 문학적 측면, 압도적인 힘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2020년 2월, 그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가사 비평집 < 이 한 줄의 가사 >를 집필했고 우리에게 한국 대중음악사의 잊혀선 안될 문장들을 소개한다.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 배호의 ‘안개 속의 가버린 사람’부터 아이유의 ‘가을아침’과 혁오의 ‘Tomboy’까지 전 세대를 아우르는 곡이 새로운 언어로 재탄생했다. 지난 20일,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뒤숭숭한 시국에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홍대 빅퍼즐문화연구소를 방문한 이주엽 대표와 ‘가사 한 줄’의 영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이 한 줄의 가사 >의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작사가 혹은 시인이라는 타이틀 비하면 책 출간이 늦은 편이 아닌가.
사실 내 인생에서 책 자체를 쓸 것이라고 생각도 못 했다. 지구력도 필요한 데다 쑥스럽지만, 워낙 게으른 편이다. 마침 우연한 기회에 조선일보에서 연재를 요청했는데, 그 계기가 아니었다면 책이 나올 일이 없었을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책은 조선일보에 ‘이주엽의 이 노래를 듣다가’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기록을 엮은 책이다. 연재물이 다 실린 것인가?
그렇다. 연재물만으로는 분량이 적어 앨범 소개 글을 덧붙이기도 하고 퇴고한 부분도 있다. 연재 당시 마감에 쫓겨 그냥 넘긴 부분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아쉽다. (웃음)
신문 연재본도 좋지만, 완전히 재구성하여 새로운 책을 발간했어도 좋았을 텐데.
물론 완전히 재구성할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글이 짧아도 압축적인 성격이 있어 의도한바는 다 담아냈다고 봤다. 신문 연재인지라 매수 제한이 있었고 자연히 하고 싶은 말을 짧은 내용 안에 다 집약해야 했다. 재구성에 대한 아쉬움은 새로운 글을 덧붙여 하고 싶은 말을 다 집어놓고자 했다.
책 속 노랫말과 곡을 선택한 기준은 무엇인가?
대단히 개인적인 기준에서 선곡했다. 아이유의. ‘가을아침’, 혁오의 ‘Tomboy’ 등 젊은 층에게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은 곡도 많지만, 윤심덕의 ‘사의 찬미’, 배호의 ‘안개 속에 가버린 사람’은 사적인 취향에서의 선곡이다.
약 40편 가까운데 이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글이 있다면.
아무래도 초반에 힘을 줬다. 시인과 촌장 ‘가시나무’, 정태춘 ‘북한강에서’ 등등… 시작 때는 글을 쓴다는 열정이 있기에 더 힘을 쏟았다.
‘한국의 비틀스를 꿈꾸던 더벅머리 멤버 네 명은 앞이 보이지 않는 청춘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네지 않았다. 단지 앞으로 나아가라고 외쳤다’ -들국화 ‘행진’ 中-

들국화의 ‘행진’도 사적인 취향이 들어간 곡으로 보이는데.
맞다. 서두의 밥 딜런 ‘Mr. Tambourine man’을 차치하고, 진정한 책의 첫 시작은 들국화의 ‘행진’이다. 사실상 우리는 들국화의 대표곡을 가사와 멜로디 모두 훌륭한 ‘그것만이 내 세상’으로 꼽는다. 그럼에도 ‘행진’을 첫 번째로 넣은 이유는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으며 / 눈이 내리면 두 팔을 벌릴 거야’라는 문장 덕이다.
‘비가 내리면 비를 맞는다’는 표현은 인내의 감정이다. 이후 ‘눈이 내리면 두 팔을 벌릴 거야’가 충격이었다. 고통을 견딘 후 환희와 의지의 강렬한 표현이다. 어린 시절 이 노래를 들었는데 이 부분만은 평생 가슴 속에 남아있다. 대중가요 역사에서 중요한 노랫말을 꼽는다면 꼭 들어갈 문장이라고 본다.
‘행진’처럼 이주엽 대표의 인생을 지배했던 몇 곡을 꼽아줄 수 있나.
참 어려운 질문이다. 책에 있는 노래들은 개인적인 경험이 묻어있어 다 좋아하는 곡이다. 예를 들면 ‘행진’은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20대 나를 위로하고 지탱한 곡이다. 시련을 견디며 환호하는 가사와 전인권의 목소리에 미치는 줄 알았다. (웃음) 내 마음을 뜨겁게 했던 곡이다.
또 다른 노래를 하나 선곡해준다면.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이다. ‘그대여 힘이 돼주오 / 그대여 길을 터주오’가 인상적이다. 존재적 불안을 겪는 자아가 그 내면에 사랑을 불러들인 순간을 표현한다. 존재와 사랑을 동시에 이야기하는 노래가 인상적이었다.
앞서 ‘힘을 실었다’는 정태춘의 ‘북한강에서’에 대해서도 설명해달라.
정태춘은 한국의 가장 문학적인 뮤지션이다. 언어적 재능도 출중하다. ‘시인의 마을’, ‘사망부가’ 등의 가사를 보라. 정태춘은 완벽한 시인이다. 이후 광장에 나온 투사의 길을 걸은 정태춘도 대단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미학적인 옷을 갖춰 입은 그 시절의 정태춘 노랫말에 더 끌린다.

이주엽 대표는 1988년부터 2002년까지 한국일보 기자로 재직하다 2002년부터 JNH 뮤직을 설립했다. 제작자로의 변신도 올해로 18년째다. 37년 만에 컴백한 정미조, 최백호의 < 다시 길 위에서 > 등 한국 가요의 오래된 이름을 다시 현재로 소환해냈고, 말로, 박주원, 로스 아미고스 등 재능 있는 재즈 아티스트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그는 기자의 삶을 포기하고 제작자의 삶을 택한 결정에 대해 “당시에는 주위 모든 사람들이 무모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음악 속에서 살고 일하고 싶었다. 지금은 행복하다. 큰 성공은 없었으나 참 잘 살아왔다. 후회는 없다”며 음악에 투신한 지난 삶을 회상했다.
대중가요 정서의 핵심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대체로 사랑과 이별이다. 다른 말로 ‘결핍’이다. 젊은 시절에 처음 마주하는 최대의 결핍이자 그 이후에도 지속하는 결핍이 사랑이다. 사랑 속의 절절한 결핍이 모든 예술적 동기가 아닌가. 사실 모든 노래는 사랑 이야기로 끝난다. 책을 쓸 때도 동어 반복에 빠진 이유가 이것이다. 사랑을 포함한 세 가지 주제로 파트를 나눴음에도 모든 곡에 사랑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JNH 뮤직 대표로서 책의 발간이 제작자의 존재감에 순기능한다고 생각하나?
이 책은 음악 마니아도 아니고 잘은 모르지만 더 알고 싶어서 남긴 책이다. 한마디로 ‘정신적인 알리바이’다. 책을 쓰면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를 돌아보게 됐다. 제작자의 입장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꿈꾸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좋은 방식으로 돈을 벌고 싶다. 책 속 노래들이 내 인생의 많은 것을 구성하고 있듯, 내가 만든 언어가 누군가의 삶에 자리 잡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최근 한국의 음악이 산업적 재화로서 가치가 크게 부각되고 있는데, 사실 음악이란 영혼의 재화 아니겠는가.

2002년 회사를 설립한 후 제작자로 18년이다.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찬사가 있다면.
평단에서는 후한 평가는 받았지만 찬사는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웃음). 기억에 남는 앨범이 있다며 37년 만에 컴백한 정미조의 앨범 < 37년 >이다. 앨범 발매 후 언젠가 아이유가 그 앨범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들었다. 이 음반이 젊은 아이돌 가수 삶의 한 부분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좋았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 중의 하나였다. 가장 근본적인 것이 새로운 것인 것처럼, ‘정미조 선생님만의 이야기’라는 근본적인 것을 담으면 모든 세대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잘 맞아떨어졌다.
정미조의 < 37년 > 외 음반 작업을 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이 있다면?
아무래도 첫 순간이다. 2003년 말로의 < 벚꽃지다 >를 처음 맡았는데 당시에는 모르는 것도 많았다. 예산 관리도 엉망이었지만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이 앨범으로 존재적 결단을 다짐했다. (웃음) 나이 39살에 새로운 삶을 사는 느낌이라 비장하기도 했다.
< 이 한 줄의 가사 >를 정리한 소감은.
‘한 권의 책이 나왔구나, 내가 저자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에 기뻤다. 나이 오십 인생의 선물이었다.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글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개인적 고백과 같은 글이다. 나의 정서적인 상태에 공감해주면 감사한 일이다. 노래들이 새로운 느낌으로 누군가에게 다가갈 수 있길 바란다. 책 속 노래를 잘 모르는 젊은 독자 여러분께도 이 노래들이 삶에 녹아든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모든 창작이나 예술은 원래 있던 것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 아닌가. 다시 말해, 예술은 새로운 발견이다. 이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인터뷰 : 임진모, 김도헌, 임선희
사진 : 김도헌
정리 : 임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