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특집 Feature

사카모토 류이치(1952-2023) 12 곡

지난 3월 28일, 일본 뮤지션 사카모토 류이치가 사망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경력을 시작한 그는 서구권에 큰 영향을 미친 신스팝 밴드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와 솔로 활동을 겸하며 전자음악의 총아로 떠올랐다. < 마지막 황제 >와 <전장의 크리스마스 >의 영화음악과 앰비언트/클래시컬 뮤직을 아우르는 다작에도 균형감과 질적 수준을 놓치지 않았고 온 장르를 포용하는 융화 미학을 펼쳐갔다.

아시아 음악가들에게 용기를 준 이 입지전적 인물은 < 남한산성 >과 < 안녕, 티라노: 영원히, 함께 >의 사운드트랙을 맡아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투병 중 12개의 음악 일기를 고른 유작 < 12 >(2023)처럼 시작과 끝을 가로지르는 열 두 트랙으로 사카모토 류이치의 작품 세계를 회고한다.

사카모토 류이치 -Thousand knives / Thousand Knives(1978)
프리 재즈 타악기 주자 츠지토리 토시유키, 시티팝 거목 야마시타 타츠로와 협업하며 경험을 쌓은 사카모토 류이치의 1979년 작 < Thousand Knives >는 데뷔작이 무색한 완성도다. 벨기에 시인 앙리 미쇼의 < 비참한 기적 >의 첫 구절에서 제목을 딴 이 음반은 중국 문화대혁명의 기류를 서구 대중음악 음향에 담은 동서양 융합의 시발점이었다. 앰비언트 뮤직의 방향성을 암시한 ‘Island of woods’와 1960년대 피아노 재즈의 영향을 드리운 ‘Grasshopper’, 아기자기한 편곡의 ‘Plastic bamboo’가 돋보인다.

도입부 마오쩌둥의 낭독으로 선언적 성격을 띠는 9분짜리 타이틀 곡 ‘Thousand knives’는 롤랜드 808의 비트와 동양적 멜로디로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를 예견하나, 날이 서 있고 야심 차다. 클래시컬 뮤직 전공자로서 자연스레 커진 곡의 부피를 선율 감각과 사운드 디자인으로 메웠다. ‘Thousand knives’는 신시사이저 팝과 아날로그 피아노 연주 양 진영에서 놀라운 성취를 거둔 음악가의 출사표였다.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 – Tong poo / Yellow Magic Orchestra(1978)
< 베이비 드라이버 >를 연출한 영화감독 에드가 라이트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1978년 ‘Behind the mask’의 실황 영상으로 사카모토 류이치를 추모했다. 라이트뿐만 아니라 수많은 서구의 예술가는 동양인 삼인조의 전자 음향 마법에 심취했다. 에릭 클랩튼과 마이클 잭슨이 ‘Behind the mask’의 리메이크로 이들의 영향력은 요약된다.

그들 경력의 정점으로 인식되는 2번째 정규 음반 < Solid State Survivor >(1979) 만큼이나 데뷔작 < Yellow Magic Orchestra >는 신선했다. 게임 음악의 키치함을 의도한 ‘Computer games’와 ‘Firecracker ‘ 모두 톡톡 튄다. 사카모토가 작곡한 ‘Tong poo’는 동풍(東風)이란 곡명처럼 중국 음악을 연상하게 하는 멜로디에 각종 전자음을 합성했다. 호소노 하루오미의 베이스 기타 덕에 일렉트로-디스코 분위기도 묻어난다.

사카모토 류이치 – Saru to yuki to gomi no kodomo / Left-Handed Dream(1981)
1981년은 또 하나의 기념비적 해였다. ‘Ballet’과 ‘Music plan’을 수록한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의 수작 < BGM > 발매 8개월 만에 세 번째 정규 음반 < Left-Handed Dream >을 내놓았다. 전작 < B-2 Unit >(1980)에 비해 대중 친화적인 < Left-Handed Dream >은 소리와 언어 측면에서 동서양 화합을 표면화했다.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의 드러머 다카하시 유키히로와 뉴웨이브 밴드 M의 로빈 스콧 등 친한 동료를 섭외했고 일본 전통 악기에 신시사이저를 합성했다.

원숭이와 내리는 눈, 버릇없는 아이란 뜻의 ‘Saru to yuki to gomi no kodomo’는 몽롱한 키보드 리프에 아트 록 밴드 비-밥 디럭스 출신 빌 넬슨과 < Scary Monsters (And Super Creeps) >(1980) 시절 데이비드 보위의 배킹 트랙을 얹은 듯 신묘하다. 익스페리멘탈 록과 신스팝의 교배 ‘The garden of poppies’와 킹 크림슨의 중기 걸작 < Discipline >(1981)의 기타 연주자 에이드리언 블루가 참여한 ‘Relache’ 도 앨범의 개성을 압축했다.

사카모토 류이치 & 데이비드 실비언 – Bamboo houses / Non-album single(1982)
영국 신스팝 밴드 재팬의 리더 데이비드 실비언은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적 동반자였다. ‘Merry christmas Mr. Lawrence’를 각색한 ‘Forbidden colours’와 1991년 작 < Heartbeat >의 ‘Heartbeat (tainai kaiki II) 등 삼십 년 넘도록 협업이 이어졌다. 사카모토 류이치가 편곡과 연주로 참여한 데이비드 실비언의 네 번째 솔로 앨범 < Secrets Of The Beehive >(1987)도 챔버 록 명작으로 공인되었다.

재팬의 네 번째 스튜디오 앨범 < Gentlemen Take Polaroids >(1980)의 마지막 트랙 ‘Taking islands in Africa’에 이어 두 사람의 두 번째 콜라보로 기록된 ‘Bamboo houses’는 영국 싱글 차트 30위로 상업적 성과도 거뒀다. 실비언 특유의 근미래 적 혹은 공상과학적 소리샘에 오리엔탈 선율을 가미한 이 곡은 펭귄 카페 오케스트라와 엑스티시(XTC)의 음반에 참여한 스티브 나이의 프로듀싱으로 완성도를 더했다.

사카모토 류이치 – Merry christmas Mr. Lawrence / Merry Christmas Mr. Lawrence(1983)
일본 영화의 혁명아 오시마 나기사와의 만남은 필연적이었다. 데이비드 보위와 사카모토 류이치, < 소나티네 >의 기타노 다케시가 출연한 영화 < 전장의 크리스마스 >는 나기사 특유의 파격적 소재에 유려한 영상미를 둘렀다. 사운드트랙을 맡은 사카모토 류이치는 메인 테마 ‘Merry Christmas Mr. Lawrence’로 제37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주제가상의 영광을 안았다. 나기사와 사카모토 류이치는 사무라이 시대 동성애를 다룬 1999년 작 < 고하토 >로 재회했다.

유리창에 은구슬 떨구듯 몽롱한 ‘Merry Christmas Mr. Lawrence’는 일본군 장교 요노이(사카모토 류이치)와 영국 육군 소령에서 포로 처지가 된 자크 세리아즈(데이비드 보위) 사이의 기류를 낭만화한다. 반복적 리듬과 주요부를 중심으로 밀도를 높여가는 방식은 모리스 라벨의 무용가 ‘볼레로’와 닮았다.

사카모토 류이치 – Rain (I want a divorce) / The Last Emperor(soundtrack)(1987)
‘Merry Christmas Mr. Lawrence’와 더불어 국내에 가장 친숙한 선율의 ‘Rain (I want a divorce)’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이탈리아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 마지막 황제 >에 삽입되었다. 마이클 더글러스 주연의 < 블랙 레인 > 속 ‘Laserman’부터 국내에서 인기를 끈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의 ‘M.a.y in the backyard’까지 영화음악가의 정체성도 이어온 사카모토는 토킹 헤즈의 프론트퍼슨 데이비드 번과 함께 < 마지막 황제 >의 음악감독을 맡았다.

1987년 제60회 아카데미 시상식 주제가상을 받은 < 마지막 황제 >의 ‘Main theme (the last emperor)’는 번의 몫이었으나 사카모토 류이치의 ‘Rain (I want divorce)’도 못지않은 잔상을 남겼다. 마지막 황제의 둘째 부인 문수(비비안 우)의 결단과 해방감을 고전 음악으로 풀어낸 이 곡은 현악기 특유의 비장미를 살렸다. 후에 부드러운 피아노 독주 버전도 사랑받았다.

사카모토 류이치 – Amore / Beauty(1989)
피터 가브리엘과 폴 사이먼처럼 사카모토 류이치의 관심도 월드 비트로 향했다. 이기 팝과의 듀엣 ‘Risky’를 수록한 1987년 작 < Neo Geo >에서 1차 월드 비트 실험을 감행했고, 1996년엔 카보베르데 출신 싱어송라이터 세자리아 에보라와 브라질 음악의 거두 카에타노 벨로조와 함께 무지카 포풀라 브라질레이라(브라질 대중음악)에 전자음을 더한 ‘E preciso perdoar(당신을 용서하겠어)’를 발매했다.

비치 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과 더 밴드의 로비 로버트슨, 캔터베리 신 아트록 밴드 소프트 머신의 로버트 와이어트 등 록계 거물들의 목소리를 담은 월드뮤직-신스팝 < Beauty >는 스페인 민속음악 플라멩코와 아트로비트로 다채롭다. “Good morning, good evening, where are you?(좋은 아침, 즐거운 저녁, 너는 어디에 있니?)” 의 간명한 언어에 라틴 뮤직과 일렉트로니카를 흩뿌린 ‘Amore’는 사카모토 류이치 식 퓨전의 하이라이트로 남았다.

사카모토 류이치 The sheltering sky theme / The Sheltering Sky(soundtrack)(1990)
사카모토 류이치는 ’21세기의 고전 음악 작곡가’란 칭호도 어울린다. 1983년 영화 < 스카페이스 >를 연출한 브라이언 드 팔마의 < 스네이크 아이즈 >(1998) 와 < 팜므 파탈 >(2002)에서 관현악 중심의 사운드트랙을 들려줬고, 중세음악을 구사하는 앙상블 단서리(Danceries)와 함께 < The End Of Asia >와 < Chanconette Tedesche >을 협업했다. 줄곧 바흐와 드뷔시를 언급한 그는 21세기 들어 관조적이고 세밀한 피아노 연주를 들려줬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와의 세 번째 협업인 < 마지막 사랑 >(1990) 속 ‘The sheltering sky’는 클래시컬 뮤직의 매력을 극대화했다. 선명한 현악 세션과 후렴구는 극 중 부부 포트(존 말코비치)와 키트(데브라 윙거)의 복잡미묘한 사랑 이야기를 청각화한다. 1990년 제48회 골든 글로브 최우수 음악상을 수상하며 영화음악가로서의 입지를 재확인했다.

사카모토 류이치 & 야마시타 요스케 & 빌 라스웰 – Chasin’ the air / Asian Games(1993)
일본 프리 재즈 피아니스트 요스케 야마시타와 자 워블, 아프리카 밤바타와 작업하며 레게의 분파 덥에서 일렉트로니카에 이르기까지 기묘한 경력을 쌓아온 빌 라스웰. 사카모토 류이치는 1993년 개성파 뮤지션 두 사람과 < Asian Games >를 합작했다. 믹 재거의 솔로 작 < She’s The Boss >(1985)에 참여했던 세네갈 출신 퍼커셔니스트 아이브 징이 아프로큐반 타악기 콩가를 연주했다.

1980년대를 걸쳤던 사카모토 류이치의 아프로비트 연구가 프리 재즈와 만나 더욱 불규칙적 형태를 빚었다. 아방가르드 재즈 ‘Asian games’와 허비 핸콕의 일렉트로를 오마주한 ‘Ninja drive’, 징이 퍼커션 울타리를 친 ‘Napping on the bamboo’ 등 퓨전 성향이 짙다. 사카모토 류이치가 요스케 야마시타와 공동 작곡한 ‘Chasin’ the air’는 긴박감 넘치는 퍼커션 공중에 어지러운 건반 연주를 흩뿌리며 앨범의 전위적 성격을 강조했다.

사카모토 류이치 – Psychedelic afternoon / Sweet Revenge(1994)
동시대성과 작품성의 공존은 말처럼 쉽지 않다. 대가들도 번번한 실패로 분루를 삼키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존 케이지, 존 루리가 참여한 실험작 < Heartbeat >(1991)로 90년대 문을 연 사카모토는 1995년 앨범 < Smoochy >로 질감은 다르나 후배 플리퍼스 기타나 피쉬만스같은 ‘젊고 감각적인’ 사운드를 구현했다. 시대 감응의 개가였다. 월드 비트와 다운 템포를 여유 있게 꾸려낸 1994년 작 < Sweet Revenge >는 카멜레온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음악성의 방증이다.

오랜 음악적 파트너이자 시티팝 명곡 ‘4am’의 오누키 타에코와 쟁글 팝 밴드 아즈텍 카메라의 로디 프레임 등 다채로운 음악가들이 힘을 보탰다. < 마지막 황제 > 사운드트랙에서 조우한 데이비드 번 작사의 ‘Psychedeic afternoon’는 보사노바 리듬에 리버풀 출신 신스팝 밴드 프랭키 고스 투 더 할리우드의 보컬 홀리 존슨을 담았다. “Psychedelic afternoon, let’s all sing a hippy tune(나른한 오후에 모두 함께 히피 노래 불러요)”라는 후렴구가 대중적이다.

사카모토 류이치- World citizen – I won’t be disappointed / Chasm(2004)
1990년대 중반 실내악 < 1996 >(1996)과 컨템퍼러리 계열 < BTTB >(1999), 앰비언트 성향의 < Comica >(2002)처럼 대중성과 먼 음반을 발표한 사카모토 류이치는, 2004년 1970년대 말 뉴욕의 전위적 음악 장르를 일컫는 노 웨이브의 대표적 밴드 DNA의 아르뚜 린지와 < Chasm >을 협업했다. 균열 혹은 수렁이란 뜻의 < Chasm >은 노이즈를 활용한 전자음악 글리치에 아날로그 피아노의 선율감을 덧대 거리감을 줄였다.

한국 래퍼 MC 스나이퍼와 함께한 대중적 넘버 ‘Undercooled’와 시종일관 긁어대는 글리치’Coro’ 앰비언트 ‘Chasm’ 가 하이브리드 정체성을 재확인했다. 2003년 EP < World Citizen >에 수록된 바 있는 ‘World citizen – I won’t be disappointed’는 미니멀한 일렉트로니카 텍스쳐에 수필 같은 데이비드 실비언의 읊조림과 피아노 연주를 곁들였다. 마리네티의 미래주의에서 착안한 1986년 작 < Futurista >의 차가움이 미래의 낙관으로 녹아내렸다.

사카모토 류이치 – Async / Async(2017)
2009년 작 < Out Of Noise > 이후 인후암으로 8년간의 공백기를 가진 사카모토 류이치는 19번째 정규 앨범 < Async >가 마지막 음반이 될 것임을 언급했다. 선물 같은 유작 < 12 >(2023)이 그 예견을 벗겨냈으나, 조화(Sync)의 강박에서 벗어나 소리와 음악을 향한 새로운 접근법을 도모한 < Async >은 음악 구도자의 초탈이다 . 피에르 셰페르의 뮤직 콩크레테(구체 음악)에 기원을 둔 필드 레코딩(자연음 혹은 인간의 음성을 현장녹음한 것)과 의도적 앰비언스가 병존했다.

거룩한 분위기의 ‘Andante’와 데이비드 실비언의 목소리를 담은 ‘Life, life’과 일본 전통 현악기 소리를 담은 ‘Honji’ 등 트랙마다 다른 구성을 취한 < Async >에서 흐름 혹은 일관성을 찾기 힘들다. 비동기라는 의미의 ‘Async’속 전위적이고 불친절한 사운드는 음악을 향한 새로운 세계관의 주제 의식을 반영했다.

이미지 작업: 백종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