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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유병열의 기타리스트 열전] Van Halen의 에디 밴 헤일런(Eddie Van Halen)

명성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창조했다.

현지 시각 2020년 10월 6일 밴드 밴 헤일런(Van Halen)의 기타리스트 에디 밴 헤일런이 향년 65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IZM은 기타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고인을 추모하며 과거 업로드 되었던 특집을 모바일 페이지로 공개하고자 합니다. 첫번째 글은 2010년 6월 기타리스트 유병열 씨가 IZM에 ‘유병열의 기타리스트 열전’ 코너에 기고한 ‘Van Halen의 에디 밴 헤일런(Eddie Van Halen)’입니다.

Eddie Van Halen Recalls '1984' Battles With Producer

에디 밴 헤일런(Eddie Van Halen)은 1980년대 초반 내가 막 일렉 기타에 막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서울 혜화동 로터리 소재의 < MTV >라는 음악카페에서 라이브 영상으로 처음 만났다. 당시 첫 느낌은 “어떻게 기타를 저렇게 칠 수가 있지?”라는 생각뿐이었다. 혀를 내두르게 하는 신기(神技)의 플레이였던 것이다.

1955년생인 에디 밴 헤일런은 친형인 드러머 알렉스(Alex) 밴 헤일런과 주축이 되어 밴드 명을 자신들의 성인 밴 헤일런으로 내걸고 본격적인 음악을 시작한다. 그는 네덜란드 출신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부모로부터 클래식 교육을 혹독하게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간 두 형제는 1972년 캘리포니아 주 파사데나에서 밴드를 조직해 동네 파티 등의 행사를 다니며 아마추어 클럽 밴드로서 10대 시절을 보낸다.

그러다가 1976년 우연하게도 할리우드 클럽의 공연을 본 전설의 밴드 키스(Kiss)의 진 시몬스(Gene Simmons)에게 발탁되어 데모 테이프를 만들게 되고 ‘워너 뮤직’에 의해 1978년 세상에 첫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당시 밴 헤일런의 등장은 음악계에 하나의 매머드 쇼크였고 유수의 록 평론가들은 에디 밴 헤일런을 ‘지미 헨드릭스 이후에 가장 혁신적인 기타리스트’로 평가했다. 나 개인적으로도 기타 연주 방법론의 혁신이라는 측면에서 역사에서 에디 밴 헤일런의 높이에 오를 자가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각종 기타 플레이어 부문상을 싹쓸이 하다시피 했다. 음악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여 1984년에 발표한 앨범 <1984>에 수록된 곡 ‘Jump’는 록 밴드로서는 드물게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오르는 흥행대박을 터뜨렸다. 이후에도 대중적인 성공 행진은 멈추질 않았다. 원년 멤버인 보컬 데이비드 리 로스(David Lee Roth)가 탈퇴하고 새로운 보컬 새미 헤이거(Sammy Hager)를 교체하는 진통 속에서 발표한 앨범 < 5150 >(1986년)도 엄청난 성공을 지속해 밴드의 상징인 보컬이 바뀌면 망한다는 징크스를 깨기도 했다. 팬들이 ‘밴 헤일런에 에디 밴 헤일런이 있으면 문제가 없다’고 간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실로 밴 헤일런에 없어서 안 될 핵 중의 핵인 인물로 새로운 기타 테크닉 시대를 열어준 인물이다. 그의 플레이는 온통 실험성으로 가득했고 기타로 낼 수 없는 소리에 도전했으며 결국을 그것을 일궈내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했다. 많은 기타지망생들을 미치게 한 그의 트레이드마크 플레이는 말할 것도 없이 라이트핸드 주법(피크를 쓰지 않고 양손 해머링, 플링을 이용한 속주 플레이)과 태핑(Tapping, 오른손으로 기타 플랫을 때려서 내는 옥타브 음)에 의한 하모닉스주법이다. 이것은 그냥 연주기법이 아니라 역사적 위업이라고 난 감히 단정하고자 한다.

Eddie Van Halen's 20 Greatest Solos - Rolling Stone

또한 당시엔 비브라토 성으로서만 사용된 트레몰로 아밍(Arming) 주법의 틀을 깬 그만의 아밍 주법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현재도 많은 기타리스트들은 하이테크닉 교본과도 같은 플레이로 그의 주법을 공부한다. 가히 기념비라고 할 데뷔 앨범의 연주곡 ‘Eruption’을 들어보면 라이트핸드 주법과 아밍 주법이 불을 뿜는다. 특히 후반부는 사람들을 몰아지경으로 이끄는 경이의 순간을 선사한다.

스케일은 펜타토닉(반음을 제외한 5개 음) 스케일과 반음을 이용한 블루 노트 스케일 그리고 도리안(3도와 7도가 플랫 된 음) 스케일 또한 즐겨 쓴다. (도리안 음계는 클래식적이면서도 영화음악 느낌의 선율이 가능해서 프로그레시브 스타일에 많이 쓰인다) 이것은 어쩌면 그가 네델란드라는 유럽 태생이라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러한 스케일의 활용도 중요하지만 결국엔 즉흥성과 독자적인 맛을 내기위해 불협화음적인 요소를 두려워하지 않고 아밍 주법에 의해 곡의 순차적인 뻔한 진행의 틀을 바꿔 놓기도 한다. 편곡 시 기타 리프(곡 반주의 굵은 뼈대)를 만드는 기술과 아이디어도 빼어나다는 점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당시 유행했던 메탈적인 파워코드 리프보다는 아르페지오 성 리프들과 누구나 들어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팝적인 리프들의 짜임새는 그가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발돋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두말할 것 없이 먼저 마이클 잭슨의 ‘Beat it’ 초반부를 들어보라.

Subt Rock on Twitter: "Happy Birthday Eddie Van Halen. #runningwiththedevil  #eruption #unchained #ainttalkinboutlove #atomicpunk #littledreamer  #andthecradlewillrock #beautifulgirls #panama #jump #hotforteacher  #vanhalen #evh #eddievanhalen #subtrock ...

리듬감 또한 훌륭해서 리프 연주 시 뿐만 아니라 솔로 연주할 때에도 엄청난 그루브 감이 살아있고 다이내믹함을 느낄 수 있다. 보통 당시의 록 기타리스트들은 마디에 충실한 스타일인 반면 에디의 스타일은 리듬을 끌고 가는 연주 즉 싱커페이션(전 마디 박자를 물고 들어가는)과 엇박(정박을 비껴나가는)에 의한 밀고 댕기는 듯한 거침없는 연주 또한 탁월하다.

기타 볼륨과 딜레이를 이용한 볼륨 주법 또한 획기적인 테크닉이었다. 왼손으로 지판을 때리고 오른손으로 볼륨을 올리면 어택이 늦게 따라 나오면서 마치 신디사이저 같은 소리가 만들어지는 이 테크닉 역시 기타리스트들의 혼을 뺐다. 기타 톤(소리) 또한 당시의 거칠고 헤비한 톤이 아닌 부드러우면서도 팝적인 톤으로, 기타 이펙터의 활용도 다채로운(다시 말해 이펙터를 넓게 사용할 줄 아는) 기타리스트이기도 하다.

그의 플레이는 마치 기타를 떡 주무르듯 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기타를 가지고 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지금은 보편화되었지만 당시로서는 엄두도 못 낼 엄청난 플레이였고 상기한 것처럼 마이클 잭슨의 ‘Beat it’에서의 명 리프와 기타솔로 하나만으로 팬들을 충격의 도가니에 빠지게 했다. 기타를 과격하게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곡에 충실한 해석력을 가진 멀티 플레이어로 신디사이저를 직접치기도하고 결국에는 밴 헤일런 스타일의 신디사이저 페턴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실제로 이후 팝계에선 밴 헤일런 스타일의 신디사이저 소리가 많이 쓰였다)

Rocker Eddie Van Halen, Battling Cancer, Celebrates Birthday with First  Posted Photo Since the Summer | SurvivorNet

아메리칸 하드록 밴드라고 정리하기엔 너무도 다양한 스타일을 구사하는 에디 밴 헤일런은 기타리스트로서 뿐만 아니라 뮤지션으로도 만능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2의 록 씬에 새로운 스타일의 지표를 열어준 기타리스트, 엄청나게 테크니컬 하지만 선율의 중요성을 살릴 줄 아는 기타리스트, 편안한 무대 의상에 스텝을 밞아가며 점프를 즐겨하고 늘 웃는 얼굴로 하이 테크닉을 편하게 연주하는 기타리스트가 에디 밴 헤일런이다.

암 투병을 하면서 힘겹기도 했었지만 그는 여전히 최고 록 기타연주자로 추앙받고 존경받는다. 나부터 존경의 염은 깊다. 적어도 지미 헨드릭스 이후 ‘기타연주의 혁신’이란 말은 누구도 아닌 오로지 그에게만 붙여야 할 수식 아닐까. 그는 그것으로 명성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창조했다.

헤비메탈로 춤을 추게 만든 밴 헤일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