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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김도헌의 실감, 절감, 공감] 얼룩진 오스카와 ‘축제의 여름’

나는 폭력을 쓰지 않고도 사람들을 즐겁게 하며 무례함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

3월 28일(한국 시각), 배우 윌 스미스가 무대로 올라가 사회를 보던 코미디언 크리스 록의 따귀를 때린 순간부터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시간은 멈췄다. 소셜 미디어 타임라인과 언론사 헤드라인이 이 초유의 사태에 깜짝 놀라 사건 경위를 초 단위로 분주히 업데이트하는 동안에 몇몇 사람들은 가장 유명한 영화계 시상식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크리스 록은 윌 스미스의 아내 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삭발한 머리를 두고 “< 지 아이 제인2 > 기대한다.”는 질 낮은 농담을 던졌다. 1997년 배우 데미 무어가 네이비 씰 양성 과정에 입교한 여군 대위의 이야기를 위해 삭발을 감행한 영화 < 지 아이 제인 >에 빗대 제이다의 외모를 조롱한 것이다. 제이다는 2018년부터 미국 흑인 여성의 절반 이상이 앓고 있는 자가면역질환, 원형 탈모증 증상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삭발한 상황이었다.

웃고 넘어갈 수 없는 발언이었다. 코미디라는 이름으로 오랜 시간 묵인되어 온 뿌리 깊은 여성 혐오의 결과였다. ‘조크를 가장한 언어폭력’이라는 주장에도 동의한다. 객석의 모두가 웃음을 터트리고, 심지어 윌 스미스도 웃고 있는 사이, 오직 제이다만의 얼굴만이 심각하게 굳었다. 이윽고 윌 스미스가 무대로 올라왔다. 그리고 크리스 록의 뺨을 때렸다. 아카데미 역사상 유례없는 폭행이 생중계됐다. 시상식이 열리던 돌비 극장의 모두가 사전 기획된 쇼와 돌발 상황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윌 스미스는 “내 아내의 이름을 네 입에 올리지 마”라며 큰 소리로 크리스 록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기억하는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이다. 월요일 아침 시상식 생중계를 지켜보던 나조차 이 기이한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크리스 록의 발언은 농담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불쾌한 모독이었다. 그렇다고 시상식에서 폭력을 행사한 윌 스미스의 행동도 멋지지 않았다. ‘맞을 짓 했네’라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이내 ‘맞을 짓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모욕에 폭력으로 응수하는 것만이 최선인가?’라는 의문에 휩싸였다. 내가 정신을 차린 순간은 크리스 록이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베스트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작을 발표할 때였다.

힙합 밴드 더 루츠의 드러머 퀘스트러브가 감독한 < 축제의 여름 (… 혹은 중계될 수 없는 혁명) >(이하 < 축제의 여름 >)은 1969년 6월 29일부터 8월 24일까지 뉴욕에서 개최된 ‘할렘 컬처 페스티벌’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다. 가수이자 진행자로 명성이 있었던 진행자 토니 로렌스가 뉴욕시와의 협조를 거쳐 할렘 중심부 마운트 모리스 공원에서 개최한 이 페스티벌은 30만 명 이상이 참가한 대규모 음악 축제였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의 결과로 흑인들은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을 통해 법적인 인종차별 폐지를 거머쥐었고 이듬해 투표권을 거머쥐었다. 비폭력 노선을 견지한 마틴 루터 킹 목사, 보다 급진적인 운동을 촉구한 사회운동가 맬콤 엑스라는 두 축을 통해 흑인들은 뿌리 깊은 인종차별에 저항했고 흑인으로의 정체성을 재확립하며 새로운 세상을 위한 혁명을 꿈꿨다. 그러나 1965년 맬콤 엑스에 이어 1968년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하자 흑인 커뮤니티는 좌절했다. 폭동이 벌어졌고 비폭력주의자와 폭력주의자 간의 간극이 벌어졌다.

< 축제의 여름 >은 고무된 흑인 사회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자랑스러운 축제였다. 팽팽한 긴장 상태에 놓인 1969년, 뒤숭숭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흑인 문화의 중심지 할렘에 구름 관중이 몰려들었다. 사회적 억압, 굴종, 고정관념을 벗어던지고 음악, 춤, 그리고 자유를 찾아 모여든 젊음의 현장이 펼쳐졌다. 기획자 토니 로렌스는 영리한 수완을 발휘해 후원사를 끌어모으고 흑표당원을 보안요원으로 고용하며 관중들과 아티스트들을 안심시켰다. 블랙 커뮤니티에 우호적이었던 당시 뉴욕 시장 존 린지까지 페스티벌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 결과로 스티비 원더, 피프스 디멘션, 비비 킹,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니나 시몬 등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들이 무대를 빛낼 수 있었다.

오해하지 말자. 이 페스티벌은 시대의 아픔을 춤과 음악으로 그저 망각하고자 했던 자리가 아니었다. 뮤지션들은 미국 전역의 블랙 장르가 교차하는 만남의 장소에서 각자의 선율과 박자, 노래와 연주를 통해 흑인 공동체의 정신을 하나로 묶고 연대를 촉구했다. 인종차별에 침묵하지 않았고 혐오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물병자리의 시대(Aquarius)’로 그려지는 꿈과 희망의 나라를 노래하고 ‘행복의 날(Oh Happy Day)’를 합창하며 신의 손길을 간절히 바랐다.

마틴 루터 킹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순간 그의 앞에 앉아있었던 제시 잭슨 목사의 찬양은 < 축제의 여름 > 속 결정적인 장면이다. 비극의 현장을 담담히 고백하며 장내를 숙연하게 만든 그는 이내 전설적인 가스펠 싱어 마할리아 잭슨과 메이비스 스테이플스의 찬양을 이끈다. 5분에 달하는 마할리아 잭슨의 ‘Precious lord’는 노래의 영역을 넘어선다. 폭력의 1960년대 말 생존 투쟁을 벌였던, 그저 한 명의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받고자 했던 모든 흑인 커뮤니티의 한숨과 응어리진 절규, 가슴속 깊은 한을 영혼으로부터 끌어올린 위대한 목소리다.

이 의미 깊은 순간을 5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페스티벌을 촬영한 할 털친(Hal Tulchin)은 40시간 이상의 기록물을 방송사에 넘기고자 했으나 사겠다는 회사는 단 한 곳도 없었다. 시대의 관심은 그 해 8월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쏠렸다. 우드스톡이 폭력과 마약, 엄청난 적자의 오명을 지우고 록 문화의 성경으로 모셔지는 동안 할렘 컬처 페스티벌은 오래도록 지하실 구석에 박혀 있었다. 2004년에야 골동품 필름이 발견됐지만 영화 제작이 결정되기까지 또 8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음악사의 위대한 순간이 어렵사리 빛을 보게 됐다.

안타깝게도 < 축제의 여름 >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치를 인정받는 그 순간마저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갔다. 크리스 록의 저열한 언어폭력과 윌 스미스의 물리적 폭력의 충격에 퀘스트러브의 감동적인 수상 소감의 의미를 조명하는 목소리는 묻히고 말았다. < 축제의 여름 >과 더불어 이 날 아카데미 시상식이 미국 내 블랙 커뮤니티에게 의미 있는 행사였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까운 결과였다. 덴젤 워싱턴이 사무엘 L. 잭슨에게 공로상을 수여했고,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의 주인공은 < 킹 리차드 >의 주연 윌 스미스였다.

결국 어떤 형태로든 그 자리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폭력이다. 스탠드업 코미디가 지향하는 표현의 자유와 날카로운 풍자라는 핑계 아래 약자를 조롱하고 모욕하며 날카로운 상처를 안기는 언어 폭력, ‘사랑은 미친 짓을 하게 만든다’는 해로운 기사도 아래 행사한 물리적 폭력이 모두 포함된다. 윌 스미스의 폭력이 부적절했던 이유는 크리스 록의 끔찍한 언행을 전세계가 지켜보는 시상식에서 공론화하고, 더는 이런 것을 코미디라 납득할 수 없다고 각인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순간의 폭행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더 프렌치 히스토리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역사학자 개리 지로드가 남긴 트윗을 읽어보자.

“크리스 록의 뺨을 때리는 대신 윌 스미스가 이런 수상 소감을 했다고 상상해보세요 : ‘제 아내는 자가면역질환을 앓고 있고 이로 인해 머리카락이 빠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 아내는 아름답고, 강하고, 멋진 사람입니다. 저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크리스,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웃음거리로 삼는 건 웃기지도 않고 옳은 일도 아닙니다.”

내가 크리스 록과 윌 스미스의 행동에 대해 두고 한 말 중 후회되는 건 ‘맞을 짓’이라는 표현이다. 윌 스미스의 폭행을 비판했던 나조차도 폭력을 저지를 만한 언행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무심코 내뱉었다는 게 부끄러웠다. 하지만 ‘맞을 만했으니 맞았다’, ‘가족을 건드렸는데 따귀로는 부족했다’, ‘혐오 발언을 막는 데 효과적인 행동이었다’ 등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폭력을 반대하는 내 입장이 세상을 모르는 인간의 속 편한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나도 사이다 서사에 통쾌함을 느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보복을 꿈꿔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건 당연한 감정이 아니다. 누군가의 질병을 코미디 소재로 삼아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응수 방법이 따귀를 때리는 것이어서도 안된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맞을 짓’의 긍정은 폭력을 행사하는 이에게 위험한 권력을 쥐여 준다. 강자의 논리에 의해 결정되는 폭력은 누구에게나 향할 수 있다. 여성과 사회적 약자를 향해서도 ‘맞을 짓’이라는 논리를 앞세울 수 있게 된다. 강자가 힘을 앞세우는 가운데 피해자와 약자는 주체에서 객체로 격하된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가 아슬아슬한 스탠드업 코미디 중 분명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가 되었을 말을 ‘해도 되는 말’로 웃어 넘겼던 것과 마찬가지다.

예술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고 투쟁했던 시기의 기록물 < 축제의 여름 >과 오스카 시상식은 우리의 내면 속 익숙해진 폭력의 논리로 얼룩지고 말았다. 누가 옳고 그른지를 다투고, 어떤 이의 폭력이 더 중한지를 저울에 매달기 전에, 지금으로부터 50년이 훨씬 넘은 숭고한 역사를 복원한 < 축제의 여름 >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곱씹어 봐야 한다. 나는 폭력을 쓰지 않고도 사람들을 즐겁게 하며 무례함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