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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보위를 추억하다 Vol. 1

이즘 에디터들에게 순간으로 남은 데이비드 보위의 열다섯 곡으로 리스트를 꾸렸다. 조금은 개인적인 필자들의 소회를 담은 특집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보위는 늘 순간을 만들어냈다. 쉴 새 없이 다채롭게 변신을 했고 수많은 명곡들과 명작들을 낳았다. 아티스트의 시선이 머무른, 손길이 닿은, 발걸음이 지나간 시공간은 모두 로큰롤 실록의 중요한 페이지가 되어 결국엔 모먼트의 자격을 획득했다. 비단 팝 역사서에서만 이었으랴. 사람들의 머릿속에다가도 데이비드 보위는 매번 인상적인 획들을 그었다. 천재가 남긴 아름다움들은 인상이 되고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되어 오랫동안 팬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이즘 에디터들에게 순간으로 남은 데이비드 보위의 열다섯 곡으로 리스트를 꾸렸다. 조금은 개인적인 필자들의 소회를 담은 특집이기도 하다.

Space oddity (1969)

영화계에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가 있다면, 음악계에는 < Space Oddity >가 있었다. 인류는 우주 시대가 열리기도 전에 ‘톰 소령’의 손에 이끌려 신비로운 우주의 공허함과 모종의 공포를 맛봤다. 세대를 초월해 우주 마니아들을 응집, 열광시키며 많은 영감의 원천이 된 불멸의 클래식은 급기야 2013년 실제 우주비행사에 의해 우주에서 울려 퍼지며 그 생명력을 입증했다.

몇 해 전, “우주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다.”라고 말하던 친구가 있었다. 별을 사랑해 우주여행을 꿈꾸던 그가 ‘Space oddity’에 이끌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멋진 커버 영상을 찾으면 감상을 공유하며 그 시절 보위의 상상력과 천재성에 함께 감탄하곤 했다. 며칠 전 ‘톰 소령’이 영영 우주로 돌아가버렸다는 소식에 문득 그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분명 그 또한 무척이나 슬퍼했을 테다. (정민재)

The man who sold the world (1970)

‘도대체 데이비드 보위가 누구야?’

90년대 얼터너티브 록에 심취되어 있었던 고등학생 때의 나는 너바나가 커버한 ‘The man who sold the world’를 듣고 난관에 봉착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적만 있었던 그 이름. ‘That was a David Bowie song’. 아무것도 모르던 나에게 처음으로 데이비드 보위를 소개해 준 것은 커트 코베인이었다. 호기심이 가득했던 나는 데이비드 보위의 < The Man Who Sold The World > 앨범을 사러 음반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두 번째 난관이 찾아왔다. 앨범 커버엔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분할 수 없는 긴 머리의 사람이 여성 드레스를 입고 S라인을 뽐내며 요염하게 누워있었기 때문이다. 당황스러웠다. 거장의 근엄함 따윈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여장을 한 일개 개그맨처럼 저렴해 보였다. ‘이것이 커트 코베인이 커버한, 그 데이비드 보위가 맞나?’ 앨범의 여기저기를 살펴보던 나는 커버에 ‘데이비드 보위’라고 크게 박혀있는 것을 확인하고 앨범을 제자리에 둔 다음 집으로 향했다. 나와 데이비드 보위의 잊을 수 없는 첫 만남은 이러했다. (이택용)

Life on Mars? (1971)

1960년대 말, 인류는 달 착륙에 성공했고 세상의 화두는 지구 밖의 어딘가로 초점을 모았다. 우주 시대의 열기가 정점에 달한 그 시절, 그리고 데이비드 보위의 우주 공상도 구체화돼 여러 노래로 우리 앞에 등장했다. 내 데이비드 보위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 노랫말을 쓰고 멜로디를 붙여 만든 아티스트의 곡들로부터 시작됐다. 아폴로 11호와 함께 우주선을 쏘아올린 ‘Space oddity’에서 출발해 이어지는 ‘Life on Mars?’, 급기야 자기 스스로 외계인이 돼버렸던 지기 앨범에서의 ‘Starman’, ‘Ziggy Stardust’와 같은 넘버들이 어렸을 적의 내 CD 플레이어와 MP3 플레이어를 차지했다.

‘Life on Mars’를 들으며 느꼈던 기묘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득하게 울려 퍼지는 릭 웨이크만의 피아노, 풍성한 사운드로 곡을 뒷받침하는 스트링, 절제미가 엿보이는 믹 론슨의 기타 솔로, 드라마틱한 보컬 퍼포먼스로 좀처럼 알 수 없는 가사를 내뱉는 데이비드 보위의 가창, 이 모든 파트들에 서려있는 서정적인 멜로디. 이들이 주는 신비감에 사로잡혀 아티스트와 함께 ‘Is there life on Mars?’를 읊조리고, 우주를 상상하고, 그 후 지기 스타더스트까지 따르게 되었던 것 같다. (이수호)

Ziggy stardust (1972)

‘지기 스타더스트’라는 가상 인물을 담은 이 노래로, 데이비드 보위는 글램 록의 아이콘이 된다. 징글 거리는 기타 연주와 보컬은 기묘하면서도 매혹적이다. 전성기의 그를 동경하고 즐겨들었던 이들에겐 대표곡으로 거론된다.

이 곡은 내가 보위를 처음 접했던, 그 첫인상을 온전히 담고 있어 각별하다. 많은 사람들 역시 독특한 의상과 오렌지색 머리, 진한 화장으로 그를 기억한다. 데이비드 보위는 독보적인 스타일을 가진 뮤지션이자 퍼포머였다. 음악뿐만 아니라 비주얼까지 확장시켰고 지금의 음악과 패션, 예술계 곳곳에 영향이 묻어있다. 화려하게 반짝였던 그를 추억한다. (정유나)

Aladdin Sane (1973)

우리 인생은 짧고, 비참하다. 그리고 그다음은 죽는 것뿐이다.
– 영화 < 트레인스포팅(Trainspotting) >(대니 보일, 1996) 중에서

미니멀리즘과 무질서가 공존하는 곳. 날것의 애정으로 메우는 소음의 방. 혼란스러운 순간에 듣는 ‘Aladdin Sane‘은 더할 나위 없이 찬란하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듯, 고통을 고통으로써 갚아나가는 것이다. 위로가 된다. 놀랍게도.

이 곡의 백미는 역시 마이크 가슨의 전위적인 피아노 연주다. 원테이크로 녹음한 만큼 우연성과 직관이 만들어낸 순간의 폭발적인 음향이 담겨 있다. 동시대에 발표된 딥 퍼플의 ‘Highway star’와는 또 다른 의미의 짜릿한 플레이다.

한때 스스로를 괴롭히던 아이가 공감이라는 코드로 사랑했던 곡이다. 라자루스가 된 포도나무께 경배를. (홍은솔)

Rebel rebel (1974)

단숨에 귀에 감기는 기타 리프와 멜로디, 어딘지 모르게 반항적인 분위기까지. 라디오에서 처음 접했던 데이비드 보위는 내게 ‘지기 스타더스트’이기 전에 ‘핼러윈 잭’이었다. 뜻도 모르면서 신나게 ‘레블 레블’을 흥얼거렸다. 비록 형인 듯 누나인 듯 화려한 모습에 적잖이 놀랐지만, 금세 그의 음악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보위의 힘은 이 지점에 있었다. 페르소나와 콘셉트가 어떠하든, 완성도 높은 음악만으로도 강한 파괴력을 발휘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그의 부고 이후 가장 많이 들은 곡도 ‘Rebel rebel’이었다. 이 곡으로 보위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이 노래로 그를 잃은 슬픔을 달랬다. 마돈나에게 선수를 뺏겼지만, 나 역시 이 노래의 가사를 인용하며 그에게 감사와 작별을 전하고 싶다. “Hot tramp, I love you so!” (정민재)

Fame (With John Lennon, 1975)

어려웠다. 그의 이름을 알게 된 1975년, 당시 고교 1학년생으로서는 재래식 멜로디 패턴의 일반 팝송과는 확연히 다른 이 거무튀튀하고 까칠한 곡을 쉬 당긴다는 것은 무리였다. 신고식은 호됐다. 이후 3-4년이 더 지나 청각의 확산을 기할 때까지 데이비드 보위는 솔직히 ‘가끔씩’ ‘허세를 보충해야 할’ 순간에나 듣는 ‘장롱’ 음악이었다. 게다가 이런 변칙적이고 변태적인 음악이 빌보드 차트(그에게는 첫) 1위에 올랐다는 정보에 더욱 이리저리 심란했다 (난 수준이 낮다!!)

많은 세월이 지나서야 그의 음악세계에 가까스로 진입했다. 대중적 친화력은 몰라도 매혹의 측면에서는 압권이었다. 그 무렵 매니지먼트 문제로 심적으로 매우 불편한 환경에서 이런 결과물을 냈다는 것도 놀랍다. 이 곡을 넘버원으로 등극시켜준 본고장 음악 인구가 마침내 이해되었다. 녹음실에서 만나 친교를 맺었다는 존 레논은 후반 코러스에서 존재감이 나타나지만 전적으로 보위 재능의 산물이다. 이 곡 이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난 무조건 보위를 ‘천재’로 부른다. (임진모)

Golden years (1976)

라디오에서 간혹 접하다가 처음으로 돈 내고 구입한 보위의 앨범(백판)은 베스트 앨범인 < Changes’one’bowie >였고 그해 좀 더 일찍 나온 그의 통산 10집 < Station To Station >이었다. 아마 고2 때인 1976년 11월 혹은 12월이었을 것이다. 실은 어쩌다 들은 ‘Golden years’ 때문이었는데 나와 맞든 안 맞든 무조건 앨범을 사야 한다는 게 그때의 심정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보위가 파고든 소울과 펑크(Funk) 노선에 닿아있지만 이후 독일 전자음악의 영향 아래 신시사이저 기반의 음악으로 달려가기 때문에 이런 풍은 거의 마지막이라는 점에서 기념비적이다. 기존 록 라인업에 콩가와 퍼커션을 이용한 리듬워크를 강조하고 음산하면서도 독창적인 코러스에다 살짝 휘파람까지 입히는 장난과 재치는 역시 비범하다. 아프로(afro) 비트가 물씬한데도 어찌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즉 외계적인 느낌이 드는 걸까. 그게 개성일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가혹한 개성! (임진모)

Be my wife (1977)

데이비드 보위는 늘 갑작스럽게, 그리고 회전각 크게 변화를 감행했다. 급격한 아티스트의 변신은 당대의 대중들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디스코그래피를 따라 (뒷북으로) 정주행하던 내게도 적잖은 충격을 줬다. 베를린 3부작이라 칭하는 < Low >와 < “Heroes” >, < Lodger >에서의 크라우트록 사운드도 내게 충격을 선사한 또 하나의 지점이었다. < Young Americans >, < Station To Station >에서의 소울, 펑크(funk)가 준 낯섦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리고 글램 록의 화신이자 화성에서 온 록 스타 버전의 데이비드 보위에 더 익숙한 상태에서 그 지점에 손을 뻗어 아티스트의 큰 변이를 느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데이비드 보위는 결코 사람을 밀어내는 실험을 하지 않았다. 독특하게 사운드를 바꿔오면서도 대중을 자기편으로 만들었고 변혁을 결국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완급을 조절해가며 다채로운 컬러를 주조해내 위화감과 친숙함을 동시에 자아내는 멋진 실험가의 면모를 아티스트는 매번 보였다. < Low >에 같이 수록된 ‘Speed of life’나 ‘Warszawa’, ‘Art decade’, ‘Weeping wall’ 등에 비해 ‘Be my wife’는 보다 쉽고 대중적인 싱글이다. 멜로디의 형태가 분명하고 그루비한 베이스 라인이 캐치하며 음반 전반에 녹아있는 노이! 식의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덜하다. 앨범의 맥락을 고려해보면 ‘Be my wife’는 조금 튀는 곡이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베를린 3부작에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이수호)

“Heroes” (1977)

매일 샤워를 할 때마다 음악을 틀어 놓아야 하는 이상한 강박이 있다. 음악이 없는 불완전한 샤워는 왠지 중요 부위가 덜 씻긴 듯한 찝찝함으로 끝나버리기 일쑤였다. ‘샤워 송’에도 조건이 있었다. 길어야 하고, 시원시원한 사운드에, 멜로디는 따라 부르기 쉬워야 한다. 이러한 까다로운 조건을 거쳐 선정된 샤워 송 플레이리스트의 처음은 항상 ‘”Heroes”‘이었다. 위의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완벽한 샤워 송이다. 특히 피치가 높아지는 중반부, 스트레이트하게 내지르는 ‘I, I will be king’은 항상 따라 외쳐야 속이 시원했다. 아마 우리 집 화장실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이 아닐까.

지금부터 내가 어디로 갈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루하진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데이비드 보위는 10분 남짓한, 그 짧은 시간에도 날 즐겁게 했다. (이택용)

Under pressure (With Queen, 1981)

데이비드 보위는 모를 수 있더라도 TV나 라디오에서 원곡이든 CM송이든 가리지 않고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들어보지 않은 한국인은 없을 테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베이스라인이 흘러나올 때부터 심장은 자연스레 그 주파수에 공명한다. 이후 위대함이라는 미사여구조차 수식하기 힘든 거장 듀오는 억압 하에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랑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줄 순 없을까?’라는 분명한 메시지로 치열한 삶 속에 자의식을 환기시켜주었다.

치열한 경쟁에 사교육으로 점철되는 대한민국 교육제도에 울분을 토하던 ‘수레바퀴 아래서’ 해방구는 음악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처음으로 가사를 통째로 외웠으며 아직도 종이와 펜이 있으면 습관처럼 적어 내려가는 팝송. 그들의 인생은 짧았지만 예술은 영원할 것임을 믿는다. (이기찬)

Let’s dance (1983)

우리나라에서 가장 알려진 곡이라면 고민 없이 이 곡을 꼽을 수 있다. 디스코 열풍이 가득했던 1983년, 마이클 잭슨의 ‘Beat it’을 밀어내고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른 곡이다. 시크(CHIC)의 리더 나일 로저스(Nile Rodgers)가 공동으로 프로듀서를 맡았고, 스티비 레이 본(Stevie Ray Vaughan)이 기타 솔로를 녹음했다. 끊임없이 변신을 원했던 그는 동시대의 트렌드를 받아들여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했고, 대중들은 이를 열렬히 환영했다.

어딘가 도시적이고 향락적인 노래에 비해 뮤직비디오의 메시지는 경건하다. 호주를 배경으로 원주민 남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자연과 도시를 대비시키며 타락한 자본주의를 경고한다. 짜인 군무가 아니라 자유롭게 음악에 몸을 맡기는 사람들, 아찔한 절벽 위에서 춤추는 남녀의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결국 그가 추자고 했던 ‘춤’은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유혹의 몸짓도 과시의 수단도 아니었다. 즐거움의 발현이자 행복을 위해 버둥거리는 아름다운 몸부림! “Let’s dance, for fear tonight is all” (춤을 추자, 오늘 밤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김반야)

Dancing in the street (With Mick Jagger, 1985)

‘틈’이 느껴지는 일탈의 곡이다. 멋지고 신비롭게만 보이는 그가 이 노래에 맞춰서 아이처럼 계단에서 뛰어내리고 경박하게 몸을 흔든다. 한때 염문설(?!)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믹 재거(Mick Jagger)와 장난꾸러기같이 해맑은 표정으로 춤을 춘다. 취지 또한 하나의 이벤트로 시작됐다. 1985년 ‘Live Aid’ 자선 콘서트를 위해 마사 앤 더 반델라스 (Martha & The Vandellas)의 곡을 리메이크해서 내놓았다.

이 노래는 미국 흑인들 사이에는 인권 운동가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두 로커는 이를 에티오피아 난민의 기아 문제를 위해 힘을 보태기 위해 불렀다. 특히 뮤직비디오가 흥미롭다. 뭔가 어설프고 재밌다. 노래도 스텝이 착착 맞기보다는 흥에 겨워 목청을 돋워 내지르고 춤도 나오는 대로 막 흐느적거린다. 그 모습이 얼마나 신나고 즐거운지 지켜보는 사람도 낄낄대며 웃게 만든다. 그에 대한 기억을 넘기며 가장 인간적이고 즐거워보였던 순간. 그 감정과 숨결이 담겨 있다. (김반야)

Little wonder (1997)

1990년대 데이비드 보위를 대표하는 < Earthling > 속 1번 트랙 ‘Little wonder’다. 독특하게도 이 곡을 드럼 앤 베이스라는 장르를 공부하다 접했다. 브레이크 비트가 달리며 만들어내는 긴박함은 으스스한 뮤직비디오와 감상하면 더욱 강렬히 느낄 수 있다. 당시는 유행을 쫓는다는 이유로 좋은 평을 받지 못했지만, 글램 록 외의 다양한 영역으로 자신을 알록달록 덧입혔기에 지금 더 특별하게 기억된다.

노래와 함께, 유니언 잭 코트를 멋지게 소화해낸 보위의 앨범 표지도 찾아보시길. 개인적으로 꼽는 그의 베스트 패션 중 하나다. (정유나)

Thursday’s child (1999)

한 남자가 거울을 바라본다. 꿈과 현실은 겹쳐지고 이어 펼쳐지는 상상의 나래. 지쳐가는 중년은 바스러지어 찬란했던 그 시절로 돌아왔고 일생의 동반자는 그 옛날 피앙세로서 곁에 서있다. 하지만 이는 단지 호접몽에 지나지 않을 뿐. 결국 우리가 살아갈 곳은 현실이며 의지할 사람은 당신 바로 옆 그 사람일 테다.

데이비드 보위의 디스코그래피 중 가장 아끼는 곡. 나 역시 영국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는 ‘슬픈 숙명을 타고난 목요일의 아이’로 태어났기에 동질감을 느꼈다. 과거를 놓아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단 한 가지 이유는 바로 구태의연한 일상을 견디게 해주는 당신이지 싶다. 그 당신이 누군지, 이미 떠나버린 건 아닌지 이제는 알 수 없더라도. (이기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