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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이브 마이 카 >에서 < 자산어보 >까지… 2021년의 영화 베스트 10(2편)

2021년의 흥미로운 영화들을 소개한다.

삼십 수년간 영화 관련 글을 써오며 지금껏, 한해의 베스트 영화 10편을 뽑는 데 이번처럼 공을 들인 적은 없다. 몇 개월에 걸쳐 이 작업을 계속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 영화 (제작) 100주년이었던 2019년 ‘한국 영화 100선’을, 다음 해 ‘세계 영화 100선’을 선정했을 때 못잖다. 그만큼 2021년에 국내에서 선보인 일련의 영화들, 특히 외국영화들에 실린 무게감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애초에는 가볍게, 한 번에 다 소개하려던 10편의 영화들을 두 차례, 나아가 세 차례로 나눠 제시하는 것은 그래서다.

3위.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리들리 스콧 

리들리 스콧이 왜 거장인지를 새삼 증거하는 ‘압도적 역작’이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들만 아니라면 별다른 주저 없이 2021년의 베스트 1로 선정했을 터. 실은 막판까지 정상 자리를 놓고 고심에 고심했음을 고백한다. <해피 아워>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드라이브 마이 카> 아닌 이 걸작을 1위로 선택했으나, <해피 아워>를 보고 나니 <드라이브 마이 카>가 한층 더 유의미하고 매혹적으로 다가서 끝내 그 순위를 바꿨다.

<라스트 듀얼>은 100년 전쟁 중인 14세기 후반의 프랑스를 무대로, 유서 깊은 카루주 가문의 장군‧기사 장 드 카루즈(맷 데이먼 분)와 그의 친구이자 라이벌 자크 르그리(아담 드라이버), 그리고 장의 아내 마르그리트(조디 코모), 세 중심인물을 축으로 펼쳐지는 휴먼 역사 대작이다. 일찍이 이 지면의 리뷰에서도 밝혔듯, 인물들의 성격화(Characterization)부터 주‧조연 배우들의 열연, 특히 전체적 ‘톤 앤드 매너’에서 다분히 마초적으로 비치는 영화를 주목할 만한 여성 영화로 비상시키는 조디 코모의 치명적 매력(Fatal Attraction), 장과 자크의 한판 승부를 그리는, 마지막 20분간의 숨 막히는 화룡점정적 결투 시퀀스, 그리고 동일한 사건을 세 주인공의 시선에 의해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비주류적 화법으로 예상치 못한 몰입감을 선사하는 플롯 등, 영화의 전 층위에서 최상의 경지를 뽐낸다. 오슨 웰즈의 <시민 케인>(1941)이나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1950) 등 세계 영화사의 대표적 걸작들의 비통속적 탈-할리우드 내러티브와 친숙한 주류 영화적 스타일로 세계영화의 지형도를 새로 그렸다, 는 것이 내 총평이다.

4위. 퍼스트 카우, 켈리 라이카트(Kelly Reichardt)

<초원의 강>(1994), <웬디와 루시>(2008), <믹의 지름길>(2010) 등을 통해 미국 독립영화를 대표하는 여성 감독으로 부상한 켈리 라이카트가 빚어낸 문제적 걸작이다. 1820년대 서부 개척 시대의 미국 오리건주, 사냥꾼들의 식량을 담당하는 백인과 도망자 신세였던 중국인 이민자 두 남자를 축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너무나도 아름다운 성찰과 감동의 휴먼 드라마다. 인종의 차이에도 아랑곳없이 서서히 형성돼 지속하다 죽음에 직면해서도 배신하지 않는 두 주인공의 변치 않는 우정을 지켜보는 맛이, 여간 강렬한 게 아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새에겐 새집이, 거미에겐 거미집이, 인간에겐 우정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절이 등장하는데, 우정의 최상급 극적 형상화로 손색없다. 여느 서부극의 총격전 대신 요리를, 총 아닌 빵을 선택한 감독의 방향‧지향성에서 영화는 서부극을 완전히 해체시킨 셈인바, 그 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걸작 웨스턴 ‘<용서받지 못한 자>(1992) 그 이후’로 일컬어질 만하다. 수시로 편협하기도 하고, 자국 영화를 향한 애정에서는 종종 맹목적으로 치닫기도 하는, 프랑스 유명 영화 월간지 《카이에 뒤 시네마》는 이 역작을 2021년의 ‘톱 텐 영화상’(Top 10 Film Award) 정상에 등극시켰다. 레오스 카락스의 <아네트>(2위)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3위), <드라이브 마이 카>(4위) 등 쟁쟁한 경쟁작들을 뒤고 하고….

5위. 티탄, 쥘리아 뒤쿠르노  

2021년 제74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화제의 논쟁작이다.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뇌에 티타늄을 심고 살아가던 한 여성(아가트 루셀 분)이 기이한 욕망에 사로잡혀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어느 날 10년 전 실종된 아들을 찾던 아버지(뱅상 랭동)와 조우하게 되면서는 그들 관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공포성 휴먼 스릴러다. 극적 설정도 그렇거니와 시청각적 묘사에서도 더 이상 자극적일 수 없을 정도로 자극적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전혀 선정적이지 않으며 묘한 페이소스까지 안겨주는데, 다름 아닌 그 미덕이 칸 심사위원들을 움직였지 않았을까 싶다.

일찍이 다른 지면에서도 말했듯, 국내 선두 OTT 업체인 왓챠에서 볼 수 있는 영화는 <드라이브 마이 카>, <아네트>와 함께 지난해 26회 부산국제영화제 최고 인기작 중 하나였다. 일반 관객 표는 일찌감치 매진됐고, 하루 전 구할 수 있는 프레스 및 게스트 표 또한 작심하고 발권 30분 전인 오전 7시부터 대기 줄에 서 기다린 뒤 신청했건만, 허탕을 칠 정도였다. 부산영화제 프로그램 노트를 빌려보자. “호러, SF, 스릴러, 범상치 않은 러브스토리…<티탄>은 분명 유례없는 영화다. 시나리오보다 더 놀라운 점은 강철과 피, 그리고 불꽃의 오페라라고 해야 마땅한 쥘리아 뒤쿠르노의 유니크한 영상 스타일이다. ‘괴물성은 규범이라는 벽을 밀어내는 무기이자 힘이다. 괴물들을 받아들여 준 심사위원들에게 감사한다.’ 영화만큼이나 인상적인 (중략) 수상 소감이다. 이 다재다능한 젊은 여성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다소 아카데믹한 프랑스 영화의 관습을 송두리째 흔들 것이다.”

<티탄>의 쾌거가 과연 “프랑스 영화의 관습을 프랑스 영화의 관습을 송두리째 흔들 것”인지 여부는 지켜봐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칸 역사상 가장 파격적이라고 평할 수 있을 그 선택이 단발성으로 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국제영화제 최고상을 안았건만 영화는 오는 27일(일) 열릴 94회 아카데미상에서 5편의 국제장편영화상(옛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조차 들지 못했다. 비용의 영화인 봉준호의 <기생충>에 국제장편영화상을 포함해 영예의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까지 4관왕을 몰아준 아카데미가 예의 보수성으로 회귀한 것일까?

1983년생인 감독 쥘리아 뒤쿠르노는 프랑스 국립영화학교 출신의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로, 단편 <주니어>가 2011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선정되며 큰 눈길을 끌었다. 가족 모두가 채식주의자인 주인공이 식인 욕망으로 치닫는 드라마를 극화한 충격의 장편 데뷔작 <로우>(2016)로 2016 칸 비평가주간에 초청돼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상을 받으며, ‘무서운 신예’로 떠올랐다. 뒤쿠르노 감독은 1993년 제인 캠피온이 <피아노>로 첸 카이거의 <패왕별희>와 공동 수상한 이후 사상 두 번째로 칸을 정복한 두 번째 여성 감독이 됐다. 단독으로는 최초다.

6위. 파워 오브 도그, 제인 캠피온

<피아노>(1993)만으로도 세계 영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여걸 제인 캠피온이, 2009년 〈브라이트 스타〉 이후 12년 만에 선보인 화제의 수작이다. 영화는 1925년 광활한 미국의 몬태나 초원을 무대로 펼쳐지는, 로맨스 곁들인 미스터리물이자 서부극이다. 거대한 목장을 운영하는 필(베네딕트 컴버배치)은 막대한 재력은 물론 위압적이고 묘한 매력으로 사람들에게 공포와 경외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어느 날 그의 동생 조지(제시 플레먼스)가 로즈(커스틴 던스트)와 그의 아들 피터(코디 스밋-맥피)를 가족으로 맞이하고, 동생의 갑작스러운 결혼 소식에 분노한 필은 로즈의 아들을 볼모로 삼아 그녀를 옭아매기 시작한다. 자신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영화는 ‘마마보이’임이 분명한 주인공 소년의 흔치 않은 성장담이자 엄마를 위한 복수극으로도, 동성애적 성향을 지닌 주인공 필의 성장담으로도, 남편 없이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야만 하는, 기구한 처지의 여인의 생존담으로도, 돈 때문에 자신과 결혼을 한 여자를 향한 조지의 순애보로도 읽힐 수 있다. 영화는 그만큼 해석에 열려 있으며, 그네들은 우리네 인생의 축약도적 캐릭터들일 수도 있다. 연기들이 매혹적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 없을 테다. 네 중심인물이 죄다 올 아카데미상 연기상 후보에 올랐다. 어인 일인지 던스트는 여우 조연상에 올랐으며, 제시와 코디는 공동으로 남우조연상 후보에 지명됐다.

<파워 오브 도그>는 (3월 21 기준으로)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감독상과 올해 골든글로브 드라마 부문 작품상과 영화 부문 감독상 등을 포함해 249개 상을 차지했으며, 오스카상 11개 부문 12개 등 무려 313개 상에 노미네이션돼 있다. <기생충>엔 다소 못 미쳐도, 그 못잖은 놀라운 성취다. 2022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최대 관전 포인트는 따라서, 작품상 수상이 확실시되는 이 화제작이 과연 몇 개의 트로피를 가져갈 거냐 여부다. <드라이브 마이 카>가 네 개 부문 중 몇 개를 차지할 것인지 여부와 더불어. <파워 오브 도그>는 최근 미국 감독조합이 수여 하는 감독상과, 영국아카데미상 작품상, 감독상 등을 확보했다.

여담 하나. 한데 《카이에 뒤 시네마》는 이 영화를 베스트 10 안에 진입시키지조차 않았다. 영화 보기 및 평가에서 취향이 제아무리 중요하다고는 하나, 그 악명(?) 높은 잡지의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흥미롭지 않은가. (계속)

7위. 램, 발디마르 요한손

8위. 듄, 드니 빌뇌브

9위. 모가디슈, 류승완

10위. 자산어보, 이준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