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프로듀스 101 >, < 쇼미 더 머니 > 등 오디션 예능이 연신 화제를 낳으며 방송 업계를 주도하는 가운데, 한 프로그램이 그 흐름에 탑승하며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작년 2월 TV조선에서 방영된 트로트 서바이벌 프로그램, < 내일은 미스트롯>이 그 주인공이다.
처음에는 다들 고개를 저었다. 주류 음악 시장에서 소외된 트로트를 다룬다는 점과 초호화 출연진에도 저조한 시청률로 마감한 엠넷의 < 트로트 엑스 > 선례를 보면 이들의 시도는 마냥 긍정적으로 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미스트롯은 최고 시청률 18.1%이라는 기록과 전국적 흥행을 일궈내며 TV조선의 간판 프로그램으로 당당히 거듭나게 된다. 놀랍게도 이 모든 선입견과 판도를 뒤집은 건 단 한 명의 출연자에서 비롯되었다.
송가인, 어쩌면 그가 손인호의 ‘한 많은 대동강’을 부르며 등장한 순간 트롯퀸의 운명은 정해졌을지도 모른다. 한국인이 선호하는 간드러진 음색과 에너지를 넓게 피력하는 시원시원한 성량. 그의 노래에는 7~80년대의 트로트 시장을 회상시키는 기교와 직선적이고 담백한 목소리가 들어 있었으니, 다시 말해 나이가 있는 어르신들에게는 ‘귀에 감기는’ 옛 정서를 가진, 그리고 어린 친구들에게는 ‘촌스럽지 않은’ 디바가 나타난 것이다.

빼어난 실력을 갖춘 타 참가자 중에서 송가인이 단연 돋보인 이유는 아리랑으로 유명한 진도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부터 국악을 배웠다는 점이다. 기교와 고음 아래 단단히 자리하고 있는 진한 판소리의 향, 이것이 그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인 것이다. 그가 얻는 폭발적인 인기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恨)을 내포한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호소력과 애절한 울림, 사람들은 송가인의 노래로부터 진정한 위로를 받는다.
송가인이 발을 디디는 곳마다 전국 각지의 팬들이 그의 방문을 반기고, 심지어 그가 방송에 출연한다는 소식만으로도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에 리모컨을 꺼내는 불편함을 감수한다. 게다가 지금껏 기술 발전에 뒤처진다 평가받던 중장년층을 두려움의 산물인 스마트폰으로 직접 스트리밍 군단을 만들게 하고, 아이돌 세력 못지않은 ‘어게인(Again)’이라는 대형 팬덤을 순식간에 형성시켰다. 사회적 신드롬이라 칭할 정도의 놀라운 영향력이다.
송가인을 기점으로 트로트 시장에는 거대한 파란이 일었다. 실제로 < 내일은 미스트롯>의 직계 후속작인 < 내일은 미스터트롯>은 첫 방송부터 미스트롯의 기록인 5%를 훌쩍 넘은 12.1%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MBC의 < 놀면 뭐하니? >에서는 유재석의 트로트 가수 데뷔 과정을 그려낸 코너 ‘뽕포유’를 신설했다. 이미 업계는 트로트의 가능성에 주목하여 발 빠르게 투자하고 있다. 바야흐로 트로트의 재전성기가 도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트로트는 이렇게 높은 잠재력을 머금고 있음에도 왜 송가인 등장 전까지 힘을 쓰지 못했을까. 2000년대 초반을 돌아보자. 장윤정이 히트곡 ‘어머나’로 음악 차트에서 당당히 1위에 입성하며 당대 최고의 트로트 여가수로 등극했던 일이나, 길거리에서 초등학생들이 박현빈의 ‘샤방샤방’을 따라 부르던 일은 그 당시에는 당연한, 정말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익숙한 풍경이었다. 분명 트로트는 뚜렷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혹자는 음악을 소비하는 주 세대가 교체되면서 트로트가 자연스럽게 사장되었다 보기도 한다. 충분히 설득력 있는 추론이다. 이는 최근 차트 추이를 봐도 짐작이 가능한데, 케이팝과 힙합이 큰 지분을 메꾸고 발라드나 록 음악이 곳곳에 배치된 양상이다. 시간이 흐르며 대부분의 장르가 시류에 맞게 형태를 바꾸거나 진화하며 생존을 유지한 반면, 트로트는 따라가지 못하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물론 명맥을 이어 나가려는 사례는 있었다. 유명 스타 홍진영의 등장과 김연자의 ‘아모르파티’ 유행이 그 예시다. 다만 이 둘은 5~60대가 소비하던 흐름과 비교되는 대개 ‘흥’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기존 트로트 스타일인 심오한 가사와 느린 템포로 서서히 감정을 돋우는 방식과는 거리가 먼, 1990년대 이후 테크노와 댄스를 기점으로 변한 현대식 트로트의 접근법이다. 이러한 적용법은 다양한 연령층을 포용할 수 있어도 정통 트로트로서의 의의나 몰입도 면에서는 심히 가벼워질 수밖에 없었기에, 완벽한 부활을 끌어내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퇴색되어 가던 트로트 시장에 불씨를 들고 나타난 송가인은 빼어난 노래 실력으로 정통 트로트를 완벽히 계승하면서도 매력적인 캐릭터와 구수한 사투리 입담을 갖춘, 그야말로 완벽한 적임자였다. 작금의 그는 스타를 넘어선 사회적 ‘상징’에 가깝다. 송가인은 5~60대에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기억해주고, 식어버린 열정에 에너지를 공급해줄 원동력이다. 존재만으로도 힘을 잃어가던 중장년층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대변자이자, 더는 숨지 않고 거리로 나올 수 있도록 자신감을 주는 인도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만 전례 없는 인기를 누리며 독보적 위치에 올라온 송가인도 그 생명력을 얼마나 유지할지 단언하기는 힘들다. 결국 그가 오랜 무명 생활 끝에 따낸 인정은 개인의 커리어가 아닌 가창으로 대중의 갈증을 해갈했다는 점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복면가왕>에 출연한 국카스텐의 보컬 ‘하현우’의 경우가 그렇다. ‘우리동네 음악대장’의 10연속 왕위 유지로 밴드는 창립 이래 엄청난 호황기를 누렸지만, 쇼가 끝난 뒤의 대중은 하현우의 실력에 대해서만 회자할 뿐, 뒤에 가려진 밴드의 수많은 곡은 기억하지 않는다.
일약 스타덤에 오른 송가인 또한 마찬가지 상황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지금이 중요하다. 전 국민이 이름을 알고 있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이자 발판인 셈이다. 여느 아티스트보다 비옥한 토지 위에서 든든한 지지 세력을 업고 2019년 11월에 본인의 정규 1집 < 가인(佳人) >을 발매하며 아티스트로서의 길을 다지기 시작한 송가인, 그가 후대에 길이 남을 거장이 될지, 혹은 그저 전국을 일주하는 행사 요정으로만 남을지는 앞으로의 행보에 달려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