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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무비즘] 에이미

코로나 기세가 조금씩 저물자 삭막했던 극장가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지구촌 곳곳에는 흥미로운 작품 소식들이 당차게 고개를 내미는 추세다. 이러한 스크린 흐름에 발맞춰 IZM이 무비(Movie)와 이즘(IZM)을 합한 특집 ‘무비즘’을 준비했다. 시대를 풍미했던 아티스트의 명예를 재건하고 이름을 기억하자는 의의에서 매주 각 필자들이 음악가를 소재로 한 음악 영화를 선정해 소개한다. 두 번째는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비극적인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 에이미 >다.

브라이언 존스,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커트 코베인, 27클럽의 짧은 생은 대중음악계를 깊이 할퀴고 지나갔다. 다가오는 7월은 27클럽의 마지막 멤버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11주기다. 매스 미디어는 그에게 뛰어난 재능을 가진 싱어송라이터라는 찬사를 보내는 동시에 마약, 알코올 중독 등 자기 파괴적인 면에 대한 비판을 일삼았다. < 에이미 >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한 상처, 남편과의 파멸적인 관계, 마약과 알코올 중독 등 미디어 너머에 숨겨진 조각들을 이어 붙였다.

Body and soul

영화를 시작하는 홈 레코딩 비디오에서 친구 로렌 길버트의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14살의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위태롭고 즐거워 보인다. 소녀는 같은 처지의 친구를 버팀목 삼아 가정불화를 견뎠고 우울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약을 먹기 시작했다. 그의 심연은 가족으로부터 비롯되었으나 모순적이게도 음악적 근간이 된 재즈도 함께 선물 받았다.

바람을 피우던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를 불러주었고 외삼촌들은 재즈 뮤지션이었다. 가정환경의 영향인지 스파이스 걸스 같은 걸그룹보다 세라 본, 다이나 워싱턴, 토니 베넷 등을 좋아했던 그는 14살에 기타를 치며 작곡을 시작했으며 16살에 국립 청소년 재즈 오케스트라에서 노래했다.

‘원하는 사람과 일하고, 가고 싶을 때 스튜디오에 가는 삶’이 성공이라 정의하며 유명세를 거부했지만 빛나는 재능은 음반 제작자들을 현혹했다. 아일랜드 레코드사의 A&R 다커스 비스는 ‘리얼리티 TV 음악 쇼에 대항할 전형적이지 않은 재능’을 가진 에이미에게 음반 계약을 맺자고 제안했고 2003년 프랭크 시나트라의 이름을 딴 첫 음반 < Frank >를 발매한다.

What is it about men

가정불화는 복합적인 상처를 남겼다. 우울증, 거식증과 각종 비행으로 얼룩진 에이미는 애정결핍에도 시달렸다. 막 데뷔한 스무 살의 소녀는 7살 많은 남자친구를 향해 ‘Stronger than me’로 충고를 보내다가도 완전히 태도를 바꿔 ‘(There is) No greater love’로 사랑을 속삭였다. 그래도 음악이 먼저였던 그가 캠든으로 이사한 후 변하기 시작한다.

트래쉬 클럽 나이트에서 만난 블레이크 필더-시빌은 에이미와 비슷한 상처가 있는 남자였다.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진 건 슬럼프를 겪고 있는 싱어송라이터뿐이었다. 블레이크가 전 여자친구에게 돌아가 버리자 그를 자극하기 위해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에이미의 홈 비디오가 섬뜩하다. 연인을 붙잡고 싶은 간절함이 슬럼프를 넘어섰다. 그는 알코올 중독 치료를 거부하고 날아간 미국에서 프로듀서 마크 론슨과 함께 두 번째 음반을 제작한다.

에이미의 기본 바탕은 재즈였으나 그 안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2집 < Back To Black >은 1960년대 걸그룹의 팝과 소울 음악에서 영향을 받았고 큰 스케일의 스트링, 경쾌한 브라스 등으로 재즈의 색을 입혔다. ‘캠든에서는 기타 밴드의 영향을 파할 수 없다’라는 인터뷰가 기저의 의식을 보여주듯 블레이크와의 이별로 인한 폭발적인 감정도 가사에 그대로 나타난다. 에이미는 상처를 승화한 앨범으로 더스티 스프링필드부터 아델, 더피 등으로 이어지는 영국 소울 디바의 위치에 올라선다.

Rehab

매니저였던 닉 시맨스키는 ‘굉장히 중요한 기회를 그때 놓친 것 같다’라며 < Back To Black >이 나오지 않았어도 좋으니 그때 재활원에 갔어야 한다고 후회한다. 매니지먼트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에이미는 재활원 입소를 거부했고 그의 아버지 역시 딸이 알코올 중독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과정과 거짓 해명이 두 번째 앨범의 선공개 곡 ‘Rehab’에 담겨있다.

싱글은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을 안겨주었고 인기는 앨범까지 이어졌다. 보상으로 간절히 원하던 블레이크와 결혼했지만 막대한 관심도 함께 쏟아진다.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그는 남편이 즐겨 하던 코카인과 헤로인에 손을 뻗다가 약물 부작용으로 병원에 실려 갔다. 약에 취해 스케줄을 소화하지 못하는 에이미가 언론의 손가락질을 받는 동시에 블레이크는 폭행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다.

27클럽

매일 쏟아지는 타블로이드지의 비난과 상관없이 에이미는 25살에 그래미 어워드 5관왕을 거머쥔다. 약물 문제로 비자 발급을 거부당해 미국에 입국하지 못한 그는 런던의 리버사이드 스튜디오에서 자축 무대를 열었다. 이때 완전히 회복된 것처럼 보였으나 친구 줄리엣 애슈비는 에이미가 ‘마약이 없으니까 너무 심심하다’라고 말할 정도로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고 증언한다.

끊임없는 토크쇼와 언론의 조롱, 파파라치의 비난을 견디지 못한 그는 가까스로 섬에 숨어든다. 호전되던 에이미는 아버지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취재진과 함께 찾아오고 블레이크와의 이혼까지 이어지자 다시 망가진다. 2011년 우상이던 토니 베넷과 조니 그린의 ‘Body and soul’을 녹음하고 퀘스트 러브와 협업을 시도하며 나아진 모습을 보이지만 세르지야의 콘서트에서 엉망으로 공연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대중을 떠났다.

자기 파멸적인 행동으로 27세에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인 천재. 그를 괴롭히던 파파라치의 영상 모음과 책임을 미루기 위해 서로 부딪치는 주변인들의 증언은 고착된 인식에 균열을 일으킨다. 에이미가 마지막에 자신이 노래 부르는 영상을 보면서 ‘노래하는 재능을 돌려주고 대신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은 채 거리를 걷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할래’라고 말했다는 경호원의 인터뷰가 씁쓸하다. 그가 사랑했던 재즈만큼이나 자유롭고 변칙적이었던 디바를 비로소 온전히 바라본다.

– 영화에 사용된 음악 목록 –

  1. Opening
  2. Stronger than me
  3. Poetic finale
  4. What is it about men
  5. Walk
  6. Some unholy war (Down tempo)
  7. Holiday texts
  8. Kidnapping Amy
  9. Like smoke
  10. Tears dry on their own
  11. Seperacao fotos
  12. The name of the wave
  13. Back to black
  14. Cynthia
  15. Rehab
  16. In the studio
  17. We’re still friends
  18. Amy lives
  19. Love is a losing game
  20. Arrested
  21. Body and soul
  22. Amy forever
  23. Vale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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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김도헌의 실감, 절감, 공감] 유희열 표절 의혹, 신뢰를 회복하려면

1971년 2월 10일, 세 번째 정규 앨범 < All Things Must Pass >로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거머쥐며 비틀즈 해체 후 솔로 아티스트로 입지를 굳히던 조지 해리슨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브라이트 튠스 뮤직 코퍼레이션(Bright Tunes Music Corporation)이 앨범의 빌보드 HOT 100 4주 연속 1위 곡 ‘My sweet lord’에 대해 저작권 침해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원고 측은 조지 해리슨이 로니 맥이 작곡하고 걸그룹 더 쉬퐁스(The Chiffons)가 불러 1963년 빌보드 HOT 100 차트 4주 연속 1위를 차지한 ‘He’s so fine’을 표절했다고 주장했다.

조지 해리슨은 노래를 듣자마자 도입부 멜로디 유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표절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재판장에 기타를 들고 입장한 조지 해리슨은 ‘My sweet lord’ 작곡 당시 ‘He’s so fine’을 모르고 있었으며, 저명한 찬송가 ‘Oh happy day’를 목표로 삼고 만든 노래라는 주장으로 결백을 호소했다. 결과는 조지 해리슨의 패배였다. 뉴욕 남부 지방 판사 리처드 오웬은 조지 해리슨이 고의로 ‘He’s so fine’을 베낀 것은 아니지만, 법률상으로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판결을 했다. 조지 해리슨은 58만 7천 달러 이상의 저작권료를 지급해야 했다. ‘무의식적 표절’의 개념이 등장한 순간이었다.

“긴 시간 가장 영향받고 존경하는 뮤지션이기에 무의식중에 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유사한 진행 방식으로 곡을 쓰게 되었고 발표 당시 저의 순수 창작물로 생각했지만 두 곡의 유사성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희열 표절 논란이 가요계를 뒤흔들고 있다. ‘유희열의 생활음악’ 피아노 소품 프로젝트 중 두 번째 곡 ‘아주 사적인 밤’이 사카모토 류이치의 ‘Aqua’를 베꼈다는 주장이 인터넷을 통해 확산하며 논란이 시작됐다. 6월 14일 유희열은 안테나뮤직 의견문을 통해 ‘아주 사적인 밤’ 관련 입장을 표했다. ‘무의식중에 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유사한 진행 방식’으로 작곡이 진행되었음을 인정하며 < 생활음악 > LP 발매 연기와 사카모토 류이치와의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어 6월 20일 사카모토 류이치의 의견문이 발표됐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두 곡의 유사성은 있지만 제 작품 ‘Aqua’를 보호하기 위한 어떠한 법적 조치가 필요한 수준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라며 법적 절차와 저작권 문제를 생략하고 바다 건너 음악 후배에게 넓은 아량을 베풀었다. 하지만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과거 유희열이 발표한 다수의 노래에 대해서도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유희열은 < 생활음악 > LP와 음원 발매를 취소했지만, 그 외 의혹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며, ‘유희열의 스케치북’ 및 방송 출연을 강행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원작자가 표절이 아니라고 선언했으니 사태가 일단락된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온다. 위대한 거장 사카모토 류이치의 관용은 분명 빛났다. 그러나 사카모토 역시 의견문에서 ‘아주 사적인 밤’과 ‘Aqua’의 ‘유사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 표절 시비가 불거졌다는 점에서 지난 30년간 한국 대중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활동해온 위상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이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용서가 유희열의 책임과 합의의 필요를 덜어주었을지언정 그 혐의까지 무마해주는 것은 아니다. 조지 해리슨이 값비싼 비용을 지불하며 전 세계에 남긴 교훈, ‘무의식적 표절’이다.

대중이 유희열에 실망한 이유는 그의 대응 방식에 있다. ‘아주 사적인 밤’의 표절 의혹을 제기한 시인 도희서에 의하면, 그는 지난해 12월부터 안테나뮤직에 연락을 취했으나 회사는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먼저 답변을 보내온 곳은 올해 1월 5일 ‘두 곡의 파트가 유사함에 동의하지만 법적인 대응을 하지 않을 것이’라 밝힌 사카모토 류이치 측이었다. 이후 5개월 반 동안 침묵하던 도희서 씨는 < 생활음악 >의 발매소식을 접한 후 6월 14일, ‘아주 사적인 밤’이 ‘아쿠아’를 표절했음을 공론화했다.

익명의 제보자가 없었다면 유희열의 < 생활음악 > 프로젝트는 계획대로 바이닐 발매되었을 것이고, ‘아주 사적인 밤’, ‘내가 켜지는 시간’의 저작자 이름에는 사카모토 류이치 대신 유희열의 이름이 올랐을 것이다. 거장의 자애롭고 신중한 대답이 없었다면 유희열은 어떤 입장을 내놓았을까.

하물며 유희열은 ‘아주 사적인 밤’ 외에도 해명할 곡이 많다. ‘Please don’t go my girl’, ‘안녕 나의 사랑’, ‘Happy birthday to you’ 등 과거 작품에 대한 의혹으로 번지고 있다. 유희열은 별다른 반응이 없다. 표절곡이 아니라는 적극적인 해명도,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유사한 진행 방식’으로 만들었다는 인정도 들리지 않는다. 30년 경력의 베테랑, 천재라는 수식어와 함께 활동한 뮤지션이라면 ‘최근 불거진 논란을 보면서 여전히 부족하고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아갑니다’는 레토릭으로 사건을 무마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의혹에 대한 정확한 설명, 음악 팬에 대한 사과, 그리고 책임의 자세가 필요하다.

완벽한 창작은 없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말처럼 ‘모든 창작물은 기존의 예술에 영향을 받는다.’. 원작자의 포용으로 ‘아주 사적인 밤’은 표절의 멍에를 벗었다. 그럼에도 유희열은 신뢰를 잃었다. 대중은 긴 시간 정상급 뮤지션으로 군림해온 그의 창작 세계를 의심하고 있다. 유사성을 인정한 상황에서 유희열이 계속 안고 가야 할 무거운 짐이다. 물론 유희열의 음악 세계 전체를 매도하고 인격을 비난하는 일은 곤란하다. 하지만 오랜 시간 유희열의 창작물을 사랑한 대중이 실망감을 표하고 그의 음악을 예전과 같이 들을 수 없는 사실 또한 당연하다.

설사 ‘아주 사적인 밤’이 표절 판결을 받았더라도 명확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했더라면 지금처럼 반응이 싸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희열은 표절에 대한 책임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고, 논란이 불거진 후 사카모토 류이치의 입장에 힘입어 뒤늦게 바이닐 발매를 취소했으며, 여전히 음악가로의 지위로 다수 방송에 출연하고 있다. 지금은 의견문 내용처럼 ‘창작 과정에서 더 깊이 있게 고민하고 면밀히 살’펴야 할 시간이다. 향후 활동으로 유희열이 다시금 잃어버린 대중의 지지를 회복할 것인지는 창작가의 양심에 달려있다. 표절은 법의 문제가 아니다. 양심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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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아치의 노래, 정태춘

서정적인 멜로디부터 냉철한 현실 비판의 노랫말까지, 정태춘의 음악은 우리 사회와 함께 오랜 세월 숨 쉬며 맥을 유지해왔다. 전설적 존재의 데뷔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 아치의 노래, 정태춘 >은 주인공 정태춘을 비롯한 주변 인물 및 평론가와의 인터뷰, 콘서트에서의 감동을 생경히 옮긴 공연 실황을 정교히 엮어 만든 음악 다큐멘터리다. 시대별 대표곡들을 찬찬히 되짚으며 따라가 본 그의 발자취 곳곳엔 대한민국 그리고 우리 대중음악의 역사가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한국형 포크의 서막

등장부터 범상치 않았다. 음대 진학을 꿈꾸다 실패하고 입대를 택한 청년 정태춘은 군 복무 당시 몇 안 되는 기타 코드 진행으로 틈틈이 곡을 만들었다. 전역 후에 작곡한 노래 중 하나인 ‘양단 몇 마름’을 공모전에 출품해 입상했고, 이를 눈여겨본 음악 프로그램 진행자 최경식이 서라벌 레코드사를 연결해주면서 가수 인생의 물꼬가 텄다.

첫 앨범 < 시인의 마을 >(1978)은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었다. 번안곡 위주의 포크가 주를 이루고 있던 상황에서 한국적인 요소가 배어 있는 ‘시인의 마을’이나 ‘촛불’은 대중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지점을 마련하며 큰 공감을 얻었다. 그 인기를 방증하듯 정태춘은 1979년 MBC 10대 가수상까지 수상하며 가요계에 얼굴도장을 확실히 찍었다.

1집 성공 이후 전적으로 앨범 제작을 맡게 된 그는 본인만의 색을 강렬하게 섞어 나갔다. 불교적인 색채를 불어넣은 < 사랑과 인생과 영원의 시 >(1980)와 국악을 토대로 한 < 우네 >(1982)는 분명 음악적으로 유의미한 작업물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록의 시대가 도래하며 포크는 설 자리를 잃었고 그 흐름에 떠밀린 정태춘 역시 연이은 실패를 겪으며 생활고에 시달렸다.

다행히 지구 레코드사로 건너가 아내 박은옥과 함께 노래한 첫 작품 < 떠나가는 배 >(1984)와 뒤이은 < 북한강에서 >(1985)가 히트를 달성하며 꺼져가던 음악인의 불씨를 되살렸다. 그럼에도 형편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업소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노래할 공간은 여전히 부족했다. 돌파구는 전국 순회 공연 < 얘기 노래마당 >이었다. 세상에 공개하지 않았던 ‘한 밤중의 한 시간’을 들려주는 장면처럼 미발표곡이나 심의에 통과되지 않은 노래를 부르며 독자적으로 언더그라운드 포크 신을 다져갔고, 이는 훗날 소극장 콘서트 형식으로 발전해 김광석과 같은 스타들의 성장 기반을 닦았다.

저릿저릿한 대한민국의 현실

성공적인 데뷔 이후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었지만 다시 한번 대중의 마음속에 안착했다는 역경 극복의 서사. 여기까진 정태춘을 모르는 이들에게 분명 익숙한 전개지만 한 일가족의 비극을 전하는 뉴스 보도 장면이 평화로운 흐름을 단숨에 뒤엎는다.

“오늘 오전 9시쯤 서울 망원동 대건 연립 지하 방에서 불이 나서 권순덕 씨의 딸 5살 혜영 양과 아들 4살 영철 군이 연기에 질식돼서 숨졌습니다.”

맞벌이 부부가 자녀들의 안전을 위해 일을 나가며 밖에서 방문을 잠갔는데 안쪽에서 불이 나 남매는 꼼짝없이 갇혀 생을 마감했다. 소외된 도시 한 구석에서 벌어진 참담한 사건을 접한 정태춘은 ‘우리들의 죽음’이란 곡으로 안타깝게 떠나간 아이들을 추모했다. 실제로 다른 어린이가 녹음했던 원곡의 내레이션 부분은 영화 속에서 박은옥이 눈물을 머금고 읊어 내리며 비통한 감정을 자극한다.

물론 이 곡 역시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지금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시인의 마을’ 같은 곡도 20~30군데 수정 지시를 받아 공개됐을 정도로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 검열 제도는 음악인들의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방해했다. 1987년 6월 항쟁을 필두로 민주화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은 더욱 커져갔고 정태춘 역시 거센 저항의 물결에 동참하며 그 의지를 굳게 다졌다.

‘거짓 민주, 자유의 구호가 넘쳐흐르는 이 땅’ (아, 대한민국… 中)

공격적이고 직설적인 어조로 무장한 < 아, 대한민국… >(1990)은 당대 사회의 어두운 이면 고발이자 억압받던 동료들의 현실에 대한 탄식, 그리고 악법으로 통제하던 국가 집단을 향한 선전포고였다. 비합본 음반으로는 최초로 LP를 찍어냈고, 스스로 위법을 저질렀다고 알리는 기자회견도 가졌고, 나아가 그 불법 음반을 각 방송사 심의실로 집어넣었고 실제로 몇 군데에선 울려 퍼지기도 했다.

고독한 싸움에 지치기도 했지만 수년간의 노력 끝에 그는 자유를 쟁취해냈다. 헌법재판소에서 음반 및 비디오법의 사전 심의 절차가 헌법과 합치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고 기나긴 세월 창작자들을 옭아매던 조항은 1996년 완전 폐지되었다. 후배 뮤지션 강산에가 언급하듯 정태춘의 숭고한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사회 운동가? 약자들의 대변인!

“노래를 들으러 왔지, 당신 이념을 들으러 온 게 아니에요!”

2019년 광주 공연 도중 울려 퍼진 한 청중의 일갈. ‘5.18’ 곡 소개에 불만을 느낀 관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정태춘은 흔들리지 않고 무대를 이어갔다. 1987년 6월 항쟁부터 2006년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투쟁, 그리고 2016년 민중총궐기까지 크고 작은 집회에 꾸준히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에 운동권 인사라는 시선은 피해 갈 수 없었다.

행보를 통한 편견 이전에 노래 속에 담긴 진정한 의의를 들여다보라. 실향민이 될 위기에 처한 동향인들을 위한 ‘황새울 지킴이의 노래’부터 누군가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위로해주는 박은옥의 공감이 어우러진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까지, 부부는 사회에서 외면 당하고 고립되어 있던 약자들의 이야기를 항상 잊지 않고 다뤄왔다.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는 ’92년 장마, 종로에서’의 노랫말을 오래도록 사유하려는 청소년 인권 활동가 이수경 양, 오로지 ‘5.18’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대회 출전을 결심한 아티스틱 수영의 전설 유나미 선수, 한평생 정태춘의 음악을 가슴 깊이 사랑해 온 루게릭병 환자 김미현 씨. 각기 다른 시대와 환경을 살아왔지만 팬이라는 유대 속에 얽힌 이들의 사연 역시 근 반세기를 살아 숨 쉬고 있는 정태춘 음악의 영속성을 여실히 증명한다.

미래가 아닌 과거로의 이상 회귀

‘아, 환멸의 90년대를 지나간다’ (건너간다 中)
‘동네 할머니 손수레 지나가고/동네 할아버지 리어카 끌고 오고’ (사람들 2019′ 中)

희망으로 가득할 것 같은 새천년을 맞이했지만 이 나라엔 여전히 ‘노인을 거지로 버려두는’ 차별이 만연하다. 노년층만의 얘기가 아니다. 세대, 성별, 지역, 학벌, 재력 등 공감을 막아서는 벽이 많아도 너무 많다. 2000년대에 접어들며 대외적인 활동 빈도를 줄인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세상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할지 고민하던 정태춘은 끝내 자본주의 체제와의 고별을 선언한다. 그가 노랫말로 그려낸 이상적인 세상은 미래를 뜻하진 않는다. 오히려 생산성이 떨어지는 먼 옛날의 수렵 채집 사회, 부에 대한 욕심이 없어 화폐를 만들거나 이자 제도를 도입하지 않았던 세계를 꿈꾼다. ‘양아치라고 불리기도’ 했던 정태춘은 그렇게 자유인이 되었다.

2시간이 채 안 되는 러닝타임으로 정태춘의 일대기를 요약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 짧은 시간에 흩뿌려진 40년 음악 세월의 조각들은 매 순간마다 그 가치를 입증한다. 때로는 절제된 형식미를 영위하는 시인이 되어, 때로는 격양된 자세로 반(反)하는 흐름을 이끈 투사가 되어 기록한 ‘아치의 노래’, 올곧은 길을 걸어온 뮤지션을 향한 가슴 벅찬 헌사이자 이 시대가 전하는 위대한 전언이다.

– 영화에 사용된 음악 목록 –
1. 이런밤
2. 시인의 마을
3. 양단 몇 마름
4. 촛불
5. 바람
6. 떠나가는 배
7. 북한강에서
8. 한 밤중의 한 시간
9. 고향집 가세
10. 들가운데서
11. 얘기2
12.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
13. 일어나라, 열사여
14. 우리들의 죽음
15. 아, 대한민국…
16. 정동진 (1)
17. 건너간다
18. 아치의 노래
19. 황새울 지킴이의 노래
20. 저 들에 불을 놓아
21. 92년 장마, 종로에서
22. 광주천
23. 5.18
24. 봉숭아
25.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26. 사랑하는 이에게
27. 사람들 2019′
28. 정동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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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되찾은 서울의 열기, 제14회 서울 재즈 페스티벌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당연시 여겼던 일상이 갑작스레 자취를 감추고, 그로 인한 공백은 ‘코로나 블루`라는 마음의 병을 낳았다. 특히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 공연 업계가 입은 내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었다. 코로나19는 라이브 음악과 관객을 철저히 멀어지게 했으며, 뮤직 페스티벌은 열두 번의 계절을 보낸 뒤에야 다시 막을 올릴 수 있었다.

일상 복귀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5월의 끝자락, 마침내 서울 재즈 페스티벌이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음악 팬들을 맞이했다. 축제의 둘째 날인 28일, 3년 동안 비워뒀던 올림픽공원 88 잔디마당은 오랜 갈증을 풀기 위해 모여든 만여 명의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일찍 찾아온 불볕더위에도 저마다 돗자리를 펴 놓고 둘러앉아 오랜만에 해방감을 만끽한 관객들의 얼굴엔 지친 기색보다 웃음기가 가득했다.

느즈막이 도착한 88 잔디마당에선 악뮤의 무대가 진행되고 있었다. 재즈 선율을 느낄 수 있는 ‘200%’, ‘Re-bye’를 비롯해 다양한 히트곡이 울려 퍼졌고 남매를 향한 떼창과 환호성이 끊이질 않았다. ‘오랜만에 페스티벌인데 굉장히 흥분되네요’라고 소감을 밝힌 이들은 공연 내내 노련한 팬 서비스로 공연장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다음 순서는 단연 이날의 하이라이트였던 호세 제임스의 무대. 재즈 명가 블루노트의 간판 싱어인 그는 전설 빌 위더스의 명곡들을 커버한 트리뷰트 앨범 < Lean On Me >을 중심으로 셋리스트를 구성했다. ‘Ain’t no sunshine’, ‘Lovely day’, ‘Lean on me’ 등의 위대한 유산이 흘러나오자 객석에선 연이어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연주였다. 재즈의 즉흥성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합주를 선보인 밴드 멤버들은 앵콜곡 ‘Just the two of us’로 무대를 끝맺는 순간까지 관객들의 혼을 빼놓았다.

저녁 8시를 넘은 시각, 어둑해진 밤하늘을 배경으로 헤드라이너 알렉 벤자민의 무대가 펼쳐졌다. 어쿠스틱 기타를 메고 등장한 그는 과거의 소년미를 벗고 한층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청량한 음색과 서정적인 감성의 팝이 선선한 저녁 공기와 어우러져 나른한 분위기를 조성했고, 관객들은 늦은 시간임에도 좀처럼 자리를 뜨지 않았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일요일, 작열하는 태양보다 뜨거운 열기를 뿜어낸 건 다름 아닌 선우정아의 퍼포먼스였다. 유튜브 내 유행 중인 재즈 여왕 엘라 피츠제럴드의 밈(Meme), ‘재즈가 뭐라고 생각하세요?’를 재치 있게 패러디한 그는 명품 스캣으로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관록을 뽐낸 베테랑 재즈 보컬리스트의 공연이 마무리되고 이어지는 무대는 4년 만에 서울 재즈 페스티벌에 재방문한 영국 시티팝 밴드 프렙. 펑크(Funk)와 재즈를 결합한 마성의 멜로디로 국내에서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이들은 스탠딩 존으로 모여든 팬들에게 ‘오랜만입니다 서울, 감사합니다!’라고 익숙하게 한국어 인사를 건넸다. 푹푹 찌는 더위에도 관객들은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켜며 낭만적인 시티팝 선율에 몸을 맡겼다. 밴드 특유의 여유 넘치는 그루브는 잠시였지만 88 잔디마당에 운집한 관객들을 시원한 바람이 부는 해변으로 옮겨놓았다.

페스티벌의 정체성에 대한 의견은 올해도 엇갈렸다. 주최 측은 다양한 기호를 가진 음악 팬들의 만족도를 고려해 넓은 장르를 포용하며 대중성을 강화했다. 한국 팬들의 취향을 섬세하게 고려한 해외 아티스트 라인업에서도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페스티벌 타이틀에 걸맞은 라인업 구성이냐는 재즈 팬들의 아쉬운 목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

그럼에도 올림픽 공원에 모인 만여 명의 관객들은 모처럼 열린 뮤직 페스티벌에 꿈같은 3일을 보냈다. 거리두기 지침에 따른 인원 제한, 한 개의 스테이지로 운용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 한계 등 여러 악조건 속에 개최된 점을 참작했을 때 이만하면 성공적인 마무리다.

움츠렸던 음악 팬들의 연례행사가 다시금 활력을 찾아가고 있다. 단절과 소통의 과도기에서 만난 2022 서울 재즈 페스티벌은 규제들로부터 완벽히 해방될 내년을 기대하게 만든다. 관객들은 그저 코로나 사태로 누적된 피로를 말끔하게 씻어줄 뮤직 페스티벌이 필요했다. 그리고, 서울 재즈 페스티벌이 돌아왔다.

사진 제공 : 프라이빗 커브(Private Cur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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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P. 반겔리스, 소리의 모험가를 떠나보내며

5월 17일, 코로나19가 또 하나의 귀중한 음악적 자산을 앗아갔다. 프로그레시브 록, 재즈, 심지어는 앰비언트까지 섭렵하며 전자음악의 선구자로 불리던 반겔리스가 향년 79세의 나이로 세상과 작별했다는 소식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룹 포밍스(The Forminx)와 아프로디테스 차일드(Aphrodite’s Child)를 거치며 1970년대부터 솔로 활동을 벌인 그는 영화 음악을 비롯해 다양한 프로젝트에 폭넓게 참여한 종합 음악인으로, 국내에서는 2002 한일 월드컵의 주제곡인 ‘Anthem’을 선물한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그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커리어와 대표작을 소개한다. 아티스트를 이미 알고 있던 이들에게는 추억할 수 있는, 처음 들어보는 독자들에게는 그의 음악을 새로이 탐구할 수 있는 글이 될 것이다.

본명은 에반겔로스 오딧세이 파파타나시우(Evangelos Odysseas Papathanassiou). 훗날 전세계에서 유명세를 떨치며 우주로도 뻗어 나간 뮤지션의 시작점은 그리스의 작은 항구도시 볼로스였다. 1943년 태어나 어린 나이부터 피아노를 만지며 음악에 관심을 보인 그는 체계적인 교육을 따르는 대신 독창성을 빚어냈고, 1963년에는 5인조 밴드 포밍스를 결성해 일렉트릭 오르간을 맡았다. 전통 음악이 우세하던 당시 그리스에 재즈와 록 등의 서구적인 사운드를 도입한 ‘Jeronimo Yanka'(1964) 등의 싱글로 새 바람을 몰고 왔다.

인기에 힘입어 국제 무대에서의 홍보 방안으로 다큐멘터리 또한 제작되었으나 제작진의 분쟁으로 촬영이 중단되었고, 그 영향으로 밴드 또한 최고 전성기인 1966년 해체를 알리게 된다. 이후 군사정권의 쿠데타를 피해 프랑스로 거처를 옮긴 그가 만든 팀이 바로 아프로디테스 차일드다. 루카스 시데라스와 아이돌스(Idols)라는 그리스 밴드에서 활동했던 데미스 루소스가 합류한 그룹은 요한 파헬벨의 ‘Canon’을 차용한 싱글 ‘Rain and tears'(1968)로 여러 유럽 국가에서 히트를 거두며 명성을 얻었다.

첫 앨범 < End Of The World >(1968)의 뒤를 이어 애절한 선율 덕에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은 싱글 ‘I want to live'(1969)와 ‘It’s five o’clock'(1969), ‘Spring, summer, winter and fall'(1970) 등이 연속적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2집 < ‘It’s Five O’Clock’ >(1969) 이후 병역 문제로 활동하지 못한 초기 멤버 실버 쿨루리스가 다시 합류해 4인조가 된 밴드는 상업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레코드사가 발매를 막는 상황에서도 2년에 걸친 작업 기간 끝에 < 666 >(1972)를 완성시켰다. 기존의 팝적인 색채를 대부분 들어내고 사이키델릭/프로그레시브 록의 요소를 대거 투입한 음반은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극찬과 더불어 지금까지도 컬트 명반으로 남아있다.

팀이 해체된 후 리드 보컬이었던 데미스 루소스가 ‘We shall dance'(1971), ‘Goodbye, my love, goodbye'(1973) 등으로 차트를 휩쓸며 곧바로 승승장구한 것과 달리 반겔리스는 상업성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1970년대 중반, 런던으로 이주한 그는 본인이 설립한 네모(Nemo) 스튜디오에서 전위적인 신시사이저 사운드를 선보인 < Heaven And Hell >(1975)을 발매하며 로열 앨버트 홀 공연을 매진시켰고, 프랑스의 다큐멘터리 감독 프레데릭 로시프(Frédéric Rossif)의 작품에 사운드트랙을 제공하면서 영화 제작자들의 주목을 샀다.

1980년대, 마침내 < 불의 전차 > OST가 제3의 부흥기를 몰고 왔다. 오케스트라 위주로 편성하던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나 신시사이저를 중추로 하여 만든 사운드트랙은 1981년 빌보드 앨범과 싱글 차트에서 모두 1위를 기록했다.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영화음악 부문도 그의 차지였다. 다양한 영화사에서 러브콜을 보냈고, 리들리 스콧 감독의 < 블레이드 러너 >에 참여하면서 미래 디스토피아 사회를 생생하게 묘사한 음악으로 극찬을 받았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다큐멘터리 < 코스모스 >에 < Heaven And Hell >의 수록곡을 삽입하기도 했다.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예스(Yes)의 보컬 존 앤더슨과 듀오 존 앤 반겔리스(Jon and Vangelis)를 결성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좌 < 불의 전차 >(1981), 우 < 블레이드 러너 >(1982)

쾌거는 다양한 영역으로도 이어졌다. 1997년 아테네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는 무대 지휘를 맡았고 2000년 시드니 하계 올림픽 폐막식에서는 감독 자리에 올랐다. 2002년에는 한일 월드컵의 공식 주제가로 한국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우주로도 눈길을 돌린 뮤지션은 나사의 2001 마스 오디세이 탐사선 프로젝트를 위한 < Mythodea >(2001), 유럽 우주국 ESA의 탐사선 로제타의 추류모프-게라시멘코 혜성 착륙을 기념하며 < Rosetta > (2016)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영감을 줬다”라는 ESA의 추모사처럼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어지며 확장과 쇄신을 거듭한 커리어는 많은 후배들에게도 귀감이 되었다. 유명 영화음악 작곡가인 한스 짐머는 반겔리스를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로 꼽았고, 같은 그리스 출신이자 뉴에이지 장르를 대표하는 야니는 스스로 그의 팬을 자처하기도 했다. 국내 아티스트 중에서는 윤상이 그의 음반을 듣고 음악에 대한 꿈을 키웠다고 밝힌 바 있다.

< 불의 전차 >에서 주인공은 난관을 겪지만 소신을 지킨 끝에 결국 값진 승리를 얻어내는 인물이다. 반겔리스의 일대기도 비슷하다. 다른 외부적인 요인에 개의치 않고 좋은 음악을 만들겠다는 일념을 지킨 끝에 많은 이들의 마음에 각인되었으니 말이다. 성실함이 미덕의 자리에서 조금 물러난 시대,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정신의 숭고함은 끝까지 이어진다. R.I.P. 반겔리스.

“꼭 들어야 할 반겔리스 음악 10곡”
‘Rain and tears’ (아프로디테스 차일드, 1968)
‘I want to live’ (아프로디테스 차일드, 1969)
‘It’s five o’clock’ (아프로디테스 차일드, 1969)
‘Spring, summer, winter and fall’ (아프로디테스 차일드, 1970)
‘La petite fille de la mer’ (< L’Apocalypse des animaux > 사운드트랙, 1973)
’12 o’clock’ (< Heaven and Hell > 파트 2, 1975)
‘Chariots of fire'(< 불의 전차 > 사운드트랙, 1981)
‘Polonaise’ (존 앤 반겔리스, 1983)
‘End title’ (< Blade Runner > 사운드트랙, 1994)
‘Anthem’ (한일 월드컵 공식 주제가,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