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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라디오를 켜봐요] Vol. 5 – 이즘 에디터의 라디오 시그널

전성기는 지났다. 스마트폰의 중심으로 무수히 쏟아지는 영상 플랫폼과 OTT 서비스에 더 익숙한 젊은 층에게 ‘라디오’는 세대를 나누는 낡은 매체의 기준처럼 다가올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 오늘날에도 라디오는 수많은 팬과 함께 굳건히 존재한다. 매일 꾸준하게 습관처럼 챙겨 듣는 마니아부터 문득 향수에 젖어 다시금 찾아오는 방문객 그리고 그 아날로그적인 특색에 반해 접하기 시작하는 호기심 많은 입문자까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작디작은 전파 속 흘러나올 음악과 이야기를 기다린다.

9년 전, 이즘에서 진행한 [라디오를 켜봐요] 시리즈의 마무리를 짓는다. 특집을 처음 시작할 때와는 많은 것이 바뀌었고 필자마저 전부 다르지만 저마다 라디오를 들으며 자라왔다는 사실만큼은 모두 같다. 저마다 추억과 애정이 꼬깃꼬깃하게 담긴 사연과 함께 이즘 필자들이 기억하는 ‘시그널 송’을 조심스레 소개한다. 자, 지금 이 주파수를 고정하기 바란다.

KBS 2FM 나얼의 음악세계 / 나얼 ‘Love dawn’
KBS 2FM에서 진행된 < 나얼의 음악세계 >를 들은 사람은 분명 흑인 음악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은 오래전의 알앤비를 묵묵히 틀어주던 나얼의 진행은 흑인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이라면 버티기 힘들 정도로 지루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새벽엔 좋은 음악이 있었다. 나얼 솔로 정규 1집에 수록된 인스트루멘탈 ‘Love dawn’은 침전하는 기분을 음악으로 집중시키는 시그널이다. 이 곡의 차분한 사운드를 듣고 있으면 순수함을 향한 그날의 동경이 떠오른다. (김호현)

KBS 2FM 볼륨을 높여요 / 바버렛츠 ‘Summer love’
학업에 집중하리라 마음을 먹기만 하면 주변의 온갖 것들이 흥미롭게 느껴지고는 한다. 그래서 그랬을까, 저녁 식사를 마치고 펜을 집어들 때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KBS 2FM의 < 볼륨을 높여요 > 속 악동뮤지션 수현의 목소리는 애석하게도 매일같이 나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그렇게 들뜨는 마음을 애써 외면하다가도 수현과 바버렛츠의 ‘Summer love’가 방송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면 나는 손에 쥔 펜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넷의 산뜻한 하모니가 나의 결심을 번번이 무너뜨릴 만큼 달콤했으니까. (이승원)

MBC FM4U 태연의 친한 친구 / 텐시러브(Tensi love) ‘Cake house’
학창 시절 조용한 자습실에서 두근대며 문자 사연을 보내던 기억은 꽤나 강렬하다. 라디오를 처음 접했던 중학생은 당시 소녀시대 태연이 진행하던 MBC FM의 < 친한 친구 >에 사연을 보냈고 설레는 마음을 안고 MP3 이어폰으로 전파를 찾았다. 흘러가는 야간 자율 학습 중에 3부 오프닝 곡 텐시러브의 ‘Cake house’가 흘러나왔고 무료한 시간을 버티게 해준 청취 이후에도 기계음으로 가득한 초창기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자주 흥얼거리곤 했다. 비록 사연은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라디오가 주는 동시성과 생동감은 특별한 경험으로 남았다. (손민현)

KBS 클래식FM 세상의 모든 음악 / 마이크 배트(Mike Batt) ‘Tiger in the night’
모 뮤직바 사장님의 단골 질문은 “< 세상의 모든 음악 > 알아요?”다. 마침 질문받을 당시 늘 듣던 종류 밖의, 클래식, 재즈 외 다른 여러 나라의 음악이 궁금하던 차였다. 덕분에 그 이후 오후 6시면 KBS 클래식FM을 찾았다. 시그널 음악은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마이크 배트(Mike Batt)가 작곡하여 로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Tiger in the night’. 하프와 오보에, 클라리넷이 두런두런 모이는 모양은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DJ의 변함없는 인사말과 어울린다. 얼마 전, 사장님은 나와는 오래 보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건네왔다. 새삼스러웠다. 같은 주파수로 접어들 때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여러 수단 중에서도 라디오는 밤의 호랑이처럼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다. (신하영)

KBS 2FM 이기광 가요광장 /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 ‘Winter games’
노래 듣는 것에 권태를 느낄 때는 라디오로 기분을 환기하곤 한다. 운이 좋으면 취향을 저격하는 음악을 발견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근황을 듣거나 새로운 정보를 얻기도 한다. < 이기광의 가요광장 >은 점심시간에 편안한 목소리와 트렌디한 선곡으로 라디오로서 역할은 물론 연예계 활동으로 다져온 입담을 통해 재미까지 놓치지 않는다. 하루 중 가장 생기 있는 시간대에 걸맞게 시그널 송은 위대한 작곡가 데이비드 포스터의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 주제가 ‘Winter games’를 사용한다. 시카고의 ‘Hard to say I’m sorry’, 휘트니 휴스턴의 ‘I will always love you’ 등 그의 수많은 대표곡에 비하면 덜 유명하지만 파워풀한 건반은 태양이 가장 높이 떠 있는 시간에 울려 퍼져 활력을 더한다. (백종권)

SBS 러브FM 정엽의 LP카페 / 정엽 ‘회전목마’
레코드판을 수집하는 입장에서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이름이다(DJ와 같은 ‘엽’자를 써서 그런 것도 있지 않을까). 개인 소장 바이닐을 가지고 실제로 공개 방청까지 다녀왔다. 턴테이블을 통해 음악을 틀어준다는 것과 더불어 다양한 라이브 무대가 특징이다. 디제이가 가수인 점을 살려 오프닝 시그널은 정엽의 노래가 SBS 러브FM의 103.5 MHz를 타고 매일 밤 저녁 6시 5분에 흘러나온다. ‘회전목마’라는 제목에 맞춰 놀이공원에서 들릴 법한 도입부 뒤 분위기는 잔잔하게 가라앉으며 진행자의 목소리와 프로그램의 무드에서 일맥상통하는 따스함이 전파를 타고 단번에 퍼진다. 아날로그, 라디오, LP, 음악, 뉴트로, 레트로. 옛것이 현재로 돌아온 지금의 대중문화를 반영해 그 시절의 자글거리는 감성을 간직했다. 오늘도 ‘카페’에 들러 음악 한 모금을 마신다. (임동엽)

KBS 1FM 생생 클래식 / 모차르트(Mozart) ‘The London sketchbook, K.15a’
누군가의 우아함을 사모하다 덩달아 고상해지는 경우가 있다. KBS TV <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 >의 열혈한 애청자인 나는 유려한 말솜씨를 가진 진행자 윤수영 아나운서를 동경하게 됐고 곧 그가 KBS 1FM < 생생 클래식 >의 오랜 MC라는 걸 알게 됐다. 정오를 알리는 이 라디오는 모차르트가 런던에 머물 동안 쓴 스케치 시리즈로서 제목이 없어 a부터 ss번까지 문자로 대신해 부르는 희유곡의 ‘K.15a’를 시그널로 삼았다. 영국의 지휘자 네빌 마리너의 통솔 아래 관현악기가 수다스럽게 빗발치며 한낮의 태양을 환희한다. 가끔 삶을 축복하고 싶을 때 들을 만한 음악이 추가됐다. 타인의 기품, 다정함, 전문성을 닮고 싶어 맞춰 놓은 주파수가 클래식 문외한에게도 취향이란 걸 심어주었다. (박태임)

MBC FM 임국희의 팝스퍼레이드 / 러브 언리미티드 오케스트라(Love Unlimited Orchestra) ‘Love’s theme’
1980년대 중반, 매일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MBC FM에서 방송된 < 임국희의 팝스퍼레이드 >는 나에겐 반 토막 프로그램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1부는 듣지 못했기 때문에. 아나운서 출신인 임국희 디제이의 약간 냉정한 진행과 선곡되는 노래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시원한 현악기로 시작하는 시그널 음악이 마음에 들었다. 이 곡은 저음으로 유명한 소울 가수 배리 화이트가 이끌었던 러브 언리미티드 오케스트라(Love Unlimited Orchestra)의 초기 디스코 스타일의 ‘Love’s theme’이다. 내가 주말을 기다렸던 이유 중 하나는 정각 오후 4시에 세련된 이 음악을 들을 수 있어서였다. (소승근)

MBC FM4U 세상을 여는 아침 최현정입니다 / 타카피 (T.A.-COPY) ‘케세라세라’
새벽 다섯 시. 하루를 온전히 마무리한 퇴근자의 안도와 이른 출근길의 불안과 설렘이 뒤섞이는 지점에 ‘세상을 여는 아침 최현정입니다’가 있었다. 아나운서 최현정은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로 각자가 지닌 선을 이어주며 청취자를 다독였다. 무엇보다 생각이 깊어질 무렵. 펑크 밴드 타카피가 부른 2부의 여는 곡 ‘케세라세라’는 직선적이고도 흥겨운 리듬으로 고민에 빠진 이들을 ‘될 대로 돼라’며 응원했고 작곡 학원에 다니고자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초짜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생에게 더할 나위 없이 큰 격려가 됐다. 오랜 세월이 지나 잠시 잊고 있었지만 불현듯 떠오른 그때의 온도와 풍경이 여전히 생생하다. (손기호)

CBS FM 한동준의 FM POPS / 어 플록 오브 시걸스(A Flock Of Seagulls) ‘Space age love song’
중학교 시절 처음 접한 CBS 음악FM의 < FM POPS >는 도회적이었다. 디스크자키 김형준의 쿨함은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서늘한 시간과 어울렸고 프로그램이 소개한 레벨 포티투(Level 42)의 ‘Love games’ 덕에 퓨전 재즈와 소피스티-팝에 매혹되었다. 나른한 오후 2시를 유쾌 상쾌로 깨우는 < 한동준의 FM POPS >에 이르기까지 방송의 시작을 알리는 노래는 같았다. 리버풀 출신 뉴웨이브 밴드 어 플록 오브 시걸스의 ‘A space age love song’은 신시사이저와 각종 소리 효과, 펑키(Funky) 기타의 합세로 가슴을 두드렸다. 제목처럼 공상과학적 사운드스케이프였다. 리드 보컬 마이크 스코어의 헤어스타일을 비롯해 멤버들의 패션도 시각적이었다. (염동교)

MBC FM4U 배철수의 음악캠프 / 비엔나 심포닉 오케스트라(Vienna Symphonic Orchestra) ‘(I can’t get no) satisfaction’
나에게 ‘Satisfaction’은 롤링 스톤즈가 아니라 비엔나 심포닉 오케스트라의 곡이다. 당연히 < 배철수의 음악캠프 > 때문이다. 해외 음악을 접하겠다는 일념으로 무턱대고 라디오를 듣게 되면서 ‘Satisfaction’은 내 안에 오프닝 시그널 송으로 먼저 뿌리를 내렸다. 마치 ‘헛, 둘, 셋’처럼 들리는 인트로부터 위트 넘치는 베이스, 현란한 현악 연주가 차례로 날리는 일격에 당하고 나니 나중에 찾아 들은 원곡과는 친해질 수가 없었다. 사실 오케스트라 버전도 2분 30초를 넘어가면 마치 마스크 벗은 맨얼굴을 처음 보는 느낌이다. 배철수 DJ의 “출발합니다!” 없이는 영 어색하다. (한성현)

MBC FM4U 푸른밤 종현입니다 / 샤즈(Shazz) ‘Heaven’
자정이 되기 직전 끝난 야간 자율 학습, 지친 하루가 끝나면 기숙사 룸메이트는 MP3로 라디오를 틀었다. 시그널송 샤즈(Shazz)의 ‘Heaven’으로 시작하는 MBC FM4U < 푸른 밤 종현입니다 >. 피아노 선율이 이끄는 포근한 재즈 사운드는 오늘과 내일 사이의 아늑한 공간으로 초대했다. 매일 도착하는 사연들과 그들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목소리는 다정하고 진중했다. 라디오는 늦은 새벽까지 공부할 때면 적막한 틈을 메웠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우리의 또 다른 친구가 되기도 했다. 여전히 ‘Heaven’을 들으면 3년 동안 자정을 지켜줬던 DJ의 사려 깊은 말들이 떠오른다. (정수민)

MBC 표준FM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 / 폴 모리아(Paul Mauriat) ‘Please return to Pusan port’
몇몇 기억은 어렴풋한 흔적으로 시작해 평생을 함께하는 문신이 된다. 어린 시절 차에 타기만 하면 뒷자리로 꾸물꾸물 넘어가 어머니에 기대 누운 채 그 조용한 떨림을 만끽하며 한가로이 졸던 나는 부모님이 즐겨 듣던 라디오 <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 >의 시끌벅적한 만담을 자장가로 삼곤 했다. 1984년 출항을 알린 이 장수 프로그램의 시그널은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폴 모리아가 첫 내한을 앞두고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경음악으로 편곡한 버전이다. 아직도 그 도입부만 들으면 강석과 김혜영의 힘찬 오프닝 멘트와 함께 여러 광경이 산발적으로 떠오른다. 반쯤 감긴 시야 너머로 핸들을 잡고 계신 아버지의 커다란 뒷모습, 앞유리창에 부딪혀 사방으로 퍼져 나가던 햇살, 그 사이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가로수까지. 원곡의 쓸쓸함이나 편곡의 경쾌함보다 내게는 기분 좋은 포근함으로 기억되는 이유다. (장준환)

MBC 표준FM 이윤석, 신지의 싱글벙글쇼 / 코요태 ‘순정’
인생 절반 이상을 < 싱글벙글쇼 >로 써 내려간 강석과 김혜영, 30년 넘는 세월의 호흡을 단숨에 이어받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전설을 고스란히 따라갈 수는 없는 법. 진행자를 교체해가며 방향을 잡아간 지 10개월이 지난 2021년 3월 뜻밖의 시그널이 울려 퍼졌다. 우렁찬 말 울음소리와 함께 ‘디스코 타임’을 알리는 코요태의 명곡 ‘순정’, 혼성 콤비의 부활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원곡자인 신지와 개그맨 정준하는 시트콤 < 거침없이 하이킥 >에서 이미 연기로 합을 맞춰본 만큼 재치 넘치는 만담으로 점심시간을 달궜고 20여 년 전 인기곡까지 소환하며 청취자층을 폭넓게 끌어안을 수 있었다. 2022년 9월부터 정준하 대신 동료 이윤석이 신지와 함께하고 있는 ‘최장수 라디오 프로그램’은 여전히 그 시절 그리고 오늘날의 순정을 담아 유쾌한 전파를 날리고 있다. (정다열)

MBC 표준FM 조PD의 비틀즈 라디오 / 루카 콜롬보(Luca Colombo) ‘Blackbird’
< 조PD의 비틀즈 라디오 >와 함께한 새벽 두 시는 불투명한 미래가 주는 압박에서 잠시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심야 라디오가 지닌 포근함이 심적 안정을 제공했고 우상으로 삼았던 비틀스의 음악에 집중할 수 있어 더없이 아늑했다. 매일 밤 리버풀 청년들의 위대한 유산을 소개해준 조정선 디제이는 최고의 명사였으며 방송의 문을 연 폴 매카트니의 걸작 ‘Blackbird’는 잠 못 드는 새벽 네 명의 비틀과 나를 이어준 징검다리가 되었다. 원곡과 달리 찌르레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프로그램 시그널은 이탈리아 기타 명인 루카 콜롬보의 핑거스타일 커버 곡을 사용했다. (김성욱)

SBS 파워FM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 / 제프 & 마리아 멀더(Geoff & Maria Muldaur) ‘Brazil’
기타 반주가 한쪽 귀를 어루만지며 시작한다. 휘파람과 함께 모든 세션이 합쳐지면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라는 나긋나긋한 오프닝 멘트가 들린다. 기분 좋은 아침을 만드는 음악과 목소리. 테리 길리엄의 영화 < 브라질 >의 삽입곡인 제프 & 마리아 멀더 부부의 ‘Brazil’은 암담한 회색 도시에 내리쬐는 따스한 한 줄기 햇살이 잘 표현된 곡이다. <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 > 또한 빌딩 숲에 둘러싸인 채 바쁘게 살아가는 이들의 편안한 쉼터다. 수더분한 말씨로 사연을 읽어주는 ‘아침창 아저씨’ 김창완과 부드러운 포크 ‘Brazil’의 오랜 동행은 20년 넘게 이어져 지금까지도 순조롭다. (김태훈)

MBC FM4U 4시엔 윤도현입니다 / 윤도현밴드(YB) ‘오늘은’
윤도현의 목소리는 멋지고 입담도 화려하다. 하지만 < 4시엔 윤도현입니다 >를 처음 들었을 때 무엇보다 내가 반긴 건 시그널 송 ‘오늘은’이었다. 11년 전 중학교 시절 처음 듣고 자유분방한 가사에 반한 ‘오늘은’. 경쾌하면서도 어딘가 나른한 데가 있는 이 노래를 하교 후 해가 지기를 기다리며 4시에 들었는데 11년이 지난 지금 똑같은 시간, 우연히 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 4시엔 윤도현입니다 >에서는 노래가 보컬 없이 반주만 나온다. 그래서 열심히 대본을 준비했을 윤도현 디제이와 작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프로그램이 시작할 때면 오프닝 멘트는 깡그리 무시하고 왕왕대는 기타 연주에 맞춰 그저 이 노래의 벌스(Verse)를 읊조리곤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YB의 곡도 ‘오늘은’이지만 윤도현도 가장 아끼는 곡이 ‘오늘은’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묘한 유대감이 든다. (이홍현)

정리 : 장준환
이미지 편집 : 백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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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제프 벡(1944-2023), 위대한 여정

2010년 제프 벡의 내한 공연에 한데 모인 국내 유명 기타리스트들은 모두 혀를 내둘렀다. ‘정말 끝내주게 잘 치더라’. 그렇다. 제프 벡은 말 그대로 기타를 잘 쳤고 후배 연주자들의 마음속엔 아득한 거리감과 경외심이 공존했다. 밴드 리더와 프로듀서 등 전방위를 아우르는 멀티 플레이어지만 기타 연주자로서의 업적이 첫 손에 꼽혀야 한다.

1965년부터 1966년까지 약 2년여간 야드버즈에서 재적한 벡은 일명 < Roger The Engineer >로 불리는 블루스/사이키델릭 록 명작 < The Yardbirds >를 끝으로 밴드를 떠나 이름을 내건 제프 벡 그룹을 결성했다. 로드 스튜어트가 보컬을 맡고 현 롤링 스톤스의 기타리스트 로니 우드가 베이스를 잡은 제프 벡 그룹은 록 인스트루멘탈의 고전 ‘Beck’s bolero’가 실린 < Truth >(1968)와 < Beck-Ola >(1969)같은 블루스/하드 록 수작을 남겼다.

바닐라 퍼지의 드러머 카마인 어피스와 의기투합한 슈퍼그룹 벡 보거트 어피스(Beck, Bogert & Appice)로 한 장의 정규작 < Beck, Bogert & Appice>(1973)를 남긴 후 1970년대 중반부터 퓨전 재즈에 경도했다. 로이 부캐넌 헌정곡 ‘Cause We’ve Ended As Lovers’와 면도날 사운드의 ‘Scatterbrain’이 들어간 1975년 작 < Blow By Blow >가 경력상 하이라이트. 1980년대 미드 < 마이애미 바이스 >의 테마음악을 쓴 체코 출신 키보디스트 얀 해머의 조력으로 완성한 < Wired >(1976)와 < There & Back >(1980) 까지가 벡의 퓨전 재즈 시기였다.

피크 대신 엄지와 트레몰로 암(Tremolo Arm)을 활용해 다채로운 톤을 구사했던 1980년대에는 뉴웨이브 시대에 감응해 쉭의 나일 로저스를 프로듀서로 초빙한 < Flash >(1985)와 기교파 드러머 테리 보지오(Terry Bozzio)와 직선적인 인스트루멘탈 록을 합작한 < Guitar Town>(1989)를 발표했다. 다음 정규작 사이 10년의 공백을 로커빌리의 재조명 < Crazy Legs >(1993)와 존 본 조비의 솔로 데뷔 앨범 < Blaze Of Glory >(1990)의 기타 연주 등의 사이드 프로젝트로 채웠다.

< Who Else? >(1999), < You Had It Coming >(2001), < Jeff >(2003)로 밀레니엄을 관통한 일레트로니카-기타 록은 늘 트렌드에 민감했던 그가 고안한 새로운 사운드스케이프였다. 레드 제플린의 선장 지미 페이지에 비해 밴드 리더의 정체성은 약했고 에릭 클랩튼처럼 대중적 히트곡을 가지지 못했지만 음악성의 변화와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기타 본연의 악기성을 끝없이 파고들었다.

작년 7월 배우 조니 뎁과 협업한 < 18 >을 발표하고 불과 몇 달 전까지자 투어를 돌던 그이기에 갑작스러운 죽음이 허망하나 수많은 동료, 후배 기타리스트들의 추모와 회고는 왜 그가 ‘기타리스트의 기타리스트’며 유일무이한 존재였는지 증언했다.

에디터가 권하는 제프 벡 열 곡

1. Shape of things (1966)
지미 페이지와 에릭 클랩튼, 키스 렐프(Keith Relf) 같은 명 뮤지션이 거쳐 간 야드버즈는 영국 록의 산실과도 같다. 앨범에 수록되지 않고 1966년 싱글로 발표된 ‘Shape of things’는 로큰롤의 골격 아래 덜컹대는 곡 구성과 비전형적 음향으로 비전형성을 도모했고 그 중심엔 제프 벡의 피드백 주법이 있다. 길게 늘어뜨린 음파의 공감각적 기운으로 사이키델릭 록의 원형을 확립했다. 이십 대 초에 이미 사운드 혁명을 불러온 벡은 솔로 1집 < Truth >(1968)의 첫 곡으로 ‘Shape of things’을 택했다. 하드 록의 프로토타입 격인 ‘The train kept rollin”과 더불어 야드버즈 시절 벡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곡이다.

2. Beck’s bolero / < Truth >(1968)
프랑스의 고전 음악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처럼 살랑살랑 춤을 추다 기타 이펙트로 환각의 탑을 쌓고 이내 굉음으로 응축했던 기운을 터트린다. 오랜 친구 지미 페이지와 레드 제플린의 베이시스트 존 폴 존스, 더 후의 드러머 키스 문 등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이 참여한 곡은 록 인스트루멘탈의 고전으로 남았다. 싱글의 A면으로 함께 붙어 있던 ‘Hi ho silver lining’도 벡이 라이브에서 즐겨 연주한 하드 록 넘버다.

3. All shook up / < Beck-Ola >(1969)
제프 벡 그룹의 명의로 발표한 1972년 작 < Beck-Ola >의 인트로 곡이다. 흑인 블루스 뮤지션 오티스 블랙웰(Otis Blackwell)이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준 산뜻한 로큰롤이 거친 부기 록으로 재탄생했다. 로드 스튜어트(보컬)과 로니 우드(베이스),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 등 수많은 뮤지션과 협업한 건반 연주자 니키 홉킨스의 드림팀이 탄탄한 연주를 들려줬다. 미국 회사 록올라 주크박스에서 이름을 따온 < Beck-Ola >에는 ‘All shook up’이외에도 ‘Spanish boots’나 ‘Plynth(water down the drain)’처럼 당대 최고 연주자들의 기량을 만끽할 수 있는 곡들로 가득하다.

4. Definitely maybe / < Jeff Beck Group >(1972)
테네시 주 멤피스의 녹음 장소와 부커 티 앤 더 엠지스 출신의 기타연주자 스티브 크로퍼(Steve Cropper)의 프로듀서 기용 등 제프 벡 그룹의 세 번째 스튜디오 음반 < Jeff Beck Group >은 블루스의 뿌리에 다가서려는 흔적이다. 흑인 보컬리스트 바비 텐치(Bobby Tench)의 목소리도 유독 소울풀하게 들린다. 하나 백미는 벡이 작곡한 마지막 트랙 ‘Definitely maybe’로 마치 우는듯한 기타 톤과 후반부 맥스 미들턴의 펜더 로즈 일렉트릭 피아노가 처연함을 드리웠다. 밴드에 처음 가입한 파워 드러머 코지 파웰은 ‘Ice cream cakes’에서 견실한 기본기를 드러냈다.

5. Cause we’ve ended as lovers / < Blow By Blow >(1975)
Blow By Blow >는 제프 벡의 솔로 경력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비틀스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이 제작한 1975년 걸작 덕에 제프 벡은 퓨전 재즈의 역사에도 중요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목소리 없이 악기 연주로만 이뤄진 인스트루멘탈 음반임에도 유기적 구성과 개별곡의 마력 덕에 빌보드 200에서도 4위까지 올랐다. ‘Constipated duck’과 ‘Freeway jam’처럼 펑키(Funky)한 넘버들 사이로 국내에서 가장 사랑받은 곡은 벡이 또 한 명의 위대한 기타리스트 로이 부캐넌에게 헌정한 ‘Cause we’ve ended as lovers’다.

6. Led boots / < Wired >(1976)
걸작 < Blow By Blow > 후 1년 만에 나온 1976년 작 < Wired >는 당시 벡의 창작력이 극에 달했음을 방증한다. 얀 해머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간 음반으로 < Blow By Blow >의 키보디스트 맥스 미들턴(Max Middleton)의 아날로그 연주와 해머의 신시사이저가 고루 활약하며 벡의 기타를 보좌했다. 재야의 강자 나라다 마이클 왈든(Narada Michael Walden)과 윌버 배스컴(Wilbur Bascomb)의 리듬 섹션도 탄탄한 흠 잡을 데 없는 퓨전 재즈/인스트루멘탈 록 앨범에서 ‘Led boots’는 상기한 모든 음악적 요소를 압축했다.

7. You never know / < There & Back >(1980)
데이비드 보위의 < Lodger >(1979)가 베를린 트릴로지에서 지니는 지위처럼 퓨전 재즈 트릴로지의 마지막 편인 < There & Back >도 앞의 두 음반에 비해 무게감이 덜하나 영혼의 파트너 얀 해머와 토니 하이마스(Tony Hymas), 1990년대 토토의 드러머로 활동했던 사이먼 필립스(Simon Phillips)의 특급 연주는 가사 없이 소리만으로 즐겁다. 벡은 타이틀 곡 ‘You never know’에서 해머가 깔아준 판 위로 유영하며 찰떡궁합을 뽐냈다. 반복적인 전자음을 파고드는 기타 연주는 1980년대 이후 줄곧 채택해온 소리 문법이기도 하다.

8. People get ready / < Flash >(1985)
디스코/펑크(Funk) 그룹 쉭의 기타리스트 나일 로저스가 참여한 1985년 작 < Flash >는 그간의 인스트루멘탈 경향에서 벗어나 지미 홀(Jimmy Hall), 카렌 로렌스(Karen Lawrence) 등 다양한 보컬을 세웠고 벡 본인도 노래했다. 수록곡 ‘Escape’가 1986년 제28회 그래미에서 최우수 록 인스트루멘탈 퍼포먼스를 수상했으나 죽마고우 로드 스튜어트가 목소리를 더한 ‘People get ready’가 더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원곡은 소울의 거목 커티스 메이필드가 이끈 임프레션스가 1965년에 발매했다.

9. Nadia / < You Had It Coming >(2001)
< Wired >와 < Flash >에서 신시사이저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던 벡은 1990년대 말부터 일렉트로니카와 기타 록의 융합을 시도했다. 예순을 향해 가던 거장은 < Who Else? >(1999)과 < You Had It Coming >(2001), < Jeff >(2003) 세 작품으로 당대의 경향성을 포착했다. 저명한 여성 기타리스트 제니퍼 배튼(Jennifer Batten)이 참여한 2001년 작 < You Had It Coming >은 2002년 제 44회 그래미에서 최우수 록 인스트루멘탈 퍼포먼스를 수상한 ‘Dirty mind’와 머디 워터스의 블루스를 재해석한 ‘Rollin’ and tumblin”을 담았고 영국 뮤지션 니틴 소니(Nitin Sawhney)의 다운템포 원곡에 기타를 덧댄 ‘Nadia’는 신비로운 선율로 제프 벡의 21세기 수작이 되었다.

10. So what / < Jeff >(2003)
일렉트로니카 트릴로지의 마지막 편에 해당하는 2003년 작 < Jeff >는 테크노와 기타 인스트루멘탈을 엮었다. 리버풀 출신 빅비트 그룹 아폴로 440(Apollo 440)과 벨기에의 전자 음악 프로젝트 테크노트로닉 소속의 미 원(Me One)을 프로듀서로 영입, 장르의 전문성을 높였다. 벡이 얼터너티브 록 듀어 커브(Curve)의 딘 가르시아(Dean Garcia)와 합작한 ‘So what’은 전자 음향과 기타 연주가 강력한 사운드를 형성했다. 2004년 제46회 그래미에서 최우수 록 인스트루멘탈 퍼포먼스를 수상한 ‘Plan b’와 함께 앨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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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신촌블루스 디스코그래피 돌아보기

아프리칸 아메리칸의 한과 비애를 담은 블루스. 하울링 울프와 존 리 후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로버튼 존슨과 이들의 문법을 계승해 록 레전드가 된 에릭 클랩튼과 레드 제플린 등으로 영미권 대중음악의 근간을 이뤘다. 기타리스트 엄인호를 중심으로 35년간 음악공동체를 이어간 신촌블루스는 척박한 한국 블루스 뮤직에 대중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언더그라운드 공연 문화에 공헌했다. 가요에 블루스를 녹인 신촌블루스의 역사를 음반 별로 되새겨본다.

< 신촌Blues >(1988)
보사노바와 록을 혼합했던 밴드 풍선에서 의기투합한 바 있는 한국 블루스의 두 거목 엄인호와 이정선은 1980년대 중반 블루스의 방향성을 세웠다. 이정선과 포크 그룹 해바라기에서 함께 활동했던 소리의 마녀 한영애와 들국화의 조덕환과 엄인호가 발탁한 신예 정서용, 한국 소울의 대부 박인수가 보컬 라인을 형성했다.

대중적으로는 정서용과 엄인호가 입 맞춘 ‘아쉬움’이었다. 수수하게 퍼지는 오르간과 색소폰 솔로 등 블루스 요소와 흡인력 있는 선율 덕에 엄인호 지향의 ‘블루스 가요’가 성립했다. 한영애가 부른 타이틀 곡 ‘그대 없는 거리’와 신중현의 곡을 재해석한 박인수 보컬의 ‘봄비’도 사랑받았다. 이정선은 명반 < 30대 >(1985)의 ‘바닷가에 선들’을 재수록해 각별함을 드러냈다. 음악적으로 완숙한 멤버들이 완성한 데뷔 앨범 같지 않은 데뷔 앨범이었다.

< 신촌Blues II >(1989)
블루스 음악으로선 이례적인 히트를 기록한 2집 < 신촌Blues II >는 음악공동체의 정점이었다. 펑크(Funk)와 레게가 뒤섞인 ‘골목길’은 김현식의 가창으로 시대회자의 지위를 얻었고 엄인호의 ‘바람인가’와 최고의 발라드 작곡가 이영훈의 ‘빗속에서’를 엮은 메들리가 연주 집단의 정체성을 요약했다. 이정선의 펑키한 넘버 ‘산 위에 올라’와 비비킹의 기타에서 이름을 따온 한영애 보컬의 ‘루씰’까지 모든 곡이 매혹적이다.

가객 김현식과 소리의 마녀 한영애가 시대의 소리를 입혔다. 가요의 질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린 동아기획의 구성원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 전태관이 조력자로 나섰고 ‘나에게로의 초대’의 정경화가 코러스로 완성도를 높였다. 이정선과 엄인호가 합작한 마지막 앨범이 되었으나 한국 블루스의 화양연화를 빚어낸 < 신촌Blues II >는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선의 선정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 받았다.

< 신촌Blues III >(1990)
밴드의 축이었던 이정선이 떠나고 엄인호가 주도적으로 기획한 음반이다. 전반적으로 절제된 사운드가 처연한 감성을 살렸고 각양각색 보컬로 엄인호의 지휘 아래 음악공동체의 기량이 공고해졌다. 2집에서 코러스로 참여했던 정경화가 브라스가 강조된 재즈풍의 ‘비 오는 어느 저녁’과 절절한 ‘마지막 블루스’로 음반의 도입부를 책임졌다.

앨범 전반의 대중적 색채는 엄인호가 추구하는 블루스 가요와 맞닿아 있다. 정규 1, 2집을 통해 얻은 내공으로 선율과 분위기의 균형감도 구축했다. 엄인호는 적재적소에 블루스 터치를 가미했고 김영배와의 기타 하모니도 조화롭다. 손석우 작곡, 김현식 노래의 ‘이별의 종착역’이 특히 사랑받았지만 맨발의 디바 이은미의 가창에 이정식의 색소폰 연주가 어우러지는 ‘그댄 바람에 안개로 날리고’와 자취를 찾기 힘든 가수 김미옥이 부른 ‘비오는 날’도 여운을 남겼다.

< 신촌블루스 라이브 Vol. 1 >(1989) & < 신촌블루스 라이브 Vol. 2 >(1991)
두 장의 라이브 음반도 혁혁한 공로다. 1960년대부터 라이브 음반 제작이 활발했던 영미권과 달리 국내 밴드들은 기술적 장벽에 가로막혀 작업을 단념하곤 했다. 국내 라이브 문화를 대표했던 신촌블루스는 열악한 환경을 딛고 < 신촌블루스 라이브 Vol. 1 >과 < 신촌블루스 라이브 Vol. 2 >를 내놓았다. 관객과의 호흡에서 전해지는 생동감은 라이브 음반만의 매력. 신촌블루스는 후배들에게 용기를 심어주었다.

1989년 롯데 잠실 홀에서 녹음한 첫번째 라이브 음반 < 신촌블루스 라이브 Vol.1 >에선 한영애와 김현식 두 언더그라운드 슈퍼스타가 위력을 발휘했다. 자신의 대표곡 ‘누구없소’와 이정선의 ‘건널 수 없는 강’로 이어진 한영애의 무대는 스캣으로 즉흥성을 포착했고, 포효의 ‘떠나가 버렸네’는 김현식 탁성의 진면목이다. 관객의 호응을 고스란히 담아 순수한 형태의 라이브 음반을 지향했다.

서울가든호텔에서 녹음한 1991년 작 < 신촌Blues 라이브 Vol. 2 >는 보다 발전한 음향 기술로 라이브의 강점을 반영했다. 신촌블루스 4기 보컬 김형철과 ‘묻어버린 아픔’으로 알려진 김동환이 번갈아 가며 노래했다. 김동환의 야생적 가창은 ‘서로 다른 이유 때문에’와 ‘환상’으로 좌중을 휘어잡았고 엄인호는 ‘갈등’과 ‘마틸다’ 등 대다수의 곡에 목소리를 실었다. 첫 번째 라이브 음반과 마찬가지로 엄인호의 친형 엄인환이 색소폰을 맡았다.

신촌블루스는 현재진행형이다. 2021년에 한국 대중음악의 전설을 기록하는 < Return Of The Legends >에 참여했고 2022년에 엘피 붐에 발맞춰 정규 1집을 리이슈했다. 주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박보밴드와의 협업도 예정되어 있다. 2022년 11월 이즘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엄인호는 신촌블루스의 역사 계승 의지를 드러냈다. 한국 블루스의 명맥을 위해 힘닿는데 까지 노력하겠다는 것. 리더 엄인호를 주춧돌로 강성희, 제니스, 김상우로 이뤄진 보컬 라인에 이상진(베이스), 김준우(드럼), 안정현(키보드)로 구성된 음악공동체는 엔데믹 속 공연을 준비 중이다.

이미지 작업: 백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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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2022 에디터스 초이스(Editors’ Choice)

조금이나마 서로의 거리를 좁힐 수 있었던 한 해였다. 그간 억눌려있던 모든 것들이 터져 나왔듯 음악 역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들 앞에 나타났다. 희로애락으로 가득 찼던 2022년, 이즘 에디터의 일상을 파고든 노래는 무엇일까. 각자 취향을 녹여내 엄선한 플레이리스트지만 필자들이 독자 여러분에게 보내는 소소한 선물이기도 하다. 음악을 사랑하는 모두의 가슴 깊은 곳까지 진심이 전해지길 바란다.

정다열’s Choice

릴 나스 엑스(Lil Nas X) ‘Star walkin”
깜빡일지언정 멈추지 않았던 별들의 서사시.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250(이오공) ‘춤을 추어요’
세월에 익어 물든 기타 연주와 목소리를 벗 삼아.

언텔(Untell) < Human, The Album >
인간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근본적인 물음에 날을 부딪치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향연.

신해경 ‘리얼러브 (Feat. 청하)’
양극단의 아티스트를 이어준 오작교 위의 황홀경.

그웬노(Gwenno) < Tresor >
익숙한 듯 낯선 미지 세계 속 보물. 위로라는 감정에 언어 장벽이 무슨 소용인가.

장준환’s Choice

MJ 렌더맨(MJ Lenderman) < Boat Songs >
마이크(The Microphones)를 든 채 인도(Pavement) 위 나타난 현대판 ‘마티 맥플라이’.

길라 밴드(Gilla Band) ‘Post Ryan’
어느 날 자택으로 배달된 택배. 그리고 이 불길한 난수 암호에 빠져들게 된 당신.

선과영 < 밤과낮 >
실이 바쁘게 오가듯, 미소가 배시시 오가듯. 그 소박함이 넘실넘실.

펜타곤 ‘관람차 (Sparkling Night)’
빠져들기까지 10초, 벗어나기까지 10개월. 키노 감성의 무서운 마력이란.

파더 존 미스티(Father John Misty) < Chloë And The Next 20th Century >
세기를 연결하는 낭만의 무도회장. 미스터 틸먼, 나와 함께 춤을 추겠어?

염동교’s Choice

킹 기저드 앤드 리저드 위저드(King Gizzard & Lizard Wizard) < Ice, Death, Planets, Lungs, Mushrooms And Lava >
1970년대의 잼(Jam)이 그립다면.

톰 제(Tom Zé) < Língua Brasileira >
MPB와 트로피칼리아(Tropicália)의 거목, 건재함을 과시하다.

FKA 트위그스(FKA Twigs) < Caprisongs >
스멀스멀 중독성 있는 앨범. 자꾸 손이 간다.

메가데스(Megadeth) < The Sick, The Dying… And The Dead! >
역시 메탈리카보다는 메가데스! 여전히 날카롭고 신랄하다.

뷰 파르카 투레, 크루앙빈(Vieux Farka Touré, Khruangbin) < Ali >
나른한 아프로 사이키(Psyche). 결은 다르지만 진저 베이커와 펠라 쿠티의 협연이 떠오른다.

김성욱’s Choice

프로미스나인(fromis_9) ‘Dm’
머리 아픈 콘셉트들 사이 투명하게 빛나는 보석. ‘눈을 못 피하게, 말도 못 돌리게’ 만들었다.

리치맨과 그루브나이스 < Memphis Special One Take Live >
멤피스가 주목한 ‘우리들의 블루스’. 2022 올해의 발견.

야드 액트(Yard Act) < The Overload >
갱 오브 포와 카이저 치프스 그사이 어딘가. 신랄하고 유쾌한 브렉시트 시대의 포스트 펑크.

비치 하우스(Beach House) < Once Twice Melody >
비치 하우스의 모든 앨범을 사랑한다. 이 앨범도 그렇다.

씨에이치에스(CHS) ‘Highway’
‘여름’하면 떠오를 노래가 하나 추가됐다. 8월 휴가철, 꽉 막힌 서울양양고속도로 위에서 들어보자.

임동엽’s Choice

텐투포(10 to 4) < 말하기 듣기 쓰기 >
예측할 수 없는 아름다움.

힙노시스 테라피(HYPNOSIS THERAPY) < Hypnosis Therapy >
정말로 최면에 걸린 줄 알았다.

이권형 < 창작자의 방 >
그저 음악을 할 뿐.

Various Artists < Elvis (Original Motion Picture Soundtrack) >
위대한 유산.

원슈타인 ‘존재만으로’
막힘없이 편안하다.

김호현’s Choice

해파 < 죽은 척하기 >
불안은 이렇게 사랑을 끌어안고 기어이 잠깐의 휴식을 만들어 낸다.

이수정 & 강재훈 < Stellive Vol.56 | Duology: Live At Stellive >
한국 재즈의 미래를 이끌어 갈 차세대 주자들의 근사한 조합.

제이콥 콜리어(Jacob Collier) ‘Never gonna be alone (Feat. Lizzy McAlpine, John Mayer)’
천재 마케팅을 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로버트 글래스퍼(Robert Glasper) < Black Radio III >
벌써 세 번째 시즌을 맞이한 최첨단 흑인음악 실험실.

도미 앤 제이디 백(DOMi & JD BECK) < Not Tight >
재즈 역사를 이끈 거인들의 어깨 위에 새로운 세대가 올라서다.

손민현’s Choice

글렌체크(Glen Check) < Bleach >
아직 어른이 되긴 이르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차오른다.

이찬혁 < Error >
어떤 예술가의 기행은 시대를 여유롭게 스쳐가기도 한다, 파노라마처럼.

9와 숫자들 < 토털리 블루 >
코로나에 무뎌진 현대인들을 위한, 시기적절한 푸른 위로 한 가닥.

에이비티비(ABTB) < ⅲ >
더 거세게, 더 열정적으로, 더 록스럽게! 새 연료를 주입한 ABTB의 질주.

키스 에이프(Keith Ape) < Ape Into Space >
해묵은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해 주는 ‘Mull’.

한성현’s Choice

자브 이스…(JARV IS…) < This Is Going To Hurt (Original Soundtrack) >
자비스 코커만의 방식으로 보듬는 ‘따끔’한 세상살이.

1975(The 1975) < Being Funny In A Foreign Language >
괜히 머리 싸매지 말고 쉽게 쉽게 삽시다.

미츠키(Mitski) ‘Glide (cover)’
인간과 로봇,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기억. 에테르는 실존할지도 몰라.

트리플에스(tripleS) ‘Generation’
유닛 시스템, Z세대의 시대정신? 다 떠나서 그냥 즐겁게 랄랄라.

유아 ‘Lay low’
유혹 대신 냉소를 품은 세이렌의 노래지만 홀리는 건 마찬가지.

백종권’s Choice

일삼공공(1300) ‘Rocksta’
시드니에서도 한국 힙합. 음악으로 맺은 FTA.

잭슨(Jackson Wang) < Magic Man >
꾸준한 탈피의 결과물. 장난기 넘치던 악동이 제대로 마이크를 쥐었을 때.

엑스지(XG) ‘Tippy toes’
한국식 제조 과정으로 구현한 미국의 맛. – (Made in Japan)

버둥 < 너에게만 보여 >
올 한 해 발버둥이 석연치 않았다 해도. 나, 너, 우리를 위한 ‘응원’ 소곡집.

사커 마미(Soccer Mommy) < Sometimes, Forever >
웰메이드 얼터너티브 록이 선사하는 평온한 꿈의 체험. 옥에 티는 풋볼 마미가 아니라는 점.

소승근’s Choice

우아!(woo!ah!) ‘별 따러 가자’
이 노래는 우아!가 과소평가받고 있다는 가설을 확인시켜준다.

우연, 민서 ‘Make u move’
브레이브걸스의 ‘운전만해’ 이후 최고의 시티팝.

트라이비(TRI.BE) ‘In the air (777)’
말이 필요 없다. 이게 대중음악이다. 최고의 야구 응원가.

뉴진스(NewJeans) ‘Hype boy’
대중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주요 멜로디와 쉬운 안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이채연 < Hush Rush >
수록곡이 적다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다.

정리 및 이미지 편집: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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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Splash of the Year 2022

Splash of the Year : 한 해를 조각내 음악 신의 주목해 볼 사건을 뽑는 이즘 내 연례행사.

명쾌하게 정리하기 힘든 1년이 지나갔다. 코로나19를 딛고 일어난 국내 문화계가 서서히 부활의 움직임을 보이기도, 동시에 안타까운 사건 사고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음악은 계속되고 삶은 흘러가니까. 어느덧 10주년을 맞이한 스플래시와 함께 2022년 가요계를 돌아본다.

배신 또는 오해, 표절 논란
시작은 유희열이었다. ‘생활음악’ 프로젝트로 발표한 ‘아주 사적인 밤’이 류이치 사카모토의 ‘Aqua’와 유사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관련 의혹이 빠른 속도로 불거졌다. 그가 작곡한 성시경의 ‘Happy birthday to you’, < 무한도전 > 가요제 프로젝트 곡인 ‘Please don’t go my girl’ 등도 연이어 도마 위에 올랐다. 이후에도 이무진 등 여러 뮤지션에게 표절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며 2022년 상반기는 여러모로 시끄러웠다.

일련의 사태에 대해 ‘레퍼런스’나 정확하게 판정할 수 없는 문제라는 반론도 곳곳에서 등장했고, 논란을 조회수 삼으려는 각종 유튜브 채널이 다소 억지 프레임을 씌우는 현상도 나타났다. 예술의 특성상 문제를 깔끔하게 종결하긴 힘든 노릇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표절’이라는 키워드가 모두의 의식 속에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드디어 돌아온 페스티벌과 공연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았던 공연 문화가 서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언택트 공연 등 대체 수단이 등장했지만 현장의 맛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 서울 재즈 페스티벌부터 인천 펜타포트, 부산 록 페스티벌 등 각종 행사가 개최되었고, 빌리 아일리시와 잭 화이트를 비롯해 여러 굵직한 뮤지션의 공연도 이뤄졌다. 풀리지 않은 규제로 마스크의 답답함은 있었으나 열정과 사랑으로 극복한 순간이었다. 아직은 완전한 정상화를 위한 예열과 시동 단계일 테지만, 억눌렀던 마음만큼 열기도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트렌드의 중심이 된 1990년대
2010년대 초중반부터 시작된 1980년대 신스팝과 디스코, 펑크(Funk) 열풍은 2020년대 본격적인 폭발을 통해 국내에도 유입되었다. 변화를 촉발한 것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 팝 펑크(Pop Punk)다. 2021년 블링크 182의 드러머 트래비스 바커를 주축으로 영미권의 머신 건 켈리, 올리비아 로드리고 등이 이끈 장르의 재부흥을 K팝 또한 재빠르게 수용했다.

태연의 ‘Can’t control myself’와 최예나의 ‘Smiley’, 우즈(WOODZ)의 ‘난 너 없이’ 등이 강렬한 기타 사운드와 더불어 이모(Emo) 감성을 일부 벤치마킹한 비주얼을 내세웠다. 정점은 단연 (여자)아이들의 ‘Tomboy’. 앨라니스 모리셋 등 록 여성 뮤지션의 정신을 받아들여 매혹적인 팝 선율, 거침없는 펑크(Punk)의 태도를 모두 끌어안았다. 음원에는 삭제된 욕설까지 함께 소리치던 대학 축제 풍경은 화끈함의 극치였다.

가지는 다른 곳으로도 뻗어나갔다. 아이브의 ‘After like’는 댄스 음악 장르인 하우스 리듬을 기반 삼았고, 뉴진스의 ‘Attention’과 ‘Cookie’는 비슷한 시기의 힙합과 알앤비 장르를 채택했다. 큰 유행이 된 Y2K 콘셉트를 여러 팀이 전격 채택한 것은 덤. 윤하의 ‘사건이 지평선’이 역주행한 원인도 비슷하다. 일본 애니메이션 오프닝을 연상케 하는 아련한 분위기가 2000년대 초 TV 만화 채널을 추억하는 젊은 층의 향수를 자극한 것이다. 1990년대생의 문화가 차츰 향수의 대상으로 편입되고 있는 현상을 음악에서도 목격할 수 있었다.

중요한 건 마인드 셋, 거장의 귀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적어도 음악에서는 그렇다. 베테랑 뮤지션들이 돌아오면서 오랜 세월 쌓은 관록만큼이나 식지 않은 에너지로 대중을 놀라게 했다. 먼저 꾸준한 바이닐과 시티팝 유행에 힘입어 5월에는 빛과 소금이 26년 만에 새 정규 앨범 < Here We Go >를 발표했다. ‘공유’의 시대를 거슬러 음악을 ‘소유’하려는 자연적인 수요와 맞닿은 점에서 의미가 깊다. 송골매 또한 ‘열망’ 콘서트로 전국을 누비며 기성세대 못지않게 젊은 세대까지 관객석으로 초대했다. 7월 서울 공연을 시작으로 11월 인천 공연까지 성행하며 곳곳에서 환호성이 이어졌다.

방송 업계에서도 컴백은 이어졌다. KBS의 < 불후의 명곡 >이 2012년 은퇴 선언을 했던 패티김을 초청해 3부에 걸쳐 특집을 꾸렸고, 그 또한 무대에 올랐다. 이미자 또한 TV조선의 러브콜을 받아 데뷔 63주년 기념 특별 공연을 개최했고, MBN의 트로트 프로그램에서는 심수봉을 심사위원으로 캐스팅하기도 했다.

그리고 역시 ‘가왕’은 ‘가왕’. 조용필이 스무 번째 정규 앨범의 예고편으로 신곡 ‘찰나’와 ‘세렝게티처럼’을 선보인 데에 이어 KSPO 돔에서 밴드 위대한 탄생과 함께 압도적인 규모의 콘서트를 개최했다. 전혀 늙지 않은 음악으로 돌아온 그, ‘영원한 오빠’ 수식어는 2020년대에도 공고했다. ‘물리적 나이보다 마인드 셋이 중요’해진 오늘날의 새로운 가치를 느껴본다. 어찌 보면 키워드는 ‘귀환’이 아니라 ‘소통’이다.

여성 아이돌 르네상스
엠넷 < 프로듀스 > 시리즈의 성공 이후 여러 그룹이 팀 단위보다는 개별 멤버 위주의 팬덤 구축과 세계화에 힘을 서서히 쏟기 시작했다. 쉽게 읽히지 않는 ‘세계관’과 가끔 난해하기도 한 콘셉트에 여성 아이돌이 예전만큼 대중적 지지를 받기는 힘들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흐름을 깨고 돌아온 2022년 걸그룹 르네상스는 그래서 더욱 반갑다.

‘Love dive’와 ‘After like’를 연속 히트시킨 아이브가 선두 주자로 올라선 가운데 같은 아이즈원 파생 그룹 르세라핌은 데뷔 초 여러 논란을 딛고 ‘Antifragile’을 흥행에 성공시키며 재빠르게 입지를 굳혔다. 남다른 방식으로 첫선을 보인 뉴진스 또한 ‘Attention’과 ‘Hype boy’로 동시에 돌풍을 일으키며 대세 자리를 놓고 전투를 벌였다. 스테이씨의 ‘Run 2 u’, 있지의 ‘Sneakers’, (여자)아이들의 ‘Tomboy’와 ‘Nxde’ 등 신세대 걸그룹의 치열한 각축전으로 바쁜 1년이었다.

선배들도 만만치 않았다. 레드벨벳이 ‘Feel my rhythm’으로 클래식 샘플링 트렌드를 이끌며 여전한 저력을 보여준 한편 블랙핑크는 미국과 영국 앨범 차트 1위에 모두 올라 글로벌 시장 점령을 이어 나갔다. 트와이스의 나연은 숏폼 플랫폼에서 안무 챌린지를 적극 활용해 첫 솔로 싱글 ‘Pop!’을 화려하게 터뜨렸다. ‘Forever 1’으로 15주년을 풍성하게 기념했던 소녀시대와 7년 만에 다시 모인 카라까지, 신예들과 익숙한 이름의 공존에 2022년 K팝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이에 반해 타겟층이 일반 대중에서 구매력이 높은 팬덤으로 많이 기울어진 남성 아이돌은 상대적으로 싱글 차트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물론 각종 콘텐츠의 범람으로 소비자층이 세분화됨에 따라 ‘국민가수’나 ‘국민가요’가 만들어지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고, 애초에 보이그룹의 목표가 공연이나 음반으로 옮겨간 지도 오래다. 그러나 이를 감안하더라도 보이그룹의 목소리가 예전처럼 거리에서 울려 퍼지던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꺾이지 않는 장기 지배, 힙합 정권 40년
얼마 전, 요즘 초등학교에서 여학생들이 걸그룹 안무를 따라 한다면 남학생들은 지코의 ‘새삥’ 챌린지에 열심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국내 음악 시장에서 힙합이 이제 하나의 별종이 아니라 굳건한 주요 장르가 되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올해 무려 열한 번째 시즌을 방영 중인 < 쇼미더머니 >와 여러 밴드가 나선 경연 프로그램 < 그레이트 서울 인베이전 >의 시청률 차이만 봐도 명확하다. 해외 못지않게 국내에서도 주도권은 힙합에게 완전히 넘어왔다.

1980년대 중반 국내에 처음 알려진 이후로 서태지와 아이들을 타고 본격 유입을 겪은 힙합/알앤비는 40여 년 동안 꾸준히 자리를 넓히며 세력을 키웠다. 비오의 ‘Love me’, 빅 나티의 ‘정이라고 하자’, 그리고 크러쉬의 ‘Rush hour’ 등 차트에는 아직도 여러 히트곡이 포진해 있다. 록 페스티벌의 부활 사이 함께 돌아온 대구 힙합 페스티벌까지, 어느덧 익숙해진 힙합 강국의 면모다.

BTS 병역 논란
엄밀히 말하면 ‘가요’계 사건은 아니지만, 방탄소년단의 병역 문제가 올 한 해 계속해서 화두에 올랐다. 국위선양의 공로를 높게 사 병역 면제를 논하는 입장과 형평성을 거론하며 반대하는 측의 논쟁이 활발히 벌어지며 일반 대중에게도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유승준과 MC몽 등 남성 뮤지션의 입대 문제로 여러 차례 논란을 겪었기에 어쩔 수 없이 떠오른 문제였다.

사안은 결국 방탄소년단의 입대로 끝을 맺었다. 맏형인 진이 12월 13일 최전방인 연천 지역 신병교육대에 입소한 것. 같은 날 솔로곡의 가사가 도마 위에 올랐던 멤버 슈가는 어깨 수술을 근거로 공익 판정을 받았다. 나머지 멤버들의 계획은 아직 미정이나 그룹 활동의 중단 이후 여러 멤버가 솔로 음반을 발표하면서 개인 커리어를 확장해가는 중이다.

다른 예술/체육 분야의 병역 특례와 엮이며 제도 자체의 존폐 여부까지 나왔던 주제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풀리지 않는 숙제를 끄집어냈다. 성별과 세대 갈등까지 연결되는 두 글자, ‘군대’. 그러나 병역이 아직까지 ‘의무’인 국가에서 이를 일종의 ‘형벌’의 차원으로 보는 시선도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다. < 100분 토론 > 임진모 평론가의 말처럼, ‘대중에게서 기억되고, 인정과 사랑을 받는 것이 가장 큰 특혜’ 아닐까.

사각지대 속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아티스트 착취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는 말도 있지만 최근 뉴스에서 떠오른 헤드라인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먼저 11인조 보이그룹 오메가엑스의 갑질 피해 소식이었다. 소속사 대표에게 멤버들이 폭행당했다는 사실이 해외 소셜 미디어를 통해 알려졌고, 이후 온갖 피해 내역에 대해 직접 입을 열었다. 성희롱부터 시작해 코로나19 감염에도 불구하고 강압적으로 무대를 섰다는 사실, 온갖 폭언과 협박 내역이 밝혀졌다.

‘내 여자라니까’로 데뷔해 한때 ‘국민 남동생’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던 이승기 또한 소속사 후크 엔터테인먼트에게서 음원 수익을 전혀 정산받지 못한 사실이 언론에 드러났다. ‘적자 가수’라는 비하 발언을 했던 대표는 현재 수익 횡령 의혹까지 불거졌다. 상황이 채 식기도 전에 이번에는 한창 여러 방송에서 활약 중인 가수 츄가 소속 그룹 이달의 소녀에서 강제로 퇴출되는 일이 벌어졌다. 큰 물의를 일으켰던 연예인이라 하더라도 대부분 중립적인 언어로 계약 해지 사실을 밝혔던 여러 선례에 비하면 ‘제명’과 같은 언어를 사용한 블록베리 엔터테인먼트의 글은 다소 악의적으로 보인다. 소속사의 입장문이 주변인들의 증언으로 반박되며 나머지 이달의 소녀 멤버들이 계약 해지 소송에 들어갔다는 소문도 퍼진 사이, 1월로 예정된 그룹의 컴백 소식이 갑작스레 공개되어 혼란을 야기했다.

한때 범람했던 가요계 계약 문제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지만 음악과 뮤지션이 돈의 논리에 의해 지나치게 좌지우지되는 모습은 착잡함을 안긴다. 정녕 음악이 순수한 존재로 남을 수는 없을까, 바란다면 너무 비현실적인 것일까. 다가오는 2023년에는 조금 더 깨끗하고 공정한 음악 산업 소식이 많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어본다.

이미지 편집: 정다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