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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 김도헌의 Twist And Shout

LP의 화려한 부활 그 아래 불안감

1980년대 오래된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레이첼 조이스의 소설 ‘뮤직 숍’은 시대의 흐름 속 왜 다시 엘피(LP)가 사랑받는지를 명쾌히 요약한다. (엘피는 음반 규격을 의미하는 용어로 아날로그 음반을 통칭하기 위해서는 ‘바이닐’이라 지칭하는 것이 맞다.)

“시디(CD)가 여러모로 편리하긴 하지만 엘피판의 그윽하고 멋스러운 느낌을 따라갈 수는 없어. 다들 두고 보면 알겠지만 시디의 유행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야. 소장 가치가 없으니까.

‘뮤직 숍’의 예언대로 바이닐 판은 시디의 권위를 박탈했다. 지난해 미국에서 LP는 2,754만 장이 팔려나가며 1991년 이후 최다 판매량을 기록했다. 2006년 이후 꾸준한 판매 증가세를 보이더니 1986년 이후 34년 만에 시디 매출을 뛰어넘은 것이다. 피지컬 음반 소비가 나날이 줄어드는 가운데서도 시디 매출이 전년 대비 48%나 감소할 때 LP는 꾸준한 구매 상승률을 보여왔다.

5년 전쯤만 해도 레코드 숍에 들러 바이닐을 구입하는 이들은 이른바 ‘레트로 마니아’들이었다. 벌집 같은 박스 속 가늠할 수 없는 시간과 수없이 많았을 공간의 이동을 거쳐 도착한 중고 판들 가운데 나만의 보물을 찾아 나서는 ‘디깅(digging)’ 족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관심은 사뭇 다르다. 코로나 19로 한 풀 꺾이기 전 ‘서울 레코드페어’와 같은 레코드 행사장은 인산인해를 이뤘고, 지금도 한정반을 구하기 위해 매장 앞에서 줄을 서고 인터넷 예약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다.

바이닐의 위상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두 가지 키워드가 있다. 첫째는 감성이다. 바이닐을 통해 음악을 듣는 행위 자체가 MZ세대에게 쿨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민 없이 터치 몇 번이면 평생 들어도 모자랄 수의 노래를 추천받는 스트리밍 시대의 음악 감상은 익숙하고 건조하다. 바이닐 감상은 다르다. 오래도록 판을 고르고, 턴테이블을 세팅하고, 오디오 시스템을 만든 다음 바늘을 올리기까지의 섬세한 과정이 필요하다. 다시 한번 ‘뮤직 숍’의 한 구절을 가져온다.

나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음악이 좋아요. 엘피판을 들으려면 제법 번거로운 과정이 있죠. (…) 엘피판은 반드시 손으로 들고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흠집이 나 판이 튀기도 해요. 엘피판은 세심하게 신경 써주어야 깊고 그윽한 음질로 보답하죠. (…) 삶을 축복해 주는 음악을 들으려면 기꺼이 그 정도 수고쯤은 감수해야죠.

과장 좀 보태 신세대 음악 팬들에게 바이닐 감상은 경량화된 형태로만 존재했던 음악 감상을 신성한 의식으로 끌어올리는 새로운 경험이다. 음악을 듣지 않아도 좋다. 세워두기만 하면 인테리어 소품, 인스타그램 계정을 장식할 좋은 도구가 된다. 심미적인 차원에도 타 매체에 앞선다. 제작사들도 이를 파악하여 레코드판에 색을 입힌 컬러 바이닐을 제작하고, 일반 앨범 커버와 다른 감각적인 새로운 디자인을 채택하며 음악 감상 이상의 가치를 부여한다. ‘어떤 음악을 듣느냐’보다 ‘어떻게 음악을 듣느냐’가 중요해진 시대에 LP의 강점이다.

두 번째 이유는 래플(raffle)과 리셀 문화다. 복권 혹은 응모권을 의미하던 래플은 선착순 판매 드롭(Drop) 마케팅과 반대되는 추첨식 판매 마케팅이다. 기업들은 고급 운동화 혹은 한정판 패션 아이템 구매의 기회를 응모와 추첨으로 진행하고, 당첨된 소비자들은 제품을 구매한 다음 직접 사용하거나 구매한 물건을 되파는 리셀을 선택한다. 래플 마케팅을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신발 시장에서는 신발과 재테크의 합성어인 ‘슈테크’, ‘스니커 테크’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리셀’ 문화가 일반화되어있다. 

최근 레코드판의 소비 유형도 이와 유사한 흐름을 보인다. 바이닐 레코드를 제작하는 공장의 수가 줄어들며 긴 제작 기간과 한정된 수량의 리스크를 감당해야 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품귀 현상’을 불러오며 희소가치를 높였다. 오래전 제작된 데다 보존 상태까지 좋은 제품이 빈티지 숍에서의 상품처럼 비싸게 거래되고, 인기 가수들은 그들의 신보를 한정판으로 제작해 일반 시장에서 구할 수 없는 제품임을 강조한다.

일련의 흐름에 힘입어 한국 엘피 시장은 작지만 탄탄한 구매층을 확보하며 저변을 넓히고 있다. 2016년 28만 장에 그쳤던 국내 엘피 판매량은 2019년 60만 장까지 증가했다. 특히 지난해에는 2019년 대비 73.1% 성장세를 보였다. 세월의 흐름에 사라진 공장이 다시 문을 열고, 유명 아티스트들부터 케이팝 아이돌까지 한정반부터 일반반까지 다양한 판을 발매하고 있다. 

2,000장 한정 제작된 백예린의 첫 정규 앨범 < Every letter I sent you. > 한정판이 발매와 동시에 품절됐고, 16년 만에 바이닐 판으로 재발매된 이소라의 < 눈썹달 > 한정판 3천 장이 예약 판매 1분 만에 매진됐다. 이외에도 듀스의 < Deux Forever >, 이승환의 < Fall To Fly >, 김동률의 < 오래된 노래 > 등이 레코드판으로 다시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중고 거래도 만만치 않다. 일례로 유재하의 < 사랑하기 때문에 > 담배 연기 디자인의 초반 엘피는 중고 시장에서 1,000만 원에 거래된다. 아이유의 < 꽃갈피 > 미개봉 한정 LP는 중고가가 무려 200만 원이다. 

디지털의 시대 아날로그의 가치가 ‘뉴 노멀’로 자리 잡아가는 광경은 분명 흥미롭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근의 바이닐 생산 및 소비 시장이 마냥 긍정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우선 비용 문제다. ‘음악에 돈 쓰는 것을 두려워하다니!’라 비판한다면 할 말 없다. 하지만 과거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작된 음원을 담은 판이라면 모를까 디지털 방식으로 제작된 음원을 마스터링만 한 최근 생산품의 가격이 5~10만 원 사이에서 형성되는 것은 의아하다. 가격이 높으면 그만큼의 품질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내부 구성이 충실한 것도 아니며 판의 만듦새도 좋지 못하다. 한정판이라는 이름으로 높은 가격을 책정하지만 수요는 넘치고 생산은 제한되어 있으니 질적 검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단적으로 백예린의 < Every letter I sent you. > 일반반과 이소라의 < 눈썹달 > 한정반의 경우 제작 불량으로 인한 음질 문제가 불거지며 제작사에서 불량판에 대한 교환을 진행해야 했다. 제작 단계부터 마스터링 과정까지의 변수가 상당한데도 가격은 언제나 높다. ‘뮤직 숍’의 주인공이 말하는 ‘깊고 그윽한 음질’을 듣기 위해 턴테이블, 스피커, 기타 장비들을 세팅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재 엘피 가격은 너무 비싸다. 

리셀이 여기서 다시 한번 문제가 된다. 최근 한국 바이닐 시장에는 한정반만 있을 뿐 일반반이 드물다. 신보나 재발 매반의 경우 굳이 ‘한정’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희소성을 강조한다. 물론 바이닐 수요층의 규모가 확실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제한적인 생산 및 판매 방식을 진행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높은 가격과 어려운 구매 과정만큼 품질도 좋아야 하는데 바로 위에서 말한 것처럼 만족스러운 경우가 거의 없다. 심미성을 위해 음질이 떨어지는 컬러 바이닐을 택하고, 몇 가지 추가 구성품을 더한 것으로 높은 가격의 이유를 대신한다. 

그럼에도 대부분 한정반들은 발매와 동시에 품귀 현상을 빚으며 원래 가격의 4~5배 상당으로 중고 거래가 이루어진다. 중고 거래를 위해 판을 구입한 후 비싼 ‘플미(프리미엄)’을 붙여 판매하는 ‘리셀러’들의 횡포에 음악을 듣고 싶은 대중은 기회를 놓치거나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중고반을 구입한다. 백예린, 김동률, 이승환 등이 중고 거래의 횡포를 지적하며 ‘리셀 금지’를 호소했지만 근본적인 마케팅과 생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양심에 호소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유명 레코드 숍 ‘김밥레코즈’는 지난 26일 공식 인스타그램을 통해 청하의 < Querencia > 한정반 엘피 발매 소식에 개인 의견을 전개하며 “일반적인 커팅, 일반적인 프레싱, 그리고 특별할 것 없는 패키지인데 가격만 특별한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라 주장했다. 수요가 늘어난 만큼 한정반뿐 아니라 일반반, 디럭스 등 다양한 옵션을 제공하여 소비자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주장이다. (< Querencia > 엘피는 기본 가격이 114,900원, 할인가 95,800원이다.)

바이닐 시장은 계속 성장할 것이다. 음악이 머천다이즈(MD)화 되는 것을 개탄하는 일부 음악 팬들의 시선도 있지만 음악 감상의 물리적 주 매체를 바이닐로 인식하고 있는 현세대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음악을 ‘구입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치가 있고, 그 인원의 증가는 늘어나는 판매량과 꺼지지 않는 수요로 증명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의 흐름 속에서 ‘뮤직 숍’처럼 음악을 소중하게 듣고자 하는 팬들을 위한 자리가 점차 좁아지는 듯한 일말의 불안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바이닐 판을 일부 소수 마니아들의 취향, 시디나 스트리밍과 구분되는 고급 매체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소중히 용돈을 모아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소위 ‘빽판’을 구입해 밤새 턴테이블 위 돌아가는 레코드판을 바라보던 경험의 세대라면, 레트로에 열광하는 신세대에게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할 생각을 하는 대신 음악의 신비로운 경험을 보다 손쉽게 제공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음악의 진입장벽은 낮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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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김도헌의 Twist And Shout

레베카 블랙, 최악의 가수를 넘어

‘졸작’은 무엇일까? 뜻을 묻는다면 ‘잊히게 될 작품’이라 답하겠다. 하루에도 셀 수 없이 쏟아지는 창작물들, 그 와중 준수한 결과물을 움켜쥐려 애쓰다 보면 나머지는 붙잡으려 해도 기억 속에서 떠내려가고 만다. 평범한 것들에도 그럴진대 미진한 완성도에는 더욱 여유를 두기 어렵다.

그런데 어떤 졸작은 상식 이상으로 형편없는 탓에 폭발적인 조롱이 쏠려 망각의 운명을 거부하고 유명해진다. 인터넷 용어로 ‘밈(Meme)’이 되어 유행 요소로 자리잡기도 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재평가가 이루어지며 명예를 회복(?) 하기도 한다. 대개 사소한 범작은 변화를 일궈내지 못하지만, 거대한 실패는 정말로 성공의 어머니가 된다.

레베카 블랙(Rebecca Black)은 한 때 역사상 최악의 가수였다. 그는 인터넷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졸작 노래 ‘Friday’의 주인공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레베카는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로 유튜브에서 가장 많은 ‘싫어요’를 받은 사람이 됐다. 팝스타 저스틴 비버의 ‘Baby’의 ‘싫어요’를 뛰어넘은 120만 개의 ‘싫어요’였다. 2021년까지 유튜브 조회수는 2억 회에 달한다.

지금은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왔지만 여전히 2021년 기준 381만 ‘싫어요’를 기록하며 유튜브 역사상 가장 많은 ‘싫어요’ 순위에서 20위에 올라있다. 대개 ‘싫어요’는 많은 ‘좋아요’가 감당해야 할 세금 같은 것이지만, ‘Friday’의 경우 ‘좋아요’와 ‘싫어요’의 비율이 1:3에 달한다. 이것도 시간이 흘러 많이 개선된 것으로 한때는 ‘싫어요’ 비율이 88%에 달하기도 했다.

2011년 당시 13세였던 레베카 블랙은 가수가 아니었다. 춤과 보컬 레슨을 받긴 했지만 프로 뮤지션으로의 의식은 희미했다. ‘Friday’는 노래를 좋아하는 딸을 위해 레베카의 부모님이 ARK 뮤직 팩토리(ARK Music Factory)라는 작은 회사에 4천 달러를 지불하고 받은 곡과 뮤직비디오였다.

rebecca black friday hate 이미지 검색결과

당시나 지금이나 한 번이라도 ‘Friday’를 들어보면 잔인한 ‘싫어요’ 수치가 근거 있는 의사 표현(?) 임을 알 수 있다. 금요일에 들떠 신나는 주말을 보내자는 주제 아래 ‘어제는 목요일, 오늘은 금요일, 내일은 토요일, 그다음은 일요일’, ‘즐거워 즐거워 즐거워 즐거워’ 등 작정하고 쓰기도 어려운 노랫말이 이어진다. 불안한 목소리는 기계 보정으로 해결해 더욱 기이하게 들린다. 여기에 꽤 공을 들여 촬영한 뮤직비디오에서 단 하나의 표정으로 일관하는 레베카 블랙의 어색한 연기가 정점을 찍었다.

‘Friday’는 공개와 동시에 유명해졌다. 너무 못 만들었다는 이유로 조회수가 폭주했고 셀 수 없이 많은 패러디 영상이 파생됐다. 그 해 빌보드 싱글 차트 58위까지 오른 곡이 되며 상업적으로도 예상치 못한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열세 살 소녀에게 세간의 조롱과 혐오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레베카 블랙은 왕따를 당해 학교를 자퇴해야 했으며 세계적으로 달리는 악성 댓글에 우울증을 앓았다. 유튜브 영상을 유료화하려는 ARK와 법정 공방을 벌이기도 했다.

대부분이 기억하는 레베카 블랙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팝 음악에 관심이 있다면 이후 팝스타 케이티 페리의 ‘Last friday night’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레베카의 모습을 기억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가수로 데뷔하게 된 레베카가 이후에도 꾸준히 가수 활동을 이어나갔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드물다.

‘Friday’ 이후에도 레베카는 꾸준히 싱글을 발표하며 불현듯 찾아온 유명세를 기회로 삼았다. 2013년에는 ‘Friday’의 후속곡 ‘Saturday’를 발표하며 즐기는 모습을 들려줬고, 팝스타 마일리 사이러스의 노래를 커버하며 실력도 쌓아나갔다.

2016년 본인의 이름을 걸고 발매한 싱글 ‘The great divide’는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기계음 가득한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준수한 가창력으로 무대를 즐기는 레베카 블랙이 있었다. 올해 초에는 싱글 ‘Girlfriend’를 발표하며 퀴어 커뮤니티에 대한 응원과 지지 메시지도 밝혔다. 비로소 사람들이 ‘Friday’ 대신 아티스트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난 11일 레베카 블랙은 ‘Friday’의 10주년 기념 리믹스 버전을 공개했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다. 2010년대 초 인기를 얻은 일렉트로닉 듀오 3OH!3, 베테랑 뮤지션 빅 프리디아와 신진 팝 가수 도리안 일렉트라가 레베카 블랙의 새 출발을 함께했다.

‘하이퍼 팝’이라 불리는 스타일의 대표 그룹 100 겍스(100 gecs)의 딜런 브래디가 프로듀싱한 곡은 세련된 케이팝처럼 다양하게 변주되고 왜곡된다. 미래 지향적인 옷을 입고 웃음 짓는 뮤직비디오 속 레베카 블랙은 수많은 밈과 함께 스스로를 희화화한다.

리믹스 발표 후 가진 ‘빌보드’와의 인터뷰에서 레베카 블랙은 10년 전 ‘Friday’를 이렇게 회고했다. “저는 13살이었어요!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죠. 하지만 그게 13살 아닌가요?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사랑하고 있잖아요. 정말 멋져요.”.

누구든 실패할 수 있다. 극소수의 천재들만이 처음부터 성공한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비로소 무언가를 만들어내거나 그러지도 못하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인 삶이다. 그 과정에서 전 세계인이 ‘싫어요’를 누르는 최악의 작품을 만들 수도 있다. 

동시에 운명은 공평하다. 향후 레베카 블랙이 아티스트로 성장할지 ‘Friday’에 머무를지는 모르지만, 고통스러운 조롱과 시련 속에도 성실했고 ‘유명한 졸작’의 주인공임을 자랑스레 자청하며 대중의 시선을 바꿨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제 누구도 그를 미진하거나 형편없다고 조롱하지 않는다.

작품은 잊힐지언정 사람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결과물에 대한 평가는 냉철하되 창작가에게는 따스하게 다가서야 하는 이유다. 졸작에도 기회는 있다. 함께 가라앉거나, 실패를 디딤돌 삼아 다음 단계로 성장하거나. 선택은 도전하는 자만이 가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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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김도헌의 Twist And Shout

경이로운 ‘소울’의 음악세계

< 소울(Soul) >이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최고 작품은 아닐 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고의 음악 영화임은 분명하다. 흑인 재즈 피아니스트 조 가드너(제이미 폭스 분), 태어나지 않은 영혼 22(티나 페이 분)의 하루를 그린 이 작품은 반복되는 일상 속 삶의 가치를 다시 묻고, 모든 것의 근원으로 거슬러올라가 세계 속 개인을 곱씹게 만든다. 그 핵심 가치의 은유 도구가 음악이다. 영화는 불협화음으로 시작해 영적인 즉흥을 거쳐, 존재 자체로 빛날 수 있는 황홀경을 향해 나아간다.

 < 인사이드 아웃 >에 이어 다시 메가폰을 잡은 감독 피트 닥터는 유년기 음악을 가르쳤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더블 베이스를 연주한 아마추어 재즈 뮤지션이었다. 자연히 재즈의 팬으로 자란 그는 제작 회의 중 우연히 누군가가 언급한 허비 행콕의 온라인 마스터클래스 영상을 시청한 후 주인공 조의 직업을 결정했다. 영상 속에서 허비 행콕은 투어 중 마일스 데이비스와의 합동 공연을 회상하는데, 워낙 큰 무대에 긴장한 나머지 연주 중 그만 음을 틀려버렸음에도 마일스가 곧바로 흐름을 이어 즉흥으로 연주를 진행했다는 일화를 들려준다. 

거장의 유연한 대처 일화는 삶의 지향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영화 주제로 이어졌다. 조 가드너는 재즈 뮤지션이었던 아버지를 동경하며 음악가의 길을 걷고자 하나 집안의 반대와 경제적 사정에 부딪쳐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친다. 학교 밴드 아이들과 씨름하면서도 조는 어린 시절 그를 매료시킨 클럽에서 밴드의 일원으로 공연하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조 가드너의 아이디어, 악기, 연주, 노래가 될 아티스트로 < 소울 > 제작진은 1986년생 재즈 뮤지션 존 바티스트(Jon Batiste)를 낙점했다. 존은 젊은 나이에도 그래미 어워드 3회 노미네이트 된 실력자이며 현재 ‘더 애틀랜틱’과 뉴욕 할렘 재즈 박물관의 음악 디렉터, 미국 CBS의 ‘레이트 쇼 위드 스티븐 콜베어’ 쇼 음악 감독을 맡은 대세 뮤지션이다. “영적인 장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며 조화롭고 멜로디가 살아있는, 리듬감 있는 음악”을 생각하며 존은 재즈를 기반으로 한 알앤비, 소울, 클래식 사운드트랙을 자유로이 선보였다. 

고전과 현실을 오가는 활기찬 연주가 ‘누구도 걷다가 멈추지 않는 도시’ 뉴욕의 조 가드너를 숨 쉬게 한다. 극 초반부터 화려한 연주로 재즈 클럽에서의 오디션과 들뜬 마음을 표현하더니, 중후반부부터는 ‘뉴욕 영화’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만큼 도시의 소음과 일상의 사물과 함께 일상의 경이로움을 발굴하는 데 앞장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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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비 행콕부터 테리 린 캐링턴, 퀘스트러브 등 신을 이끄는 다양한 뮤지션들이 자문을 더하며 고전에 대한 경의도 잊지 않았다. 데이브 브루벡 쿼텟의 ‘Blue rondo a la turk’, 월터 노리스의 ‘Space maker’, 듀크 피어슨의 ‘Cristo Redentor’ 등 과거의 명곡이 사운드트랙 곳곳에서 변주된다.

“우리 밴드의 음악 연령대는 95세부터 19세까지다!”. 존 바티스트의 자랑스러운 선언대로 < 소울 >의 음악은 세대 무관이다. 올드 재즈 팬부터 신세대 베드룸 알앤비 싱어송라이터까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무아지경의 세계 속 자유로이 발걸음을 옮기는 연주의 즐거움과 쾌감이 영화의 주제 의식을 자연스레 옮기는 것은 덤.

1963년 커티스 메이필드가 작곡한 임프레션스의 고전 ‘It’s all right’ 역시 존의 손 끝에서 극의 마지막을 잔잔하게 빛낸다. 정말로 ‘손 끝’이다. 실제로 영화 속 조의 연주 장면은 존의 실황을 촬영해 모션 캡처로 옮긴 결과물이니까.

그토록 바라던 재즈 밴드의 일원이 된 조. 벅찬 감정에 발 밑을 제대로 살피지 않다가 그만 하수구에 빠져 ‘태어나기 전 세상’으로 가고 만다. 피카소의 입체파 그림을 닮은 형이상학적 존재 ‘관리자’들과 무한한 영혼들이 신비로운 풍경을 이루는 이 곳에서 음악의 문법도 빠르게 전환된다. 리얼 세션 재즈에서 영롱하고 광활한 앰비언트가 장엄한 소리의 안개를 펼친다. 

이 세계의 설계자들이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다. 음악 팬들에게는 나인 인치 네일스로 유명한 이름이다. 1994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온 몸에 진흙을 뒤집어쓰고 인간의 음울과 고통을 절규하듯 토해내던 인더스트리얼 밴드를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던지 이들의 참여 소식은 영화 개봉 전부터 화제였다. 정작 트렌트 레즈너는 “픽사만큼 애니메이션을 잘 만드는 곳은 없다”며 반가운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다고. 

21세기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는 나인 인치 네일스보다 사운드트랙 작곡가로 더욱 유명하다. < 소셜 네트워크 >, < 나를 찾아줘 >, < 버드 박스 >, < 맹크 >까지 유수의 영화 사운드트랙을 담당했고 특히 2010년 < 소셜 네트워크 >로는 2010년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검증된 아티스트다. 그럼에도 < 소울 >은 듀오의 첫 애니메이션 작업이고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과는 꽤 거리가 있는 전자 음악을 선보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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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바티스트가 즉흥의 붓질이라면 트렌트와 애티커스는 아티스트의 캔버스 같은 존재다. 장대한 가상공간 곳곳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듀오의 음악은 야심 가득하면서도 포근하며 천진한 디즈니의 성격에 정확히 부합한다. 아날로그 신시사이저부터 가상 악기, 사운드 합성을 통해 제작한 소리는 < 인사이드 아웃 >의 감정, < 토이 스토리 >의 포근한 무생물 세계와 닮았으면서도 분명히 구분된다. 사후세계 ‘머나먼 저 세상’부터 어린 영혼들을 교육하는 ‘유 세미나’까지 유연하게 찰랑이는 청각의 물결이다. 

현실과 가상을 오가는 영화처럼 두 ‘음악 관리자’ 들의 연주도 자유로이 교차된다. 하이라이트는 가상 세계 관리자 테리(레이첼 하우스 분)가 존과 22를 뉴욕으로부터 가상 세계로 영혼을 데려갈 때다. 재즈 밴드 연주가 왜곡된 사운드 벽을 거쳐 긴박한 앰비언트 파편으로 제시되는 부분이 긴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충돌의 순간을 그린다. 친절하게도 트렌트 레즈너는 곧이어 온화한 피아노 뉴에이지로 긴장을 낮추며, 존 바티스트가 바통을 이어 화려한 고전의 세계를 전개한다. 아름다운 앙상블, 화려한 하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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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한 사운드트랙 덕에 < 소울 > 은 한 편의 영화임과 동시에 영화의 형태로 비유된 음악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리고 음악은 곧 삶과 동의어다. 하루하루 정신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 거대한 ‘불꽃’ 같은 순간을 바라며 삶을 무의미하다 비관할 수 있지만, 관리자 제리(리처드 아이오아이 분)의 말처럼 “불꽃은 삶의 목적이 아니다.”.

존재 그 자체로 아름답고 우리에게 하여금 새로운 꿈을 꾸게 만드는 음악, 그 몰입의 과정 속 선물처럼 내려오는 아름다운 순간, 그것이 곧 삶일지니. 훌륭한 작품의 드넓은 저편에 경이로운 음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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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 김도헌의 Twist And Shout

2021년 음악을 이해하는 키워드

새해의 첫 번째 달도 반 이상이 지나갔다. 여전히 코로나 19의 위협이 개인의 삶을 짓누르고 있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던 2020년과 달리 백신을 개발하고 비대면 시기에 맞는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는 등 희망의 싹을 찾을 수 있는 2021년이다.  

음악 산업 역시 글로벌 팬더믹의 가운데 지속적인 적응과 혁신, 신기술 투자로 활로를 개척했다. 동시에 대중과의 소통 활로가 막힌 창작가들과 공연, 페스티벌 업계는 연일 안타까운 소식에 한숨을 내쉬고 있는 아이러니한 광경이다. 

남은 345일 동안 우리는 어떻게 음악을 듣게 될까, 그리고 음악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까. 네 가지 키워드로 2021년 음악 산업을 전망한다. 

스포티파이 국내 진출, 치열해질 오디오 시장 경쟁

지난해 12월 18일, 세계 최대의 음악 플랫폼 스포티파이가 올해 상반기 내 국내 서비스 론칭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2019년 3월부터 한국 시장 진출을 준비해온 스포티파이는 약 2년 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본격적으로 한국 시장에 발을 디딘다. 6천만 곡 이상 보유곡, 40억 개 이상 플레이리스트, 3억 2천만 명 이상 유저를 보유한 골리앗의 등장이다. 

적지 않은 음악 감상자들이 스포티파이의 한국 진출을 고대해왔다. 명성, 풍부한 해외 음원, 타 서비스들과 비교 불가능한 개인화 추천 서비스는 분명한 강점이다. 물론 멜론, 지니, 벅스, 플로, 바이브 등 기존 스트리밍 서비스들과의 경쟁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공격적인 할인 혜택과 통신사 연계를 통해 고정 이용층을 갖춘 토종 서비스들에 밀려 고전한 애플 뮤직(Apple Music)의 전례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하지만 스포티파이의 시선은 그 너머를 향해 있다. 

스포티파이는 보도자료를 통해 케이팝의 글로벌 인기를 견인하는 스포티파이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매년 음원 스트리밍 트렌드를 결산하는 스포티파이 플래그십 캠페인 ‘랩드(Wrapped)’를 통해 자체 ‘2020년 케이팝 결산’ 자료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기도 했다. 여기에 스포티파이가 최근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는 팟캐스트다.  2019년 4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여 팟캐스트 업체를 인수한 이래로 스포티파이는 꾸준히 독점 콘텐츠 확보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물론 이 행보에 대한 전망은 해외 시장에서도 찬반 논란을 부르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스포티파이의 국내 진출에 음원 서비스 시장 확장의 목적과 더불어 글로벌 오디오 시장에서의 케이팝 콘텐츠 선제 확보 및 전초기지 건설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2014년 케이팝 허브 플레이리스트를 처음 선보인 이래 스포티파이에서 케이팝은 청취 비중을 2,000% 이상 늘렸고, 1,800억 분 이상 스트리밍 되었으며 1억 2천만 개 이상의 플레이리스트를 확보했다. 

스포티파이 한국 서비스는 케이팝 기획사들과의 기민한 협력과 발 빠른 소통을 통해 국내는 물론 세계 시장에 다양한 오리지널 콘텐츠를 소개할 수 있다. 스트리밍 업계는 물론 팟캐스트, 오디오북, 유튜브 및 OTT 서비스들까지 스포티파이의 등장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다. 

기업 + 기획사 합작 플랫폼, 게임과 음악 

동시에 2020년은 케이팝 온라인 플랫폼들 간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 해였다. 상호 간에 양해각서를 체결하며 손을 잡은 SM엔터테인먼트와 네이버는 라이브 스트리밍 서비스 ‘비욘드 라이브’를 론칭하며 온라인 콘서트 시장에 발을 디뎠다. 빅히트엔터테인먼트는 자체 개발 플랫폼 위버스(Weavers)를 통해 BTS와 산하 아티스트들의 온라인 콘서트, 굿즈, 홍보 및 뉴스를 포괄했다. 한국 아티스트뿐 아니라 영화감독 JJ 에이브럼스의 딸로 유명한 그레이시 에이브럼스, 뉴 호프 클럽, 영블러드 등 신진 해외 아티스트들까지 위버스에 합류했다. 

NC소프트의 야심작 ‘유니버스’도 시장에 뛰어들었다. CJ ENM과의 합작법인 설립 계획을 알리며 본격적인 행보를 알린 유니버스는 인공지능 음성 합성, 모션 캡처 등 다양한 IT 기술 기반의 엔터테인먼트 요소와 콘서트, 현장 투표 등 팬덤 공간으로의 요소를 동시에 갖췄다. 300만 명 이상의 사전 예약자를 확보한 유니버스에는 강다니엘, 몬스타엑스, 아이즈원, 우주소녀, (여자)아이들이 합류 예정이다. 

유니버스에 더욱 시선이 가는 것은 글로벌 시장에서 가속화되고 있는 음악과 게임의 합작 흐름 덕이다. 소니 뮤직이 2020년 트래비스 스캇의 가상 콘서트로 화제를 모은 인기 게임 포트나이트의 지분을 일부 인수한 데 이어, 워너 뮤직은 지난 12일 1억 5천만 명 이상의 유저를 확보한 게임 플랫폼 로블록스(Roblox)에 대한 5억 2천만 달러 상당의 투자에 참여했다. 릴 나스 엑스, 에이바 맥스 등이 로블록스에서 온라인 콘서트를 가졌다. 

현재 NC는 유니버스 사전 등록에 참여한 이들에게 리니지, 아이온, 블레이드 & 소울, 프로야구 H2 등 자사 게임 쿠폰을 제공하며 신규 케이팝 플랫폼과 기존 게임 서비스의 융합을 의도하고 있다. 대규모 자본과 기술의 투자를 확보한 케이팝은 음악을 넘어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콘텐츠 제공 시스템으로의 확장을 꿈꾼다. 

사라진 콘서트와 공연장, 코로나 이후 전망은?  

분명 빛은 밝다. 하지만 그림자는 더 짙다. 케이팝의 성장은 팬데믹을 기회로 삼은 일부의 경우다. 다수 음악 산업 종사자들은 전례 없는 최악의 시기에 신음하고 있다. 특히 대면 콘서트가 사라지며 전 세계 공연 업계가 심각한 타격을 입은 가운데, 우리의 삶 속 크고 작은 추억과 기억을 안긴 공연장들 역시 속속 문을 닫고 있다.

2019년 말부터 2020년 초까지 음악 팬들을 설레게 했던 대다수 페스티벌과 내한 공연은 연기를 거듭하다 씁쓸한 취소 소식을 남겼다. 1998년부터 명맥을 이어온 재즈 클럽 ‘원스 인 어 블루 문’이 영업을 종료한 데 이어 홍대 앞 상징적인 공연장 ‘브이홀’도 코로나 19 여파를 피해 가지 못했다. 퀸라이브홀, 무브홀, 에반스라운지도 문을 닫았다. 이태원의 밤을 책임졌던 소프 서울, 케이크샵 등 다양한 베뉴들도 ‘집합 금지명령’ 앞에 차디찬 한 해를 보냈다.

자연히 온라인 콘서트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빅히트, SM, JYP, YG 등 케이팝 기획사들은 가상현실 및 특수효과의 최첨단 기술을 활용하며 온라인 콘서트로 대규모 투어의 아쉬움을 달랬다. 한국 인디 신 역시 잔다리 페스타, 테이프 앤 포스트 등 스트리밍을 통해 활력을 불어넣고자 분투했다. 그러나 오프라인 콘서트보다 더욱 많은 비용을 요구하는 온라인 콘서트가 모두의 대안이 될 수 없음도 분명했다.

세계적으로 대면 공연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8월 독일에서는 3회에 걸친 거리두기 정책 하의 실내 공연 테스트를 통해 안전성을 시험했으며, 1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도 1,000명의 지원자가 ‘실험’에 참여했다. 영국과 일본은 일찌감치 2021년 자국 페스티벌의 라인업을 공개하는 중이다. 그러나 코로나 19 유행 종식 이후에도 대면 콘서트가 돌아오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틱톡과 소셜미디어, 카탈로그와 싱글 시대

현실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가상의 소셜 미디어다. 15초짜리 짧은 숏-폼 영상으로 출발한 틱톡(Tiktok)은 음악 산업의 핵심 서비스. 국제보건기구(WHO)도 코로나 19 확산을 막는 홍보 플랫폼으로 틱톡을 선택했을 정도로 글로벌 시장에서 그 영향력은 거대하다. 우리도 지코의 ‘아무노래’를 통해 틱톡의 인기를 체감한 한 해였다. 

조쉬 685, 메간 더 스탤리온, 트래비스 스캇, 도자 캣, 로디 리치 등 2020년의 뜨거운 이름은 모두 틱톡으로부터 출발했다. 2021년 첫 메가 히트곡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drivers license’ 역시 인기 근간에 틱톡이 있다. ‘바이럴’은 과거와 현재를 가리지 않는다. 크랜베리 주스를 마시며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청년이 1977년 플리트우드 맥의 ‘Dreams’를 2020년 빌보드 싱글 차트 12위까지 견인할 줄 누가 알았으랴. 

틱톡과 소셜 미디어, 스트리밍의 유행은 대중음악의 핵심 콘텐츠를 앨범에서 싱글로 되돌리고 있다. 1960년대 비틀스가 앨범의 미학을 확립한 이후 연전연패하던 싱글은 디지털 음원의 등장과 함께 힘을 키워오다 스트리밍 시대 다시금 주류의 문법 중심을 되찾았다. 이제 잘 만든 앨범보다 잘 ‘큐레이션 된’ 플레이리스트가 더욱 힘을 얻는 시대다. 

따라서 광대한 과거 음악의 바다에서 콘텐츠를 엄선해 현대의 소비자들에게 제공하는 ‘큐레이터’들의 역할이 각광받고 있다. 코로나 19로 투어 수입을 기대할 수 없게 된 올드 뮤지션들 – 밥 딜런, 닐 영, 플리트우드 맥 등 -이 저작권 회사에 본인의 카탈로그를 판매하는 흐름도, 플레이리스트를 통해 돌아오는 과거의 명곡들도 2020년대의 음악이 ‘창작’보다 ‘활용’, 긴 호흡의 작품보다 단편의 멀티 콘텐츠를 향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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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 ‘다이너마이트’ 정상 데뷔의 의미

BTS(방탄소년단)의 ‘다이너마이트(Dynamite)’가 발매 첫 주 빌보드 핫 100 (이하 싱글 차트) 1위로 데뷔했다. 그룹 최초의 1위 곡일 뿐 아니라 한국 가수 최초의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 기록이며 아시아로 범위를 넓히면 무려 57년 전 1963년 일본 가수 사카모토 큐의 ‘스키야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시아계 아티스트를 포함해도 아시아계 아티스트 파 이스트 무브먼트(Far East Movement)’의 ‘Like A G6’가 추가될 뿐이다.

‘On’을 4위, ‘작은 것들을 위한 시’를 8위, ‘IDOL’을 11위에 올렸으나 정상과는 거리가 있었던 방탄소년단은 거듭된 노크 끝에 염원하던 기록을 거머쥐게 됐다.

한국 아티스트의 종전 빌보드 차트 최고 기록은 2012년 빌보드 싱글 차트 7주 연속 2위를 기록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다. 하지만 ‘강남스타일’의 히트와 ‘다이너마이트’의 히트는 다른 각도에서 살펴봐야 한다.

2012년 당시에도 ‘강남스타일’의 대성공은 케이팝의 세계화처럼 묘사됐다. 그러나 ‘강남스타일’의 히트는 개인의 성공이었다. ‘강남스타일’은 해외 히트를 고려하지 않은 로컬 콘텐츠였고 어떤 철저한 기획이나 전략보다는 싸이와 유건형의 오래된 공식인 ‘즐기기 좋은 파티 튠’을 기초로 했다. 큰 고민 없는 콘텐츠가 즐겁게 소비되며 말춤과 유튜브, 셀 수 없이 많은 패러디와 함께 세계를 휩쓸었다.

비교하자면 댄스와 파티로 히트한 로스 델 리오의 ‘마카레나(Macarena)’, 바우어의 ‘할렘 셰이크(Harlem Shake)’와 유사한 경우다. 그러나 BTS의 빌보드 싱글차트 넘버원은 시스템의 성공이다. 일각에서는 ‘다이너마이트’ 가사 전체가 영어라는 점에서 이 곡을 케이팝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나 오히려 그 논쟁 지점이야말로 케이팝의 승리를 증명한다.  

“미국 프로듀서에게 받은 노래를 영어로 부른다면 그것은 이미 K팝이 아니다”라는 빅히트엔터테인먼트 방시혁 대표의 발언이 무색하게도 ‘다이너마이트’는 철저히 미국 시장을 겨냥한 소속사의 전략 하에 만들어졌다. 

장르적으로는 최근 몇 년간 다프트 펑크, 브루노 마스, 도자 캣, 해리 스타일스 등이 활약하며 팝의 유행 코드로 돌아온 디스코를 채택했고, 뮤직비디오 속엔 미국 LA 베니스 비치(Venice Beach) 농구 코트, 랜디스 도넛(Randy’s Donut)등의 장소가 등장한다. 곡은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과 인종 갈등으로 침체된 미국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에너지 넘치고 밝다.

여기에 ‘다이너마이트’의 작곡가는 방탄소년단 멤버들이나 그들과 오래 호흡을 맞춰온 피독(Pdogg)이 아닌 데비드 스튜어트(David Stewart)와 제시카 아곰바르(Jessica Agombar)다. 영어 가사는 결정적이다. 가사 내용이 매끄럽다고 보긴 어려우나 당장 접근성부터 라디오 플레이까지 훨씬 친숙한 콘텐츠다.

음악 평론지 <롤링 스톤>과 인터뷰한 데이비드 스튜어트는 BTS의 미국 유통을 담당하는 콜롬비아 레코즈와의 대화를 돌아보며 “그들(BTS)은 영어 곡을 찾고 있었다(They were looking for an English single)”라 언급하기도 했다.

현재 케이팝의 가장 보편적인 작업 방식으로 세계 각지 해외 작곡가들로부터 다양한 데모 곡들을 모아 엄선하여 한국어 가사와 가창을 덧입히는 ‘송캠프’ 시스템을 들 수 있다. 이 작법을 통해 케이팝은 내수용으로 기획되면서도 글로벌 시장에도 어필할 수 있는 ‘무국적성’을 얻었다. 로컬로 소비되었으나 자연스레 글로벌의 가능성을 품고 적용하기 쉬운 콘텐츠가 된 것이다. ‘학교 시리즈’로 출발해 월드스타가 된 BTS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다이너마이트’의 1위는 긴 시간 동안 무수한 결과물을 통해 노하우와 작곡 시스템, 현지 팬덤을 축적해온 케이팝 시장이 이제 마음먹고 글로벌 히트를 겨냥하면 꿈만 같던 성과도 거머쥘 수 있음을 선언한다. 소녀시대, 원더걸스, 보아 등 미국 시장 개척을 꿈꿨던 2010년대 초 케이팝 선배 그룹들 역시 영어 가사, 트렌디한 곡으로 무장했으나 당시 그들의 기반은 한국 혹은 아시아 및 라틴 아메리카 등 제3세계에 국한되어 있었다.

BTS는 그들의 노력으로 세계에 확보된 케이팝 마니아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거침없는 상승세를 이어갔고 ‘다이너마이트’로 미국 내 팬덤을 총결집하여 기록을 세웠다.

‘강남스타일’은 모두가 따라 부른 노래였다. 남녀노소, 인종, 국적 가릴 것 없이 ‘오빤 강남스타일’을 외치고 말춤을 췄다. 반면 ‘다이너마이트’는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랐으나 아직까지 미국인의 사랑을 받는 대중적인 곡이라 확언하기는 어렵다. 이는 BTS의 성공 동력 및 대중이 차트를 바라보는 시선이 기존 해석과 전혀 다른 형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 음악 산업에 ‘팬덤 중심 소비’의 힘을 과시한 대표 사례로 남을 전망이다.

케이팝 그룹의 히트는 팬덤 중심의 소비에 기초한다. 가요계에서 어떤 아이돌 그룹이 컴백하면 그 팀의 팬덤 역시 분주해진다. 이들은 음원 발매와 동시에 스트리밍을 집중해 차트 정상을 노리는 ‘스밍 총공(스트리밍 총 공격)’, 앨범 사전 예약 구매, 음악 프로그램 문자 투표 등 다양한 형태의 소비 전략으로 지지하는 가수에게 가시적인 성과를 안겨준다. 때문에 팬덤의 규모 및 조직은 그 케이팝 그룹의 인기 척도를 보여준다.

BTS의 1위 기록 역시 그들의 굳건한 팬덤 아미(A.R.M.Y) 중심 소비 결과다. 일찍이 싱글 공개 전부터 이들은 SNS를 통해 조직적으로 ‘다이너마이트’의 빌보드 히트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공유해왔다. ‘다이너마이트 서바이벌 키트(Dynamite Survival Kit)’를 작성해 빌보드 차트 1위를 위한 스트리밍 방법을 공유한 ‘BTS 온 빌보드(BTS on Billboard)’ 계정, 돈이 없어 스트리밍을 하지 못하는 팬들을 위해 크라우드펀딩을 운영한 ‘펀즈 포 방탄(fundsforbangtan)’ 계정 등 그 방법도 기상천외하다.

성원은 어마어마한 수치로 증명된다. 음원 공개 첫날 777만 회 스트리밍을 기록하며 올해 최고 기록을 세운 ‘다이너마이트’는 9월 첫주 차 빌보드 차트에서 첫 주 총 3,390만 회 스트리밍 횟수와 총 26만 5천 건의 음원 다운로드 건수로 정상에 올랐다.

한국 가수 최초로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이(Spotify) ‘글로벌 톱 50’ 차트 1위에 올랐고 유튜브 조회수 역시 하루 만에 1억 뷰를 넘겼다. 음원 다운로드의 경우 2017년 스트리밍 업체에 음원을 제공하지 않았던 팝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의 ‘Look What You Made Me Do’ 이후 최고 기록이다.

관건은 ‘라디오 에어플레이’ 차트다. 음원 판매량 및 스트리밍, 유튜브 조회수와 더불어 빌보드 차트 집계를 이루는 3대 축이다. 지금까지 케이팝 아티스트들의 곡은 미국 라디오 방송에서 주로 선곡되지 못해 차트에서 부진하여 첫 주 좋은 성과를 거두고도 큰 폭의 하락세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 역시 팬덤의 적극적인 참여가 동원되면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2016년부터 팬들은 ‘BTSX50스테이트(BTSX50states)’라는 계정을 만들어 미국 각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 BTS의 음악을 알리고 요청하는 자체 홍보 프로그램을 진행해온 바 있다. 그럼에도 성과가 높지 못했는데, 이번 ‘다이너마이트’의 경우 미국 콜롬비아 레코드의 홍보 총괄 인원들까지 미리 방송국에 사전 홍보를 진행하여 에어플레이 차트에서도 최고 기록인 30위를 기록할 수 있었다.

이 순위를 유지하여 ‘다이너마이트’가 다음 주 빌보드 차트에서도 유의미한 성과를 기록한다면 그때부터 BTS의 노래가 미국 내에 안정적으로, 보편적으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이너마이트’ 성공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시사한다. 첫 번째는 차트에 대한 인식이 ‘히트곡의 상징’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 일반 대중에게는 ‘관심의 척도’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기존 국내 팬덤과 같은 열성적인 BTS 팬덤이 미국에서도 상당수의 거대한 규모로 자리 잡아 빌보드 차트에 영향을 미칠 정도까지 성장했다는 점이다.

과거 빌보드 싱글 차트는 말 그대로 미국을 대표하는 히트곡 모음이었다. 음악 애호가들은 매주 빌보드 잡지를 뒤지고 순위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흐름을 확인했고, 차트 관련 기록을 줄줄이 외우고 확인하는 것은 음악 지식의 척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대중음악이 스트리밍 중심으로 완전히 개편된 2010년대 중후반부터 빌보드 차트는 과거만큼 전세대를 아우르지 못한다. 나날이 축소되는 음반 판매량은 이제 집계 대상에서도 제외됐고 그 자리는 스트리밍, 유튜브 조회 등 신세대의 새로운 소비 방식이 메꿨다. 이제 빌보드 차트는 ‘유행가’, ‘인기곡’보다는 아티스트의 유명세, 인터넷 상 유행, 팬덤의 조직적인 소비를 통해 보이는 흐름으로 해석해야 한다.

팬들은 차트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에 기뻐합니다. 그들은 음악 업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 위해, 누가 인기 있는지 알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아티스트 및 음악적 발견에 도움을 얻기 위해 빌보드 차트를 확인합니다.

– 실비오 피에트로롱고(Silvio Pietroluongo), 빌보드 부사장 –

현재 유명 팝 스타들도 상품, 콘서트 티켓에 앨범을 끼워 파는 ‘번들’을 적극 활용하고 SNS 상 홍보를 가속화하며 그들의 팬덤을 독려하고 있다. 물론 이는 기존의 정상적인 소비 행태와 거리가 있다. 이에 과도한 쏠림현상을 막기 위해 빌보드는 지난 7월 번들 판매 집계를 제한하고 엄격화하는 개편안을 제시했지만, 이런 팬덤 및 집단 단위 소비가 하나의 흐름이 되어버린 것을 부정할 순 없다.

차트에서 대세를 이루고 있는 장르 힙합, 라틴 팝 역시 미국 내 굳건한 블랙, 히스패닉 커뮤니티 지지를 기반으로 한다. 이제 케이팝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규모를 구축했다. 인종을 아우르고 조직적인 결집과 행동으로 무장하여 성소수자, 다인종 등 비주류의 목소리를 담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유의미한 성과를 내고 있다.

미국 시장, 더 나아가 글로벌 시장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도 있다. 올해 들어 국내에서 소비되던 케이팝이 수출되는 과정에서 블랙페이스, 종교, 인종주의 등 차별과 관련된 논쟁이 숱하게 목격됐다. 철저한 팬덤 기반의 소비 시스템이고 그 지지자들은 소수자들인 경우가 대부분인 케이팝이기에 지금까지 한국에서 둔감하게 생각했던 문제라도 향후 기획에선 신중을 가해야 한다.

글로벌 성공의 빛 아래 가려진 케이팝 내부의 열악한 인권 현실과 육성 시스템, 낙후된 환경도 공론화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특히 빅히트엔터테인먼트는 BTS의 성공과 동시에 현재 엠넷과 함께 진행 중인 오디션 프로그램 <아이랜드>로 받은 비판, 슈가의 ‘어떻게 생각해’를 두고 둘러싼 논란을 새겨야 한다.

BTS의 ‘다이너마이트’ 빌보드 넘버원은 향후 케이팝 시장의 이정표로 자리할 사건이다. 이 성과를 발판 삼아 신 전체가 보다 정교하고 입체적인 방법으로 세계의 흐름과 발맞추는 명민한 전략이 요구된다. ‘한국 최초의 빌보드 넘버원’이 단순 사건에 그치지 않고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정정합니다]
7번째 문단의 ‘뮤직비디오 촬영’ 부분에서 ‘~미국에서 촬영됐다’는 잘못된 내용이 있었습니다. ‘다이너마이트’의 뮤직비디오는 미국 LA 베니스 비치에서 촬영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정정하여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