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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로드리고와 새드 걸 팝, 팝은 어떻게 슬퍼졌는가

2021년 < Sour >의 기록적인 데뷔로 음악계를 거세게 강타한 올리비아 로드리고가 세간의 주목을 받는 소포모어 앨범 < Guts >와 함께 복귀에 시동을 걸고 있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선공개곡 ‘Vampire’는 어렵지 않게 빌보드 정상에 올랐고, 이어 발표된 ‘Bad idea right?’ 역시 다수의 차트 상위권을 장식했다. 이 정도 기세라면 이번 앨범 역시도 전작만큼의 성과를 이룰 공산이 무척 높아 보인다.

거대한 상업적 성공이 못지않게, 올리비아의 음악은 비평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이어갔다. 등장과 함께 그래미 시상식 3관왕을 차지함은 물론, 데뷔 앨범 < Sour >는 유수의 매체에서 당해 최고작 중 하나로 거론되는 등 상당한 호평을 받았고 차기작 < Guts >의 선공개 싱글들은 그 피치포크마저도 연이어 베스트 뉴 트랙(Best New Track)에 선정할 만큼 음악적으로 더욱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포스트 테일러 스위프트’라는 별칭과 점점 거리를 좁히는 모양새다.

영민하고 매력적인 음악 자체도 수많은 호평을 받았지만 다수의 평론가 및 대중은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이 성공을 Z세대의 세대 의식과 연관 지었다. ‘Drivers license’, ‘Deja vu’ 등 그의 음악에서 강하게 표현되는 비련의 정서가 젊은 세대의 감성에 적중했다는 식의 평가였다.

▶ (좌) 빌리 아일리시 / (우) 로드

비단 올리비아 로드리고뿐만이 아니다. 최근 팝 음악 전반에는 이전보다 어둡고, 우울한 정서가 자욱하게 자리 잡고 있다. 당장 < Sour > 이전 < When We All Fall Asleep, Where Do We Go? >(2019)의 빌리 아일리시와 < Pure Heroine >(2013), < Melodrama >(2017)의 로드(Lorde)가 유사한 평가를 받기도 했고, 이에 영향을 받은 듯 최근 대부분의 팝 신성들은 당연하다는 듯 이별과 우울의 주제를 동반하고 있다. 오죽하면 그래미 어워드를 주관하는 미국 레코딩 아카데미를 비롯, 몇몇 이들이 나서 ‘새드 걸 팝(Sad Girl Pop)’이라는 용어와 함께 해당 흐름을 구획화하려는 시도까지 보이는 상황이다. 케이티 페리를 필두로 한 희망차고 화려한 팝이 위세를 떨치던 10여 년 전 팝 시장에 비하면 결코 적지 않은 변화다.

왜 지금의 젊은 대중은 우울한 정서에 열광하는가

원인은 꽤나 복합적이다. 대부분의 변화가 그러했듯 음악 내부뿐 아니라 여러 사회, 문화의 흐름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선 이러한 맥락의 배경을 음악 내부에서 찾아볼 때, 가장 먼저 지목돼야 할 이름은 역시 ‘팝의 여왕’ 테일러 스위프트다. < Speak Now >(2010) 이후 컨트리에서 팝으로 노선을 점차 전환한 테일러의 음악적 스타일은 그 진솔한 표현 방식과 함께 당시 젊은 리스너에게 팝의 지향점, 교과서적 존재로 간주되며 이후 음악 전반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올리비아 로드리고를 비롯 로드, 클레어오, 트로이 시반 등 팝의 수많은 주요 인물들이 테일러식 팝의 뒤를 따르며 지금의 감상주의적 시류가 만들어진 것이다. 단어 그대로 테일러 이전과 이후의 팝이 완전히 다른 영역에 있다고 말해도 어색하지 않다.

▶ (좌) 테일러 스위프트 / (우) 라나 델 레이

지금의 ‘포스트 테일러 스위프트 팝’에 테일러 다음으로 큰 영향을 준 인물인 라나 델 레이의 이력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 ‘새드코어(Sadcore)’라 표현할 만큼 우울한 심상 묘사에 집중한 라나의 방법론은 팝이 더욱 적극적으로 정서 표현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며, 빌리 아일리시, 로드 등 이후 음악에 큰 파란을 일으킨 아티스트들에게도 분명한 견인이 됐다.

이들의 공적은 ‘새드 걸 팝’ 도래의 또 다른 배경인 인디 신과 메인스트림의 결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영원한 인디 앨범이라는 별칭의 < Folklore >(2020)와 < Evermore >(2020)로 피비 브리저스, 본 이베어, 줄리엔 베이커로 대표되는 인디 포크, 챔버 팝의 질감과 인상을 대중화시키며 그 화학적 결합의 촉매 역할을 하였고, 한때 ‘힙스터의 여신’이라 불렸던 라나 델 레이는 메인스트림으로 자진 침투로 스스로 물리적 매개체 역할을 했다. 전자는 정상의 자리에서, 후자는 정상에 올라서며 장르의 경계를 허물어 낸 것이다.

이와 같은 개인의 노력도 분명한 영향을 끼쳤지만 인디 신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주요 요인은 단연 스트리밍 서비스의 대중화 및 고도화라는 시장의 흐름이다. 유저 성향에 맞춰 개인화된 알고리즘을 매개로 하는 지금의 스트리밍 구조는 듣는 이들로 하여금 다양하고 심도 높은 청취 경험을 제공하며 디깅 문화의 보편화와 함께 비주류 음악의 접근성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 인디 신은 이전보다 많은 소비층을 확보하며 더욱 넓고 두터워졌으며, 메인스트림과의 교류도 활발해져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공유하는 선순환도 이어졌다. 그렇게 주류 팝은 인디의 감성을 장착했고, 인디 신은 메인스트림의 활기를 나눠 받게 됐다.

가라앉은 사회와 함께 침잠한 음악

상술한 주요 아티스트들, 인디 신의 영향도 물론 적지 않으나 가장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한 것은 결국 사회 분위기의 변화다. 경제적 저성장과 1인 가구의 증대, 그리고 SNS의 보급 및 대중화 등은 전반적인 사회의 분위기를 침체시켰고 이는 자연스레 슬픈 음악에 대한 수요로 이어졌다. ‘가장 많이 일하고 가장 적게 버는 세대’가 혼자 사는 것도 모자라, SNS를 통한 상대적 박탈감에도 손쉽게 노출되며 우울이 서식하기에 최적의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심지어 이에 더불어 코로나19라는 강력한 전염병까지 덮치며 사회적 교류마저 통제되자 그렇지 않아도 거대하던 우울은 곰팡이처럼 빠르게 사회 전반으로 번져 나갔다.

수많은 작품의 발매와 공연이 취소되고 연기되는 등 심각한 타격이 있기도 했으나 음악계는 변화한 기류를 기반으로 새로운 해답을 향해 나아갔다. 클레어오, 그레이시 에이브럼스, 리지 맥알파인(Lizzy McAlpine) 등 젊은 베드룸 팝, 포크 아티스트들이 우후죽순 등장했고, 테이트 맥레이, 걸 인 레드, 스티브 레이시, 코난 그레이 등 인디와 메인스트림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슬픈 정서를 주무기로 리스너들의 이목을 끌어당겼다. < How I’m Feeling Now >(2020)의 찰리 XCX나 < Big Time >(2022)의 엔젤 올슨(Angel Olsen) 등 기존 아티스트들 역시도 그들만의 새로운 방법론을 통해 우울함에 생명력을 주입하며 시대에 발을 맞추는 모습을 보였다.

비단 팝뿐만이 아니다. 타 장르를 포함한 다양한 방면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은 분명히 이어졌다. 우울이 크게 작용하는 인디 록, 포크는 유례없는 원동력을 얻었고 감정의 극단을 달리는 슈게이즈 장르가 인디 신을 중심으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했다. 마초적인 장르로 통하는 힙합마저도 이모(Emo)의 감성을 끌어오며 이모 랩이라는 새로운 국면에 돌입할 만큼 음악계는 우울을 새로운 변화의 계기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새로운 시대, 음악이 나아갈 길

청년들의 음악 청취에 대해 분석한 국내 연구(최희진, 2021)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조사 대상자들의 75%가량은 증가한 개인 시간을 통해 음악 플랫폼에 더 많이 접속하고, 새로운 음악을 발견하며 능동적으로 찾아 듣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음악를 통해 스스로의 마음을 치유하고 성찰하며 감정을 공유하며 서로 소통하고 공동체의 의미까지 재발견하고 있었다. 음악계의 멱살을 잡고 흔든 위기 속에서 음악이라는 예술, 산업이 그 유연성을 발휘하며 스스로의 구조를 개편하여 새로운 경로를 설정하고 있던 것이다.

기쁨을 배로 나누던 팝은 이제 슬픔을 반으로 나눈다. 우울을 스스로 표현하고 공유할 때, 또 이를 받아들일 때의 카타르시스는 젊은 세대의 의식과 강하게 공명하며 이제 새로운 하나의 클리셰로 거듭났다. 늘 그랬듯, 음악이 새로운 답을 찾아낸 것이다. 우울의 차가운 빗줄기 이후, 팝의 땅을 단단히 굳힐 올리비아 로드리고와 젊은 아티스트들에게 많은 이들이 기대를 걸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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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펜타포트 베스트 7

김성욱 필자

엘르가든(금)
페스티벌의 축포는 엘르가든이 쏘아 올렸다. 지난 2008년 이후 15년 만에 다시 펜타포트 무대에 오른 베테랑 로커들은 과거 국내 CF에 삽입된 ‘Make A Wish’, ‘My Favorite Song’과 같은 히트 메들리와 지난해 신보 < The End of Yesterday >를 교차로 퍼부으며 금요일 밤의 열기를 끌어올렸다. 2008년부터 약 10년의 공백기를 가진 밴드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노련한 무대였다. 지천명의 록스타는 80분의 러닝타임 동안 20곡 이상을 쏟아냈고, 세트리스트 중간 ‘감사합니다’란 인사를 잊지 않으며 관객과 호흡했다. 메인 스테이지를 가득 메운 군중들은 앵콜 타임에 울려퍼진 국내 애창곡 ‘Marry Me’를 끝까지 따라 부르며 최고의 연주를 선물한 헤드라이너에게 경의를 표했다. 한국 내 J팝 열풍을 체감한 엘르가든은 무대 직후 단독 내한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이디오테잎(토)
과거 펜타포트는 하드록 밴드들을 라인업에 대거 포진시키며 ‘록 마니아’의 열렬한 지지를 획득했다. 현재는 대중성을 아울러 진입장벽을 허물었지만 특유의 관객 문화는 DNA처럼 계승됐다. 올해 역시 공연장 곳곳에 슬램 핏이 형성되고 그 사이로 수백의 관중이 부딪히며 슬램을 즐겼다. 페스티벌 기간 슬래머들의 활약이 절정에 다다른 순간은 메탈 밴드도, 당일 헤드라이너인 스트록스도 아닌 국가대표 일렉트로닉 그룹 이디오테잎의 무대다.

둘째 날 저녁 깃발 부대의 도열 속 모습을 드러낸 트리오는 ‘Pluto’로 포문을 연 뒤 프로디지와 케미컬 브라더스, 그리고 다프트 펑크의 클래식 넘버를 고루 배치해 현장을 장악했다. 전주만으로 탄성이 터져 나온 비스티 보이즈의 ‘Sabotage’와 대표곡 ‘Melodie’를 포함해 세 멤버는 별다른 멘트 없이 한 시간 동안 명품 셋리스트를 몰아치며 구름 떼 인파를 지휘했다. 이디오테잎은 2주 전 영국 슈게이즈 밴드 라이드가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대체자로 급히 투입되었다. 이들은 구원투수이면서 동시에 토요일의 지배자였다.

염동교 필자

장기하(금)
전위적인 음악과 안무를 결합한 2022년 < 공중부양 > 콘서트를 펼쳤던 장기하가 록밴드 포맷으로 돌아왔다. 장기하와 얼굴들을 함께했던 드러머 전일준과 기타리스트 하세가와 요헤이가 참여한 싱글 < 해 / 할건지 말건지 >로 록의 갈급을 털어낸 그는 지난 4월 600석 규모의 무신사 개러지에서 단독공연 < 해! >를 펼쳤다.

무신사 개러지에서 송도달빛공원으로 확대된 무대에서 데뷔 16년 차의 프론트퍼슨은 노련했고, 넥스트의 신해철을 연상하게 하는 조련에 관객들은 일사불란했다. ‘빠지기는 빠지더라’와 ‘그렇고 그런 사이’부터 < 공중부양 >의 ‘부럽지가 않아’의 ‘가만 있으면 되는데 자꾸만 뭘 그렇게 할라 그래’의 밴드 버전과 신곡 ‘해’까지 경력을 망라했다. 오래된 전우가 주는 안정감과 밴드 밴디지 출신 신현빈(기타)와 손도현(키보드) 등 젊은 연주자의 활기에 프론트퍼슨의 에너지 레벨도 유독 높아 보였다. 그 에너지가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옮아간, 전이(轉移)의 시간이었다.

잠비나이(토)
유일무이. 잠비나이가 생성한 활자다. 짧고 굵은 첫 곡 ‘소멸의 시간’에 마비된 감각은 순서가 끝날 때까지 풀릴 줄 몰랐다. 잠비나이 사운드가 신체 한 바퀴를 크게 훑고 갔달까. 탑에 벽돌을 올리듯 쌓아가는 소리 탑엔 ‘국악 프로그레시브 록’, ‘국악 포스트 록’ 등의 명명이 부질 없었다. 그저 잠비나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리더 이일우의 절규와 국악기와 양악기의 일합이 에어포트 스테이지의 대기를 채웠다. 해금이 신비로움을 발산하다 후반부 기타 굉음과 주문에 가까운 보컬이 오컬트적 색채를 자아내는 ‘온다’와 반복적인 거문고 리듬에 급작스런 메탈 사운드를 끼얹는 ‘그들은 말이 없다’처럼 잠비나이의 음악은 다변적이고 도식화를 거부했다.

스트록스(토)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의 핵심, 새천년 가장 스타일리시한 밴드라는 상징성은 더 스트록스를 ‘꼭 한번 라이브 보고싶은 밴드’에 올려놓았다. 2006년 펜타포트에서 첫 내한을 펼쳤으니 여러모로 이 축제와 인연이 깊은 스트록스는 건반이 두드러진 신스팝 ‘The adults are talking’ 2020년 근작 < The New Abnormal >의 ‘Bad decisions’ 이 20년 역사를 가로질렀지만 역시 데뷔작 < Is This It >에서 커다란 호응이 터져 나왔다. 명징한 베이스라인의 ‘Someday’와 ‘Is this it’이 소환한 < Is This It >과의 첫 기억, 그 흥분감은 ‘Last nite’에서 절정에 달했다.

호불호가 갈렸다. 나사 풀린 듯한 줄리안 카사블랑카스의 퍼포먼스(술에 취했다는 루머가 있다)와 앙코르 포함 14곡의 적은 숫자도 아쉬움을 남겼지만, 후지 록과 펜타포트를 함께 다녀온 이에 의하면 줄리안의 컨디션 자체는 후자가 나았다고. 여러 가지 결함에도 기타리스트 알버트 해먼드 주니어의 톤 메이킹을 위시한 다채로운 음악색과 포스트 펑크와 뉴웨이브를 가로지르는 스펙트럼이 돋보였다.

진저 루트(GINGER ROOT)(일)
펑키(Funky) 리듬에 눈이 번뜩 뜨였다. 맷 카니(드럼)와 딜런 호비스(베이스), 카메론 류(보컬, 키보드)로 이뤄진 미국 인디밴드 진저 루트는 베이퍼웨이브와 퓨처 펑크 류의 복고 음향으로 송도달빛공원의 밤하늘을 채색했다.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와 버글스를 반추하는 오토튠과 각종 디바이스가 연결된 포터블 신시사이저는 듣는 재미를 배가했다. 일본 시티팝 풍 무대 영상은 ‘Loneliness’의 낭만성을 부각했고 ‘Everything’s alright (meet you in the galaxy ending theme)’엔 공상과학물과 소녀만화의 심상이 공존했다.

두 곡을 비롯해 2022년에 발매한 EP < Nisemono > 수록곡을 셋리스트 대부분으로 꾸린 진저루트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사카모토 류이치와 그가 소속했던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의 트리뷰트 메들리도 준비했다. ‘Tong Poo’와 ‘Firecracker’, ‘Rydeen’의 재해석은 아시아계 중국인을 프론트퍼슨으로 둔 밴드의 음악 원천과 지향성을 가리켰다.

김창완밴드(일)
상투적 표현이나 ‘살아있는 전설’보다 적합한 표현이 있을까. 산울림의 맏형 김창완을 주축으로 한 김창완밴드는 3일 축제의 대미를 장식했다. ‘아니벌써’ 와 ‘너의 의미’ 등 산울림 클래식부터 김창완밴드의 ‘중2’까지 40여 년 타임라인을 80분에 농축했다. ‘내 마음의 주단을 깔고’의 전주의 주술에 걸린 듯 몸을 비틀어 댔고, ‘개구쟁이’에선 모두 함께 하늘 위로 솟았다. 베테랑 멤버들은 산울림의 아마추어리즘과는 또 다른 질감의 음악성을 드러냈고 어쩌면 산울림보다는 김창완밴드가 펜타포트 같은 대형 축제엔 더 잘 어울릴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바로 옆 소녀 “새소년 보고 집에 돌아가려고 했는데 미안해요. 아저씨”를 외쳤다. 그는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의 신비로움에 감화되었고, ‘기타로 오토바이타자’의 진보성에 충격받았을 테다. 한국적 가락과 사이키델릭이 뭉쳤던 1977년 곡 ‘청자’는 46년이 흐른 현재의 무대에서 국악인 안은경의 태평소를 곁들인 ‘아리랑’으로 현신했다. 마지막까지, 김창완다웠고, 산울림다웠다.

리드 글 : 김성욱
글 : 김성욱, 염동교
사진 : 예스컴이엔티 제공, 염동교(스트록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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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륜(絕倫)의 송라이터 로비 로버트슨(1943-2023)

The weight / Music From Big Pink (1968)
‘더 밴드’라는 무색무취한 이름은 밥 딜런과 관계한다. 로버트슨이 이끌던 록 밴드 더 호크스는 전기기타를 든 밥 딜런의 포크 록 시기에 동행했고, 점차 밥 딜런의 백 밴드(밥 딜런 앤 더 밴드) 이미지가 굳혀진 더 호크스는 자연스레 ‘더 밴드’가 되었다.

릭 당코와 리차드 마누엘, 로비 로버트슨과 가쓰 허드슨, 레본 헬름 5인이 조직한 더 밴드의 < Music From Big Pink > 음악만큼은 데뷔작이 무색한 완성도였다. 사이키델릭 록이 부흥했던 1960년대 말 루츠 록(포크와 블루스, 컨트리의 요소를 담은 록)의 역행도 깊은 음악성 덕에 설득력을 얻었다. 성경 속 인물 나자렛을 등장시킨 문학적 노랫말과 빈틈없는 악곡 전개는 밴드의 상징이자 루츠 록 걸작 ‘The weight’를 탄생시켰다. 많은 이들이 “곡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며 명성을 의문하나 ‘The weight’ 한 곡만으로 그 기준치를 뛰어넘는다.

Up on cripple creek / The Band(1969)
더 밴드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허락치 않았다. 1969년 발매된 2집 < The Band >는 데뷔작 < Music From Big Pink >와 빅 브라더 앤 홀딩 컴퍼니의 < Cheap Thrills >(1968)을 제작했던 프로듀서 존 사이먼과 멤버들의 기량이 조화롭다. 남북 전쟁 속 남부 백인 하층민을 다룬 ‘The night they drove old Dixie down’과 가난한 농부를 이야기한 ‘King harvest (has surely come)’처럼 진중한 < The Band >에서 ‘Up on cripple creek ‘은 윤활유 역할을 한다. 키보디스트 가쓰 핸더슨의 클라비넷과 보컬 하모니가 음악평가 일 야노비츠(Il Janovitz)의 표현처럼 산뜻하고 캐치한 선율을 빛낸다. 구성원 대부분이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점은 더 밴드의 특징점이자 대표 키워드였다.

The shape I’m in / Stage Fright (1970)
무대공포증이란 뜻의 5번째 스튜디오 앨범 < Stage Fright >는 1970년대의 문을 활짝 열었다. 비교적 밝은 음향은 불안과 긴장을 담은 어두운 노랫말을 중화했고 앞의 두 앨범만큼 만장일치 호평은 못 받았지만 빌보드 200 5위를 획득했다. 싱글 컷 된 ‘Time to kill’의 B사이드 ‘The shape I’m in’은 빌보드 121위에 그쳤으나 무대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골든 레퍼토리가 되었다. 리처드 마누엘의 보컬과 로버트슨의 일렉트릭 기타, 가 핸더슨의 오르간 연주는 각자의 자리에서 은은한 빛을 내뿜음과 동시에 함께 쌓이며 다층성을 빚었다. 밴드의 유일한 미국인인 드러머 레본 헬름은 자서전 < This Wheel’s on Fire: Levon Helm and the Story of the Band >에서 곡을 자포자기(Desperation)로 정의하며 상기한 모순점을 부각했다.

Ophelia / Norther Lights Southern Cross(1975)
다른 뮤지션들을 커버한 4번째 정규 음반 < Moondog Matinee >(1973)은 색다른 시도였지만 완성도는 덜했다. 로버트슨의 작곡으로 독자성을 재확보한 1975년 작 < Norther Lights Southern Cross >는 또렷한 선율과 과하지 않되 안정적인 편곡과 프로덕션을 다시금 천명했다.

두 곡을 기억해야 한다. 캐나다 남동부 노바 스코샤의 분쟁 역사를 담은 ‘Acadian driftwood’와 ‘Ophelia’. < 인생 찬가 >로 알려진 미국 시인 헨리 롱펠로의 대표작 < 에반젤린 >에서 착안한 전자가 고든 라이트풋의 ‘The wreck of the Edmund Fitzgerald’처럼 문학적 서사를 둘렀다면 후자는 악곡 자체가 명징하다. 화려하지 않지만 건반악기와 관악기가 혼합된 맛깔나는 연주가 남부 재즈의 향취를 드리운다. ‘Ophelia’의 진가를 안 마이 모닝 자켓과 빈스 길 같은 후배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포크 록 명작을 리메이크했다.

Fallen angel / Robbie Robertson (1987)
조디 포스터 주연의 < 삐에로 프랭키 >(1980)와 로버트 드니로가 열연한 < 성난 황소(분노의 주먹) >(1980)처럼 사운드트랙 작업에 집중하던 로버트슨은 1987년 솔로 데뷔작 < Robbie Robertson >을 발매했다. 빌보드 200 38위와 캐나다 앨범 차트 12위를 수확한 < Robbie Robertson >엔 더 밴드 시절 동료 릭 당코와 가쓰 허드슨 뿐 아니라 보노를 비롯한 유투의 전 멤버, 최고의 재즈 편곡자 길 에반스와 프랭크 자파와 활동했던 드러머 테리 보지오, 채프먼 스틱이라는 독특한 현악기를 연주하는 토니 레빈 등 특급 지원군을 구성했다.

피터 가브리엘과 공연한 ‘Fallen angel’은 세심한 편곡과 프로덕션을 갖춘 명품 팝록이며 로버트슨과 가브리엘의 잔향이 동등하게 드러난다. 루츠 록 뮤지션 샘 라나스의 백보컬을 입힌 ‘Showdown at big sky’와 캐나다 프로듀서 겸 뮤지션 다니엘 라노이스가 참여한 ‘Somewhere down the crazy river’도 주목할 만하다. 스페인 재즈 퓨전 기타리스트 알 디 메올라는 < Robbie Robertson >을 가장 좋아하는 팝 록 앨범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Go back to your woods / Storyville (1991)
경력 내내 딕시랜드 재즈를 비롯한 남부 음악에 뿌리 뒀던 로버트슨 1991년 두 번째 정규 음반의 제목을 뉴올리언스의 유서 깊은 지역 스토리빌(Storyville)로 짓는다. 본격적인 재즈 음반으로 보긴 어렵지만 알렉스 아쿠냐(드럼)과 로니 포스터(해먼드 오르간)처럼 재즈에 기반한 세션 뮤지션을 기용해 악기 듣는 맛을 살렸다.

‘The way it is’의 주인공 브루스 혼스비와 듀엣한 ‘Go back to your woods’는 뉴올리언스 알앤비의 전설적인 뮤지션 워델 퀘제궤의 혼섹션과 펑크(Funk) 그룹 더 미터스의 창립자 아트 네빌의 오르간 연주가 흥겨움을 자아낸다. “스토리빌의 밤이 저물도록 여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못 보낸다면 음악이 대신 너를 흥분하게 할거야(When the night goes down on Stroyville, If the women don’t get you, then the music will get your trills)”란 가사가 곡의 생동감을 요약했다.

Theme for Irishman / The Irishman (Original Motion Picture Sound)(2019)
로버트슨은 영화 감독 마틴 스콜세지의 죽마고우였다. 더 밴드의 1978년 콘서트 < The Last Waltz >를 다큐멘터리로 만든 < The Last Waltz >(1978)에서 로버트슨은 사운드트랙 프로듀서를 역임했다. < 코미디의 왕 >(1983)과 < 컬러 오브 머니 >(1986) 등으로 지속된 협업의 마지막은 올해 10월 개봉 예정인 신작 < 플라워 킬링 문 >(2023)이었다.

로버트 드니로와 알 파치노가 출연한 2019년 작 < 아이리시맨 >의 메인 테마는 두 배우만큼이나 무게감 있다. 연륜과 품격을 담은 곡조엔 1930~40년대 미국 누아르의 고전미가 흘렀고, 프레더릭 요넷의 하모니카에서 레지 헤밀턴의 베이스로 이어지는 구성이 절묘하다. 배철수는 영화 음악에 활발했다는 측면에서 로버트슨을 랜디 뉴먼과 비교했다. 뉴먼은 < 토이스토리 >의’You’ve got a friend in me’ 등 픽사 애니메이에서 활약한 작곡가.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1943년생으로 나이가 같다.

국내에서의 인지도는 미약하지만 로비 로버트슨은 록 역사의 위대한 작곡가로 추앙 받으며, 그에 따른 관련 미디어가 많다. 캐나다 영화 감독 다니엘 로허가 연출한 다큐멘터리 영화 < 로비 로버트슨과 더 밴드의 신화(Once Were Brothers: Robbie Roberston And The Band >(2019)는 로버트슨의 2016년 회고록 < 증언 >을 기초로 했고 그의 내레이션도 들을 수 있다. 로버트슨의 음악 세계를 이해하는 지침서 역할을 할 것이다. 로버트슨의 마지막 정규 음반 < Sinematic >(2019)에 동명의 ‘Once were brothers’가 실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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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 필자가 사랑하는 뮤직비디오 (해외편)

팻보이 슬림(Fatboy Slim) – ‘Weapon of choice’ (2001)
< 007 뷰 투 어 킬 >의 미치광이 빌런을 연기한 크리스토퍼 워컨, 기이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 존 말코비치 되기 >의 감독 스파이크 존즈, 펑카델릭의 베이시스트 부치 콜린스, 그리고 빅 비트의 시대를 주도한 팻보이 슬림의 앙상블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진중하고도 자유로운 뮤직비디오를 탄생시켰다. 정장 차림의 크리스토퍼는 적막과 공허함이 감도는 호텔 로비에 멍하니 앉아 있다. 이윽고 ‘Weapon of choice’의 비트가 울려퍼지자, 호텔은 댄스플로어가 된다. 3분 40초간 리듬을 타고, 움직이고, 점프하고, 회전하고, 날아오르면서 가사처럼 이렇게도 저렇게도 마음껏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삭막한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이자 일탈이다. 2001년, 그렇게 팻보이 슬림은 수많은 샐러리맨 겸 내적 댄서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김태훈)

푸 파이터스(Foo Fighters) – ‘The pretender’ (2007)
파괴는 순간이다. 푸 파이터스의 강렬한 에너지를 분출하는 ‘The pretender’의 뮤직비디오에 복잡한 서사가 등장하지 않는 건 이때의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상징하는 바를 해석하는 게 의미 없을 정도로 직관적인 대립 구도, 저항 정신을 밀도 있게 표현한 음악의 색채, 비트와 밀접하게 닿아 있어 타격감이 넘치는 장면전환 등 영상의 모든 요소가 펑크(Punk) 그 자체다. 이 세상 모든 위선자를 부숴버리는 푸 파이터스의 카운터 펀치가 4분 30초간 신나게 작렬한다. (김호현)

패닉 앳 더 디스코(Panic! At The Disco) – ‘Girls/girls/boys (Director’s cut)’ (2013)
원 테이크의 아슬함을 즐긴다. 수백 번의 리허설을 거친다 해도 기어코 발생하고야 마는 돌발 상황, 그 무한한 변수를 극복한 필름이 포착해 낸 귀한 찰나를 좋아한다. 이 곡 또한 단 한 번의 촬영으로 기세를 이어 나간 원 샷(one-shot) 뮤직비디오다. 이십여 년 전 제작된 미국의 알앤비 가수 디안젤로의 아이코닉한 뮤비 ‘Untitled’를 그대로 리메이크했다. 알몸의 남성 뮤지션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열창하는 와중, 그 신체를 샅샅이 핥아 내리는 카메라가 거침없이 아래로 내려가다 장골 근처, 기막힌 타이밍에 시선을 거둔다. 간단한 촬영 기법만으로도 재치와 긴장감을 더한 것은 물론 주인공의 연기도 강렬하다. 사랑의 애환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프론트맨 브랜든 유리가 피사체의 힘만으로 끌고 가야 하는 원 샷 필름의 약점을 온몸으로 보완했다. 바이섹슈얼을 암시한 가사에 맞춰 디렉터스 컷 클라이맥스에 삽입된 약간의 반전이 곡을 독특한 방식으로 시각화했다. (박태임)

레이디 가가(Lady Gaga) – ‘Born this way’ (2011)
사랑하는 것을 떠나 충격과 깨달음을 안겨준 뮤직비디오다. 다소 기괴하고 충격적인 어쩌면 직접적이고 적나라하게 출산을 묘사한 도입부로 인해 눈을 깜빡이게 하는 시작을 지나면 이후 퍼포먼스는 그야말로 강력 메시지의 집합체다. 속옷 정도만 입고 ‘Don’t be a drag, just be a queen’ 그러니까 ‘행세하지 말고, 그냥 네가 돼라’는 간단하고 위대한 메시지를 계속해서 밀어붙인다. 시선을 뗄 수 없는 영상 속 캐릭터 및 시각 효과도 출중하다. 유니콘을 타고 내려온 레이디 가가가 제목 그대로 ‘태어난 대로 살자’며 전 세계 많이 어른이들의 “마더 몬스터(Mother monster)”가 된 작품. 이 뮤직비디오가 마음에 들었다면 2011년 53번째 그래미 시상식에서 그가 펼친 공연도 추천한다. (박수진)

시저(SZA) – ‘Doves in the wind’ (2017)
화려한 비주얼이나 파격적인 연출로 시선을 끄는 뮤직비디오가 있는가 하면 시각적 쾌감이 부족해도 코믹하고 컨셉츄얼한 시도로 재미를 주는 영상이 있다. 최근 몇 년간 최고의 알앤비 앨범으로 손꼽힌다고해도 손색이 없을 시저의 < Ctrl >에 수록한 ‘Doves in the wind’가 그렇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내세우는 가사와 켄드릭 라마의 컨셔스랩, 서정적인 얼터너티브 알앤비 사운드까지. 음악만들어서는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를 상상하기 힘들다. 무림고수들의 대결이라는 스토리를 짧고 전형적인 연출과 빈티지 질감의 대사, 어설픈 와이어 액션으로 담은 영상은1980년대 무협영화를 고증한다. 굳이 의미를 부여할 필요 없이 시저와 켄드릭 라마의 유쾌한 면모에 집중하자. (백종권)  

케미컬 브라더스(Chemical Brothers) – ‘Star guitar’ (2002)
사람들은 30초 정도 지났을 때 이 뮤직비디오의 패턴을 눈치 챘겠지만 그 시간이 되기 전까지 대부분은 예측 불가능한 시각적인 충격을 기대했을 것이다. 이유는 감독이 미셸 공드리이기 때문. 가사 없는 차갑고 날카로운 일렉트로니카 사운드와 건조한 영상이 만나 제3의 공간을 창조한 이 명작은 돈이 아닌 아이디어의 승리이자 영광이다. 때로는 ‘Star guitar’처럼 음악과 화면이 어울리지 않는 뮤직비디오가 충격과 감탄을 선사한다. (소승근)

맥 밀러(Mac Miller) – ‘Good news’ (2020)

‘Good news’ 뮤직비디오의 맥 밀러는 초연했다. 생애 마지막 작품이 된 < Swimming >에서 비극적 고통을 토해낸 젊은 아티스트에겐 ’삶‘에 대한 미련은 사라졌고, 고민이 떠난 자리엔 < Circles >란 텅 빈 허무가 머물러있다. 타인을 향해 미소 짓던 그였지만 당장 자신의 내일은 캄캄했고 이는 곧 정체를 알 수 없는 형형색색의 형태로 변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혼란을 뒤로하고 도달한 곳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우주. 맞이한 순간이 위안이었을까? 확신할 수 없기에, 우리는 그가 마련한 무(無)의 공간에서 단지 유영할 뿐이었다. 6분 30여 초. 한 사람의 생을 판단하기엔 턱 없이 부족한 시간. 다만 여과되지 않은 고뇌와 해방의 과정이 세상에 묵직이 내려앉았다. 맥 밀러가 견딘 무게가 큰 만큼 모두의 상처도 깊게 파였지만, 그가 느낀 우울의 끝엔 남은 이들을 위해 심은 위로가 작게 싹트고 있었다. (손기호)

에미넴(Eminem) – ‘Stan’ (2000)
누군가의 사랑은 잔인하고 강렬하다.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이 타인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 ‘Stan’은 뮤지션과 그에게 집착하는 팬의 시선을 빌려 비극적인 이야기로 엮었다. 1인 2역을 소화한 에미넴의 랩이 먼저 애증의 분노를 토해내고, 노랫말을 그대로 화면에 옮긴 광적인 스토킹 현장이나 강물에 차가 들이받는 컷이 차례로 입혀지면 이 서사는 곧 생동감 넘치는 현실로 다가온다. 비극으로 치닫는 이 울적한 영상은 감상자들에게 시커멓게 타버린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을 뇌리에 강하게 남겨버린다. 참, 이왕 ‘Stan’을 챙긴 김에 뮤직비디오 디렉팅을 닥터 드레가 맡았다는 사실과 2001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엘튼 존과 함께 한 라이브 버전도 잊지 말길. (손민현)

자넬 모네(Janelle Monae) – ‘Dirty computer’ (2018)
자넬 모네의 4집 < Dirty Computer >와 함께 제작된 동명의 장편 SF 필름은 규범에 맞지 않는 소수자들을 ‘오염된 컴퓨터’로 간주하는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제인 57821’로 분한 자넬 모네 역시 강제로 기억을 삭제 당할 위기에 놓이지만 그의 기억은 오히려 시스템을 교란하는 저항의 도구로 작용한다. 그것이 기억과 꿈, 환상의 경계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며 형식적으로는 다름 아닌 뮤직비디오였기 때문이다. 내러티브 필름과 뮤직비디오의 절묘한 결합, 정점에 오른 모네의 음악적 성취, 새로운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메시지까지. 시학, 미학, 주제 모든 면이 군더더기 없이 완벽하다. (신하영)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 – ‘Sledgehammer’ (1986)
정신 착란적이고 기괴하지만 놀랍고 감탄스럽다. 프레임 단위로 촬영물을 연결해 움직임을 구현하는 픽셀레이션과 점토를 이용한 클레이메이션 등 다양한 기법을 동원한 ‘Sledgehammer’는 가브리엘이 영국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제네시스 시절부터 제공한 시각적 충격파의 연장선상이며, 아하 ‘Take on me’와 더불어 1980년대를 대표하는 음악 영상이다. 아르침볼도의 환상화와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 개구진 동심(머리둘레를 횡단하는 기차)과 고약한 장난(치킨 댄스)이 뒤섞인 유미주의 종합선물 세트는 가브리엘 뇌 속 상상계의 출력물. 곡의 펑키(Funky) 리듬을 살린 스티븐 R. 존슨의 연출력은 < So >의 수록곡 ‘Big time’에서도 이어진다. (염동교)

케로 케로 보니토(Kero Kero Bonito) – ‘Break’ (2016)
음악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음악에는 시공간 이상의 힘이 있다. 평범한 일상의 순간도 음악과 함께 종종 특별한 경험으로 완성되곤 하니 말이다. 케로 케로 보니토의 프론트우먼, 사라 보니토는 과연 음악의 이런 마법같은 힘을 알고 있는 인물이다. 하트 모양 선글라스, 정체 모를 음료 한 잔과 함께 런던 곳곳에 걸터앉은 뮤직비디오 속 사라는 그 존재만으로 주위를 휴양의 한복판으로 바꿔 버리며 이 흥미로운 현상을 몸소 시각화해 보인다. 바쁜 일상 속 찰나의 휴식이 필요하다면, 양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Break’를 재생해 보자. 그곳이 어디든 친절한 가이드 사라 보니토가 당신을 달콤한 휴양지로 안내할 것이다. (이승원)

마이 케미컬 로맨스(My Chemical Romance) – ‘Welcome to the black parade’ (2006)
죽어가는 남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감성적인 피아노 선율. 단숨에 이목을 잡아끄는 오프닝이다. 거기에 아버지에 대한 가사의 언급과 화려한 사후세계가 등장하면 이 뮤직비디오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병원에서 숨을 거둔 환자가 저승으로 연결되어 자신을 격려하고 축복하는 이들을 만나는 장면을 목격하는 순간 죽음이 삶과 별개가 아닌 또 하나의 연장이라는, 노래의 가사 ‘Carry on’의 의미가 가슴에 꽂힌다. 저승의 악단 ‘블랙 퍼레이드’로 분한 멤버들의 격정적인 연기, 돈 냄새 나는 세트와 각종 효과 장치, 배경을 가득 메운 엑스트라 귀신들이 완성한 시각적 아름다움도 압도적인데, 무엇보다 그러한 삶과 죽음을 어루만지는 메시지가 따뜻하다. 마이 케이멀 로맨스의 ‘Bohemian Rhapsody’? 아니, 구태여 어떤 곡과 비교할 필요 없는 2000년대 최고의 록 명곡. (이홍현)

오케이 고(OK Go) – ‘Here it goes again’ (2009)
뮤직보다 뮤비! 음악보다 영상에 더 심혈을 기울이는 오케이 고 덕에 뮤직비디오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다. 무표정으로 진지댄스를 춘 ‘A million ways’, 스톱 모션을 이용한 ‘End love’, 그리고 화룡점정 러닝머신 퍼포먼스를 보여준 ‘Here it goes again’을 대표로 밴드는 지금까지도 기발한 작품을 찍어오고 있다. 뮤직비디오에 정성을 다하는 이미지 탓에 라이브를 못 할 것이라는 편견도 있었지만, 몇 년 전 국내 록 페스티벌에서 본 그들의 실력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오해는 풀렸고, 오케이 고는 음악을 못하는 게 아니라 영상 제작을 더 잘할 뿐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음악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임동엽) 

뱀파이어 위켄드(Vampire Weekend) – ‘Cousins’ (2009)
기발하다. 뱀파이어 위켄드의 커리어 중 가장 통통 튀는 작품으로 평가 받는 < Contra >에서도, 그중 가장 복잡하고 급진적인 곡인 ‘Cousins’의 뮤직비디오는 더할 나위 없이 밴드가 가진 활기와 상상력의 역동성을 내포한다. 골목길 위에 놓인 트레일을 반복 움직이며 간단한 변주를 주는 구조부터 충동적이다. <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의 감독 가스 제닝스가 구현한 독창적 프레임 속 원색 그라피티와 접착 테이프, 각종 저예산 소품들, 꽃가루마저 휘날리는 투박한 판타지가 현실과 화려하게 충돌한다. 큰 의도를 찾을 수 없어도 정신없이 빠져든다. ‘인디’가 가진 불특정 유쾌함을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한다면, 군말없이 이 영상을 보여주지 않을까. (장준환)

차일디쉬 감비노(Childish Gambino) – ‘This is America’ (2018)
팝과 힙합, 어디에도 접점이 없었다. 그럼에도 알고리즘은 이 충격적인 아수라장 한가운데로 나를 안내했다. 합창과 기타 연주가 어우러진 도입부만 들으면 평화로운 찬가에 가깝지만, 주인공이 뒤춤에서 총을 꺼내들어 기타리스트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내 머리도 함께 터졌다. 투신, 총기 난사, 집단 폭동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중에도 ‘이게 미국이야/정신 바짝 차려’라며 뚝심 있게 현장 고발을 이어 간다. 트랩 비트 위에 실제 흑인들이 겪었던 참상을 그린 덕분에 성찰의 탄환 한 발이 즉각 신체를 관통한다. BLM(Black Lives Matter) 운동에 재차 불을 지폈던 차일디쉬 감비노 조차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종종 드러냈다는 게 아이러니. 분개해선 안 된다. 당장 주변의 약자들만 돌아봐도 달라진 게 없다. 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게 모두의 현실이다. (정다열)

펄프(Pulp) – ‘Bad cover version’ (2011)
“네가 누굴 만나든 내 아류일 뿐”이라 말하는 프론트맨 자비스 코커의 심보 고약한 가사와 달리 뮤직비디오의 정서는 사뭇 따뜻하다. 유명 뮤지션을 초빙해 녹음 광경을 포착하는 캠페인 송의 형식을 비틀어 진짜 아티스트 대신 그들의 닮은꼴을 초대했고, 심지어 음원에는 이들의 어설픈 노래까지 담았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지만 이 우스꽝스러움 속에 공동체의 가치가 피어난다. 사실 우리 살아가는 모습이 그렇지 않은가. 각각 불완전한 엉터리, 가짜일 수는 있어도 한데 모여 화합하는 순간 삶은 어느덧 ‘진짜’가 되며 형편없는 모창은 사랑스러운 찬가로 바뀐다. “가짜들의 세상”이어도 아름다울 수 있는 법이다. 마음만 순수하다면. (한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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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스래시 메탈 명곡 13선(2)

테스타먼트 – First strike is deadly / The Legacy(1987)
1983년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조직된 테스타먼트는 40년간 메탈월드를 종횡무진 누빈 메탈계 큰형님이다. 괴물 보컬 척 빌리(Chuck Billy)와 전 드림 시어터의 드러머 마이크 포트노이와 함께 메탈 공동체 메탈 얼라이언스에서 활동한 기타리스트 알렉스 스콜닉(Alex Skolnick) 등 실력파로 구성된 테스타먼트는 ‘성서’란 그룹명만큼 진중하고 깊은 음악성을 펼쳐냈다.

데뷔 앨범 < The Legacy >(1987)는 이듬해 나온 2집 < The New Order >와 함께 테스타먼트의 가장 우수한 음반으로 꼽힌다. 원래 밴드명도 더 레거시였으나 앨범 녹음 전 테스타먼트로 바뀌었고 보컬 스티브 소우자가 엑소더스로 떠났다. ‘The haunting’과 ‘Burnt offerings’같은 대표곡이 수록된 < The Legacy >는 소우자 특유의 강렬하고 무거운 가사가 돋보이니 떠나기 전 큰 선물을 남긴 셈이다. 균형감 있는 수록곡 사이에서 국내 팬들에겐 ‘First strike is deadly’가 선명할 수밖에 없다. 기타리스트 이태섭이 서태지 ‘하여가’에서 ‘First strike is deadly’의 기타 간주를 차용했기 때문이다.

애니힐레이터 – Alison hell / Alice In Hell(1989)
‘소멸자’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의 애니힐레이터는 보이보이드, 레이저, 새크리파이스와 더불어 캐나다 스래시 메탈의 사천왕으로 군림했다. 1984년 캐나다 수도 오타와에서 결성된 이래 40년 가까이 활동 중인 애니힐레이터는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예스를 방불케하는 이합집산에도 리드 기타리스트 제프 워터스(Jeff Waters)가 굳건히 중심을 지켰다.

메탈 명가 로드러너에서 발매된 < Alice In Hell >(1989)는 데뷔작이 무색한 완성도다. 워해머로 퉁퉁 내리치는 듯한 기타 리프의 ‘W.t.y.d’와 꿈틀거리는 리듬의 ‘Schizo’ 등 다채로운 곡들엔 워터스와 밴드의 또 다른 창립자 빅 존 베이츠(Big John Bates)의 역량이 빛을 발했다. 워터스는 앨범의 총괄 프로듀서를 역임하기도 했다. 짧은 인스트루멘탈 ‘Crystal Ann’에서 ‘Alison hell’로 이어지는 구성은 초반부터 밀어붙이겠다는 공포문과도 같아 아찔하다. 부기맨에 대한 소녀 앨리스의 공포감을 담은 ‘Alison hell’은 잔혹동화스런 분위기와 물 흐르는 듯한 구성을 지닌 애니힐레이터의 역작이다.

세풀투라 – Arise / Arise(1991)
브라질에서 여섯 번째로 큰 도시 벨루오리존치에서 결성된 세풀투라는 브라질 헤비메탈의 뿌리 격인 밴드 스트레스와 파워 메탈의 최강자 앙그라와 더불어 가장 영향력 있는 브라질 메탈 밴드로 인정받는다. 메탈 팬들에게 그루브 메탈의 명작 < Roots >(1996)과 빌보드 200 32위까지 오른 < Chaos A.D. >(1993)가 익숙하나 1984년부터 오랜 공력을 쌓아온 팀이다. 1986년 블랙 메탈과 데스 메탈을 섞은 듯한 데뷔작 < Morvid Visions >로 출사표를 끊은 세풀투라는 로드러너에서 발매한 1991년 작 < Arise >로 남미 스래시 메탈의 최고봉에 올랐다.

라틴 리듬에 거친 펑크적 특성을 부여한 < Arise >는 3분대의 짧은 곡들과 리드 기타리스트 안드레아스 키써(Andreas Kisser)가 쓴 ‘Desperate cry’와 ‘Altered state’ 같은 6분대 대곡들이 균형을 맞췄다. 황야에서의 합주를 담은 뮤직비디오가 인상적인 ‘Dead embryonic cells’과 더불어 싱글로 발매된 ‘Arise’는 시종일관 내달리는 브라질 종마 같은 에너자이저다. ‘Territory’, ‘Roots bloody roots’과 더불어 세풀투라의 대표곡으로 꼽힌다.

크리에이터 – Extreme Aggresion / Extreme Aggresion (1989)
독일은 록 음악 강국이다. 크라프트베르크와 캔을 위시한 크라우트 록과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은 스콜피온스, 멜로딕 스피드 메틀의 대표주자 헬로윈과 ‘Du hast’의 람슈타인 모두 독일 출신이다. 스래시 메탈 방면에서도 ‘저먼 스래시 메탈’의 분파가 생길 정도로 입지가 확고하다. 소돔과 탱커드, 디스트럭션과 함께 저먼 스래시 메탈의 판타스틱 포를 구축한 크리에이터는 1982년 결성된 이후 40년 현역을 이어가고 있다.

스피드 메탈과 인더스트리얼 등 시대에 조응하는 사운드를 선보였지만 역시 스래시 메탈에 중심을 두었다. 스래시 메탈 클래식 < Pleasure To Kill >(1986)로 일찌감치 입지를 확고히 한 이들은 < Terrible Certainty >(1988)와 < Extreme Aggresion >(1989)로 기세를 이어간다. 기타리스트 요르그 트리에비아토프스키(Jörg Trzebiatowski)와 드러머 벤토(Ventor)의 기량을 고스란히 반영한 < Extreme Aggresion >은 명료한 편곡과 연주로 성숙기를 나타냈다. 미국에서 사랑받았던 ‘Betrayer’와 더불어 타이틀 곡 ‘Extreme aggression’은 기승전결이 또렷한 곡 전개와 밀레 페트로자(Mille Petrozza )의 고음 보컬로 크리에이터의 전성기를 압축했다.

디스트럭션 – Curse the gods / Eternal Devastation (1986)
독일 소도시 바일 암 라인에서 1982년 결성된 디스트럭션은 2022년 열다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 < Diabolical >을 발표할 만큼 정력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초기엔 기타 트레몰로 피킹과 스크리밍, 조악한 음질 등을 특질로 하는 메탈의 하위 장르 블랙 메탈의 성향도 드러냈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내놓은 일련의 음반들로 독일 스래시 메탈의 선봉에 섰다. 멤버 교체가 잦았으나 밴드의 중심축은 베이시스트 겸 보컬리스트 마르셀 시머(Marcel Schimer)와 기타리스트 마이크 시프링거(Mike Sifringer)였다.

비교적 낮은 완성도의 데뷔작 < Infernal Overkill >(1985)을 무색하게 할 만큼 2집 < Eternal Devastation >과 3집 < Release From Agony >의 위용은 대단하다. ‘Confound games’와 ‘Life without sense’등 대표곡이 몰려 있는 < Eternal Devastation >은 드러머 토마스 샌드만(Thomas Sandmann)의 마지막 참여작으로 원년 멤버 간의 화양연화를 남겼다. “신을 저주한다”라는 도발적 제목의 ‘Curse the gods’는 음산한 분위기를 고조하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전개가 일품이며 결코 화려한 연주라고 할 순 없지만 시머의 고음 보컬과 중독적인 기타 리프가 곡의 레벨을 한 층 끌어올렸다.

소돔 – Agent orange / Agent Orange (1989)
독일 제조업 중심지 겔젠키르헨에서 결성된 소돔은 기독교 역사에 근거한 죄악의 도시라는 팀명처럼 강렬한 음악을 뿜었다. 원년 멤버로 끝까지 밴드를 지키고 있는 보컬 겸 베이시스트 탐 엔젤리퍼(Tom Angelripper)를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한 소돔은 특유의 음산하고 악마적인 기운으로 독일 블랙 메탈의 뿌리가 되기도 했다. 2020년 열일곱번째 정규 음반 < Genesis XIX >로 스태미나를 과시한 소돔은 자국 후배들에 존경을 사는 독일 메탈 대부로 자리매김했다.

1989년 작 < Agent Orange >는 1987년 발매한 < Persecution Mania >와 함께 소돔의 양대 명작으로 통한다. 후자가 블랙메탈에서 스래시로 이동하는 과도기였다면 전자는 스래시 메탈을 파고들었다. 개틀링 건이 그려진 앨범 재킷은 전쟁 사상자의 추모라는 메시지와 맞닿아 있고 소돔은 어느 때보다 광포한 연주로 주제의식을 부각했다. 베트남전에 사용된 주홍색 고엽제에서 착상한 타이틀 곡 ‘Agent orange’는 비장미 넘치는 도입부와 변화무쌍 전개로 곡의 서사를 구축했다. 크리스 위치헌터(Chris Witchhunter)의 드럼 속주와 안젤리퍼의 억지로 쥐어짜는 듯한 보컬이 극적 효과를 연출했다.

이미지 작업: 백종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