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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5 신지

평소에도 많이 얘기했지만 코요태를 그만두지 않은 것이 내가 가장 잘한 일이다.

웹진 이즘(IZM)이 인천 부평구 문화재단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련한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열다섯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여름 댄스음악의 전설이자 현재진행형 코요태의 메인 보컬 신지다.

1998년 데뷔 이래 코요태는 마이너 댄스음악이란 확고한 정체성으로 나이트클럽과 길거리를 수놓았다. “차가 있었던 분들이라면 우리의 테이프가 꼭 있었다.” ‘순정’, ‘만남’, ‘시련’, ‘Passion’, ‘디스코왕’ 등 나열하기 힘든 수많은 히트곡이 줄지어 터지면서 그들은 댄스음악 전문팀의 롱런 가능성을 시범했다. 그때 만해도 가수가 댄스음악을 가지고 10년 이상 장수하기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중심엔 노래하는 신지가 있었다. 오랜 세월을 통해 익숙해진 목소리는 이제 댄스음악, 발라드, 트로트 등으로 멀티 스타일로 발현되어 대중을 찾았고, 가수는 기꺼이 노래 부를 수 있는 지금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 모두가 ‘인복’ 때문이라며 반복적으로 주변인들에 대한 감사와 애정을 표한 현한 신지를 지난 10월25일 홍대 빅퍼즐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대화에 거침이 없었다.

1998년 데뷔한 코요태가 20년이 넘도록 여전히 이름을 지킨 동력이 무엇일까?
크게 튀지 않았지만, 멤버 개개인이 방송을 통해 꾸준하게 얼굴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코요태의 음악에 대한 반응이 예전보다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김종민의 힘이 크다고 생각한다. 김종민은 (코요태 핵심은)신지의 목소리라고 말하지만, 앨범과 노래에 한정할 때만이 그럴 것이다. 내가 메인 보컬이니까.. (웃음) 그것도 많은 분이 들어주실 때나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코요태의 시작부터 원년 멤버가 바뀌는 과정에서도 지금까지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인복이 많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많이 얘기했지만 코요태를 그만두지 않은 것이 내가 가장 잘한 일이다.

김종민이 군 생활을 하기 전과 후에도 많은 예능 활동을 소화하고 있다.
응원한다. 코요태는 원래 애초 예능을 많이 하는 그룹이었고, 사랑받을 수 있던 이유이기도 하다. 나 역시도 김종민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자주 예능에 출연했다. 방송에서는 나름 청순하게 생긴 여자가수가, 솔직하게 말하는 콘셉 자체가 신선했지 않았나 생각한다. (웃음)

코요태에서 신지의 정체성을 본인은 어떻게 보는지..
내가 지금 마흔이다. 열여덟 살 데뷔 이후 내 인생의 반 이상을 이지선이란 본명보단 신지로 살았다. 이름보다 예명이 익숙한 만큼, 많은 분께 나를 알릴 수 있었던 계기 역시 코요태였다. 만약 솔로나 걸 그룹으로 나왔으면 이만큼 빛을 봤을까. (웃음) 코요태로 시작을 안 했다면 내가 과연 이 자리에 있었을까?

그 당시 여성 보컬을 중심으로 한 3인조 혼성그룹의 조합은 흔하지 않았다.
맞다. 3인조 혼성은 많이 있었지만, 여자 보컬을 메인으로 세운 댄스 그룹은 우리가 처음이라 생각한다. 사실 데뷔 때만 해도 많은 분이 그룹의 축인 차승민한테 스포트라이트가 갈 거라고 했다. 나는 인천에서 가요제나 쫓아다니던 촌스러운 아이였으니까. 외모도 아이돌보다 못했고, 춤을 잘 추는 것도 아니고. 그런 어린 애가 누구한테도 안 지려고 했다. 당차다 못해 되바라져 보이기도 했을 거다.

‘순정’이 히트했을 땐 어떤 기분이었나. 1999년이다.
잘 몰랐다. 나이트클럽을 갈 수 없었던 고등학교 3학년의 나이였으니 체감을 할 수 없었다. 코요태 음악 중 애증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순정’이다. 신지를 있게 해준 곡이고, 아직 무대의 엔딩이기도 하다. 공연에서 ‘순정’을 먼저 부르면 다른 노래가 다 죽으니까 세트 리스트 무조건 마지막 순서에 배치한다.

‘파란’, ‘비상’ 등 새 곡을 가지고 나올 때마다 신지의 어떤 형태든 특별한  안무 동작이 있었다. 팬들이 많이 따라했던 부분이다. 본인 아이디어의 산물인가?
내가 요청하는 건 딱 하나다. 라이브 하면서 안무를 보여드려야 하니까 발보단 팔과 손을 이용하는 동작을 부탁드렸고, 실제로 그런 것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쉽고. 나부터가 어려운 춤은 못 춘다. (웃음) 어려운 부분이 없으니 많은 분이 디스코 클럽 같은 곳에서 편하게 따라 한 것 같다.

코요태 혹은 솔로를 통틀어서 제일 자랑스럽거나 만족스러운 앨범 혹은 곡은?
뭐가 더 좋고 나쁘다고 표현하기가 쉽지 않지만, 코요태의 가장 단단한 결과물은 1집 < 고요태(高耀太) >, 2집 < 실연 >, 6집 < Koyote 6 >라고 생각한다. 다른 앨범도 마찬가지지만, ‘디스코왕’이 있던 6집은 열일곱 곡으로 꽉 채워 발매했고 그중에서도 버릴 게 없었다. 특히나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신지는 항상 ‘기’가 세 보이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뜻밖에 무대 공포증이 있다는 얘기에 놀랐다.
아무도 안 믿더라. 그게 너무 힘들었다. 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웃음) 어릴 때는 무서울 게 없었는데 철이 든 거로 생각한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솔로 활동을 하게 됐다. 김종민이 갑자기 군 대체 복무 판정을 받아 가게 됐고, 빽가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코요태란 그룹 안에서 애초 가졌던 ‘각자 해보고 싶은 음악을 혼자 해보자’가 아니라 마지못해 한 거고. 2008년부터 10년까지가 불안정한 시기였다. 만약 그때 코요태를, 가수 신지를 포기를 했다면 지금 이렇게 인터뷰도 못 했을 거다.

혹시 코요태로 모든 걸 일구고 난 다음, 일종의 허탈감은 아니었을까?
그런 건 아니다. 멤버들의 갑작스러운 부재가 컸다.

우울증 대인기피증 등 당시 리얼한 상황을 듣고 싶다.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카메라 리허설까진 아무렇지 않게 잘했다. 그런데 본방송에 들어가고, 시작해야 되는 데 뭔가 어색하더라. ‘내가 지금 여기에 왜 있지?’란 생각이 들었다. 그 전부터 떨림은 있었는데 < 음악중심 >하던 날이 최악이었다. 생방송, MC를 많이 했던 터라 라이브와 녹화 방송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서 온 건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안이 갑자기 닥치니.. 미치겠더라

병원에서는 뭐라고 하던가?
대인기피증, 무대 울렁증, 공황장애, 그리고 우울증이라고 했다. 약은 먹지 않았다. 평소 내 모습과 어울리지 않은 병이지만, 사실 대외적으로 비추었던 센 이미지는 ‘자기방어’적이었던 내 성격에서 나온 것이다. 스스로 뛰어난 것도 없다 느끼며 연예인을 시작했고, 활동하면서도 ‘무슨 복이 많아서 사랑을 받을까?’란 생각을 했다. 너무 잘 될 때는 기계처럼 움직이기도 했고. 노래가 좋아서 가수가 됐는데, 스케줄이 너무 많아 흥미를 느낄 시간도 없었다.

지금도 혼자 무대는 힘든가?
당시에 비하면 아무렇지 않지만, 아직 발라드는 혼자 하기 힘들다. 그때는 녹음하면서도 떨었으니까. 너무 힘들어서 녹음실에 작곡가와 나만 남아 불도 끄고, 가사도 외워 노래 불렀는데, 목소리가 바들바들 흔들리고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아무런 생각이 없으면 좋으련만. 불안을 겪고 난 뒤엔 조금만 인지해도 더 떨게 되더라.

신지는 출생(부평구 청천동)은 물론 초중고를 부평에서 졸업한 오리지널 부평인이다. 청천 초등학교, 북인천여중(계양구 소재), 부평구 부개동의 부개여고를 다녔다. 그에게 부평은 ‘마음 편하게 놀 수 있는 공간’이자 동시에 ‘가수의 꿈을 품게 한 공간’이다. 자그마한 스튜디오에서 연습하고, 가요제에 출전하면서 데뷔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 그는 다른 인천 아티스트처럼 인천이란 출신을 자랑스러워했다.

부평에 대한 이미지는?
좋은 곳이었다. 나한테 부평역 앞 지하상가는 놀이터였다. 가수를 하기 전에는 아르바이트도 했고 데뷔하고도 우리 음악이 얼마나 나오는지, 반응이 어떤지 가늠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자주 갔다. 길보드 차트라고 하지 않나? 리어카에서 노래가 나오고 했던 때에 인기를 체감할 수 있었다. 부평은 마음 편하게 놀 수 있는 공간이었다.

고향으로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은 있는지.
부모님이 한 번도 인천을 떠나신 적이 없었고, 나만 서울에 나와 있던 터라 워낙 자주 다녀온다. 떠났다든가 다시 간다든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지금도 마음  속에는 부평이 있는 것 같다. 가끔 스케줄 때문에 경인 고속도로를 지나가면, 예전에 살았던 무지개 아파트가 보인다. 그때는 어릴 때 생각이 나 뭉클하다. 따로 숙소는 있긴 했지만 3집을 시작하고도 집은 부평이었다.

어릴 때 제일 좋아했던 가수 혹은 음악은?
박미경의 노래로 가요제에 많이 나가기도 했고,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는 인천 청소년 가요제에 나가서 은상을 받았다. 여자 가수가 솔로로 무대 위 그렇게 멋진 모습은 처음 봤다. 충격이었다. 심지어 고음을 너무 잘 올리더라. 그런 강렬한 모습 때문에 박미경을 동경했다. 남자가수의 경우 무조건 ‘모두 잠든 후에’의 김원준이다. 김원준의 인천 팬클럽 회장이기도 했다. (웃음)

박미경을 따라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시원했고, 멋있었다.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여자한테 저런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 게 박미경이 처음이었으니까. 노래 자체를 부르는 걸 좋아하던 나였으니까, 저렇게 무대에서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연락도 하고 지낸다.  신기하다. (웃음)

곧 코요태 앨범이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다.
모레인 10월 27일에 이효리(린다G)와 함께 한 ‘삭제’가 나온다. 6월부터 매달 노래를 한 곡씩 내고 있었고, 이번이 네 번째이다.  11월엔 신지의 솔로 음원을 거쳐 12월에 남은 두 곡을 더 포함해 코요태의 미니앨범으로 나올 계획이다.

‘삭제’은 어떤 스타일인가?
전형적인 코요태의 댄스곡이다.

11월에 나올 본인의 곡은? 어떤 스타일인가?
아마 11월 20일에 발매될 것 같다. 제목은 ‘세 번 잊어요’다. 6월에 발매한 ‘히트다 히트’의 프로듀서 ‘알고보니혼수상태’가 만들었고, 얼마 전 선물로 받은 곡이다. 처음 들었을 땐 너무 트로트가 아닌가 생각했다. 아직 정통에 가까운 장르를 표현할 정도의 깊이는 없었으니까. 작곡가에게 말하니 내 원래 스타일로만 불러 달라고 했고, 녹음한 뒤 나온 결과물에 생각보다 너무 만족해했다.

2008년 정규 1집 < 1stAlbum > 이후 꽤나 많은 시간이 지났다. 본인의 솔로 정규 앨범 준비 계획은?
신곡을 많이 만들어야 하는데, 내 음악 때문에 그룹의 작업을 뒤로할 순 없다. 일단 코요태가 우선이니까. 내년에 기회가 된다면 김종민도 빽가도 솔로를 했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내 활동에 시간을 투자할 수 있고.

코요태는 두 분의 약간은 무신경한 점으로(웃음) 내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다. 작게는 커버 디자인부터 사진을 고르고 뮤직비디오 수정하는 것까지. 그래서 멤버들이 나를 총 프로듀서라고 불러준다. 내가 해서 분란이 없다고. (웃음)

앞으로 어떻게 코요태를 유지해 갈 것인가?
2012년부터 직접 기획사를 만들어서 우리끼리 코요태를 꾸려가고 있는데 쉽지 않더라. 감사하게도 공연이 많은 그룹이었지만, 이번 코로나 19로 사무실 재정이 좀 힘들다.

코요태의 음악도 이제는 옛날 노래다. 요즘 분들은 잘 모르기도 하고. 그런데도 아직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 알아봐 주시고 반가워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어떤 가수든 신경 써서 만들어낸 음악을 소개할 때 모두 사랑을 받으면 좋겠지만, 원한다고 이뤄지는 건 아니니까. 우리의 목표는 해체하지 말고 디너쇼까지 해보는 것이다. 코요태가 40주년 일 때 김종민이 환갑이다. (웃음) 잔치 겸 디너쇼를 해보는 게 어떨까? 혼성 그룹으론 유일무이할 거 같다. 평론가님도 그 디너쇼에 꼭 와 달라.

감사해야 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나도 꽤 길다면 긴 시간을 활동했다. 중간 중간 무너지는 순간과 힘든 시기가 있었고 버틸 수 있을지 고민하기도 했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 술에 의지할 때도 있었고.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론은 다시 밝은 모습으로 대중 앞에서 방송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하다. 그래서 항상 나는 전생에 나라보다 더 큰 우주를 구한 것만큼의 인복이 있다고 말한다.

앞으로도 많은 분께서 코요태의 음악을 예전처럼 부담 없이 들어주셨으면 좋겠다. 일일이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감사하고 싶은 분들이 많다. 너무 감사하다.

인터뷰 : 임진모, 손기호, 임동엽
사진 : 임동엽
정리 : 임진모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