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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20 서수남

음악을 향한 애정은 멈추지 않았다.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련한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은 하청일과의 콤비로 한국 컨트리 포크 음악의 대중화를 이끈 뮤지션 서수남이다.

큰 키에 서글서글한 미소, 재치 있는 입담을 갖춘 서수남을 방송인으로만 기억하는 젊은이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중심은 음악이다. 하청일과 함께 내놓은 ‘동물농장’, ‘팔도유람’ 등 무수한 히트곡은 세대를 막론하고 널리 사랑 받았고 ‘수다쟁이’는 한국 랩 음악의 시초로 평가받기도 했다. 격동의 1970년대, 서수남 하청일 콤비는 국민들에 웃음과 감동을 선사해준 마술사였다.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옛날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미8군부터 시작해 하청일과 공유한 전성기, 선풍적 인기를 끈 노래 교실까지 쉼 없이 달려온 그의 여정이 펼쳐졌다. 코믹함 속에 숨겨진 다양한 음악적 시도와 멈추지 않는 열정을 확인했다. 연예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아지고 대한민국이 문화강국이 된 것에 감사하다는 그에게서 대선배의 따스함과 인자함이 묻어나왔다.

선생님 요즘 근황이 궁금해요.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우선 코로나 때문에 공연은 못 하고 있다. 지금은 집에서 쉬고 있는 상태다. 주업이 방송과 강연인데 현 상황으로 인해 여러모로 외부 활동이 어려운 실정이다.

최근에 복면가왕에서 만나 봬서 반가웠습니다. 출연하시게 된 계기를 알 수 있을까요?
프로그램 출연진에서 연락이 왔다. 추석 때 나가는 방송이다 보니 고연령 시청자들에게 친숙한 얼굴을 찾고 있던 모양이다. 목 상태가 안 좋아서 기량 발휘를 못 한 게 아쉽다.

음악을 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소년기에 접한 AFKN(주한미군방송)의 영향이 크다. 라디오에서 종일 음악이 흘러나왔는데 특히 컨트리풍 곡들이 인상적이었다. 음악 잡지를 사서 본 것도 큰 영향.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잡지들을 명동 뒷골목에서 팔곤 했다.

그럼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겠다고 마음 먹으신 계기는요?
고등학교 3학년이니 입시 공부를 해야 하는데 나는 계속 라디오만 붙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명동에 있는 쎄시봉이라는 음악감상실에 출입하게 되었다. 거기에 가보니 미 8군 부대에서 나온 컨트리, 팝 음반이 가득했다. 그래도 영어엔 자신이 있던 터라 가사를 나름대로 해석해가면서 음악 탐구에 열정을 쏟았다.

기타는 종로 2가에서 처음 접했다. 세계 음악학원이라는 기타 교습소에서 ‘애수의 소야곡’이나 ‘황성옛터’를 연습했다. 어느 날 원장님께서 ‘베사메 무초’를 연주하시는데 그 룸바 리듬이 너무 강렬해서 ‘아름다운 멜로디 이외에도 또 다른 연주 세계가 있구나’란 걸 실감했다.

그렇게 기타를 잡고 미국 팝송들을 연습하면서 조금씩 실력을 쌓았다.

음악을 한다고 할 때 부모님과 갈등은 없으셨나요?
물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음악 하면 딴따라라고 부르며 경시하는 풍토였다. 어머니가 제 뒷바라지하느라 고생이 많으셨는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기타만 치고 있으니 얼마나 걱정이 심하셨겠는가. 결국 어찌어찌해서 한양대를 입학했지만, 공부는 뒷전이었고 음악 감상실에서 사는 게 일과였다.

그렇다면 영혼의 콤비 하청일 씨는 어떻게 만나시게 된 건가요?대학교 때 음악 동아리 활동하면서 만났고 2학년 때 함께 콩쿠르에 나갔다. MBC가 주관하고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꽤 큰 대회였는데 거기서 돈 깁슨의 ‘Oh lonesome me’를 불러 입상했다. 밴드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혼자 기타 반주와 노래를 곁들인 게 독특했나보다.

그 대회에서 하청일 씨와 일행을 만났다. 자기네들이 지금 ‘아리랑 부라더스’ 보컬 그룹을 조직하려고 하는데 한 명이 모자란다고 나보고 들어와 달라는 거다. 당시에 브루벨스라는 사중창이 있었는데 그들과 비슷한 모습을 생각한 것 같다.

그 이후의 일들도 조금 더 들려주세요.
‘아리랑 부라더스’ 멤버들은 악보도 다들 볼 줄 아는 실력파였다. 나는 멜로디 파트였고. 몇 개월 함께 연습하고 워커힐 호텔의 가야금 식당에서 오디션을 봐 합격했다. 그런데 얼마 후 어처구니없게도 지나치게 큰 키 때문에 그림이 안 좋다고 나만 빠지게 되었다. (서수남은 190cm에 달하는, 당시로선 드문 장신이었다.) 그 길로 미8군 각종 무대에 오르며 전문적인 음악 생활을 시작했다.

미8군 부대에 가보니 윤항기, 차도균이 락앤키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이더라. 나도 오디션을 봐서 호평과 함께 A 등급을 받았다. 웨스턴 쥬빌리 쇼라는 단체에 들어갔는데 나와 음악적 코드가 딱 맞아 만족스러웠다. 1967년부터는 컨트리 음악 방송 그랜드올오프리쇼에 참여했고 비틀스처럼 전기기타가 들어간 록 음악이 득세했던 시절임을 고려했을 때 참 인기가 많았다. 샤우터스, 김치스, 키보이스, 가이즈 앤 돌스 등 각양각색 밴드들이 활약하던 시기다.

서수남의 애스컴 추억은 또렷했다. 그에게 애스컴은 최신 문물에 눈 휘둥그레지는 신천지이자 본인의 끼를 풀어헤칠 안성맞춤 무대였다. 펑크(Funk), 디스코, 재즈 등 다양한 장르로 분화한 블루스에 비해 현대에 미치는 영향이 덜한 감이 있으나, 컨트리 음악을 향한 미국인들의 사랑은 자명하다. 엘비스 프레슬리, 밥 딜런 등 당대의 대표 뮤지션들도 음악 뿌리의 한 축에 컨트리가 있었다.

미군들은 향수를 건드리는 컨트리 곡을 들으며 애상에 젖다가도 서수남의 전매특허 코믹 퍼포먼스에 열광했다. 탄탄한 실력과 빛나는 아이디어로 군부대를 들썩이게 했던 그는 애스컴의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그 당시 어떤 곡을 부르셨나요?
물론 생생하게 기억한다. 항구도시다 보니 모든 물자가 인천으로 들어왔고 보급기지인 애스컴이 자연스레 문화 일번지가 되었다. 나를 비롯한 저희 밴드 멤버들이 다 같이 카우보이 모자 쓰고 AFKN에서 나오는 최신곡을 들려주면 반응이 정말 좋았다. 평소에 라디오 방송으로만 듣던 곡을 라이브로 보니까 얼마나 재밌었겠는가.

그 당시 어떤 곡을 부르셨는지 기억하실까요?
지미 로저스가 부른 ‘뮬 스키너 블루스(Mule skinner blues)’라는 고전 컨트리 곡을 자주 불렀고 요들송도 인기가 많았다. 우리는 컨트리 전문이다 보니 자니 캐쉬나 행크 윌리엄스의 모창을 해서 관중들의 반응을 끌어냈다.

서수남 하청일 콤비로 ‘과수원길’, ‘동물농장’, ‘팔도유람’, ‘수다쟁이’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기셨어요.
현인의 딸 현혜정과 듀엣 활동을 하던 시기에 MBC에서 PD로 활동하던 김경태씨가 코믹한 노래를 부르는 콤비를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곧바로 하청일을 떠올렸고, 이미 아리랑 부라더스의 이름으로 1964년에 녹음했던 ‘동물농장’으로 서수남 하청일 콤비의 서막을 알렸다.

‘동물농장’은 해리 벨라폰테의 ‘I do adore her’의 번안곡이라는 느낌이 안 들 정도로 획기적인 창작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벨라폰테의 곡에서 발상을 얻어서 만든 건 맞지만 번안곡이라기보단 제2의 창작에 가깝다고 본다. 녹음할 당시 암탉 소리 등 실제 동물 소리를 삽입하려 했으나 여건이 어려워 동물 모사를 한 게 외려 큰 인기를 끌었다. 공연할 때는 즉석에서 동물을 바꿔가며 모사를 했고 큰 웃음을 주었다.

‘과수원길’이라는 곡은 교과서에 인기가 워낙 대단하여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우리 콤비는 3개 방송사(KBS, MBC, TBS)의 어린이 프로그램에 출연해 동요를 많이 불렀다. 그래서인지 어린이 팬들이 참 많았다. 어느 날 ‘과수원길’을 듣는데 곡이 너무 좋아서 작곡자인 김공선 당시 신림초 교장에게 ‘이 곡 취입해도 될까요?’라고 여쭤봤다. 그렇게 허락을 받아 오아시스 레코드에서 녹음한 곡이 슈퍼 히트를 기록했다.

코미디언과 뮤지션을 아우르는 정체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그 정체성이 성공 비결이라 고마운 마음이다. 가수가 전업이었지만 구봉서, 곽규석 같은 대선배들이 우리를 참 예뻐해 주셨다. 이홍렬, 임하룡, 이용식 같은 코미디언 후배들과도 친분이 많다. 그리고 사실 진지한 곡도 안 알려졌을 뿐 다수 발표했다. 1970년부터 91년까지 활동했으니 여러 스타일의 곡을 보유할 수밖에 없다.

특히 ‘수다쟁이’는 현재 한국의 랩 음악의 효시라는 평가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동의한다. 그 곡 이외에 ‘버스를 타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설악산 양양 낙산사 대관령 고개 넘어 강릉 경포대 삼척’이라고 줄줄이 읊는 ‘팔도유람’도 랩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빨리 가사를 읽는 노래가 없었으니까.

오리지널 곡에 대한 열망은 없으셨나요?
1985년에 발표한 트로트풍의 ‘친구가 그립구나’가 자작곡이었다. 하청일과 헤어지고 나서도 작곡을 꽤 했다. 1992년엔 < 세상사는 이야기 >라는 독집을 발표했다.

1990년대에 인기를 구가한 노래 교실이 궁금합니다.
사실 그전에도 가곡을 함께 부르는 가곡 교실은 있었다. 반면 나는 일본의 가라오케에서 모티브를 얻은 가요 교실을 도입했다. 작곡가 길옥윤이 노래방의 시초가 된 150곡 정도의 가요 반주를 만들었고 그 곡을 노래 교실에도 사용했다.

꽃꽂이나 붓글씨 같은 정적인 취미생활이 주를 이룰 때인데 노래 교실은 훨씬 동적이지 않은가. 주부들 사이에 인기가 퍼져서 나중에는 회원이 천 명이 넘어갔다. 커다란 강당을 빌려야 했다. 그렇게 10여 년간 노래 교실을 이어갔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선생님을 자주 봐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한동안 노래 교실 활동을 하다가 2천 년도부터 다시 방송을 시작했다. MBC < 브레인 서바이벌 >에 패널로 나가면서 인기를 끌었고 방송 활동을 계속해왔다. 가수와 코미디언, 예능 패널을 아우르는 멀티 엔터테이너의 시초가 아닐까 싶다,

현재의 국내 대중음악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내가 데뷔했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발전했다. 1970년대에도 내가 주로 구사했던 컨트리와 디스코, 록 등 다양한 장르가 있었지만, 지금은 훨씬 다양한 스타일로 대중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어서 후배들이 자랑스럽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음악 인생을 돌아보신다면요?
대중음악은 늘 사랑받아왔지만 사회적으로 대접을 못 받고 무언가 소외되어 있었던 것 같다. 딴따라라고 불리던 시절에 데뷔했는데 언젠가부터 연예인이라는 칭호가 생기고 지금은 어디 가나 사랑받는 직업이 되었으니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상대적으로 짧아진 요즘 가수들의 수명에 비해 꽤 긴 시간을 활동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BTS를 통해 한국이 문화예술 강국임이 입증되었고 국민들의 많은 성원도 큰 힘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론 공연장을 비롯한 대중음악 관련 시설이 많이 부족하다. 국가적인 제도로 이런 부분을 개선한다면 더욱더 단단한 입지를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인터뷰: 손기호, 염동교, 장준환
사진 : 본인 제공
정리 : 임진모, 염동교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