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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 Single Single

에프티아일랜드(FT Island) ‘Sage’ (2023)

평가: 3.5/5

이제는 관록이란 수식이 몸에 뱄다. 곡 진행 내내 코드를 읊어가는 밴드의 함성은 공연 한가운데로 청자를 들여와 몰입도 높은 현장감을 선사하며, 마디마다 호흡을 끊거나 후반부에 스트링 세션이 가담하는 악곡 구성은 경쾌한 리듬감까지 부여한다. 풍성하면서도 과하지 않게 수놓은 5분의 정면 승부다.

진심을 써 내린 멤버들의 노랫말 또한 진취적인 울림을 퍼뜨린다. 꿋꿋하고 슬기롭게 자신의 길을 헤쳐 가자는 외침은 현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게 힘찬 용기를 북돋우고 16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룹을 지탱해 온 서로를 다독인다. 각지에서 밴드 음악에 대한 관심이 상승하고 있는 지금, 에프티 아일랜드의 오랜 과거와 찬란한 미래를 동시에 쟁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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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le POP Single

찰리 푸스(Charlie Puth) ‘Lipstick’ (2023)

평가: 3/5

나지막이 깔리는 사이렌이 예고하듯, 여느 때보다 끈적이는 알앤비다. 미국 뮤지션 찰리 푸스가 네 번째 정규작의 첫 싱글로 발표한 ‘Lipstick’은 베이스와 피아노 선율의 반복 아래 간드러지는 가성을 얹어 청자의 귀를 간질인다.

속삭임은 보다 선명하고 직선적이다. ‘내 목과 몸에 네 립스틱을 남겨줘(Come and put your lipstick on my neck and my body)’. 히트곡 ‘Attention’의 혼란스러운 감정선이나 방탄소년단 정국과 함께한 ‘Left and right’의 묘한 수줍음은 찾아볼 수 없다. 당신의 사랑을 오롯이 차지하고픈 팝스타의 자신감 충만한 도발, 또 하나의 자국을 짙게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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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Choice

2023/08 Editors’ Choice

그레이스 포터(Grace Potter) < Mother Road >

시가렛 문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
추천곡 : ‘Mother road’, ‘Ready set go’

by 박수진

슈퍼샤이(Supershy) < Happy Music >

톰 미쉬 기타에 생명을 불어 넣었던 명곡의 재주조.
추천곡 : ‘Happy music’, ‘Feel like makin’ love (Feat. Roberta Flack)’

by 정다열

NSW 윤(NSW Yoon) < Grateful >

적어도 19살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완숙한 ‘외국 힙합 때깔’과 트렌드 감각.
추천곡 : ‘Drip too wet (Feat. 박재범)’, ‘Waiting (Feat. TRADE L)’, ‘Couple Alex (Feat. Street baby, YLN Foreign, Boyz N The Stickz)’

by 이홍현

제네시스 오우수(Genesis Owusu) < Struggler >

아린 홍반 사이 여전히 분투하는 펑크와 힙합의 혈액.
추천곡 : ‘Leaving the light’, ‘Stay blessed’, ‘What comes will come’

by 장준환

코리 웡(Cory Wong) < The Lucky One >

기타가 거드는 풍성한 진수성찬 사운드.
추천곡 : ‘Call me wild (Feat. Dodie)’, ‘Look at me (Feat. Allen Stone)’, ‘Brooklyn bob’

by 임동엽

애디슨 레이(Addison Rae) < Ar >

세계 4위 틱톡 거물, 찰리 XCX의 신고전주의를 탐하다.
추천곡 : ‘I got it bad’, ‘Nothing on (but the radio)’

by 이승원

자메즈(Ja Mezz) < 더 찐한 핑크 앨범 >

감성 힙합으로만 포장하기에는 아까운 진심, 쑥스럽지만 뭐 어때!
추천곡 : ‘Urnotalone ft Sun Ahn’, ‘더럽게 아름다워’, ‘집 ft 루이 of 긱스’

by 손민현

노네임(Noname) < Sundial >

감각과 관념이 살아 있는 재즈 힙합.
추천곡 : ‘Boomboom (Feat. Ayoni)’, ‘Beauty supply’, ‘Afro futurism’

by 염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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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40 장미화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마흔 번째 주인공은 우리 일상에 밝은 에너지를 불어 넣었던 가수 장미화다.

1960년대 미8군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그룹사운드 ‘레이디버드’에서 보컬로 활약했던 장미화는 일찍이 해외 각지를 순회하며 풍부한 무대 경험을 쌓았다. 체계화된 공연 시스템 그리고 자유로운 문화 전반을 접하고 돌아온 그에게 한국 사회는 어딘가 삭막하게 느껴졌다. 그 얼어붙은 길거리에 화사함을 불어 넣은 게 바로 1973년 솔로 데뷔곡 ‘안녕하세요’다. ‘안녕하세요 또 만났군요’라며 해맑게 건넨 인사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그는 계속해서 우리 삶에 긍정을 불어넣으려 애썼다.

남양주 인근으로 찾아가 실제로 얼굴을 맞댄 장미화는 여전히 밝음 그 자체를 살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호쾌한 웃음과 함께 풀어낸 그의 이야기는 분명 오래전 기억임에도 근래의 일처럼 선명했다. 동시대를 함께 했던 어른들에겐 재미난 회고록으로, 당대를 살지 못했던 젊은 친구들에겐 간접적인 과거 체험기로 남길 바란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셨나요.
최근엔 TV 프로그램 녹화를 많이 하고 있다. < 스타다큐 마이웨이 >도 촬영 중이고. 얼마 전에 <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에도 나갔는데 시청률이 대박 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내가 봐도 너무 재미있더라. 내가 녹화해 놓고 내가 그렇게 웃어본 건 처음이었다. (웃음)

그리고 얼마 전에 우리나라 1세대 그룹사운드 출신들이 모여 있는 예우회 분들과 용산에 다녀왔다. 일부 반환된 미군기지 부지에 최근 공원을 조성했는데, 거기 우리 세대 얼굴들을 다 전시해 놓은 기록관을 만들었더라. 옛날에 노래하던 자리에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으니까 감회가 깊었다.

1960년대 미8군과 여성 밴드 ‘레이디버드’로 가수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1965년 KBS < 아마추어 톱 싱어 선발대회 >에서 대상은 물론 연말 대상까지 받았고, 신중현 선생님이 나를 픽업해서 1966년 미8군 막내 싱어로 들어가게 됐다. 당시 대학교에 갓 입학한 상태였는데 맨날 레슨 받고 무대 한다고 밤새니까 학교 갈 틈이 없었다. 그러다 김시스터즈 매니저였던 맥맥퀸(Bob McMackin)이 나를 중심으로 여성 그룹사운드를 만들고 싶다 했고, 보컬 로지(장미화), 메인기타 앤젤라, 베이스 리사, 드러머 루비, 오르간 애니로 구성된 ‘레이디버드’가 탄생했다.

신중현 선생님을 따라 들어간 미8군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나요.
노래 연습을 굉장히 많이 하게끔 만들어 준 곳이었다. 그때는 신중현 선생님을 따라 눈만 뜨면 연습했었다. 또한 외국 노래에 대해서 몸이 익어갔던 장소였다. 한국 노래를 안 부르고 전부 팝송만 부르니까. 팝송 속에서 살았고 그러다 보니 외국 사람들과 사는 것 같고 그랬었다.

그래도 우리는 선배들보다 조금 나은 때에 들어갔다. 윤항기 오빠 때는 50년도 후반, 그러니까 막 6.25 전쟁을 겪고 그야말로 먹을 게 없던 시절이었다. 미8군에 딱 들어가면 식사부터 미국식으로 주곤 했는데 오빠들은 가족들과 나눠 먹기 위해 그걸 싸 갔다더라. 집에 있는 식구들이 생각나 도저히 밥이 안 넘어간다면서. 그만큼 너무나 어려운 시절이었다고 한다.

미8군 출신 가수들에 의해서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격이 올라갔다는 평이 많습니다. 의견에 동의하시나요.
당연하다. 가요계를 봤을 때 미8군 출신과 일반 가수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일단 오디션을 통과해야 했는데 그중에서도 더블 A 등급을 받아야만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떤 노래를 한다 했을 때 싱어는 가사를 다 영어로 쓸 수 있어야 했다. 그때만 해도 영어를 할 줄 몰랐으니까 공연을 위해 무조건 외웠었다. 그만큼 열심히 노력을 했으니 난 자부심을 가진다. 음악적으로 봐도 그룹 출신은 솔로와 창법부터 다르고, 노래할 때의 감정 표현이나 무대 매너가 확실히 세련됐다.

우리나라보다 해외에서 먼저 무대를 가졌습니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레이디버드 5명이 연습해서 처음 진출한 곳은 LA다. LA에 도착해서 한복을 입고 맥맥퀸을 기다렸는데 이 사람이 공항에 안 나왔더라. 근처 공중전화기에 동전을 넣고 전화를 걸었는데 전부 영어로 말하니까 우린 다 못 알아듣고 쩔쩔매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영사님을 만나게 돼서 맥맥퀸하고 대신 통화를 해주셨고 감사하게도 영사님 댁에서 잠시 머무르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 이후에 맥맥퀸은 우리를 픽업해서 라스베가스로 향했다.

당시 선생님과 레이디버드는 어떤 캐릭터였나요.
외적으로는 굉장히 예쁘장했다. 가랑머리 한 여자애들이 미니스커트랑 롱부츠 신고 나오니까 사람들이 너무 귀여워했다. 그들 눈에는 열네다섯 정도 되는 아이들로 보였을 거다.

그보다 대부분 오리지널 팝을 하던 때에 흑인 음악을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신중현 선생님이 내 목소리가 다이애나 로스랑 너무 비슷하다고 해서 그런 노래를 주로 부르라고 하셨다. 중간에 페툴라 클라크 ‘Downtown’, 앤 마그렛 ‘Slowly’ 같이 섹시한 곡도 했는데 그때마다 난리가 났었다.

한 번은 내가 슈프림스의 히트곡 ‘Stop! in the name of love’를 불렀는데 맥 맥퀸이 나더러 다이애나 로스 노래를 할 때 목소리를 너무 똑같이 내지 말라고 하더라. 아무리 닮았다 해도 자연적으로 나오는 본인 목소리 그대로 해라. 똑같아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 그때부터 본연의 내 목소리를 따라 노래 부르게 됐다.

라스베가스에서도 인기가 괜찮았나요.
당시 센스 호텔이라고 있었는데 그 호텔 카지노에서 쇼를 열곤 했다. 홀 중앙에 원형 스테이지가 있는데 벽으로 반을 갈라서 두 팀이 동시에 공연을 펼쳤고 한 타임이 지나면 무대가 회전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때 우리 레이디버드와 같이 무대에 올랐던 게 바로 라이처스 브라더스였다. 얼굴이나 이름은 잘 몰라도 대표곡인 ‘Unchained melody’는 너무 잘 알았으니까 내 눈으로 직접 공연을 보고 싶었고, 막간을 활용해서 잠시 관람했던 적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무대가 두 명이 깨지기 전에 가진 마지막 무대라더라. 카메라가 없었던 게 너무 아쉬웠다.

미국 다음으로 떠난 곳은 어디였나요.
라스베가스 이후엔 캐나다랑 동남아도 돌았다. 베트남 구정 공세가 일어났던 시기에 현지에 머물렀었는데 그때 공항이 완전 봉쇄됐다. 노래하던 클럽에서 끼니를 해결하곤 했는데 그 집이 문을 닫으니까 밥도 잘 못 먹었다. 그때 라디오에서 맹호부대에 도움을 요청하란 소리를 들었고 바로 연락을 취해 부대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해외에서 가장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베트남이 다시 문을 연 이후에 싱가포르, 태국, 홍콩 등 마저 공연을 돌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주변 반응은 어땠나요.
미8군을 거쳐 세계 순회공연을 하고 오긴 했지만 1973년 ‘안녕하세요’를 발표하기 전까지는 무명에 가까웠다. 장미화란 이름을 알릴 수 있었던 건 ‘안녕하세요’ 덕이 크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다른 분들 말로는 그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미8군 때야 그냥 철모르고 노래할 때라 막연한 재미였지만, 솔로 데뷔 직후엔 인기는 물론 돈도 많이 벌며 진정한 전성기를 맞았다.

말씀하신 데뷔곡 ‘안녕하세요’는 물론 ‘봄이 오면’, ‘내 마음은 풍선’, ‘어떻게 말할까’ 등 수많은 노래가 우리 사회에 밝은 기운을 불어넣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다들 얼굴이 우울해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미국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끼리도 인사를 나누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꼭 싸우다가 나온 사람들 같았다. 그래서 ‘안녕하세요’가 인기를 끌었을 때 “좀 웃고 삽시다. 안녕하시죠?” 내가 막 그러면 사람들이 웃더라. 그다음에 낸 노래가 ‘웃으면서 말해요’였는데 그때 노란색 스마일 스티커를 내가 처음으로 만들어서 택시 같은 데 붙이고 그랬었다. 다 같이 웃고 살자고. 참 좋은 노래다. 힘들고 어려울 때 그런 노래 좀 불러줘야 하는데 부를 데가 없다.

‘안녕하세요’, ‘웃으면서 말해요’ 모두 MBC 악단장을 맡았던 여대영 선생님의 곡입니다.
그런데 나는 막상 MBC에서 출연 정지를 당했던 사람이다. 활동 당시에 집시 스타일의 옷을 많이 입었는데 등을 너무 팠다고 1년 정지를 시키더라. 같은 날 출연한 여가수 중에 가슴 쪽을 판 사람도 있었는데 거긴 정지를 안 당했다. 너무 열받아서 내가 직접 사장실에 올라가서 엄청 따졌다. 지금이야 다 품고 사는데 그때는 아니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하는, 소위 성깔이 좀 있었다.

실제로는 TBC에 더 많이 출연했다. < 쇼쇼쇼 >에서 무지 키워줬다. 매일 같이 나갔으니까.

TV에 나올 때마다 항상 춤을 추셨습니다. 본인의 아이디어였나요.
내 아이디어다. 무슨 노래를 하라 그러면 내가 집에서 거울을 보고 이 노래는 이렇게 해야지 하고 무대를 떠올리며 안무를 구상했다.

가수로도 최고지만 예능 스타로 활동했어도 최고였을 것 같아요.
코미디언 구봉서 씨, 서영주 씨 이런 분들이 너는 이쪽에 종사했어도 잘 됐을 거라고 하셨다.

1973년부터 전성기를 보냈지만 이후 긴 공백을 가지기도 하셨습니다.
1983년에 컴백을 했는데 이 시기가 꽤 마음에 남는다. 이혼하고 난 다음이니까. 아픈 엄마와 3살 난 아기를 데리고 나와서 살 때 통 허무했었다. ‘내 인생 바람에 실어’라는 노래 속에 그 가슴앓이가 다 들어있다.

그때만 해도 대한민국에서 음악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야간 업소뿐이었다. 미국의 큰 호텔에서 체계적인 공연을 하다가 이상한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려 하니 적응이 안 됐다. 현미 언니 같은 선배들도 우리나라에선 어쩔 수 없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돈을 버는 건 좋았다. 다만 꼭 술 먹고 무대로 음식을 던지는 사람들이 문제였다. 원래는 누가 뭐라 그러거나 욕을 들으면 무서워하면서 울고 그랬었는데 이 엉망인 분위기에 동화되면서 굉장히 사나워졌다. 나중엔 도저히 못 참고 뛰어 내려가서 그대로 얼굴에 던져주기도 했었다. 이런 게 내 가치관하고 너무 안 맞으니까 그냥 이럴 때 결혼이나 해서 가정집 안에 들어앉아 조용히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만난 사람이 전 남편이었다. 처음엔 매너도 너무 좋고 뭐 하나를 해도 고급스러운 젠틀맨이었다. 그래서 식을 올렸는데 결혼 첫날부터 사람이 달라졌다. 이 사람은 내 사람, 그러면서 딱 날 잡기 시작하더라. 내 기가 눌려 기분이 영 찜찜했지만 우리 엄마 말을 듣고 그냥 참으며 지냈는데 살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됐다. 그래도 큰아들이 곁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내 모든 재산과 우리 아들을 바꿨다. 아이가 내 보물이다.

복귀 이후에도 많은 히트곡으로 가요계를 수놓았습니다. 기억에 남는 순간들을 간단히 짚어볼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봄이 오면’, ‘내 마음은 풍선’ (1973) / ‘웃으면서 말해요’ (1974) / ‘그 누가 뭐래도’ (1976) / ‘어떻게 말할까’, ‘푸른처녀’, ‘해뜰날’ (1977) / ‘애상’ (1985) / ‘내 인생 바람에 실어’, ‘서풍이 부는 날’ (1988)

그런데 인기에 비해 상복은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7대 가수상처럼 돈 주고 받는 상 이런 거는 맨날 받았다. 그런데 정작 가수왕 상같이 큰 상들은 탈 법한데도 못 탔다. 그때는 매니저들이 다 알아서 처리했으니까. 그래서 난 맨날 떨어졌다.

개인적으로 뽑는 장미화의 베스트 트랙은 무엇인가요.
옛날엔 ‘여름의 훈장’이었다가 ‘쓸쓸한 연가’로 제목을 바꾼 곡이 있다. 동아방송 드라마 주제가로도 썼다. ‘안녕하세요’보다 더 히트할 거라 예상했는데 그때 분위기와는 안 맞는 노래였던 것 같다. 최고로 맘에 드는 노래다. ‘사랑, 그 그리움’이란 곡도 정말 아끼는데 주목받지 못해 너무 아깝다.

장미화의 음악 인생에 가장 큰 도움을 주신 분은 누구입니까.
신중현 선생님이 나의 길을 열어줬다. 창법이나 매너도 그렇지만 연습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걸 몸소 보여주셨다. 추운 겨울날 선생님 댁에서 따뜻한 차 한 잔 마실 겸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덜덜 떨면서 걸어온 후에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안에 들어가 기타 연습을 하시더라. 선생님처럼 일 없는 날에도 매일같이 연습하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겠다고 느꼈다.

신중현 선생님 외에 우리나라 가수 중에서 기억에 남는 인물이 있을까요.
선배 중에선 패티김 언니가 제일 멋있었다. 후배는 같은 그룹사운드 출신인 조항조나 김상배가 기억에 남는다.

최근 해외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우리 K팝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나요.
너무나도 자랑스럽다. 우리가 예전에 해외로 다닐 때 그런 무대를 원했었다. 왜 우리는 세계적으로 나가서 노래를 못 부르나. 우리는 뭐가 모자라서 이게 안 되나. 그런데 요즘 우리 후배들이 나가서 당당하게 1위 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 벅찬 감동을 느낀다. 참 감사하다.

그 친구들이 우리를 모를 수 있다. 그럼에도 미8군 쪽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바탕이 되고, 디딤돌이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알아줘야 한다. 그 부대 안에서 힘들게 고생하면서 피나는 노력으로 쟁취했던 무대 경험이 모이고 모여 지금의 K팝이 되었다는 걸 인지해 주면 좋겠다. 더욱더 발전하기를 기원하며 항상 뒤에서 박수와 응원을 보내고 있다.

끝으로 장미화 선생님은 우리 가요계에서 어떤 가수로 남기를 바라시나요.
참 착하고 활달하고, 언제 봐도 기분 좋은 여자로 기억되고 싶다.

진행 : 임진모, 정다열, 이승원
정리 : 정다열
사진 : 이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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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 Single Single

오마이걸(OH MY GIRL) ‘여름이 들려 (Summer comes)’ (2023)

평가: 2/5

갑갑하다. 선선한 신시사이저, 펑키(Funky)한 기타 리프, 상쾌한 멜로디. 걸그룹 오마이걸을 대표하는 여름 키워드를 한데 모았음에도 더위가 좀체 가시지 않는다. 히트곡 ‘Dun dun dance’에 참여했던 작곡진이 그간의 성공 공식을 단편적으로 조립한 것이 패착. 얼핏 흥얼거리게 되지만 몇 개의 음표만 오르내리는 후렴구는 단조로운 리듬감을 드리우고 그 중간에 삽입된 랩 파트 역시 모호한 추임새로 작용해 감상에 차질을 빚는다.

섭섭하다. < Nonstop > 이후 여름은 분명 오마이걸에게 새 생명을 불어 넣었다. 다만 가시적인 흥행에 초점을 둔 발매 전략이 사계절을 넘어 ‘다섯 번째 계절’까지 노래하던 이들에게 오히려 족쇄를 걸어 잠갔다. 푸르렀던 1년 4개월의 골든 타임을 충전이 아닌 현상 유지, 나아가 방전으로 흘려보냈다. 그렇게 오마이걸의 시계는 잠시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