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특집 Feature

[김도헌의 실감, 절감, 공감] 야구 좋아하세요?

2022년을 시작하며 세 가지 질문을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우선 ‘술 드실래요?’다. 세상 모든 사람이 음주를 즐기는 건 아닌데도 언젠가부터 항상 술을 권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두 번째로 아무나 붙잡고 ‘음악 좋아하세요?’라고 묻지 않기로 했다. 모두가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지는 않다. 그리 궁금하지 않은 음악계 소식을 지루하게 듣고 있어야 하는 상대의 고충을 고려했다. 마지막으로 이 질문만큼은 반드시 줄여야 함을 절감했다. ‘야구 좋아하세요?’

나는 야구광이다. 매일 저녁 여섯 시 삼십 분, 주말 낮 두시만 되면 웬만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반드시 야구 중계를 켠다. 영어 공부를 핑계로 10년째 시즌권을 결제하고 있는 메이저리그 중계까지 더하면 새벽 두 시 십 분과 오전 아홉 시까지 야구의 시간으로 할당된다. 오랜 친구들과는 반드시 야구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하고 오랜만에 가족이 모일 때면 항상 야구 중계를 켜 둔다. 어젯밤 꿈에서도 나는 호쾌하게 초구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에이스 투수가 되어 경기를 즐기다 팔을 머리 위로 올리는 것도 찌뿌둥한 현실로 돌아오고 말았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신문지 모자를 쓰고 찾은 야구장, 푸르른 그라운드가 눈 앞에 펼쳐지던 그 순간부터 야구는 세상을 이해하는 문법이자 공감대를 형성하는 중요한 문화 요소가 되었다. 돌아보면 아버지께서는 야구에 미쳐있는 나의 고향에서 살아남기 유리한, 나름의 사회생활 조기 교육을 일찌감치 해주신 셈이었다. 야구 학원 가는 봉고차 안에서도, 저녁거리 심부름하러 지폐 몇 장을 쥐고 들어선 슈퍼마켓에서도, 마른안주를 주워 먹던 호프집에서도 야구 중계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시내 초등학생들이 모두 모인 교육청 영재 캠프에서 어색한 분위기를 깨 준 것도 야구 이야기였고, 영어를 잘하고 싶어 학교 원어민 선생님과 친해질 구석을 찾은 곳도 야구장이었다.

결정적으로 야구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음악이었다. 2013년 이즘에 처음 들어와 팝의 고전 강의를 들을 때 나는 내가 의외로 선배들이 이야기하는 가수와 노래가 낯설지 않다는 점이 의아했다. 알고 보니 그들은 야구장에서 내가 열심히 따라 부르던 응원가의 주인공들이었다. 야구장에 가기 전 나는 항상 모든 응원가를 숙지하여 가곤 했는데, 운이 좋게도 내가 응원하는 구단은 주로 유명한 팝 노래를 번안하여 활용하는 팀이었다.

캐롤 킹과 제리 고핀의 명작 ‘The Loco-motion’은 거액의 FA 계약을 따냈으나 부진을 거듭하다 음주 문제로 커리어를 접은 선수의 상징 곡이었다. 긴 무명 시간을 떨치고 주장으로 거듭난 선수의 응원가는 도널드 분의 ‘Beautiful Sunday’였고, 앞날이 창창한 신인 내야수였으나 끔찍한 수비 탓에 중견수로 자리를 옮긴 선수의 주제가는 터틀스의 ‘Happy Together’였다. 지금은 다른 팀의 스타가 된 타자가 나올 때면 팬들은 보니 엠의 ‘Riverside of Babylon’을 소리 높여 불렀고, 나중에는 이럽션의 ‘One Way Ticket’까지 응원가가 되었다. 올드 팝만 나온 건 아니었다. 콰이어트 라이엇의 ‘Cum on Feel the Noize’와 트위스티드 시스터의 ‘We’re Not Gonna Take It’을 처음 들은 곳도 야구장이었다.

그냥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였을까, 또래보다 음악을 더 많이 안다는 허세를 부리고 싶어서였을까. 야구장 응원가로 나름 음악 공부를 열심히 했다. 리틀 에바가 부른 ‘Locomotion’으로부터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와 카일리 미노그의 리메이크 버전을 찾아 듣고, 캐럴 킹과 제리 고핀의 빛나는 브릴 빌딩 틴 팬 앨리 명곡을 찾아 노트에 써 내려갔다. 콰이어트 라이엇, 트위스티드 시스터로 알게 된 1980년대 헤비메탈의 휘황찬란한 시대로부터 머틀리 크루, 건스 앤 로지스, 밴 헤일런, 데프 레퍼드의 이름을 발견했다.

시간이 흘렀다. 노래의 주인공들이 은퇴를 선언하고, 응원하는 팀은 단 한 번도 정상에 서지 못했다. 2017년부터는 노래 원작자들이 KBO에 응원가 편곡에 대한 저작권을 요구하며 유명 팝송 응원가가 구단 자체 제작 노래로 대체되었다. 선수도, 응원가도 사라졌다. 그러나 음악만큼은 기억에 남았다. 아직도 백스트리트 보이스의 ‘Straight Through My Heart’를 접하게 되면 팀을 옮긴 프랜차이즈 선수에 대한 감정이 되살아나고, 노래방에서 노브레인의 ‘넌 내게 반했어’를 선곡하면 중간중간 이름을 넣어 소리 질러야 할 것만 같다. 고령의 닐 세다카가 음악 다큐멘터리에 등장할 때마다 나는 ‘날려버려!’를 외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지난 3월 한국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20대의 18%만이 프로야구에 관심이 있다고 한다. 80% 이상이 야구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부 선수들의 방종과 구단의 태만한 운영, 올림픽 참사로 만천하에 드러난 실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야구에 열 내는 사람이 희귀한 요즘 굳이 다른 사람에게 재미없는 이야기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음악, 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야구를 보면 음악이 생각나고, 음악을 듣다 보면 야구를 떠올린다. 그리고 야구에 몰입하다 보면 술이 당긴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손에 든 채로 옆자리 처음 만난 아저씨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힘차게 견제 응원을 하고 싶다. 그렇게 음악을 체험하고 익힌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음악을 글로 쓰고 말로 전할 수 있다.

강요는 아니더라도, 모르는 사람에게 친절하고 재미있게 권하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오늘도 넌지시 질문을 던져본다. ‘음악 좋아하세요? 그리고 야구도 좋아하시나요? 술 한 잔 하실까요?’. 혹시 내가 응원하는 이 팀까지 좋아한다면 금상첨화인데… 여기까지 하자.

Categories
특집 Feature

[김도헌의 실감, 절감, 공감] 얼룩진 오스카와 ‘축제의 여름’

3월 28일(한국 시각), 배우 윌 스미스가 무대로 올라가 사회를 보던 코미디언 크리스 록의 따귀를 때린 순간부터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시간은 멈췄다. 소셜 미디어 타임라인과 언론사 헤드라인이 이 초유의 사태에 깜짝 놀라 사건 경위를 초 단위로 분주히 업데이트하는 동안에 몇몇 사람들은 가장 유명한 영화계 시상식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크리스 록은 윌 스미스의 아내 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삭발한 머리를 두고 “< 지 아이 제인2 > 기대한다.”는 질 낮은 농담을 던졌다. 1997년 배우 데미 무어가 네이비 씰 양성 과정에 입교한 여군 대위의 이야기를 위해 삭발을 감행한 영화 < 지 아이 제인 >에 빗대 제이다의 외모를 조롱한 것이다. 제이다는 2018년부터 미국 흑인 여성의 절반 이상이 앓고 있는 자가면역질환, 원형 탈모증 증상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삭발한 상황이었다.

웃고 넘어갈 수 없는 발언이었다. 코미디라는 이름으로 오랜 시간 묵인되어 온 뿌리 깊은 여성 혐오의 결과였다. ‘조크를 가장한 언어폭력’이라는 주장에도 동의한다. 객석의 모두가 웃음을 터트리고, 심지어 윌 스미스도 웃고 있는 사이, 오직 제이다만의 얼굴만이 심각하게 굳었다. 이윽고 윌 스미스가 무대로 올라왔다. 그리고 크리스 록의 뺨을 때렸다. 아카데미 역사상 유례없는 폭행이 생중계됐다. 시상식이 열리던 돌비 극장의 모두가 사전 기획된 쇼와 돌발 상황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윌 스미스는 “내 아내의 이름을 네 입에 올리지 마”라며 큰 소리로 크리스 록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기억하는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이다. 월요일 아침 시상식 생중계를 지켜보던 나조차 이 기이한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크리스 록의 발언은 농담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불쾌한 모독이었다. 그렇다고 시상식에서 폭력을 행사한 윌 스미스의 행동도 멋지지 않았다. ‘맞을 짓 했네’라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이내 ‘맞을 짓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모욕에 폭력으로 응수하는 것만이 최선인가?’라는 의문에 휩싸였다. 내가 정신을 차린 순간은 크리스 록이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베스트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작을 발표할 때였다.

힙합 밴드 더 루츠의 드러머 퀘스트러브가 감독한 < 축제의 여름 (… 혹은 중계될 수 없는 혁명) >(이하 < 축제의 여름 >)은 1969년 6월 29일부터 8월 24일까지 뉴욕에서 개최된 ‘할렘 컬처 페스티벌’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다. 가수이자 진행자로 명성이 있었던 진행자 토니 로렌스가 뉴욕시와의 협조를 거쳐 할렘 중심부 마운트 모리스 공원에서 개최한 이 페스티벌은 30만 명 이상이 참가한 대규모 음악 축제였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의 결과로 흑인들은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을 통해 법적인 인종차별 폐지를 거머쥐었고 이듬해 투표권을 거머쥐었다. 비폭력 노선을 견지한 마틴 루터 킹 목사, 보다 급진적인 운동을 촉구한 사회운동가 맬콤 엑스라는 두 축을 통해 흑인들은 뿌리 깊은 인종차별에 저항했고 흑인으로의 정체성을 재확립하며 새로운 세상을 위한 혁명을 꿈꿨다. 그러나 1965년 맬콤 엑스에 이어 1968년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하자 흑인 커뮤니티는 좌절했다. 폭동이 벌어졌고 비폭력주의자와 폭력주의자 간의 간극이 벌어졌다.

< 축제의 여름 >은 고무된 흑인 사회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자랑스러운 축제였다. 팽팽한 긴장 상태에 놓인 1969년, 뒤숭숭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흑인 문화의 중심지 할렘에 구름 관중이 몰려들었다. 사회적 억압, 굴종, 고정관념을 벗어던지고 음악, 춤, 그리고 자유를 찾아 모여든 젊음의 현장이 펼쳐졌다. 기획자 토니 로렌스는 영리한 수완을 발휘해 후원사를 끌어모으고 흑표당원을 보안요원으로 고용하며 관중들과 아티스트들을 안심시켰다. 블랙 커뮤니티에 우호적이었던 당시 뉴욕 시장 존 린지까지 페스티벌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 결과로 스티비 원더, 피프스 디멘션, 비비 킹,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니나 시몬 등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들이 무대를 빛낼 수 있었다.

오해하지 말자. 이 페스티벌은 시대의 아픔을 춤과 음악으로 그저 망각하고자 했던 자리가 아니었다. 뮤지션들은 미국 전역의 블랙 장르가 교차하는 만남의 장소에서 각자의 선율과 박자, 노래와 연주를 통해 흑인 공동체의 정신을 하나로 묶고 연대를 촉구했다. 인종차별에 침묵하지 않았고 혐오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물병자리의 시대(Aquarius)’로 그려지는 꿈과 희망의 나라를 노래하고 ‘행복의 날(Oh Happy Day)’를 합창하며 신의 손길을 간절히 바랐다.

마틴 루터 킹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순간 그의 앞에 앉아있었던 제시 잭슨 목사의 찬양은 < 축제의 여름 > 속 결정적인 장면이다. 비극의 현장을 담담히 고백하며 장내를 숙연하게 만든 그는 이내 전설적인 가스펠 싱어 마할리아 잭슨과 메이비스 스테이플스의 찬양을 이끈다. 5분에 달하는 마할리아 잭슨의 ‘Precious lord’는 노래의 영역을 넘어선다. 폭력의 1960년대 말 생존 투쟁을 벌였던, 그저 한 명의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받고자 했던 모든 흑인 커뮤니티의 한숨과 응어리진 절규, 가슴속 깊은 한을 영혼으로부터 끌어올린 위대한 목소리다.

이 의미 깊은 순간을 5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페스티벌을 촬영한 할 털친(Hal Tulchin)은 40시간 이상의 기록물을 방송사에 넘기고자 했으나 사겠다는 회사는 단 한 곳도 없었다. 시대의 관심은 그 해 8월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쏠렸다. 우드스톡이 폭력과 마약, 엄청난 적자의 오명을 지우고 록 문화의 성경으로 모셔지는 동안 할렘 컬처 페스티벌은 오래도록 지하실 구석에 박혀 있었다. 2004년에야 골동품 필름이 발견됐지만 영화 제작이 결정되기까지 또 8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음악사의 위대한 순간이 어렵사리 빛을 보게 됐다.

안타깝게도 < 축제의 여름 >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치를 인정받는 그 순간마저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갔다. 크리스 록의 저열한 언어폭력과 윌 스미스의 물리적 폭력의 충격에 퀘스트러브의 감동적인 수상 소감의 의미를 조명하는 목소리는 묻히고 말았다. < 축제의 여름 >과 더불어 이 날 아카데미 시상식이 미국 내 블랙 커뮤니티에게 의미 있는 행사였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까운 결과였다. 덴젤 워싱턴이 사무엘 L. 잭슨에게 공로상을 수여했고,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의 주인공은 < 킹 리차드 >의 주연 윌 스미스였다.

결국 어떤 형태로든 그 자리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폭력이다. 스탠드업 코미디가 지향하는 표현의 자유와 날카로운 풍자라는 핑계 아래 약자를 조롱하고 모욕하며 날카로운 상처를 안기는 언어 폭력, ‘사랑은 미친 짓을 하게 만든다’는 해로운 기사도 아래 행사한 물리적 폭력이 모두 포함된다. 윌 스미스의 폭력이 부적절했던 이유는 크리스 록의 끔찍한 언행을 전세계가 지켜보는 시상식에서 공론화하고, 더는 이런 것을 코미디라 납득할 수 없다고 각인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순간의 폭행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더 프렌치 히스토리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역사학자 개리 지로드가 남긴 트윗을 읽어보자.

“크리스 록의 뺨을 때리는 대신 윌 스미스가 이런 수상 소감을 했다고 상상해보세요 : ‘제 아내는 자가면역질환을 앓고 있고 이로 인해 머리카락이 빠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 아내는 아름답고, 강하고, 멋진 사람입니다. 저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크리스,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웃음거리로 삼는 건 웃기지도 않고 옳은 일도 아닙니다.”

내가 크리스 록과 윌 스미스의 행동에 대해 두고 한 말 중 후회되는 건 ‘맞을 짓’이라는 표현이다. 윌 스미스의 폭행을 비판했던 나조차도 폭력을 저지를 만한 언행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무심코 내뱉었다는 게 부끄러웠다. 하지만 ‘맞을 만했으니 맞았다’, ‘가족을 건드렸는데 따귀로는 부족했다’, ‘혐오 발언을 막는 데 효과적인 행동이었다’ 등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폭력을 반대하는 내 입장이 세상을 모르는 인간의 속 편한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나도 사이다 서사에 통쾌함을 느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보복을 꿈꿔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건 당연한 감정이 아니다. 누군가의 질병을 코미디 소재로 삼아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응수 방법이 따귀를 때리는 것이어서도 안된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맞을 짓’의 긍정은 폭력을 행사하는 이에게 위험한 권력을 쥐여 준다. 강자의 논리에 의해 결정되는 폭력은 누구에게나 향할 수 있다. 여성과 사회적 약자를 향해서도 ‘맞을 짓’이라는 논리를 앞세울 수 있게 된다. 강자가 힘을 앞세우는 가운데 피해자와 약자는 주체에서 객체로 격하된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가 아슬아슬한 스탠드업 코미디 중 분명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가 되었을 말을 ‘해도 되는 말’로 웃어 넘겼던 것과 마찬가지다.

예술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고 투쟁했던 시기의 기록물 < 축제의 여름 >과 오스카 시상식은 우리의 내면 속 익숙해진 폭력의 논리로 얼룩지고 말았다. 누가 옳고 그른지를 다투고, 어떤 이의 폭력이 더 중한지를 저울에 매달기 전에, 지금으로부터 50년이 훨씬 넘은 숭고한 역사를 복원한 < 축제의 여름 >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곱씹어 봐야 한다. 나는 폭력을 쓰지 않고도 사람들을 즐겁게 하며 무례함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

Categories
특집 Feature

[김도헌의 실감, 절감, 공감] 개의 세력에 부쳐

아카데미 12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된 제인 캠피온 감독의 영화 ‘파워 오브 도그’를 본 사람은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분한 필이라는 남자를 절대 잊지 못한다. 몬태나 주에서 동생 조지와 함께 목장을 운영하는 마초 카우보이 필은 설명이 필요 없는 악인이다.

필은 무고한 이들을 쏘아 죽이는 악당이나 발길 닿는 대로 방랑하며 법의 울타리를 넘나드는 무법자는 아니다. 그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아이비리그 대학을 졸업한 수재이며 예술에도 조예가 깊은 엘리트다. 거친 서부 생활에도 일가견이 있어 맨손으로 황소 수백 마리를 거세하고 소가죽으로 밧줄을 만들며 주변 지리에 능숙하다. 여기에 거친 남성성과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까지 갖춘 타고난 리더다.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좋은 인간인 셈이다. 하지만 ‘파워 오브 도그’의 필은 명백한 악당이다.

동생 조지가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미망인 로즈와 결혼하자 필은 로즈를 목장의 재산을 노리는 사기꾼으로 간주하고 멸시와 조롱을 퍼붓는다. 로즈가 비쩍 마른 외동아들 조지를 대학에 보내 집안의 재산을 사용하자 경멸은 더욱 심해진다. 필은 비수 같은 언어로 로즈의 영혼을 산산조각 낸다. 뛰어난 밴조 연주를 보란 듯 들려주며 무안을 주고, 옅은 휘파람 소리만으로 가엾은 제부(弟婦)를 벌벌 떨게 만든다. 영화가 끝난 후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던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이 거북하게 들린다면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필의 지독한 존재감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쉬이 가실 줄을 모른다.

제인 캠피온 감독은 은유적으로 필의 과거를 제시하며 복잡한 감상을 유도한다. 필은 타고난 소시오패스여서가 아니라 자신의 연약한 심성과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 거친 생활 태도를 유지하고 로즈를 학대한다. 다 큰 어른이지만 동생 조지가 곁에 없으면 불안감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브롱코 헨리라는 인물을 자신의 우상으로 받들어 모시는 태도는 유치함을 넘어 순수하기까지 하다. 필이 열등감은 있지만 똑똑하고 다재다능한 어른으로 머물렀다면 몬태나 목장의 모든 사람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남편 잃은 여인을 폐인으로 만들고 그 아들에게까지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줬다. 영화는, 그리고 역사는 필을 ‘나쁜 어른’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다.

‘우상의 몰락’을 기고한 후 한 달간 나는 ‘좋은 어른’에 대한 짙은 회의감에 빠져있었다. 운 좋게도 내 주위엔 좋은 어른들이 많았다. 능력 있고 박학다식하며 많은 것을 이룬 그들은 인생의 선배이자 닮고 싶은 롤모델이기도 했다. 그들의 글을 보며 문장을 배열하는 법을 배웠고, 그들의 말을 들으며 삶의 태도와 방향을 가늠해보기도 했다. 갓 스무 살부터 음악에 대해 글을 써보겠노라 호기롭게 나선 천방지축의 어린아이를 사리분별 가능한 젊은이로 만들어준 이들도 모두 좋은 어른들이었다.

어른이 되어가며 당혹스러운 순간은 그렇게 믿고 따랐던 선배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종종 저지르고도 자각하지 못하는 광경을 목격할 때다. 열등감은 독기가 되고 사명감은 독재가 된다. 갑질과 오만, 거짓말과 위선, 시대에 뒤떨어진 성인지 감수성을 일상에 품고 있는 어른들이 뒤틀린 시선을 세상에 풀어놓을 때마다 마음속 책장에 꽂힌 위인전 한 권에 쓰인 이름이 희미해지다 사라져 버린다. 믿음을 잃어버린 아이들은 상처받고, 눈물 흘리다 자극과 혐오를 약속하는 선동가의 달콤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디지털 문화에 능통하고 20대를 자주 만난다고 해서 젊은 사람이 아니다. 나름의 근거와 논리가 있겠지만 누군가는 당신을 ‘개의 세력’이라 칭하며 분노하고 조롱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선거 운동이 격렬해지면서 더 많은 우상들의 황당한 자침(自沈)을 목격하게 되자 회의주의는 더욱 짙어졌다. 그런 와중 한줄기 빛처럼 내려온 작품이 있었다. 펄 잼의 리더 에디 베더의 솔로 앨범 < Earthling >이었다.

▶에디 베더 < Earthling >의 아트워크

에디 베더가 누군가. 1991년의 < Ten >부터 2020년 < Gigaton >까지 꾸준히 사회의 어두운 면을 노래로 옮기고 거대 자본에 맞서 저항하며 약자와 연대하는, 보기 드문 모범 록스타다. 이제 그도 1964년생 57세로 적지 않은 나이인데 새 솔로 앨범에서 들려주는 정력(精力)이 상당하다. 활력 넘치는 로큰롤 앨범 위에서 에디 베더는 젠체하며 폼 잡지도 않고 무거운 훈계를 늘어놓지도 않는다. 그저 고고하게 록 신의 베테랑으로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하며 경쾌하게 자신의 음악을 연주할 뿐이다.

커트 코베인, 레인 스텔리, 크리스 코넬만큼의 인기는 누리지 못했을지라도, 나는 그런지 붐 최후의 생존자로 꿋꿋이 걸어가는 에디 베더를 ‘좋은 어른’이라 믿고 싶다. 무료한 삶을 보내지만 자신은 정의롭다고 믿는, 맹목적으로 충성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모든 ‘개의 세력’에게 에디 베더의 새 앨범을 적극 추천한다.

아, 바빠서 음악 들을 시간이 없다고요… 그렇다면 < Earthling >의 수록곡 ‘Try’라도 꼭 들어보세요. 에디 베더가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남자는 척할 필요가 없다(Good men don’t have to pretend)”고요.

Categories
Feature

[김도헌의 실감, 절감, 공감] 우상의 몰락

마릴린 맨슨의 음악을 좋아했다. ‘안티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외치며 도발적인 퍼포먼스를 펼치던 하얀 분장의 프론트맨이 세상이 싫었던 사춘기 소년에게는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을 다룬 마이클 무어의 영화 < 볼링 포 콜럼바인 >을 보고 나서는 사회로부터 핍박받는 록스타의 환상까지 더해졌다. < Antichrist Superstar >, < Mechanical Animals >, 1997년 MTV 어워드에서의 ‘The beautiful people’ 라이브, 베스트 앨범 < Lest We Forget > 등등. 많이도 들었다.

안타깝게도 이젠 어디서도 마릴린 맨슨을 좋아했노라 이야기할 수 없다. 현재 그는 추악한 성폭행 범죄 의혹을 받고 있다. 2007년 당시 19세 나이로 맨슨과 교제하던 배우 에반 레이첼 우드가 지난해부터 맨슨의 그루밍과 학대, 성폭력을 폭로하고 있다. ‘Heart shaped-glasses’ 뮤직비디오 촬영 도중 성폭행을 가했고, 하루 152번 이상 전화를 걸었다는 등 집착이 심했다는 주장이다.

일방적인 내용도 아니다. < 왕좌의 게임 >에 출연한 배우 에스미 비앙코 역시 2009년부터 2013년까지 마릴린 맨슨에게 성적 학대와 폭행을 당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맨슨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만 15명이다. 맨슨은 혐의를 부인했지만, 레이블에서 쫓겨났다.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맨슨은 새 친구의 도움을 받아 다시금 대중 앞에 섰다. 놀랍게도 그 친구는 카니예 웨스트였다.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다 ‘생일이당’을 창당하여 대통령 선거에 뛰어든 래퍼, 악명 높은 강간범 빌 코스비의 무죄를 외치며 관심을 끌고 양극성 장애에 시달리며 망언을 내뱉다 아내 킴 카다시안에게 버림받은 래퍼, 카니예 웨스트였다.

카니예 웨스트는 소문만 무성하던 앨범 < Donda >의 2차 리스닝 파티에 마릴린 맨슨을 초대했다. 시카고 솔져 필드 한가운데 지어진 저택 세트장에서 난간에 기댄 채로 모습을 드러낸 맨슨은 수록곡 ‘Jail pt.2’에 참여한 상황이었다.

맨슨의 옆에는 래퍼 다베이비가 있었다. 2021년 초까지만 해도 메가 히트 싱글 ‘Rockstar’와 두아 리파와의 콜라보레이션 ‘Levitating’으로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아티스트였던 그는 7월 마이애미의 힙합 페스티벌 공연 도중 “에이즈, 성병에 걸려 2~3주 안에 죽을 일 없는 사람들, 게이, 문란한 여자들 제외하고 핸드폰을 높이 들어”라 발언하며 장내를 침묵에 빠트렸다.

논란이 된 후에도 다베이비는 소셜 미디어에 실언을 늘어놓고 조롱 격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는 등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줄줄이 공연이 취소되고 엘튼 존, 마돈나, 릴 나스 엑스 등 아티스트들의 비판이 쏟아지자 마지못해 사과의 메시지를 내놓았다. 그도 ‘Jail Pt.2’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마릴린 맨슨과 다베이비가 참여한 < Donda >는 ‘인디펜던트’지에게 0점을 받았다. 불공정하다고? ‘인디펜던트’ 지를 제외하고도 카니예 웨스트의 작품에는 문제가 많았다. 2020년부터 작업을 알렸던 앨범은 수차례 발매 연기된 끝에 8월 29일 기습 공개됐고, 그마저도 미완성본이라 두 번의 추후 수정을 거쳐야 했다.

실망이 컸음에도 나는 < Donda >를 동정했다. < Jesus Is King >부터 의아한 행보만 보여준 칸예지만, 호불호를 떠나 지난 20년을 지배한 시대의 아이콘이 정신을 차리고 멋진 모습을 보여주길 바랐다. 지난 1월 13일 사인을 요청한 남성 팬을 때려눕혀 LA 경찰에게 용의자로 지목됐다는 뉴스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방탕한 록스타들과 갱스터 래퍼들의 음악이 친숙했던 나는 예술가들의 경거망동에 관대한 편이었다. ‘예술과 인성은 별개’라 믿기도 했고, 대놓고 자랑할 순 없어도 일종의 길티 플레저처럼 아쉬움을 곱씹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점점 그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인내심이 낮아진 것일까?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에 물들어버렸나? 아니다. 이것은 배신감이다. 나를 음악의 세계로 인도한 가수의 노래와 함께했던 소중한 기억이 사실은 추악한 과정의 결과물이었다는 당혹감과 분노다. 마릴린 맨슨, 카니예 웨스트, 다베이비의 음악을 좋아했노라 당당히 말할 수 없게 된 허탈함이다. 오랜 시간 동안 활동을 이어가면서도 논란 없이 만인의 존경을 받는 예술가들이 있다. 우상은 그런 이들에게 어울리는 영예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또 다른 우상이 몰락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해 < The Nearer Fountain, More Pure the Stream Flows >를 발표한 블러, 고릴라즈의 데이먼 알반은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테일러 스위프트는 스스로 곡을 쓰지 않는다”며 논란을 자초했다. 평가 절하, 여성 간의 비교, 어이없는 변명까지 현대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 삼대 금기를 충족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기타 히어로에서 백신 반대 운동 투사로 직업을 변경한 에릭 클랩튼은 유튜브 라이브를 통해 “제약회사들에게 속아 백신을 접종”했노라며 접종자들은 ‘집단 최면 형성’ 이론의 희생자들이라 열변을 토했다. 과거의 유산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더는 애써 그들의 행동을 옹호하고 싶지도 않다. 스스로의 권위는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

Categories
POP Single Single

조니 스팀슨(Johnny Stimson) ‘Twin sister’ (2021)

평가: 2.5/5

부드러운 목소리와 감각적인 리듬 감각으로 국내 팝 마니아들의 많은 지지를 얻고 있는 싱어송라이터 조니 스팀슨의 신곡이다. 고전 8비트 게임 속 칩튠 사운드를 적극 활용해 계절에 어울리는 나른한 분위기를 깔고, 사랑하는 사람의 냉정해진 태도를 쌍둥이에 빗대 달달한 구애의 노래를 완성한다. 올 초 공개한 싱글 ‘Butterflies’처럼 몽환적인 분위기에 간결한 구조로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러브 송. 국내 여기저기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이유를 확인하지만 소셜 미디어 속 수많은 ‘감성’, ‘인싸’ 플레이리스트의 재료 이상의 깊은 감흥을 주지는 못한다. MZ세대의 봄을 담당하는, 진지하게 듣기보다 틀어 놓기 좋은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