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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10구절로 프린스 이해하기

4월21일 전해진 프린스의 돌연사는 우리에게 데이비드 보위의 사망에 못지않은 충격을 던져주었다. 서구 언론은 2016년을 이미 비극의 해로 규정하고 있다. 프린스(Prince)는 천재와 기인의 평판 아래 1980-90년대 전성기를 누리면서 무수한 명곡과 명반을 남겼다. 그의 삶과 의식을 축약하는 10개의 구절을 통해 그의 위대한 음악발자취를 더듬어보기로 한다.

슈퍼 펑키(Funky) 판타지

그의 음악은 흑인음악의 역사에 걸친 모든 장르의 요소들이 뭉개진 것 같으나 엄연히 개체적 느낌이 살아있다. 미국의 정체성인 ‘샐러드 보울’을 닮았다. 이게 프린스 음악의 핵심이며 크로스오버라는 용어는 어쩌면 그의 음악을 두고 써야할 말이다. 따라서 그의 음악에 대한 통상적인 장르 분류는 의미가 없다. 딱히 뭐라고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살아 숨 쉬는 개체 가운데 펑크(Funk)의 느낌이 가장 먼저 들어온다. 전성기 시절의 ‘1999‘, ‘Dirty mind’, ‘Raspberry beret’, ‘Sign ‘o’ the times’ 등 대부분 곡들이 펑키 사운드가 제공하는 탄력적, 입체적이며 핫한 리듬의 환희다. 프린스 위 계보에 ‘제임스 브라운’과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가 있다는 규정은 그가 크로스오버 속에서도 펑크가 지향한 아프로(Afro) 아이덴티티를 견지했음을 의미한다.

“록 인구도 그를 사랑했다!”

전성기에 결성한 ‘레볼루션’ 그리고 이어서 ‘뉴 파워 제네레이션’이란 밴드는 멜로디와 코드워크 이상으로 펑크 리듬을 밀어대려는 욕구의 산물이다. 그러다 보니 지향이 비슷한 록과 부담 없이 손을 잡게 된다. 프린스 음악은 곧 펑크 록(Funk rock)이다. 하지만 이 록의 터치가 상대적으로 짙은 ‘블랙’ 감성을 가리는 결과를 초래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언젠가 “난 하나의 특정 문화풍토에서 성장하지 않았다. 난 펑크도 아니고, 리듬 앤 블루스 가수도 아니다. 백인이 많은 미네소타 주의 중산층 출신이기 때문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반드시 흑인감성에만 충절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본인이 기타리스트였기에 더욱 확연히 드러난 록의 감성으로 인해 1980년대, 그 펄펄 날던 시절에 프린스는 마이클 잭슨보다 훨씬 더 많은 록 인구를 규합했다. 그것을 증명하는 단 하나의 곡이 다름 아닌 ‘Purple rain’이다.

마이클 잭슨의 라이벌, 프린스

상기한대로 록 팬들의 선택은 마이클 잭슨이 아닌 프린스였다. 1980년대를 놓고 봤을 때 마이클 잭슨이 비틀스라면 프린스는 롤링 스톤스였다. 동갑인 둘을 놓고 음악 팬들 사이에도 암암리에 경쟁의식이 작용했다. 빌보드차트는 그 시대를 정리하면서 전체 1위를 마이클 잭슨(총 2080점), 2위를 프린스(2019점)로 집계했다. 별 차이나지 않는다. 프린스 같은 까칠하고 훨씬 덜 대중적인 음악이 등위(等位)를 누렸다는 것은 경이적이다. ‘When doves cry’, ‘Let’s go crazy’, ‘Kiss’, ‘Batdance’, ‘Cream’ 등 무려 다섯 곡이 빌보드 1위. 마이클 잭슨도 프린스의 영향을 받는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불타는 숲 속의 새끼사슴’이라고 묘사했던 연약한 마이클 잭슨은 ‘어두운 동굴의 사자’ 프린스가 크게 어필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악동’ 이미지를 차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게 버클을 주렁주렁 달고 부츠에 체인과 벨트가 잔뜩 달린, 제목 그대로 다소 거친 이미지의 1987년 앨범 < Bad >다.

프린스의 영원한 수식은 천재

음악을 잘한다고 무조건 천재(genius)라는 수식을 들이대지 않는다. 눈과 귀를 본능적으로 잡아끄는 각별함, 독자성, 일반적인 관행이나 보편적 질서를 따르지 않는 비타협성이 작위적이 아닌 자연스럽게 술술 나와야 천부적 능력의 소유자라는 영예를 얻는다. 데이비드 보위가 그렇듯 프린스는 부고 기사가 언론을 도배하는 지금은 물론, 생전에도 언제나 뮤지컬 지니어스(musical genius)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녔다. 그가 아니면 표현하지 못할 그것도 광대한 음악의 땅을 < Dirty Mind >, < 1999 >, < Purple Rain >, < Sign ‘O’ The Times >, < Graffiti Bridge> 등으로 굴착했다. 선배 스티비 원더의 헌사를 듣는다. “프린스는 실로 다양한 문화를 함께 엮어 우리에게 전달했다. 그는 원했다면 클래식을 했을 것이다, 원했다면 재즈도 했을 것이며 원했다면 컨트리도 했을 것이다. 그는 록을 했고 블루스를 했고 팝을 했다. 그는 모든 것을 했다. 그는 진정 위대한 뮤지션이다.”

MTV 스타,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프린스는 1980년대를 견인한 뉴 미디어 MTV의 총아이기도 했다. 그는 음악만이 아니라 외적 개성의 표현에서도 우월했다. 한때 6피트 장신 여성모델 옆에 서게 되자 “장난해? (키 올려주는) 애플 박스 어디 있어?”라고 했다는 에피소드가 말해주듯 단신임에도 결코 카리스마를 놓치지 법이 없었다. 그 특출 난 스타일은 단지 보여주는 수준이 아닌, 음악의 외연 확장과 유기적으로 관계했다. 이러한 이미지와 메시지의 혼재, 사운드와 패션의 결합이 1980년대의 ‘팝 컬처’였고 프린스는 그 글로벌 선두였다. 유명 패션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시리아노의 말. “우리는 진정한 패션 아이콘을 잃었다. 프린스는 과감했고 동시에 패션과 재밌게 놀았던, 머리에서 발끝까지 진정한 ‘아티스트’였다!” 그는 음반을 정복했고, 방송(MTV)과 공연을 제패했고 나아가 < Purple Rain >, < Under The Cherry Moon >, < Sign ‘O’ The Times >, < Graffiti Bridge > 등 스크린도 유린했다. ‘우린 토탈 엔터테이너, 멀티미디어 아티스트를 잃었다!’

레코드 산업, 그 거대자본과 싸운 혁명아

아티스트는 창작의 자유를 건드리는 음반사가 밉지만 대놓고 그 증오를 실행하기란 쉽지 않다. 프린스는 1993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시상식장에서 난데없이 법정서류를 꺼내 읽었다. “아마도 어느 날 모든 권력들은 깨닫게 될 것이다. 뮤지션의 작품을 그들이 조종하고 제한하기보다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도록 놔둬야 한다는 것을!” 그는 그때까지 17년간 소속되어 있던 음반사 워너레코드사과 자신의 관계일반을 ‘제도화된 노예제’로 규탄했다. 언론은 그것을 ‘혁명 수행 중’이라고 했고 <뮤지션>지는 “프린스는 아티스트와 기업 간의 현상(現狀)에 도전하는 몇 안 되는 혁명아 중 한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프린스는 이의 일환으로 1993년부터 음반녹음을 거부했고 심지어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심볼로 대체했다. 당혹스런 언론은 궁여지책으로 그를 ‘과거에 프린스라 알려진 아티스트’라고 불렀다. 그는 7년이 지난 2000년이 되어서야 다시 프린스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섹스와 섹슈얼리티 코드의 마케팅

1970년대까지 아티스트는 정치사회적 메시지로 기성 질서와 가치에 시비를 걸었다. 극도의 상업성이 지배하던 미국 레이건과 영국 대처의 보수시대에 음악가는 자선 의식을 표출하거나 아니면 유서 깊은 성(性)에 칼을 휘두르는 방식을 택했다. 외설이라는 보수 언론의 딱지에도 불구하고 프린스는 거의 광기로 성을 통한 자유 의식의 설파에 집중했다. 섹스에 대한 억압 이데올로기에 든 반기라고 할까. 마돈나에 적용되었던 혐의처럼 호기심의 자극 혹은 성공 창출을 위한 방법론이 아닐까 하는 일각의 회의적인 시선을 깔아뭉개며 프린스는 여성의 자위, 신음, 근친상간, 오럴 섹스 등 음반사도 앨범을 낼지 말지를 고민할 만큼 표현수위가 높은 소재를 거리낌 없이 음악에 옮겨 놓았다. 의도적으로 섹스를 노골화하고 섹슈얼리티를 충격적으로 부각해 억제된 인간내부의 자유분방함을 꺼내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그가 얻은 닉네임은 ‘악당 전하(His Royal Badness)’. 그는 모든 면에서 왕자 아니면 왕이었다.

고유 컬러를 확립한 미니애폴리스 제국

전성기에 그는 ‘더 타임’, ‘베이너티 6′(올해 2월, 57세의 나이로 사망), ‘아폴로니아’, ‘실라 이’, ‘웬디 앤 리사’ 그리고 ‘더 레볼루션’ 등의 뮤지션들과 함께 언론과 벽을 쌓으며 자신의 고향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 그들만의 음악 성지를 축조했다. 이른바 미니애폴리스제국. 제도적 장치로 파악한 매스컴과의 일정한 간격 유지에 의해 미니애폴리스 음악제국은 더욱 신비화되는 효과를 낳았다. 마이클 잭슨처럼 프린스도 음악적 자유를 ‘폐쇄’책을 통해서 실현하고자 한 셈이다. 미니애폴리스제국은 하지만 외부와의 차단을 통해 음악에 매진하는 작업공간으로서의 개념을 넘어, 바깥세상의 제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에 의해 통치되는 별개의 소우주로 기능했다. 이것은 그가 스타인 동시에 반(反)스타 기질의 소유자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아메리칸 팝의 주류를 반역적으로 비틀었던 프린스의 선동은 아름다웠다.

최고의 히트 작곡가로서 기염을 토하다!

언론의 접근이 차단된 별도의 미니애폴리스 제국을 통치하면서 프린스는 당대에 활약한 무수한 아티스트의 히트 레퍼토리를 제공하는 작곡가로도 금자탑을 쌓았다. 제국 내의 산물로 < Purple Rain > 당시인 1984년 모리스 데이가 이끈 ‘더 타임’의 ‘Jungle love’와 드러머 실라 이(Sheila E)의 펑키 감성이 물씬한 ‘The glamorous life’가 있지만 이후 리스트는 더욱 화려했다. 그 무렵 샤카 칸의 ‘I feel for you’, 시나 이스턴의 ‘Sugar walls’, 여성밴드 뱅글스의 ‘Manic Monday’ 등 차트를 주름 잡은 곡들이 모두 프린스의 오선지에서 나왔다. 1990년 시네이드 오코너의 깊은 보컬이 빛나는 명곡 ‘Nothing compares 2 U’가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팝 팬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는 가수만이 아니라 성공적인 작곡가로 당대를 풍미했다. 음악 관련미디어 영역에 프린스의 이름이 내걸리지 않은 곳은 없다.

2000년 이후만 독집 앨범 16장 발표

2015년에 프린스는 두 장의 앨범 < HITnRUN Phase One >과 < HITnRUN Phase Two>를 잇따라 내놓았다. 여기서 활약한 여성 3인조 백업 밴드 ‘써드아이걸’은 B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앨범은 저 옛날 < Purple Rain >의 사운드를 듣기 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프린스가 뭘 말하고자 하는가를 귀 담아 듣는 팬들을 위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창의 스피릿은 꺼지지 않을 듯 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앨범이 2014년, 4년 만에 컴백해 거푸 두 장의 신보 < PlectrumElectrum >과 < Art Official Age >를 낸 후에 다시 또 두 장의 새 앨범 발표를 반복했다는 사실이다. 겨우 한해 지나 또 신작으로 롤백 한 그 왕성한 생산력은 후대의 귀감이다. 2000년대 들어서 내놓은 독집이 자그마치 16장이다. 거룩한 다산(多産). 마지막까지 음악의 불꽃을 태운 것이다. 그는 음악으로 산 게 아니라 ‘음악을 살았다!!’

(2016.04.21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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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세정 인터뷰

세정은 실제의 ‘균형’을 원한다. 가수에게 필요한 대중적 인기도 분명 인식하지만 스스로 곡 쓰고 자신의 것을 축조하는 ‘자주’도 요구하고 있다. “하고 싶어서 음악을 한다!!” 선우정아가 곡을 쓴 인디 감성의 신곡 ‘화분’은 솔직히 아이돌 가수와 쉬 부합하지 않는다. 모험을 할 줄 아는 이런 약간의 도발이 아이오아이와 구구단 세정이 아닌 ‘솔로 세정’의 입지를 확장해주고 있다.

인터뷰 중에 그가 주로 동원한 어휘는 솔직함, 진심, 공감 그리고 자기 위로였다. 이번 미니앨범은 ‘힐링 뮤지션’의 본격 시작점. 대화 시간 내내, 자신의 음악과 닮아서 미디어가 붙여준 수식 ‘힐링 웃음’은 조금도 놓치지 않았다.

다섯 곡의 미니 앨범이지만 내용은 실하다. 작업과정을 알려 달라
제일 처음 만든 곡은 ‘오늘은 괜찮아’에요. 재작년 말부터 작년 초에 만들었으니 꽤 오래 걸렸죠. 태연 선배님의 ‘U R’처럼 잔잔하고 예쁜, 희망을 줄 수 있는 메시지의 수록곡을 생각했어요. 이 곡을 타이틀로 가자는 이야기도 많이 나왔답니다. 하지만 제 기준으로 이 노래는 수록곡이라고 봤어요.

타이틀 욕심이 없었나
모르겠어요. 확 성이 차지 않았다고 할까? 예술성의 측면에서 완벽하지 않다고도 봤고, 타이틀 곡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었어요. 그렇게 해서 이어서 만든 곡이 ‘SKYLINE’과 ‘오리발’이에요.

‘화분’을 제외한 모든 곡의 작사 작곡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오늘은 괜찮아’ 한 곡만 자작곡으로 수록하고 나머지 노래들은 다른 분들께 받을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이 곡을 타이틀로 하자는 얘기를 듣고 나니, 멍해지더라고요. “이대로 있지 말자. 더 좋은 곡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더 많이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SKYLINE’, ‘오리발’, ‘꿈속에서 널’ 세 곡은 동시에 작업한 곡이에요. ‘오리발’의 1절까지 써놓은 상태에서 작업을 미루게 됐습니다. 이후 객관적인 시각으로 작업을 돌아볼 수 있었고 다시 준비해서 앨범 < 화분 >을 완성했어요. 정말이지 자작곡이 모두 수록될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웃음)

‘화분’은 선우정아가 곡을 만들고 바버레츠의 안신애와 함께 노랫말을 썼다. 타이틀곡도 욕심을 냈을 법한데..
작업을 하며 전문가의 터치가 필요하다는 걸 느꼈어요. 내심 타이틀곡만은 전문가에게 받았으면 했죠. 그러던 중에 회사 A&R 팀에서 먼저 관심있는 아티스트가 있냐며 제안을 주셨어요.

일부에선 타이틀곡 ‘화분’ 대신 ‘SKYLINE’을 타이틀곡으로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목소리도 있던데 들어봤나
‘SKYLINE’을 계속 끌고 갈까 고민도 했어요. 회사에선 ‘화분’을 밀었어요. 타 솔로가수와 차별화되는 지점도 있고, 좀 더 세정다운 색이 ‘화분’에 담겨있다고 본 것 같아요. 저도 물론 그렇게 생각했구요.

‘SKYLINE’이 보다 대중적인 건 맞아요. 웅장하고 벅차오르는 느낌도 있죠. 다만 가슴 깊은 곳을 울리는 찡한 감정은 ‘화분’이 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와 회사 모두 ‘화분’이 주는 주제와 느낌, 봄이라는 계절감, 시작의 의미 모두가 하나로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더라도 노랫말은 세정이 해낼 수도 있었을텐데.
선우정아님께서 곡을 쓰실 때 세세히 정확하게 계획을 세워두셨더라고요. ‘여기에는 이 음이 들어가고, 이 가사가 들어가야 하고,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여기다.’ 모든 게 이미 짜여 있었죠. 제가 이 곡의 가사를 수정하거나 멜로디를 만지게 되면 전체적인 의도와 내용을 오히려 흐트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에도 ‘화분’은 도식적인 다른 발라드들과 다른, 조금은 도발적 터치가 있다. 아이오아이와 구구단, 지금까지 솔로 활동과 견줄 때 새롭다. 사실 이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인데..
회사는 ‘꽃길’, ‘터널’ 그리고, ‘화분’으로 이어지는 ‘굳히기’의 의도로 ‘화분’을 제안한 것 같아요. 사실 ‘터널’까지만 이런 위로의 이미지와 주제를 가져가려 했는데, 아직 ‘세정의 노래는 이거다’라는 대중의 인식이 약하지 않냐는 의견을 주셨죠. 저도 수긍했고요. 앨범 단위의 작품은 또 없었기 때문에 그랬구요.

아이오아이와 구구단 활동과 달리 세정의 솔로 커리어는 발라드 장르로 진행되고 있다.
틀에 갇히고 싶진 않아요. 제가 판단하기에 제 목소리의 장점은 목소리만 들어도 어떤 노래를 할지가 연상되는 개성보단, 각 장르에 맞춰 다양하게 부를 수 있다는 점이라 생각해요. ‘세정의 음악’, ‘세정의 노래’가 사람들 사이서 감이 잡히게 되면, 빨리 장르를 넓히고 싶어요.

2018년 작사 작곡의 의사를 처음 내비쳤던 한 매거진과의 인터뷰를 기억한다. 왜 작사 작곡을 하려고 한 것인가
처음에 벽을 너무 높게 잡아서 시작하는 데 굉장히 오래 걸렸어요. 미디도 다룰 수 있어야 할 것 같았고, 믹싱도 제가 할 줄 알아야 될 것 같았죠. 그렇다고 어설프게 시작하고 싶진 않았어요. 할 거면 제대로 배우고 싶었죠.

2년 전쯤 회사 내부에 저만의 자그마한 공간이 생기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했어요. 작가님들께 부탁해서 장비를 구하고, 프로그램 세팅을 부탁드렸죠. 처음에는 다른 가수분들의 모르는 곡의 인스트루멘탈(연주 대목)에 제 멜로디를 얹으면서 시작했어요. 그렇게 혼자 신나서 몇 곡을 만들어서 친구들에게, 작가분들께 들려주니 세상에 괜찮다는 거예요, 참.. 그리고 나서 회사 내 송캠프 시스템을 추천 받아 본격적으로 들어가게 됐죠. 심장이 뛰고 너무 재미있는 거에요!(웃음). 그렇게 만든 첫 곡이 ‘오늘은 괜찮아’였어요.

‘꽃길’, ‘터널’, ‘화분’ 모두 위로의 주제를 담고 있다. 갑자기 든 생각인데 자기를 위로하기 위해 노래 부르고 작곡하는 것 같다.
어릴 때 저는 진짜 제 상태를 모르고 살아왔던 거 같아요. 모든 걸 다 긍정적으로, “뭐든 이겨낼 수 있어, 해낼 수 있어!”라 받아들였죠. 그러다 보니 가슴 한 켠에 이상한 무언가가 생겨났어요.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좋은 부분만 보려고 한 거에요. 그 닫힌 부분을 확인한 게 스물 두 살 때였을 거예요. 이러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아픈 부분은 치유해야 하구나, 외면하면 병이 나는구나…’.

그러면서 나에 대한 위로, 공감에 시선을 두게 됐어요. 그렇게 저의 솔직한 진심을 마주하고 나니, 이것만은 모든 사람들에게 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어요. 솔직하게 제가 느낀 점을 말하고, 진심을 전하면 공감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모든 걸 음악에 담고 싶었고요.

앨범 속지 속 수록곡 옆에 직접 쓴 에세이를 담고, 팬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동봉한 것도 그런 의도에서인가.
곡을 만들며 가사로 풀어내기 힘든 생각을 담았죠. 왜 제가 이 곡을 쓰게 됐는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항상 글을 쓰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회사에서 편지 아이디어를 줬어요. 글을 통해 제 진심을 더 느껴주셨으면 해요. 솔직한 진심이요.

< 화분 >을 준비하며 가장 어려웠던 점은
‘오늘은 괜찮아’는 후반부 진한 가성이 잘 안 나와서 힘들었어요. ‘SKYLINE’은 작업 과정에서 편곡을 많이 바꿔서 그 점이 어려웠고요.

아이오아이와 구구단 활동을 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사랑의 소중함을 배웠어요. 아이오아이를 하면서는 사람들이 왜 저를 좋아해 주시는지, 어떤 점에서 제가 대중성을 갖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됐죠. ‘항상 긍정적이고 밝아야 한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기도 했지만요 (웃음). 구구단을 하면서는 더 노력하게 됐어요.

가수로서 세정의 롤모델은 누구인가.
늘 아이유 선배님이에요. 어렸을 적에는 인순이 선배님. 인순이 선배님처럼 오랜 시간 음악하고 싶다는 마음을 아주 오래 갖고 있었어요. ‘오리발’이 그 내용을 담고 있어요.

사람들이 미니 앨범 < 화분 >을 어떻게 들어줬으면 하나.
취향 따라 골라 듣는 ‘위로의 뷔페’? 꼭 전곡을 다 안 들어도 돼요. 오늘은 이런 위로의 메시지가, 내일은 저런 위로의 메시지가 필요할 수 있잖아요.

마지막으로 세정이 자주 들었던, 세정의 인생에서 중요한 노래들을 꼽아달라.
폴 뷰캐넌(Paul Buchanan)의 ‘Mid air’는 가장 좋아하고 많이 본 영화 중 하나인 ‘어바웃 타임’에서 주인공이 처음 사랑에 빠질 때 나오는 노래에요. 이 노래를 들으면 마치 내가 운명의 상대를 만나, 시간 속에 그 사람과 단둘만 남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요.

린의 ‘…사랑했잖아…’는 중 2때 운동장에서 연습했던 저의 첫 곡이에요. 이 때 ‘제대로 실용음악 학원을 다녀야겠다’라고 마음을 먹었어요.

옥상달빛의 ‘괜찮습니다’도 추천해요. 옥상달빛은 저에게 인디라는 장르를 눈 뜨게 해주신 분들이자, 인디 음악을 어색하게 느꼈던 저에게 인디의 담백하고 솔직함을 깨닫게 해주신 분들이에요.

인터뷰 전 IZM SNS를 통해 많은 분들께서 평소 세정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중 선정된 2분의 질문을 직접 물었습니다.

트위터 ‘동달’ 님의 질문 : < 화분 >을 어떤 앨범으로 기억하게 될지?
솔직히 아쉬움이에요. 아쉬움이 남아야 다음에 할 게 더 많은 법이잖아요?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고 새로운 시도도 했지만 그만큼 아쉬움도 큰 앨범이에요. 훗날 돌아봤을 때 이 아쉬움으로 성장한 제 자신을 마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인스타그램 ‘yssj034’님의 질문 : 위로가 필요할 때 세정이 듣는 노래는?
사실 위로가 필요할 땐 노래를 잘 듣지 않는 편이에요. 대신 글을 많이 써요.

인터뷰 : 임진모, 김도헌, 임동엽, 임선희
사진 : 젤리피쉬 엔터테인먼트 제공
정리 : 임진모, 김도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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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10곡 Feature

IZM 필자들이 소개하는 ‘내 인생의 음악 10곡’ – 임진모

이난영 ‘목포의 눈물'(1935)
음악을 듣기 위해 라디오를 처음 틀었던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이 음악인생의 시작이라고 밥 먹듯 얘기한다. 이후 서구 로큰롤, 팝으로 냅다 달려갔지만 그렇다고 그 이전 프리 틴 때 나를 건드린 노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부모 음악을 따라가던 이 시절의 대세는 트로트와 미국식 스탠더드 팝. 소멸된 것 같다가도 이 음악들은 새봄에 다시 싹이 트듯 내 삶에서 잠재와 현재(顯在)를 반복했다. ‘목포의 눈물’은 최초의 (일제에 대한) 저항가요일지 몰라도 내게는 ‘학교 밖의’ 첫 노래였다. 초등 6학년 봄 소풍 때 학부모 대표로 나서 이 곡을 부르신 한 급우 어머님의 그 구성진 가락을 잊지 못한다.

황금심 ‘외로운 가로등'(1939)
세상이 무서워 방에 있는 게 좋았다. 대신 외로웠다. 이 노래는 실로 외로움이 실연 통(痛)을 더 높이는 블루스 비극미의 극치일 것이다. 내 스타일이었다. ‘희미한 가로등이여/ 사랑에 병든/ 내 마음속을/ 너마저 울려주느냐..’ 황금심의 목소리는 증폭기가 필요 없을 만큼 커서 더 둔중하게 가슴을 내리누른다. 나중 차인표 송윤아 주연의 드라마 <왕초>(1999)에 이 곡이 나왔을 때 마음속에 뭔가가 불쑥 솟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박신자 ‘땐사의 純情'(1959)
질긴 생명력으로 따지면 이 곡을 넘지 못한다. 어릴 적 못났다는 말을 듣고 자란 터라 이상하게도 처량함, 막막함, 구슬픔 등등의 ‘비탄’쪽 정서에 이끌렸다. 게다가 노랫말은 ’10대가 들어선 안 되는’ 내용이라 더 깊숙이 들어왔다.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처음 본 남자 품에/ 얼싸 안겨..’ 나중 동네삼촌이 그랬다. 예뻤던 박신자는 미인은 박명이라고 스물셋 꽃다운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갔다고. ‘울어라 색스폰아∼∼’ 금지 처분이 풀리던 1987년 시점에 나온 이순길 버전도 기억에 남는다.

박재란 ‘밀짚모자 목장아가씨'(1964)
개발시대 그 못살던 시절에 밀짚모자는 뭐며 포플라, 양떼, 목장은 뭔가. 상상할 수 없는 미지의 언어들이라서 혹했던 건가.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를 통해 우리가 긴급 동의한 것은 오랜 핵심정서, 바로 서구에 대한 동경과 선망이었다. 마치 애들한테는 고구마말랭이와 쌀엿을 내동댕이치게 한 초콜릿, 아이스콘의 습격과 같은 맥락. 첫대목 ‘시원한 밀짚모자’와 후렴구 라라라를 지겹게 따라 불렀다. ‘이런 게 양키 구라파 음악이구나!!’ 하지만 지금의 젊은이가 이 곡을 들으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이런 게 북한 노래구나!!’

이미자 ‘섬마을 선생님'(1966)
최고의 콤비가 된 박춘석과 이미자 콜라보레이션의 서막. 1964년 ‘동백아가씨’의 센세이션으로 데뷔 5년이 지나서 마침내 정상에 오른 ‘엘레지의 여왕’은 라디오연속극 주제가에 또 한 번 일절 장식과 기교가 없는 미니멀리즘 창법으로 선풍을 재현한다. 그럼에도 순정의 힘 때문인지 후반 ‘서울 ∼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는 수백 번 꺾기가 구사된 듯 절절하다. 괜히 이미자 이미자 하겠는가. 형들은 조금은 이기적인 가사로 바꿔 불렀는데 기억은 나지 않는다. 지금도 60대 이상 어른들한테 꿈이 뭐였냐고 물으면 섬마을 선생님이라고 답하는 분들이 있다.

최희준 ‘종점'(1966)
작은집의 한 삼촌이 내게 그랬다. ‘이런 노래는 애들이 들으면 안 되는데…’ 영화 주인공의 산업스파이 행각이 들키면서 자살로 막을 내리는 19금 소재와 그 처절한 사운드트랙 노랫말을 전제해서였을까. 그런데도 ‘광복20년’ ‘팔도강산’과 같은 건전가요보다는 비참가요를 선호했던 나는 안 되는 쪽으로 갔다. ‘싸늘하게 싸늘하게/ 식어만 가는/ 아아아아 내 청춘/ 꺼져가네..’ 어린 애였는데도 꺼져가는 것에 왠지 마음이 갔다. 고 최희준은 부드러운 냇 킹 콜 창법에다 클라이맥스의 폭발성도 겸비한 당대 극강 보컬이었다.

배호 ‘두메산골'(1966)
각 시대의 고유정서라는 중요한 함수가 개입하기 때문에 꼭 내가 들어온 음악들이 대물림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과거의 음악이 흘러간 것들이지만 그중 더러는 이후 세대의 필요에 의해 부활하기도 한다. 과거시제가 역사성을 획득하는 순간인데 이 대목에서 첫 손가락에 꼽힐 가수가 배호다. 최희준이 굵음이라면 배호는 가녀림이다. 아픈 몸이어서 그랬을까. 쑤욱 치솟는 고음, 이건 한마디로 절세 가창(佳唱)이다. 이 곡에서 한번 ‘아니 가련다/ 풀피리 불며불며’와 ‘아니 떠나리/ 수수밭 감자밭에’ 부분을 들어보라.

남진 ‘어머님 얼굴'(1967)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를 달군 남진 나훈아 라이벌전 때 대체로 나훈아 편에 섰지만 곡 하나만 고르라면 배우 뺨치는 미남이 애타게 부른 이 노래였다. ‘어머님/ 참사랑에/ 목이 타는/ 어린 자식..’ 일반적 트로트가 아니라 모던 팝이라 할 만큼 세련된 곡조였다. 남진 선생님을 만났을 때 “그 노래를 어떻게 알아요?” 하면서 비슷한 곡 ‘어머니’가 더 떠서 이 곡이 묻혀버렸다고 설명했다. 늘 색다르고 혹하는 노래를 찾았다. 돌이켜보면 다양성 욕구가 그때 이미 싹텄던 것 같다.

이장희 ‘그건 너'(1973)
지금도 말과 글에서 고매한 문어체가 아니라 속화된 구어체를 사랑한다. 이 곡은 정형화된 가사패턴으로 노래를 하는 게 아니라 마치 형이 원색적 톤으로 마구 지껄이는 느낌이었다. ‘동창생 녀석이/ 너 미쳤니 하면서…’ ‘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네/ 종일토록 번호판과 씨름했었네’는 딴 가요에는 없는 가사였다. 언어는 그렇지 않음에도 왠지 모르게 엉김, 반항, 비타협이 넘실거렸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심대한 타격이었다. 이후 나도 모르게 씩씩해졌다.

신중현과 엽전들 ‘미인'(1974)
나중에 이런 걸 기타리프라고 한다고 알게 됐지만 처음 들었을 때 기타 전주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비슷한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한국 록의 대부’라는 수식처럼 거문고 가야금을 뜯는 듯한 기타연주는 물론, 가락 전체가 한국적이었다. 아들이자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의 평. “그 누구에게라도 단 5음계만으로 이렇게 멋진 곡을 써 보라고 해보시라. 기념비적인 곡으로 언젠가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100년 후엔 ‘아리랑’과 같은 반열에 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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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모의 위대한 유산 Feature

마이클 잭슨 : 영상시대 이끈, 대중음악 현대화의 단일 주체

※ 위 글은 2018년에 작성되었습니다.

“음악의 영상시대를 열다”

마이클 잭슨의 위대함과 그 찬란한 역사적 위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 접근법은 무수히 많습니다. 잭슨 파이브, 신동(神童), 마리아(Maria), 환상적 춤과 노래솜씨, 문워크, 블록버스터 스릴러(Thriller), MTV, 킹 오브 팝, 음반 판매량 등등 그와 직결된 여러 콘텍스트들 가운데 하나만을 골라 논해도 그를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댄스 문워크에서 이름 딴 아트 필름 < 문워커 >(Moonwalker)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당대 무려 2200만 달러라는 거액을 들여 제작한 이 영화는 그와 동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뮤직 비디오’를 쭉 연결해 장장 92분의 흥분, 걷잡을 수 없는 스릴과 서스펜스를 팬들에게 선사했지요. 일부 극장에서도 상영되었지만 주로 VHS와 레이저디스크를 통해 일반과 만났는데요, < Thriller > 이후 무려 5년의 학수고대 끝에 나온 새 앨범 < Bad >와 함께 만들어 영상의 측면에서 일대 회오리를 일으켰던 작품입니다.

특히 마이클 잭슨이 직접 스토리를 구성한 ‘Smooth criminal’은 압권이었고 마치 싱글처럼 별도로 소개된 ‘Leave me alone’의 경우는 그래미상을 수상하고 칸영화제에서도 최우수 특수효과 부문의 상을 받습니다. 이 작품이 나온 지 자그마치 30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너무나 빨리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 30년을 다른 말로 한다면 ‘영상시대’겠지요. 이전의 ‘듣는 음악’ 시대와 분리선을 치는 ‘보는 음악’, 그 뮤직비디오 시대를 견인한 절대 선두가 바로 엠제이(MJ)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어떤 각론보다도 먼저 총론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도대체 마이클 잭슨이 갖는 의미망은 무엇일까요. 이 대목에서 마이클 잭슨은 단지 음악적 현상을 넘어 세상을 바꾼 ‘사회적 현상’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마이클 잭슨의 ‘월드 슈퍼스타덤’에는 백인지배 사회에서 신음한 아프로 아메리칸(Afro- American)들의 비상 욕구와 자긍심이 저변에 흐르고 있다는 거지요.

형편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얼마 전 차일디시 감비노(Childish Gambino)의 쇼킹한 노래와 영상 ‘이게 미국이야(This is America)’가 웅변하듯 지금도 미국 아니 전 세계 흑인들은 알게 모르게 차별과 억압의 불평등 구조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에는 오죽했겠습니까. 그런 암흑과 절망의 상황에서 지구촌을 뒤흔든 마이클 잭슨의 열풍은 흑인들에게 ‘우리가 빼어나고 우리가 아름답다’는 신념과 긍지를 제공했지요.

“마이클 잭슨과 오바마 대통령”

바로 대중문화의 사회적 영향력입니다. 마이클 잭슨과 함께 흑인들은 자신 있게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마이클 잭슨보다 세 살 밑인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스릴러’ 시절의 엠제이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해낼 수 있다!’ 그것 아닐까요. 결과적으로 마이클 잭슨과 같은 흑인스타의 분발로 미국은 우리 생애에 어려울 것 같던 흑인 대통령을 보게 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최초의 아프로 아메리칸 대통령’ 오바마를 두고 마이클 잭슨에 대한 채무자, 즉 마이클 잭슨에게 빚을 졌다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겁니다.

마이클 잭슨 이전에도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 같은 엄청난 슈퍼스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틀스는 영미 사회에서 주로 백인들에게 인기를 누렸던 반면 마이클 잭슨은 흑백 사회 모두에서 폭발적 반응을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흑백 크로스오버 시대’를 이끌었다는 평을 받는 거지요.

가수로 보면 빌리 할리데이, 레이 찰스, 샘 쿡, 아레사 프랭클린, 오티스 레딩,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 등등 마이클 잭슨 이전에도 흑인 스타가수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스타들이었지만 그들이 미국사회에서 상기한 엘비스 프레슬리,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엘튼 존, 믹 재거,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등 백인가수들을 누르고 진정한 1등을 차지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그때까지 명백히 백이 흑의 위에 있었지요.

흑인가수로서 백인을 뛰어넘어 진정으로 1등에 오른 인물은 마이클 잭슨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마이클 잭슨이 등장하면서 대중음악의 헤게모니가 백인에서 흑인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거지요. 1982년이 대중음악에서 전환점이란 말이 그래서 나옵니다. 바로 이 해에 백인음악의 대변자이자 상징인 이글스(Eagles)가 해산하고 아프로 아메리칸 스타 마이클 잭슨이 등장했으니까요. 한편으로 미국의 문화유산이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 만들어낸 블루스와 재즈라고 한다면, 또 거기에서 로큰롤이 파생했음을 전제하면 흑인문화가 마이클 잭슨에 와서 비로소 본래의 주도적 위상을 탈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 최고의 앨범 판매량 기록”

이제 각론으로 가볼까요. 우선 기록적 측면에서 어떤 가수도 그에게 범접불허입니다. 잭슨의 별명은 ‘킹 오브 팝’입니다. 우리는 흔히 ‘팝의 황제’로 번역하는데, 마이클 잭슨은 그러한 수식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던 뮤지션이지요. 무려 13곡이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올랐고 앨범 판매고는 7억 5000만장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기념비적인 앨범 < Thriller >는 미국 레코딩 산업협회(RIAA)의 집계에 따르면 미국에서 3200만장을 비롯해 세계 판매량6600만장으로 단일 앨범 최고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불법복제를 포함한 실제 판매량은 1억 2천만 장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단일 앨범으로 1억장 이상 추정된 것은 < Thriller > 밖에 없습니다. 비틀스, 아바, 이글스, 핑크 플로이드가 앨범을 많이 팔았다고 하지만 한 장의 독집으로만 따졌을 때는 마이클 잭슨의 근처에도 못 온다는 거지요. 게다가 공식적으로 2000만장 이상 판매한 앨범을 마이클 잭슨은 무려 5장을 보유, 이 부문 역시 최고입니다. 그 다섯은 다음과 같습니다.

Thriller >(6600만, 1982)
< Bad >(3500만, 1987)
< Dangerous >(3000만, 1991)
<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1 >(2000만, 1995)
< Off The Wall >(2000만, 1979)


성인이 되어 낸 전성기 시절 앨범 다섯이 모조리 2000만장 이상 팔린 거지요. 경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잭슨 다음의 아티스트는 비틀스, 마돈나, 셀린 디온으로 각 3장에 불과합니다. 기록에 관한 한 누구도 마이클 잭슨을 이기지 못합니다.

< Thriller >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지요. 이 앨범은 1982년 말에 발표되어 이듬해 시장과 인기차트를 석권했습니다. 이 무렵, 모타운 25주년 기념공연에서 소개된 ‘문워크’ 춤은 지구촌 전체에 탄성을 불렀지요. ‘Billie Jean’을 부르며 마치 달을 밟고 걷는 듯 유연하게 뒤로 걷는 춤을 선보였을 때 청소년들은 넋을 잃었습니다. 모방 본능에 충실한 나머지 젊은이들은 따라 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뒤로 넘어지는 사고가 속출했지요.

오죽하면 너무 열심히 추다보니 신발이 너무 닳아 신발 판매량이 늘었다는 소식마저 나왔겠습니까. 하긴 전설적인 ‘춤의 배우’인 프레드 아스테어가 ‘경이적 춤꾼(wonderful mover)’이라고 격찬한 사람의 동작을 어찌 쉽게 재현할 수 있겠습니까. 여배우 제인 폰다는 “마이클 잭슨의 음악에 맞춰 춤출 수 있고, 일할 수 있고, 섹스할 수 있고, 노래할 수 있다. 그의 음악을 듣고 가만있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Wonderful mover, invincible singer!!!”

춤만이 사람들을 홀린 것은 아니었지요. 천재적 감정표현과 비트 감각에다 어릴 적 잭슨 파이브(Jackson 5) 활동 시절부터 노래한 풍부한 이력은 가창력 측면에서도 그를 발군으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14살 때 히트 친 노래 ‘Got to be there’와 ‘Rockin’ robin’가 수록된 1972년 솔로 앨범의 또 다른 곡 ‘Maria(you were the only one)’에서 자유자재로 음을 타고 지르며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솜씨는 달리 천재가 아니었지요. 신동이었습니다. 영혼으로 노래해야 이렇게 나온다지만 타고난 역량과 재기가 아니면 도무지 부를 수가 없는 거죠. 정말이지 ‘Maria hey hey heh hey Maria/ Maria don’t you hear me calling Maria…’ 시작 몇 초에 모든 게 끝납니다. 느린 노래 ‘She’s out of my life’, ‘You are not alone’이든 빠른 노래 ‘Beat it’, ‘The way you make me feel’이든 마이클 잭슨의 히트 넘버들을 자세히 들어보십시오. 그는 가수로도 역사가 인정한 특급 소울가수, R&B가수입니다.

녹음기술의 측면에서도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언제나 유행을 선도했습니다. 녹음할 때 완벽한 소리가 나올 때까지 ‘어게인(다시!)’이란 말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고 하니 사운드 측면에서도 그는 혁신적이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까지 국내는 물론 세계 어디 녹음스튜디오의 엔지니어 책상에는 언제나 마이클 잭슨의 음반이 비치되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아마 ‘Heal the world’나 ‘Earth song’을 들어보시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실 겁니다.

다시 춤으로 돌아가 그의 출중한 댄스 역량은 1980년에 시작된 음악전문채널인 MTV 시대와도 맞물려 폭발했습니다. 유선방송 MTV가 종일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뮤직비디오를 틀면서 전 세계가 그의 춤과 음악에 빠져들었지요.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보는 음악’, ‘비주얼 댄스’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어찌 보면 마이클 잭슨은 ‘대중음악 현대화’의 주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영향 아래 국내에서도 1980년대 중후반 소방차, 박남정, 김완선 등의 댄스가수가 잇달아 나왔습니다. 서태지도 어릴 적에 마이클 잭슨을 동경하면서 댄스음악의 무한 파괴력을 가슴속에 담아뒀을 것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어느새 9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고인이 됐지만 ‘문워커’를 비롯한 영상 그리고 음악으로 아직도 우리 곁에 살아있는 듯합니다. ‘리빙 레전드’지요. 누가 뭐래도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처럼 마이클 잭슨의 음악사적 위상은 견고합니다. 그의 빼어난 음악과 명반 그리고 새 음악시대의 창조라는 위업이 있기에 ‘팝의 황제’라는 타이틀은 앞으로도 영원할 것입니다. < Moonwalker >만 봐도, ‘Black or white’ 한 곡만 들어도 왜 그가 위대한지 증명됩니다. 그는 현재진행형의 음악위인입니다. 그가 있어서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며 앞으로도 행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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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보아 인터뷰(2016/02)

한류가 중국을 중심으로 동남아 권에서 발화하고 있을 때 더 큰 대중문화 시장인 일본을 정복해 그 확산력, 폭발력, 파괴력을 주도한 인물은 말할 필요 없이 보아(BoA)다. 공인 수식이 ‘아시아의 별’이다. 어쩌면 진정한 의미의 ‘K팝’ 글로벌 비상은 보아가 일본을 흔든 시점과 궤를 맞춘다고 할 수 있다. 2016년은 그가 일본에 진출한지 15년이 된 해다.

이제 막 30대에 들어섰지만 중견이라는 타이틀이 어색하지 않은 보아의 스탠스는 견고하다. 지난해 발표한 통산 8집 < Kiss My Lips >는 이즘의 올해 베스트10 앨범에 선정됐고 서울가요대상에서도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했다. 이에 대해 그는 고생한데 따른 보상이라고 밝힌 바 있다. 중견으로서의 음악지향과 갈등, 지금의 심경 등 전반이 궁금했다. 13년 만에 이즘과 만난 보아는 음악이야기에 즐겁게 집중했다.

작년 < Kiss My Lips > 앨범은 평단과 음악관계자들 사이에 반응이 좋았다. 노력하고 고생한 만큼 보상받은 것 같아서 다행, 행복이라고 밝혔는데 앨범 작업하면서 무엇 때문에 고생을 했나.
아무래도 전체 노래를 다 쓴다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제가 7집 ‘Only one’을 냈을 때 사실 ‘Only one’도 제가 쓴 노래였는데 많은 분들이 모르세요. 제가 작사, 작곡하는 것을 잘 모르셔서… 8집 때, 2015년은 데뷔 15주년이었거든요. 그래서 15주년을 기념으로 해서 재밌는 무언가를 할 수 없을까 라는 생각을 했고 “내가 직접 손수 만든 앨범을 팬들에게 선물을 하면 어떨까”하는 판단을 했죠. “될지 안 될지 모르겠는데 최선을 다해서 혼자 한번 써볼게요.”라고 회사에 얘기를 해서 혼자 쓴 노래들도 있고 또 외국 작가들이 와서 캠프를 진행할 때 저도 같이 참여를 해서 쓴 노래들도 있어요. 편곡자 분들도 지속적으로 만났고. 시간 할애하는 것이나 계속 아이디어를 내는 것. 그런 게 가장 어려웠던 것 같아요.

앨범 작업은 어느 정도 걸렸나.
시작한 건 2014년도 거의 초반인 1, 2월 정도부터였으니까 1년이 넘게 걸린 거죠. 앨범이 5월에 나왔으니까요. 말씀 드린 대로 정성스럽게 만들어 선물 꾸러미를 팬들에게 바친다는 생각에서 작업시간이 꽤 길었죠.

경력이나 위치 때문에 앨범 접근 방식도 달랐을 거로 본다. 우선 수록 곡을 12곡으로 빼곡히 채워 대단했다. 워낙 싱글, 미니가 판치다보니 아직도 앨범 곡수 형식미를 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7집의 수록곡이 7곡 밖에 안됐어요. 그때 기자 분들, 관계자들로부터 이건 미니 앨범인데 왜 정규라고 하는 거냐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어요. 제 나름대로는 정말 좋은 노래만 내고 싶어서 한 건데. 그때 마음에 뭔가가 남았나 봐요. 그래서 이번에는 풀 열두 곡을 채워서 내겠다(웃음)고 그랬죠. 사실 만든 노래는 20곡 가까이 있었구요.

한일 양국 왔다 갔다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워낙 스트레스도 많은 슈퍼스타인데 굳이 자신이 곡을 쓴다는 게… 왜 작사, 작곡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뮤지션으로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인가?
아니요, 그렇지는 않았고요. 이번 앨범은 정말 팬들에게 선물이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저를 위한 선물이기도 했어요. 왜냐면 아이돌이란 타이틀로 데뷔했던 10대 소녀가 자신의 손으로 만든 앨범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된다면 저 또한 ‘내가 열심히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 것 같은 거예요. 욕심이라면 그게 욕심이었죠. 그래서 조금 무리를 하긴 했죠. 전 곡을 다 채워서 넣는다는 게… 이제는 또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는 항상 일을 할 때 일에 대한 흥미를 찾아가고 싶은 스타일이라서 다음에 또 노래를 내게 된다면 내 노래가 아니라 어떤 다른 작가의 노래를 나만의 방식으로 꾸며서 색다른 옷을 입혀보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 ‘꼭 내가 노래를 쓸 겁니다!’라고 고집을 하는 건 아니에요.

8집의 12곡 중에서 제가 생각할 때 후크가 명확한 ‘Shattered’하고 ‘Fox’가 좋았던 기억이 있다. ‘Shattered’는 곡 진행의 변화폭도 크고 몽환적이고… 이 노래 작업한 과정을 들려 달라.
저랑 ‘언더독스’ 팀하고 처음 같이 작업을 한건데요, (스스로 요청한 것이냐고 묻자) 네. 이번에 작업을 했던 팀이 언더독스 랑 ‘스테레오타입스’ 랑 테디 라일리 등등이었는데… 테디 라일리 캠프와 하니까 너무 마이클 잭슨 같은 노래가 나오는 거예요. (웃음) 저 또한 마이클 잭슨의 광팬이었기 때문에… 사실 그 노래를 리패키지로 내려고 했는데 좀 여의치가 않아서 아직 발표를 못한 상태입니다. 언젠가는 나오겠죠? 근데 언더독스가 한국에서 캠프를 갖는다는 얘기를 듣고 저도 욕구가 솟구쳤죠.

어떤 측면에서?
그 팀에 대해서 좋은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너무나 프렌들리하고 즐거운 환경에서 일을 한다고 해서 어떨까 궁금해서 호기심 반, 이렇게 간 거죠. 캠프를 가면 되게 즐거운 게 트랙을 막 들려줘요. 그럼 뭔가 쇼핑하는 기분인거예요. (웃음) 근데 ‘Shattered’를 딱 들었는데 ‘아 이건 꼭 써야겠다!’, 근데 한국 A&R 분들은 좀 어려운 곡이라고 하셨는데, 몽환적인 것을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집했죠.

몽환적이지만 후크가 확실하다.
네. 그게 약간 제가 멜로디를 쓸 때 습관 아닌 습관이기도 한데, 코러스 부분은 좀 확실하게 캐치해야하지 않을까, 그런 게 있어요. 그리고 또 같이 탑 라인을 해준 티파니라는 친구도 저랑 동갑에 잘 통해서 금방 금방 나왔던 노래예요.

앨범을 딸에게 들려준다면 아델에게 선수를 뺏겨서 그렇지 (웃음) 보아의 ‘Hello’도 만만치 않다. 예쁜 곡이다.
(웃음) 감사합니다. 저는 가사를 쓰면서 사실 우리가 너무 바쁘게 살면서 몸 다치는 건 신경 많이 써도 마음 다치는 건 신경을 많이 안 쓰잖아요? 근데 내 마음에게 내가 한번이라도 진정성 있게 안부를 물어본 적이 있나, 내가 누구한테 받은 상처나 이런 거에 대해서 정말 진심어린 사과나 위로를 나 자신에게 해본 적이 있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위로’로 썼습니다.

음악을 들을 때는 감성적이다가 글을 쓸 때는 냉철해야 하는 게 평론가들이다. 그래서 감성과 이성이 동거해서 이중적이다, 심지어는 때로 변태성이 있다는 말을 듣는데 예술가들은 다 그렇지 않나?
네, 다들 조금 변태성이 있죠. (웃음) 맞아요. 저희 직업도 맨 정신으로 하기에는 힘든 부분이 많아요.

백 스테이지에서 보아는 되게 침착할 것 같다. 근데 막상 온 스테이지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춤추고 그럴 것 같다. 한마디로 (상상과 현실의) 차이가 커 보인다. 거기서 어떤 괴리를 느끼지 않나?
저는 사실 백 스테이지 일이 더 잘 맞는 성향 같긴 해요. 만들고, 스튜디오에 있는 시간을 너무 좋아하고… 근데 저는 무대에 올라가기 전 그 긴장감 때문에 ‘나는 정말 무대를 올라갈 때마다 수명이 1년씩 줄 것 같다.’고 항상 얘기해요. (웃음) 어렸을 때는 멋모르고 시작했던 게 이제는 사람들이 ‘보아가 연말에 무대한대’, ‘뭐 어떻게 할까’, ‘당연히 라이브 하겠지?’, ‘보아는 라이브 해야지. 미친 듯 춤추면서 그래도 라이브 해야지.’ 이런 기대감이 있잖아요. (웃음) 항상 그런 기대감이 저에겐 점점 부담이 되고 강박이 되니까 무대가 이제 더 어려워지죠. 하지만 그걸 하면 너무나 뿌듯하고… 그런 면에서 저도 그런 이중적, 변태성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웃음)

패티김 여사도 공연을 앞두고 너무 긴장되고 떨려서 ‘화재가 나서 공연이 취소 됐으면’ 하고 기도하곤 했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사람들 앞에서 무대에 선다는 게 일반인은 하기 어렵다, 사실은.
그렇죠. 근데 저는 공연은 조금 더 안심이 돼요. 왜냐면 만회할 기회가 뒤에 스물 몇 곡이 있으니까. 근데 생방송 무대를 비롯한 TV 프로그램이 더 힘들어요.

근데 <케이팝스타>는 너무 잘했다.
케이팝스타는 앉아서 듣는 입장이니까. 그거랑 또 내가 직접 올라가서 하는 게 다르죠.

그래도 여유 있게 하던데. 그래서 그때 ‘멘토 언니’ 되지 않았나.
하하하 멘토 언니? (프로그램 하는 게) 재밌었어요.

‘Kiss my lips’는 만들고 나서 이게 타이틀이다 하는 생각을 바로 했나
사실 저는 노래를 12곡을 회사에 던지고 ‘타이틀을 고르십시오.’하고 맡겼어요. 대중가수로서 앨범에 객관적일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들으시고 판단을 해주세요!’라고 했는데 압도적으로 ‘Kiss my lips’가 높았다고 하고, 그 다음이 ‘Fox’, ‘Smash’ 그렇게 갔어요. 저는 솔직히 ‘Kiss my lips’를 내면서도 이 노래는 음원으로 많은 사랑을 못 받을 거라고 예상했어요. 왜냐면 너무나 생소한 음악이니까요.

좀 어려울 수도 있다.
뚜렷한 훅도 없고 이게 어디가 코러스인지 구분이 안 되는 노래기 때문에. 근데 한번쯤은 시도를 해야 하는 음악이지 않나 싶었어요.

‘Hurricane venus’때도 그렇고 ‘Only one’에서도 약간 그런 느낌을 받았지만 ‘Kiss my lips’ 이번에도 본인이 빅 스타, 월드스타인 것에 대한 부담이 너무 큰 것 같다. 대중가요는 소통이다. 왜 그냥 편하게 가도 욕먹을 나이도 아니고 욕먹을 위치도 아니고 욕먹을 상황도 아니다. 근데 너무 자기 위치에 따른 강박이 작용하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Hurricane venus’도 좀 쉽게 해도 되는데 내가 적어도 월드스타로 뻗어갔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아 하는 느낌이 들었다. ‘Kiss my lips’ 때도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차라리 ‘Fox’나 ‘Clockwork’, ‘Who are you’로 가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고려할 게 많은 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결국은 음악적 선택입니다.

‘Who are you?’를 선공개로 발매한 이유는?
‘Kiss my lips’가 조금은 어려운 음원이라는 판단 하에 부담 없이 가자. 더 솔직하게 ‘Who are you?’는 이거 100% 음원 잘 될 노래니까 한 방 치고, ‘Kiss my lips’로 무대에서 보여준다는 전략이었어요. 어차피 저희는 앨범을 프로모션 하는 거고 싱글 프로모션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죠. 저희가 음악 방송을 2곡씩 하잖아요. 근데 이 2곡을 방송 3사마다 모두 다른 노래로 했어요. 안타까운 건 우리나라 음악 방송의 시청률이나 관심도가 예전만하지 못하다는 것과 이제 그런 모습을 보여드려도 많은 분들이 찾아서는 보시지 않는다는 점이죠. 점점 음악자체가 인스턴트 화 되는 게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제 안에서는 8집 앨범이 중요한 해에 나온 앨범이기도 하고, 트렌드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15년 이상 음악을 했던 사람으로서 이런 정규 풀 앨범을 꼭 내고 싶다, 뭐 앞으로 활동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런 욕심이 좀 있었어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Kiss my lips’가 첫 싱글이었을 때 ‘보아는 여전히 앨범 아티스트다!’ 하는 생각은 든다. 그 정도의 무게감, 존재감은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좀 자주 하려고요 이제는. 아까 말씀하신 ‘Hurricane venus’도 5년 만에 한국에서 다시 내는 거였기 때문에 저도 그렇고 회사도 그렇고 너무 부담이 많았던 앨범이긴 했어요. 예를 들어 3D 티비 때문에 뮤직비디오를 3D로 찍어야 하고 뭔가 시도가 굉장히 많았던 앨범이었어요. 그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나오긴 했는데, 성과를 떠나서 그 노래는 정말 지금 공연할 때 써도 너무 좋은 노래예요. 사실 ‘Only one’은 더 캐주얼하게 냈던 노래긴 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더 대중적으로 들어주셨던 것 같고. 근데 저는 너무 공백기가 길잖아요, 다른 가수들에 비해서. 그 기간을 좀 줄여가면서 나도 편하게 음악을 낼 수 있는 싱글 체제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이제 많이 들더라구요.

‘Only one’ 할 때 마이크를 끄고 안무만 한 적이 있다. 내가 알던 보아라면 어떻게든 노래와 춤을 다 해내리라 했을 것 같은데 뭔가 하나를 포기하고 춤, 퍼포먼스 측면을 극대화하는 것을 봤을 때 다 잘해야겠다는 강박관념을 좀 벗어난 게 아닌가 생각했다. 음악적으로도 사실 ‘Hurricane venus’ 이전은 뭔가 컨셉트를 연기하는 보아가 노래를 부르는 거라면 ‘Only one’ 부터는 진짜 인간 보아가 자기 노래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캐주얼하게 받아들이는 게 아닌가 하는데, 그 중간 기점에 뭔가 터닝 포인트가 있었던 것 아닌가. 6, 7집 사이의 간극이 있었던 것 같다.
음, 뭐가 바뀌었을까요. 나이가 들어서 유해졌나? (웃음)

그때 6, 7집 사이가 일본 활동에서 국내활동으로 무게중심이 좀 이동할 때 아니었나.
네, <케이팝스타>를 2011년에 시작해서…

그런 것도 큰 변화다. 사실 2007-8년까지 보아는 거의 일본 가수이지 않나. 2010년까지는 일본에 임대한(?) 상황이었으니까. 일본에서는 많이들 보아를 일본 사람이라고 여긴다고 들었다.
그게 초반에는 한국 출신이라는 얘기도 했었고 신문에도 ‘한국 출신의 가수 보아’ 이렇게 나는데 사람들에게는 제가 그냥 어디 출신이건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냥 ‘보아는 일본에서 일본어로 노래하는 가수’라고만 생각을 하는 것 같더라구요.

일본어 싱글이나 앨범 낼 때하고 한국어로 낼 때 어느 것이 더 편한가.
마음이요, 아님 노래 할 때요? 사실 2000년대 후반까지는 일어가 조금 더 편하다고 느꼈어요. 왜냐면 우리말로 부를 일이 5년 정도가 없었으니까. 근데 또 이쪽에서 더 활동을 많이 하고 일을 하니까 또 한국어가 더 편하고 이제는 역으로 가끔 일본 가면 일본어가 좀 막힐 때도 있어요.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음악적으로 크게 얻은 소득은?
일단은 제이팝 나름의 캐치한 멜로디 감성? 제 8집을 들으시면 굉장히 제이팝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맞다. 약간 뽕끼가 전반적으로 흐른다 (웃음)
근데 그게 케이팝 뽕끼는 아니잖아요. (웃음) 꼭 코러스 부분에서는 알기 쉬운 멜로디여야 하고, 그런 게 무의식중에 좀 있나 봐요 제가. 근데 어쨌든 그런 노래들이 많이 기억에 남고 좋잖아요. 그런 게 도움이 많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또 사실 초반에는 일본에서 음악을 더 많이 냈고, 제 목소리 컬러를 믹스 과정이라든지 좀 더 명확하게 잡아준 게 일본 쪽이어서 그 영향이 우리에도 많이 도입이 됐었죠. 엔지니어링이라든지.

‘아틀란티스 소녀’ 들을 때 놀란 건 유난히 숨소리가 많이 들어갔다. 숨소리는 위험해서 보통은 지우려고 한다. 괜찮았기 때문에 놔둔 것 아닐까.
우리나라에서 90년대만 해도 가성을 쓰는 가수는 노래를 못하는 사람처럼 많이 인식이 됐잖아요? 그래서 한국에서는 꼭 진성으로 어디까지 올라가냐 이게 정말 중요했던 시기였는데 저는 가성을 쓰는 게 더 편했던 목소리였어요. 왜냐면 어렸을 때 소프라노 이런 걸 조금 했거든요. 진성이 너무 어려웠는데 일본에서 제 가성의 장점을 찾아준 거죠. 코러스도 녹음해보고 발라드나 이런 것도 하면서. 저는 진성, 가성을 섞는 게 너무 편했어요.

한국에서 강타 오빠가 2집 때 ‘늘’이라는 노래를 줬는데, 녹음을 하러 갔다가 키가 너무 높아서 “오빠 이거 키가 너무 높아서 내렸으면 좋겠어요!” 했더니 “야, 시간이 없어서 스트링을 녹음 해버렸어 못 내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럼 오빠 제가 이거 가성을 좀 섞어서 불러 봐도 될까요?” 하고 불렀더니 그 목소리를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수만 선생님도 ‘아, 보아한테 이런 목소리가 있었어?’라고 하면서 놀라셨구요. 다른 분들도 가성을 쓰는 게 사실은 노래를 못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주셨던 계기였죠. 그래서 곡을 쓴 (황)성제 오빠도 저의 그런 가성이나 숨소리를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겠지만 그럼에도 보컬 측면에서 8집 가운데 이 노래는 잘한 것 같다 하는 곡이 있다면 어떤 노래인가.
어려운 질문인데요? 저는 ‘Shattered’도 굉장히 어려웠구요, 그 톤을 잡는 게 되게 힘들었어요. 그게 진짜 진, 가성을 섞어야 나올 수 있는 목소리라 그 보컬을 잡는 게 어려웠어요. 또 힘들었던 게 노래를 만들면서 가이드를 만들잖아요? 그때 목소리가 훨씬 좋아요. 소리가 너무 열려있고 아무런 부담이 없으니까.

제가 ‘Love & hate’ 노래 녹음을 세 번 다시 했어요. 그 가이드 느낌이 안 살아서. 그래서 ‘우리 이거 그냥 가이드 갖다 쓰면 안 될까?’ (웃음) 어차피 콘덴서 마이크에 했으니까 갖다 쓰자, 가사 몇 개만 고치자’ 그랬어요. 그 톤이 안 잡히니까. 열심히 부르긴 했는데… 다 열심히 불러놨는데 어떡하죠. 너무 어렵다.

그런 면에서 ‘Kiss my lips’가 잘한 노래라고 본다. 그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게 보아다. (웃음)
제가 ‘Kiss my lips’ 믹스를 23번 했어요. 제 앨범 때문에 저희 엔지니어 기사님들이랑 녹음실이 마비가 됐었거든요. 데드라인은 정해져있지, 믹스는 밀려있지, 통과는 안 나지, 엄청 힘들어 하셨어요. 근데 스테레오타입스만의 믹스 방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친구들이 트랙을 줬을 때의 그 느낌이 안 사는 거예요. 정말 제 목소리 톤도 그렇지만 기타 루프나 이런 소리가 왜 안살까. 그래서 정말 고집도 많이 부리고 수정도 많이 보고 마스터를 두 번 했거든요. 왔다가 탐(드럼 파트) 소리 하나 때문에 ‘다시 해주세요~’ 하기도 하고.

일반인으로 따지면 보아는 너무 젊다. 그런데 사람들은 완전 노장 취급을 한다. 그것을 빨리 벗어나야 할 것 같다.
저는 정말 젊게 살고 나이를 잊고 사는데 내 나이를 주변이 더 잘 아는 느낌? 나는 정작 잊고 사는데 그런 느낌이 들어요. 자신이 나이 먹는 건 생각 안하고 벌써 보아 걔가 그렇게 됐어? (웃음)

또 이것도 묻고 싶다. ‘Kiss my lips’, ‘Who are you?’, ‘Shattered’, ‘Fox’란 노래도 그렇고 ‘Double jack’, ‘Love & hate’, ‘Green light’도 그런데 대체로 노래가 퍼스널(personal)한 느낌이 든다. 그 정도 되면 누구에게 희망을 줘야지 하는 공적인 주제가 있을 법한데 사적인 접근이 대부분이다.
저는 확실히 여자 감성이라 그런 류의 노래가 많은 것 같긴 해요. 그리고 여 전사 같은 이미지를 하고 싶지 않아서. (웃음). 항상 SM에서 하던 ‘센’ 가사들 있잖아요. 의미를 잘 모르는. 그 가사들을 별로 안 좋아했어요. 그냥 제 나이 여자들이 느끼는 것, 그런 거를 쓰는 게 가장 솔직하고 나다운 게 아닐까 싶었어요. 자켓도 보면 굉장히 편안해요. 그냥 여자. 뭐 화장 좀 진하게 하고 약하게 한 거? 그거 두 개밖에 다른 게 없죠.

‘Double jack’의 경우 그래요. < 비긴 어게인 >의 그 ‘더블 잭’있잖아요? 저도 더블 잭이 있긴 했는데 굳이 쓸 일이 없었죠. 근데 영화를 보면서 저렇게도 쓸 수 있구나 싶었어요. 저희는 이어폰으로 모니터링을 해야 하는데 동시에 못할 때는 그거 꽂아서 같이 듣고 빨리 빨리 진행을 해야 하니까 그렇게만 썼지 그렇게 로맨틱하게 쓸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웃음) 그걸 보면서 ‘더블 잭이 Y모양인데 사람의 심장이 이어진다고 생각이 되면 어떨까’, 공유한다는 느낌이 있어서 그렇게 썼어요. 그렇다고 가사가 100% 가상은 아니죠. 그럴 수가 없죠.

사적인 질문인데, 보아씨 부모님은 활동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이시는지, 자랑스러운지 걱정스러운지 궁금하다. 일본에 오래 활동하면서 제대로 딸을 곁에 둬본 적이 적으시니까, 가장 이쁠 때.
그래서 저희 엄마가 절대 독립 못하게 하세요. 다 같이 살거든요. 부모님은 굉장히 개방적인 분이세요. 그래서 한 번도 뭐 해라 하지마라 강요를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오빠들도 바이올린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피아노가 하고 싶다고 해서 피아노로 대학을 갔고 작은 오빠는 춤이 좋다, 만화 그리는 게 좋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자기 영상을 하고 싶다고 해서 스스로 공부해서 가고. 그런데도 (저의) 독립생활을 허용하지 않으시죠. 연예활동은 좋아하시고 정신건강 상태가 좋은 거에 가장 안심하세요. 사실 연예계 쪽에 오래 있으면 생각하는 거나 행동하는 거나 좀 일반적이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근데 널 보고 있으면 되게 평범한 30살 여자 같다는 얘기를 많이 하시죠.

독립하는 걸 싫어하신다면 시집가는 것도 그렇게 달가워하시진 않겠다.
그거랑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웃음) 결혼하는 건 괜찮은데 혼자 사는 건 안 돼, 그런 거죠. 혼자 살면 제가 너무 놀러 다닐까 봐 안 된다는 걸까요. (웃음)

2003년 인터뷰 마치고 ‘보아 저 사람은 춤추고 노래하기 전에 문학소녀여야 했다고 그랬던가, 책 읽고 조용히 있는 게 어울릴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 아까 백 스테이지에 더 어울린다는 얘기를 했을 때 그때 생각이 들더라. 공부를 하는 게 더 나을 거라는…
그러게요, 원래 꿈이 의사였는데. 의사할 껄 그랬나. (웃음) 2003년 그 무렵에는 책도 많이 읽었어요. 요즘에는… 이게 사람이 점점 나태해진다니까요. 점점 책을 안 보게 되고.

보아의 베스트 곡은? 본인한테는 안 맞아도 대중적으로 어필하기 위해서 또는 시류에 맞추기 위해서 한 곡이 아니라 진짜 내 취향, 내 감성, 내 스타일을 반영한 곡.
그럼 저는 8집의 경우 ‘Who are you?’랑 ‘Fox’인 것 같아요. 저는 좀 밝으면서도 감성적인 노래를 좋아하거든요. 사실 ‘Only one’이나 이런 노래를 참 좋아해요.

‘Only one’은 좋아하면서 부른 것 같았다.
네, 사실 저는 어렸을 때부터도 미디움 템포 알앤비 노래를 너무 많이 들어왔고 좋아했어요.

그럼 결정적인 아티스트는 누구인가? 오늘날 보아를 음악하게 만든 사람들. 테디 라일리는 들어갈 것이고.
테디 라일리도 있고, 사실 그런 거 있잖아요. 어렸을 때 보면 남들이 안 듣는 거 찾아듣고 싶고 그렇잖아요. 갑자기 도넬 존스 막 이런 거. ‘U know what’s up’ 이런 노래. 되게 감미로운데 사람들 잘 모르고. 지금은 많이 알지만, 어셔의 댄스 노래도 좋아하지만 슬로우 잼 감성의 노래에 끌렸죠. 이번 저스틴 비버 앨범이 너무 맘에 드는데 거기에 ‘Love yourself’라는 노래가 특히 좋았어요. 저스틴 비버의 EDM도 좋고 다 좋은데 그런 감성적인 노래를 개인적으로 좋아해요. 비트가 강한 노래보다는.

한동안 SM의 간판이었고 톱스타였지만 지금은 모든 상황이 말해주듯이 주력 상품이라고 볼 수는 없다. 팬들로부터는 기획사로부터 홀대 받는 것 아니냐는 불평 아닌 불평이 있기도 했다. 본인으로서도 이제 내가 회사의 중심이 아니다, 후배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데,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아직 나이로 볼 때 힘들지 않았나.
주력 상품은 항상 바뀌는 것 같아요. 주력 상품이라는 건 항상 바뀌지만 그 회사의 가장 핵심 상품이라고 해야 하나요, 진짜 주(主)가 되는 상품. 왜 농심도 ‘너구리’ 말고도 많은데 너구리는 항상 오래도록 죽지 않는 사랑을 받잖아요. 새로운 게 나오면 또 그게 주력 상품이 될 수도 있는 거고. 그냥 물 흘러가듯 항상 그 자리에 있는, 하지만 우리가 언제든 먹고 싶을 때 찾아 먹을 수 있는, 그런 것 같아요. 요즘에 라면의 신상들이 널려 있지만 너구리는 스테디셀러잖아요. 그래서 사실 저는 그런 거에 대한 부담은 없어요. 왜냐. “야 SM=보아잖아”, 근데 SM=누구잖아, SM=뭐잖아 이런 얘기는 안하잖아요. 그거에 대한 자부심?

앞으로 내가 SM이 아니라 대한민국 또는 아시아 가수로서 앞으로 음악적이든 뭐든 내가 보여줘야 할 것은 뭐라고 생각하나.
전 정말 오래오래 이 일을 하고 싶거든요. 많은 분들이 그러세요. 보아는 약간 국가대표 운동선수 같은 느낌이 있다. 그리고 가장 많이 듣는 얘기가 마돈나처럼 60대에 육박해도 무대에 서줬으면 좋겠다는 말인데, 근데 요즘은 여자 댄스가수의 수명이 점점 길어지는 것 같아서 다행인 것 같아요.

또 저희 회사에서 ‘스테이션(Station)’이라는 시스템을 도입을 했는데, 노래를 내는 거에 있어서 저조차도 부담감이 좀 많이 없어진 것 같아요. 예전에는 항상 그래도 정규를 해야지 그런 게 있었는데 그렇게 되다보니 한 곡 한 곡 내는 거에 너무 부담이 많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좀 더 캐주얼하게 내가 어떨 때는 정말 밝은 것도 내보고 어떨 때는 발라드도 내보고 뭔가 저조차도 부담 없이 많은 공을 던질 수 있는, 그런 활동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죽어도 10집은 꼭 채우기 바란다.
그럼요. 해야죠. 근데 이제 다시 그런 시대가 오는 것 같아요. 싱글을 내서 싱글을 모아서 신곡을 채워서 정규를 내는, 약간 옛날 일본식의 시스템이 되는 것 같아요. 미국은 싱글을 냈다가 앨범을 내고 이걸 1, 2년에 걸쳐서 리컷해가면서 프로모션을 하는데 사실 저는 그게 하고 싶었거든요 이번 앨범에서. 근데 그게 안 되더라구요.

장기적으로 많은 공을 던져보고 싶다고 했는데 단기적으로는 어떤 음악을 하겠다는 계획이 있는지. 앨범이 나온 지 얼마 안됐지만 ‘스테이션’ 잡혀있는 게 있나.
지금 잡혀 있는게 있긴 한데 아직 진행이 안 되어서요. 확실하게 뭘 할 거라는 말씀은 못 드리는데 확실하게 제 노래는 아니에요. (웃음) 왜냐면 저는 작년에 과다출혈을 했거든요. 너무 많이 썼고, 한번 딱 하면 정말 몇 년은 ‘로직(작곡 프로그램)’을 열지도 않아요. 일단 다른 사람들의 감성이나 멜로디나 그런 음악을 통해서 충격도 많이 받고 싶고, 노래하면서 그런 음악들을 꾸미는 재미가 또 있거든요.

2003년부터 해온 공연이 현재 98회를 했고 100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처음부터 밴드라이브를 하고 있는데, 밴드 라이브를 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조영남씨가 감탄하기도 했다. 밴드 라이브를 고집하는 이유, 앞으로 어떤 퍼포먼스나 공연을 만들고 싶은지 말해 달라
제가 태어나서 처음 가졌던 공연도 밴드 라이브였고, 밴드 라이브가 없는 공연 자체를 상상해본 적이 없어요. 다른 아티스트들은 MR 공연을 하기도 하는데 저는 밴드 공연만의 드라이브감이 너무 좋고, 그게 있어야 제 에너지가 2시간 반을 채울 수 있어서 앞으로도 밴드는 계속 고집할 것 같아요. 100회 공연이 어디서 이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예술의 전당에서 해보고 싶어요. 얼마 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했는데 아마 대관을 안 해주시지 않을까요. (웃음) 댄스가수 쪽은 좀 더 박하다고 들었어요. 사실 세종문화회관에서 할 때도 폭죽이나 이런 게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도 너무 뿌듯할 것 같아요.

8집을 신보라고 간주하고 ‘이 앨범은 이렇게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말해야 한다면.
8집은 보아라는 여자가 담겨있는 것 같아요. 멋있는 보아, 귀여운 보아 뭐 여러분들이 상상하시는 보아가 있겠지만 그냥 제 나이에 맞는 여자 보아가 표현하는 앨범이에요. 사실 제 앨범을 저도 아직 CD로 못 들었어요. (‘무서워서 못 듣는 거죠’ 라고 했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확실히 mp3랑 CDP는 음질이 다르니까…이제는 듣고 싶네요.

보아는 아티스트로서 어떤 사람인가.
보아라는 사람은 일을 참 좋아하고 항상 재밌게 살고 싶은 여자, 사람인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떤 것 하나를 하더라도 제 스스로가 그거에 대한 흥미를 못 느끼면 100% 몰입을 할 수 없는? 그래서 항상 내가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재미를 찾아가는.

내 춤, 현재 추고 있는 춤은 많은 변화가 있어왔지만 그 춤은 내 노력의 결과인가, 아니면 천부적인 건가.
저는 노력인 것 같아요. 왜냐면 저는 정말 라이브를 못하던 가수였거든요. 일본에서 2001년에 데뷔를 하고 어떤 공연에서 라이브를 보고 에이벡스(SM과 계약한 일본 소프트회사)에 어떤 분이 ‘쟤는 단독 콘서트 하려면 10년은 걸릴 것’이라고 했대요. 너무 못해서. 그래서 춤 추면서 노래 하는 거를 정말 많이 연구하고 연습했어요. 그래서 이만큼 할 수 있게 됐죠.

‘ID; Peace B’는 잘했지 않나?
그땐 립싱크 세대잖아요. 진짜 노래를 하면서 춤을 소화 하는 건 정말 못했어요. 그래서 저는 춤도 그렇고 노래도 그렇고 노력의 결과라고 봅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이주노씨가 인터뷰에서 보아가 가장 춤을 잘 추는데 그 이유는 춤에 감정을 집어넣기 때문이라고 했던 게 기억난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해석하는 거에 대한 차이가 아닐까요? 저는 음악을 들으면서 들리는 소리가 많으니까 거기에 맞춰 춤을 좀 느낀다고 해야 하나? 뒤에 해주시는 분들도 다 잘하시는 분들이고 한데 그냥 제가 센터에 있어서 저만 보인다고 하신 것 같아요. (웃음)


인터뷰: 임진모, 황선업, 이수호, 정민재
인터뷰 정리: 임진모
사진 제공: SM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