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7 김홍탁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련한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은 한국의 전설적인 록 밴드 ‘키보이스’와 ‘히식스’에서 활동한 기타리스트 겸 싱어송라이터 김홍탁이다.

멋스럽게 샌 백발에 딱 붙는 청바지. 선글라스 속 눈동자는 호롱불처럼 빛났다. 차분한 말투에 여유가 묻어 나왔지만, 스타와 뮤지션을 단호하게 구분하기도 했다. 로커 특유의 애티튜드와 예술가의 자의식이 충만한 그는 ‘평소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라는 성격처럼 과거의 반추를 뒤로 한 채 미래의 목표에 골몰해 있었다.

물론 한국 대중음악사의 발자취인 그의 경력을 생략하기는 어렵다. 최고의 인기 록 밴드 ‘키보이스’로 데뷔했고 ‘히파이브’와 ‘히식스’를 통해 독자적 음악영지를 건설했다. 전성기 무렵인 1972년부터 14년간 이어진 미국 체류기는 오인된 것처럼 음악적 공백기가 아닌 새로운 도전의 시기였다. 한국으로 돌아와 1992년에는 서울재즈아카데미를 설립, 18년간 원장으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는 “아직 과제가 많이 남았다”고 했다.

중학생 시절 친구 집 위층에 살던 미군 병사에게 기타를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의사소통이 우리말처럼 원활하지는 않으셨을 텐데, 어떤 식으로 익혀나갔는지 궁금합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하던 시점에 기타에 빠진 게 큰 행운이었다. 당시 ‘목포의 눈물’,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처럼 부드러운 곡들밖에 배울 수 없는 상황에서 미군 병사를 만나 현지 스타일을 체득할 수 있었고 오래 배우진 못했지만 커다란 수확이 되었다. 의사소통은 말이 안 통하다 보니 바디 랭기지를 주로 활용했다.

1964년 키보이스 데뷔 때 얘기를 들려주세요.
우리가 다 함께 모인 건 1963년으로 기억하고, 1964년에 첫 번째 음반이 나왔다. 우리의 음반이 비틀스보다 먼저 나왔던 거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아니었다. (비틀스의 데뷔 앨범 < Please Please Me >는 1963년 3월 22일에 나왔다) 당시 키 보이스의 주요 레퍼토리는 비틀스의 곡들과 김영광이 작곡한 ‘그녀 입술은 너무나 달콤해’ 였다. (원년 멤버는 김홍탁 차중락 차도균 윤항기 옥성빈이었다)

키보이스 1집의 대표곡은 ‘정든 배는 떠난다’였죠.
그 당시엔 멤버들의 자작곡이 아닌 기성 작곡가들의 곡을 받아 부르는 시절이었다. 김영광 선생이 작곡한 ‘정든 배는 떠난다’는 애초 트로트 선율이 완연해 우리가 추구한 록 풍으로 편곡했다. 비틀스의 영향을 받아 샤우팅 창법을 도입했고(첫 소절의 ‘달그림자에’를 들어보라) 6도, 7도 코드를 첨가해 화성학적으로 더욱 풍성한 편곡을 완성했다. 그래도 ‘정든 배는 떠난다’가 뜬 데는 복합적인 운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키보이스 시절 차중락의 죽음은 안타까웠던 기억이겠어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매일같이 함께 생활했던 차중락은 순정파 로맨티스트였다. 그렇기에 그의 사망과 관련 가짜 뉴스가 많아서 마음이 아팠다.

미8군 무대에서의 키보이스 인기는 어느 정도였는지요.
당시 미8군 쇼에서 ‘컨템포러리 뮤직’의 최고봉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달랑 다섯 명이 만들어내는 사운드가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비틀스로부터 점화한 록 밴드의 전성시대와 키보이스의 등장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키보이스의 음악에서 김홍탁이 갖는 의미는요.
우선 모든 게 굉장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하늘에 감사한 마음이다. 처음 데뷔한 그룹에서 좋은 처우를 받았고, 무엇보다 음악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자체가 큰 행복이었다. 송창식, 윤형주의 무대로 잘 알려진 쎄시봉에서 가장 먼저 공연한 것도 우리며 방송국, 지방공연과 극장 쇼를 누비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신중현과 애드포(Add4)는 키보이스와 달랐다. 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요.
키보이스는 명백히 비틀스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 때문에 차중락이라는 뛰어난 보컬이 있었음에도 하모니의 비중을 매우 높게 가져갔다. 반면 신중현의 음악은 롤링 스톤스처럼 거친 기타 사운드가 주를 이뤘다. 신중현은 존경하는 선배님이고, 음악적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기반을 닦은 최고의 뮤지션이라고 생각한다.

키보이스를 떠나 히파이브를 결성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당시에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에 꽂힌 상태였다. 헨드릭스의 우드스톡 공연을 보고 잠을 못 이룰 정도로 흥분감에 사로잡혔다. 그에 영향을 받아 사이키델릭, 하드록을 향한 음악적 야망을 갖고 새로운 도전을 했을 뿐이지 키보이스 멤버와의 어떠한 불화로 떠난 것은 아니다.

키보이스와 히파이브와의 관계는 어떠했나요. (히파이브는 최헌이 가세하면서 히식스로 바뀐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서울 시민회관에서 ‘플레이보이 컵 쟁탈’이라는 보컬 그룹 경연대회가 열렸다. 1969년 5월 17일부터 20일까지 열린 제1회 대회에서는 키보이스가 대상을 받았고, 2회와 3회 연속으로 히식스가 수상했다. 대중성에 초점을 둔 심사위원은 키보이스에 좋은 점수를 줄었지만 히파이브와 히식스의 음악적 시도를 높게 평가한 심사위원도 있었다.

히파이브 다음인 히식스에선 더욱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펼쳐 보였다. 히식스와 키보이스의 본질적인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히식스 활동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점은 창의성을 맘껏 펼쳐 보였다는 것이다. 당시의 전형적인 미국 음악에서 탈피해 사이키델릭 록 그룹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In-a-gadda-da-vida’를 재해석해서 연주하는 등 틀에 구속되지 않았다. 한번은 명동 오비스캐빈에서 원래 약 17분 정도인 이 곡을 45분으로 늘려 잼(즉흥 변주) 형식으로 연주했다. 기타 솔로만 15분 정도 했던 것 같다.

서울 시민회관에서 산타나의 ‘Black magic woman’을 연주하다 중간에 돌연 6명의 멤버가 동시에 드럼 연주를 하는 퍼포먼스도 선보이기도 했다. 사이키델릭과 젊음의 코드가 일치했던 때라 관객 반응도 좋았다. 키보이스 시절에 비해 자작곡 비중을 높인 점도 구별점으로 꼽고 싶다.

히파이브와 히식스 시절, ‘초원’, ‘초원의 빛’, ‘초원의 사랑’으로 이어지는 유명한 ‘초원 시리즈’는 어떻게 기획하시게 된 건가요.
아시다시피 당시에는 노래의 소재가 조금은 획일화되어 있었다. 자연의 소재를 활용해 신선한 느낌을 표현하고 싶어 ‘초원’이란 단어를 쓰게 되었다. 그게 대박이 나서 서울 곳곳에 ‘초원 다방’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초원 세탁소’가 생겨날 정도였다. 사운드 적으로는 트로트 일변도에서 벗어나 히식스만의 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한 작품이다.

이어서 김홍탁의 부평 애스컴 회고담이 이어졌다. 그 이야기를 통해 속된 말로 ‘그가 얼마나 잘나갔는지’를 느꼈다. 인천 출신의 그는 애스컴을 ‘마음의 고향’이라고 표현했다. 키보이스의 일원으로 애스컴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던 그는 순간 과거 여행을 다녀온 듯 우수에 젖었다.

미8군 무대는 당대의 K-뮤지션들에게 프로페셔널리즘을 제공해주었고 숙련을 통해 쌓은 음악적 자양분은 한국에 소울, 펑크, 재즈 등 장르 음악의 뿌리가 되었다. 조용필과 ‘사랑과 평화’ 또한 미8군 출신임을 아시는지. 김홍탁의 증언은 ‘과거 없이 현재 없다’는 간명한 진리를 재확인해줬다.

부평애스컴에 대한 기억을 들려주세요.
애스컴은 미군 총괄 기지 중에서도 가장 크고, 뭐랄까 부유한 부대 중 하나였다. 당시 가장 많은 공연을 펼쳤던 곳이라 마음의 고향 같다. 고향이 인천이다 보니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도 있고. 비틀스의 고향 리버풀처럼 인천 또한 항구도시, 개화 도시이다 보니 당시 외국 문물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었고 그래서인지 인천 출신 뮤지션 혹은 밴드가 유독 많다.

K팝과 연결지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당연하다. 애스컴에서 활동했던 많은 뮤지션들의 음악과 활동이 작금의 K팝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허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극히 한정된 인물들만 기억할 뿐이다. K팝 뮤지션 명예의 전당을 만들고 싶다. 이를 통해서 세월 속에 잊힌 이들과 그들의 음악을 반추하고자 한다.

김홍탁 음악 인생에 있어서 가장 자랑스러운 곡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가장 인지도가 높은 최헌이 부른 히식스의 ‘당신은 몰라’겠지만 음악적으로 자부심을 가지는 곡은 1970년에 발표한 히식스 1집 < HE6 Vol. 1 >의 수록곡 ‘말하라 사랑이 어떻게 왔는가’이다.

1972년이면 전성기였는데요. 그런데도 홀연히 미국으로 떠난 이유는 무엇인가요.
한번 결심을 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행동한다. 엉뚱한 성격도 한몫했을 것이다. 대중음악의 본토 격인 미국에 부딪혀 보고픈 마음이 컸다. 떠난 뒤 약 14년 6개월을 미국에서 보냈다. 어떻게 살아도 아쉬운 점, 좋았던 점은 공존할 수밖에 없기에 후회는 없다.

미국으로 떠난 후 음악관의 변화가 있으셨나요.
세상과 나 자신이 변함에 따라 추구하는 음악 또한 자연스레 변화해왔다. 미국 생활 초기에 일류 호텔에서 스탠더드 재즈를 연주했다. 본성이 로커이기에 시행착오가 있었으나 점차 적응해나갔다. 후에 퓨전 재즈에도 관심을 두게 되었고 박인수가 부른 1980년 작 ‘너처럼 예쁠수야’의 펑키(Funky)한 사운드가 그 결과물 중 하나다. 미래 대중음악의 중심엔 재즈가 있다고 보았고 실용 음악학원이라는 말 대신 서울재즈아카데미란 이름을 사용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김홍탁은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18년간 원장으로 재직했다)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원장으로 계시면서 얻은 보람은 무엇인가요.
축구 경기서 스타플레이어만큼이나 경기 전반을 조율하는 미드필더가 중요한 것처럼 곡 제작의 전체적인 과정을 조율하는 뮤지션들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서울재즈아카데미가 이러한 뮤지션들의 산실 역할을 해서 기쁘다. 현재 BTS의 곡 녹음에 참여하는 뮤지션, 테크니션 중 아카데미 출신이 더러 있는 거로 안다.

현재 한국의 대중음악계에서 록은 힙합이나 EDM에 밀려 침체된 상태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일생을 록에 헌신한 사람으로서 물론 안타깝다. 역시나 좋은 곡이 발표되어야 록이 다시 살 수 있다고 본다. 신중현 선배님이 ‘빗속의 여인’을 비롯한 많은 명곡으로 대중에게 다가간 것처럼 말이다. 결국 우리는 대중음악 뮤지션이기 때문에 대중이 사랑하는 음악, 좋은 곡을 만들어내야 한다.

선생님께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뮤지션 혹은 밴드를 다섯 팀만 소개해주세요.
‘Rock around the clock’으로 로큰롤의 시작을 알렸던 빌 헤일리 & 히스 코메츠(Bill Haley And His Comets)와 비틀스(Beatles), 앞서 언급한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산타나(Santana, 그의 휴대폰 벨 소리는 ‘Samba pa ti’였다.) 그리고 조금 의외로 들리겠지만 시카고(Chicago). 재즈 록 퓨전 밴드 아닌가.

김홍탁 선생님의 향후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우선 유튜브를 꾸준히 할 계획이다. 키보이스를 계승하는 해피 밴드와 히식스의 음악을 연주하는 567Nll과 함께 유튜브를 통한 지속적인 음악 활동을 계획 중이다. 좀 더 크게 보자면 아까도 말했지만, 미국 로큰롤 명예의 전당처럼 < K팝 뮤지션 명예의 전당 >을 설립하고 싶다. 한국 대중음악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양평, 인천, 서울, 샌프란시스코의 네 도시에서 < K All-Star Group >이란 이름으로 자선 공연을 펼치고도 싶다. 아직 과제가 많이 남았다.

인터뷰 : 임진모, 김성욱, 염동교, 장준환, 정다열
사진 : 정다열
정리 : 임진모, 염동교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팀

Categories
POP Single Single

아바(ABBA) ‘I still have faith in you’ (2021)

평가: 3.5/5

솔직히 아바의 신곡과 새 앨범 심지어 ‘아바(Abba)타’ 공연까지 현실화되지 않길 바랐다. 프리다와 아그네사 두 여인의 고음 하모니 그리고 두 남자의 곡 주조 역량이 고령에 흔들릴지 모른다는 조마조마함 때문이 아니라 과거에 남겨놓은 걸작들이 (지금도 음미하기에) 충분히 많기 때문이다. 나이 들었어도 다시 음악 하는 쾌감은 숭고하며,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바를 편애해온 사람은 누구라도 긴장, 불안, 초조라는 자연반사적 속박 속에 듣지 않았을까.

뭐 결과물은 실망스럽지 않다. 특히 클라이맥스 코러스는 과거처럼 경이의 입체감은 아니더라도 지금 어떤 음악보다 고퀄! 중박은 된다. 자이언트 타력은 아니더라도 파워 그리고 5분20초의 길이도 괜찮다. 다만 곡 흡수력은 중간. 그것도 前 아닌 現 아바임을 감안하면 70점 이상 줄 수 있다. 풀 앨범에 대한 기대감을 준 것만으로도 승리. 반가움과 상호귀속 가능성까지 모든 게 무난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기분은) 안돌아왔으면 하는 쪽에 기울어있다. 모르겠다.

Categories
Interview

이두헌 인터뷰

1980년대 음악을 기억할 때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밴드 ‘다섯 손가락’이다. 그 시절 음악 젊음들에게 그들이 남긴 노래 ‘새벽기차’,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그리고 ‘풍선’은 1순위 애창 레퍼토리들로 남아있다. 특히 ‘풍선’은 2006년 아이돌 동방신기가 리메이크하면서 한참 뒤 세대 청춘들도 다섯 손가락이란 존재를 알게 됐다.

이두헌(기타)은 이 팀의 사실상 음악감독이나 같았던 존재였다. ‘새벽기차’와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을 작사 작곡했고 ‘풍선’의 노랫말도 빚어냈다. 그는 전성기 시절 투톱이었던 임형순(보컬)은 물론 원년 멤버 최태완(건반)과 투합하면서 곧 다섯손가락의 컴백 앨범이 나올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베이스는 송골매와 위대한 탄생 출신의 이태윤, 드럼은 베테랑 장혁이 맡는다고 한다. 다섯 손가락은 현재 신곡 녹음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했다. 이두헌은 자신이 만든 카페이자 작은 음악회장인 경기 수지 소재의 ‘책가옥’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다섯손가락의 궤적 뿐 아니라 음악 팬이라면 귀 담아 들어야 할 의미 있는 이야기를 전했다.

다섯 손가락이 완전체로 돌아온다니 기쁩니다. 임형순과 함께 선 마지막 무대가 언제지요.
2004년에 배철수 씨가 진행한 < 7080콘서트 > 2회에 출연했어요. 그때 저희가 다시 만나서 연주를 했죠.

임형순과 이두헌 두 분의 음악적 비전 차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하자’는 대의명분이 있었나보죠.
명분이라기보다는 나이가 드니까 너그러워진 것 같아요. 제가 둥글어졌다고 봐야죠. 굳이 뭐 이제 와서 ‘내 건 내 거고 네 건 네 거고’ 이럴 필요가 뭐 있나요.

이력을 많이 남기신 분들이라서 돌아온 다섯 손가락은 과연 어떤 스타일의 음악을 들려줄지 궁금합니다.
이미 써놓은 곡도 많고 지금도 곡을 계속 쓰고 있어요. 4월 중순 즈음에 드러머 장혁 씨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시작해요. 저는 사실 머릿속에 생각이 많죠. 블루스도 하고 싶고, 재즈도 하고 싶고. 그렇지만 명색이 공식적 활동인데 대중적 지향을 갖지 않을 수는 없어요. 임형순 씨는 아직도 다마키 코지같이 옛날 다섯 손가락 스타일의 음악을 좋아하는데, 저는 미국 유학 다녀오면서 좀 많이 바뀌었죠. 지금은 다룰 수 있는 음악이 많아져서 사실은 하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이두헌과 합을 이룰 요즘 스타일이라면 어떤 것일까요.
저는 재즈가 가장 가까운 것 같아요. 재즈 중에서도 아주 스탠더드 하거나 비밥 스타일은 아니고 컨템포러리한 스타일이요. 네오 비밥 같은 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 인스트루멘탈 같은 스타일에 보컬도 같이 생각을 하고 있어요. 요즘 키스 자렛이나 브래드 멜다우 같은 친구들도 ECM 스타일로 가기 시작하면서 클래식이나 전통 음악, 포크가 다 교배가 되니까.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완전 재즈의 언어보다는 포크적인 언어, 국악적인 것들, 클래식적인 거죠.

임형순과 같이 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작곡에 팝 보컬의 개념이 필요할 텐데 이 부분도 고려하겠지요.
그렇죠. 이미 그렇게 맞춰서 쓰고 있기 때문에 다채로울 겁니다. 거기다가 또 베이시스트 이태윤 씨가 노래를 또 잘해요. 송골매 때도 그랬고 부활 때도 그랬고. 그래서 이태윤 씨의 보컬도 이번에 많이 들어갈 거예요.

임형순 이두헌 최태완은 원래 오리지널 멤버인데 이태윤과 장혁은 어떤 인연인가요.
이태윤은 1980년대 중반 그때부터 항상 저희 언저리에서 있었던 친구예요. 장혁은 후배이긴 하지만 워낙 프로고. 그래서 팀으로 어딜 나갈 때는 오래전부터 항상 같이했어요. 이 다섯 라인업으로 이미 한 10년 정도를 활동하고 있었죠.

이두헌 씨는 젊었던 시절부터 음악의 깊이와 관련한 고민이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 우선 기타리스트라는 측면에서 볼 때 다섯손가락 시절과 미국 유학에 다녀온 후 어떻게 달라졌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단어가 많아졌죠. 예전에는 쓸 수 있는 단어가 아버지, 어머니 정도였다면 지금은 부친, 모친까지는 할 수 있는 거죠. 언어의 깊이나 수준은 확실히 나아졌죠. 근데 또 그런다고 기타가 좋아지는 건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반대로 그게 더 정제가 되고 말이 적어지면서 훨씬 더 좋은 기타가 된다고 생각해요.

먼저 다섯손가락 멤버들보다 선배인 김성호와 어떻게 인연이 닿은 건지 얘기해보죠. ‘풍선’의 작곡자잖아요. 1집에도 ‘좁은 골목’ ‘작은 기쁨’ ‘슬픈 사랑’ 등 3곡이나 주었고요.
옛날 서울 신림동 살던 집 앞에 레코드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가 중앙대 캠퍼스밴드 ‘블루 드래곤’ 드러머 분의 친형이 운영하시는 곳이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제가 기타를 좀 치고 그러니까 그분께서 “네가 기타를 제대로 치려면 우리 팀에 있는 성호 형을 한 번 찾아가 봐라”라고 말했고 , 저는 친구 3명이랑 김성호 씨가 살고 계셨던 강남 대치동 은마 아파트로 무작정 찾아갔죠. 거기서 오디션 비슷하게 봤는데 나머지 두 명은 집에 가라고 하더라고요. 너희는 공부해라 그러면서요. (웃음) 저 보고는 시간 되는대로 오라고 하셔서 처음엔 일주일에 1~2번 정도 가다가 나중엔 거의 맨 날 갔죠. 당시에 신림동에서 대치동을 가려면 버스를 세 번 정도를 갈아탔어야 해서 오고 가는 길이 쉽지도 않았는데 말이에요. 어쨌든 거기 다니면서 김성호 형으로부터 기타 연주부터 화성, 작 편곡까지 다 배웠죠.

당시에 다섯 손가락은 학생들인데 연습실까지 소유하면서 집요하게 음악에 매진하는 팀이라고 소문이 났던 기억이 납니다. 김성호씨 이후의 과정들에 대해서 설명 좀 부탁드려요.
일단 저희 싱어가 원래 ‘세월이 가면’을 부른 최호섭 씨였고, 베이스는 작곡가 하광훈이었어요. 근데 앨범이 나오기 직전에 두 명이 탈퇴한 거죠. 그래서 녹음을 시작했을 때 베이스는 조원익 선생이 쳐줬어요. 중학교 때부터 이미 각자가 자기 악기에서는 프로를 지향했던. 1집 멤버 정리를 해보자면 임형순, 이두헌, 박강영, 최태완이 있고 베이스는 빈자리나 마찬가지였죠. 근데 여기에 이우빈이라고 저희를 서울음반에 소개했던 매개체가 되었던 친구가 사진을 같이 찍은 거였죠. 실제로 베이스는 조원익 씨가 쳤고요.

‘새벽기차’,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이 히트하고 나서 팀 내부의 분위기는 어땠었나요.
안 좋았죠. 사실 저희는 음악적인 욕심이 많았었는데 임형순 씨가 들어오면서 대중적으로 변한 편이죠. 형순이가 가요 지향적인 친구이기도 했고 소속사도 막상 음반으로 내려고 하니까 이전 노래들은 안 팔릴 거라며 노선 변경을 요구했죠. 그러다 보니 저희 음악이 좀 더 쉽기도 하면서 상업적인 쪽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죠.

그렇다면 1집이 성공할 때부터 이미 음악적 트러블이 있었겠네요.
그렇죠. 박강영 씨 같은 경우에는 음반 내자마자 아예 활동을 같이 못했어요. 녹음만 같이 한 거죠.

당시 새로운 세대의 평단이 호평하고 지원해주면서 대학생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으로 압니다. 평가 가운데 기억나는 것이 있는지?
강인중 씨는 레코드사 제작부장으로 우리 앨범을 제작했고 유명 라디오작가인 왕광순, 그리고 재즈평론가 김진목 선생 등이 있겠네요. 몇몇 분은 아예 연습실로 찾아오시기도 했어요. 오셔서 얘 네들 음악은 신선하고 좋다는 얘기를 해주셨죠. 대학교 1학년 애들 작품으로 프로 음반을 만들어 보라고 했으니까 그만한 칭찬이 없죠.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같은 경우는 실제로 수요일에 빨간색 장미가 많이 팔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어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이나 ‘새벽 기차’는 어떤 상황에서 쓰게 된 곡들이죠?
앨범에 실을 곡들을 웬만큼 갖춰 놓은 상황이었는데 회사 쪽에서는 지금 있는 곡들로는 히트하기 어렵다면서 두 곡 정도는 대중적인 걸 써야 한다고 했어요. 그렇게 오더가 떨어졌고 부랴부랴 급하게 쓴 노래가 ‘새벽 기차’랑 ‘수요일에 빨간 장미를’이죠. 두 곡 모두 가장 나중에 쓴 곡이고 엉겁결에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근데 ‘수요일에 빨간 장미를’에서 굳이 수요일을 붙인 이유가 있나요. 그럼 호응이 있을 걸로 생각했나요.
그냥 만든 날이 수요일이었어요. (웃음) 짝사랑했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날 퇴짜를 맞고 명동 거리를 걸어가는데 백화점 앞에서 어떤 할머니가 장미꽃을 팔고 계시더라고요. 그걸 보고 나서 버스를 탔는데 또 뒤에 여학생들이 수다를 떨어요. “밖에 비가 오는데 오늘이 수(水)요일이라서 그런가.” 이렇게 농담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할머니가 장미 팔던 모습, 비오는 수요일 이런 게 엮이면서 나온 거죠. 한창 담배 피울 때였는데 급한 대로 담뱃갑 안 종이에 줄 쳐서 멜로디랑 가사를 썼죠.

기법적으로 음악적인 실험도 많이 하셨지만 ‘수요일에 빨간 장미를’에서는 빨간색, ‘풍선’에서는 노란색을 쓰는 걸 보고 색깔 감각 그러니까 은근히 대중적인 감각도 있다고 느꼈거든요. 색감 같은 게 이두헌에게 있어서 중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색에 대한 생각이 있기도 하고 일단 무채색보다는 컬러를 좋아해요. 음악 작업을 할 때도 항상 색깔을 많이 떠올리는 편입니다. ‘이층에서 본 거리’나 ‘전자오락실에서’, ‘서울은’에서는 회색이라고 하면, 또 어떤 곡은 약간 오렌지색, 푸른색이 생각나기도 하고 그러죠. 곡 작업을 하면서 기본적으로 색깔을 생각하기 때문에 은연중에 색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간다고 봅니다.

1집과 2집이 어쨌든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죠. 그런데 수록 곡 가운데 대중적으로 소화가 안 되어서 아쉽게 여기는 곡은 있나요.
최근에 새로 녹음을 진행하면서 임형순 씨가 1집에 실린 ‘고독한 이에게'(이두헌 작사작곡이다)라는 곡을 다시 녹음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다시 들어봤는데 그 당시에 어떻게 이런 노래를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사도 좀 우울한 면이 있고.

말이 나온 김에 여쭤보는데요. 이두헌 음악은 왜 그렇게 사람 잡아먹을 정도로 우울했던 건가요.
저희 아버지는 이북에서 내려오신 실향민이에요. 거기선 양조장을 운영할 정도로 부잣집 아들이나 다름없었는데 일사 후퇴 막바지에 내려오면서 완전 빈털터리가 되셨잖아요. 물론 혼자 사업을 정말 열심히 하셔서 성공은 하셨는데 어쨌든 아버님의 성격이 저랑은 썩 맞지 않았죠. 그야말로 애증의 관계죠. 그게 결국엔 저를 굉장히 우울하게 만들었죠.

그런 환경에서 음악을 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그렇죠. 아버지께서 술 많이 드신 날에는 고향 생각도 나고 하셔서 난폭해지기도 하셨어요. 화목한 가정을 꿈꿨는데 그게 어려웠죠. 그러다 보니까 20대까지만 해도 “집은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되어버렸고 모든 게 다 어두워졌던 거죠.

보컬에 있던 임형순이 2집 후 팀을 떠나게 되었어요. 그때 솔직히 임형순과의 갈등이 심했나요.
아니에요. 형순이랑 저는 그다지 갈등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지금도 이렇게 편하게 잘 지내는 거죠. 최태완 씨가 농담처럼 자꾸 얘기하는 건 있어요. ‘뭔가 준비된 게 (솔로) 있었을 것이다.’ 제가 보기에도 좀 그랬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옷 잘 입고 솔로로 나가면 반응이 좋았으니까. 잘 모르긴 해도 일종의 제안이 있었을 거예요. 준비를 계속하다 보니까 계속 겉돌게 되는 거죠.

그리고 저희는 발표할 곡들을 공연장에서 미리 선보이는 편이었어요. 근데 아무래도 곡을 제가 쓰다 보니까 자기한테 맞는 노래가 점점 없어진다고 느꼈던 거죠. 본인이 생각하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전자오락실에서’, ‘이층에서 본 거리’의 가사는 무겁고 우울했으니까.

‘전자오락실에서’는 인스트루멘탈(연주곡) 아니었나요.
가사가 있었는데 심의 통과를 못했어요. 무조건 안 된다는 식이었죠. 전자오락실에서 사행성을 조장한다든지 청소년 유해시설에 대한 예찬이라는 이유를 대면서요. 그래서 3집에는 인스트루멘탈로 남았다가 4집에서 다시 가사가 생겼죠.

다섯손가락 3집으로 된 앨범에 수록된 ‘이층에서 본 거리’는 마니아들 사이에서 명곡으로 꼽힐 만큼 호평을 받았지요. 전 당시 ‘수녀’가 가사에 등장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그건 어떤 배경에서 나온 곡인가요.
대학생 때 제가 이층에 있는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아래층 구두 부스에서 중학교 때 친했던 친구가 구두를 닦고 있었어요. 구두를 가지러 올라왔다가 몇 년 만에 우연히 절 만난 거죠. 얼마나 놀랐겠어요. 다 집어 던지고 바로 나가 버렸죠. 어린 마음에 본인은 대학을 못 나오고 구두를 닦고 있다는 현실이 좀 그랬었겠죠.

그때 마침 수녀가 지나가고, 건너편에 약국이 있는데 밑에 담배라는 간판이 붙어있고. 또 조금 있으니까 초등학교 6학년쯤 되어 보이는 애가 껌 사달라고 놔두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그 상황을 그대로 썼던 거죠. 원래 가사는 ‘어릴 적 내 친구는 구두를 닦고/ 세상은 모순 속에 깊어만 가고/ 온종일 껌을 파는 아이도 있고’였어요. 이것도 심의에 걸리면서 통과가 안됐죠.

그래서인지 ‘이층에서 본 거리’가 분명히 다섯 손가락의 타이틀로 나왔음에도 많은 세월 속에서 이두헌의 솔로로 사람들이 기억을 하더라고요. 어쨌든 그 다음이 다섯 손가락의 마지막인데 3집에서 이미 반응이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왜 4집까지 강행했나요.
이제 음악을 안 하기로 마음을 먹고 3집의 마지막에 ‘노래를 마치며’라는 곡을 넣었어요. 그러고 나서 결혼까지 했는데 머릿속에선 계속 멜로디가 생각나고 기타만 잡으면 또 새로운 코드가 생각나고 하니까. 그래서 써놓은 노래들 마무리만 하겠다. (웃음) 그런 마음가짐으로 만들었죠.

사실 저도 죄송하지만 4집은 안 샀어요. 그래도 4집까지 내면서 이두헌 씨가 거둔 음악적 성과가 있다면 뭘까요.
저는 제가 ‘주제’ 갖고 노래를 만들려고 애쓴 80년대의 뮤지션 중 한사람이었다고 생각해요.

주제라고 한다면 정확히 뭘 의미하나요.
예전에 김민기 씨나 한대수 씨가 무엇을 노래해야겠다는 생각이 있는 상태에서 노래를 만들었거든요. 막연한 대중적 접점만 찾는 게 아니라 ‘나만의 특별한 테마’를 가지려고 했죠. 도시에 대한 반대든, 동심파괴에 대한 이야기든 1980년대 들어와서는 그렇게 주제를 가지고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거의 사라졌죠. 그래서 저는 노찾사 이런 개념과는 달리 한 가지 주제를 갖고 음악을 만들었어요. 지금도 계속 하고 싶은 것이 그런 거예요.

그 뒤로 이두헌 씨가 겪었던 음악적 갈등을 듣고 싶습니다.
프랭크 시내트라가 80살에 < Duet > 앨범으로 그래미상을 탔잖아요.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그때 제 나이가 서른 중반 정도로 기억하는데 ‘내가 음악을 팔십까지 저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일단 단어가 너무 없어요. 요리로 치자면 냄비 하나랑 라면 하나만 달랑 있는 거죠. 파도 없고 계란도 없고. 그래서 그때까지 음악을 하려면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됐죠. 사실 유학은 오래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결심을 한 건 딱 그때인 거죠.

처음에는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떠난 게 아니었어요. 1993년 보스톤 소재 버클리 음악대학 프로듀싱 전공으로 갔는데 첫날 학교 퍼포먼스 센터에서 기타 과 전공 선생님 7명이 리사이틀을 한 거예요. 기타도 안 가져갔었는데 그걸 보고 바로 한국에 전화해서 기타를 보내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바로 다음 학기에 기타를 배우기 위해서 퍼포먼스 전공으로 바꿨어요.

버클리에서 배운 것은요.
다양성이죠. 이스라엘이나 브라질 같은 여러 인종의 음악을 만나잖아요. 똑같은 기타에 똑같은 장르를 쳐도 그 나라나 개인의 인생의 색깔들이 느껴져서 굉장히 신선했어요. 그래서 음악은 결국 글로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보스턴이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하잖아요. 등록금과 수업료도 그렇고… 1996년까지 학비를 어떻게 충당을 했나요.
그때 이미 프로듀서로 활동하면서 벌어두었던 수입이 있었죠. 그리고 지금 얘기하면 아무도 안 믿을 얘기지만 그때 컴퓨터 프로그래밍 음악 2세대라고 할 정도로 작업을 많이 했어요. 조규찬의 ‘따뜻했던 커피조차도’, 김건모의 ‘첫인상’을 비롯해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의 컴퓨터 시퀀싱을 전부 제가 맡아서 했었죠. 당시에는 편곡료보다도 비싸게 받았어요. 세션이 한 30만원 받을 때, 프로그래밍 하는 사람은 100만원을 받았으니까요. 거기다 프로그래머도 별로 없었던 시절이었죠.

이제 한국 K팝도 시장 측면에서 글로벌로 가고 있는데 BTS를 비롯한 K팝의 도약에 대해서 음악적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저는 사실 큰 점수는 안 줘요. 기초가 부족하다고 봐야죠. 예를 들면 비틀스를 가지고 있는 영국. 퀸이나 핑크 플로이드, 딥 퍼플, 레드 제플린을 들으면서 자란 세대의 자녀들. 심지어는 일본 애들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친구들은 최소한 장르에 대한 존중이 다 있잖아요. BTS가 지금 K팝으로 세계에서 최고라고 하더라도 김민기, 노찾사, 신중현도 최고라고 생각해 주는 분위기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죠. 이렇게 뿌리가 약한 식물은 그렇게 크게 자라지 못하거든요.

음악적인 면에서 토양이 굳지 못한 거고 또 거기에 대한 대중들의 존중심도 부족하고. 이런 점이 아쉽죠. 어제 (이)승환이랑 같이 기타치고 놀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번에 < 이승환과 아우들 >이라는 공연을 했어요. 근데 제가 “승환이 네가 우리나라에서 ‘이승환과 형님들’은 할 수 없다는 게 참 안타깝다”라고 했어요.

그래도 나름 우리가 외국 팝과 록을 들으면서 내공을 쌓아온 건데 어느 순간부터 뿌리가 약하다는 게 드러났을까요.
아무래도 프로덕션 개념이 발전되면서 그랬다고 봐야죠. 예전에 음반사 시스템이었을 때는 음악을 아는 분들이 포진해 있었지만, 어느 날인가부터 장사를 하는 사람이 음반을 제작하기 시작한 거죠. 음악이 예술에서 산업으로 이동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봐요. 옛날 동아기획이나 지구레코드처럼 좋은 음악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영향력이 줄어들었죠.

홍보지원도 크게 없었고 TV에 많이 나오지도 않았었는데 KBS에서 그룹상까지 수상했다. 당시에 사람들이 다섯 손가락을 왜 그렇게 좋아했다고 보나요.
그렇게 좋아한 것 같진 않은데. (웃음) 물론 음반이 많이 팔리긴 했었죠. 회사에서 65만장이 팔렸다고 저희한테 얘기를 했으니까. 활동 당시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은 딱 한 번 불렀어요. 그 노래를 TV에서 불러본 적이 없어요. 홍보시스템은 제로였죠.

솔직히 ‘풍선’은 1집의 곡들보다는 가볍다는 이미지를 주는 곡이다. 그런데 나중에 동방신기가 리메이크해서 대박을 쳤을 때의 느낌은 어땠는지.
이 노래가 그럴 만한 곡인가? (웃음) 전혀 예상 못 했죠. 그렇게까지 재조명 받을 만한 노래인가? 근데 다시 발표했을 때 보니까 또 (동방신기의 분위기에) 맞더라고요.

그래도 새로운 세대가 다섯 손가락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죠. 김광진 씨는 동방신기가 ‘마법의 성’을 불러줘서 그 세대 아이들이 자기를 안다는 게 영광이라고 했었거든요.
저도 당연히 인정은 하지만 사실 크게 감흥은 없었어요. 김광진 씨와는 정반대네요. 저는 누구나의 뮤지션이 되고 싶지만 아무나의 뮤지션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대상으로서 저를 봤을 때 누구나 나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날 좋아하는 건 제가 사양하겠다는 거죠.

다섯 손가락은 분명 아마추어의 순수와 프로뮤지션십을 공유한 팀이죠. 그래서 ‘새벽 기차’나 ‘풍선’이 먹혀든 게 여학생들이 들을 음반이었기 때문이라고 보는데 결국엔 그건 작사와 작곡을 주도한 이두헌 덕분 아닐까요.
그건 아니에요. (웃음) 팀이 다 같이 한 거니까. 다 뛰어난 친구들이었잖아요. 다섯 손가락 해체하자마자 최태완은 김현식부터 해서 봄여름가을겨울, 조용필까지 갔으니까. 지금도 같이 연주해보면 깜짝깜짝 놀라요.

최태완은 음악적 스승이 고 김명곤 씨 아닌가요. 우리 음악계 편곡분야 제일의 인물인데..
맞아요. 개인적으로 제일 존경하는 분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 가장 먼저 전화하신 분도 김명곤 선생이었고요. 아직도 잊지를 못해요. 전화도 방금 개통하고 새로 한 번호인데도 전화를 주셨어요. “이제 너희 세대가 음악 신에서 목소리도 내고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정말 기대하겠다!”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러고 얼마 안 되어서 돌아가셨어요.

이두헌 선생님을 음악가로 만든 인생의 뮤지션은 누구인가요.
먼저 한대수. 아홉 살 때 그의 ‘바람과 나’라는 노래를 듣고 그랬고. 그 후론 이정선이라는 뮤지션. 저랑 너무 가깝지만 지금도 그걸 영광스럽게 생각할 정도예요. ‘섬소년’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의 모든 노래가 음악적으로 세련됐죠. 편곡이나 작곡도 잘 하셨고. 제일의 롤 모델이었죠. 물론 김민기, 한 대수 그리고, 김정호도 있지만 세월이 다 지난 다음에 한 사람만 내게 남아있다고 생각하면, 이정선 이 세 글자에요.

팝 쪽에선?
외국에서 한 사람만 고르라면 지미 헨드릭스죠. 너무 완벽해요. 연주만의 얘기가 아니라 보컬, 작곡, 톤, 뉘앙스, 뮤지션십. 그냥 모든 면에서 뛰어났어요. 그다지 높지 않은 목소리인데도 노래를 할 수 있었다는 것? (웃음) 이걸 배웠죠. 사실 저도 노래를 할 생각은 없었거든요. 그래도 밥 딜런과 지미 헨드릭스에게 용기를 얻었죠. 자기 개성이 확실했죠.

음악적으로 가장 만족했던 하이라이트 모멘트는.
남들이 볼 때는 제일 존재감이 없었을 때예요. 4집의 ‘서울은’이라는 곡의 심의가 해결이 되면서 인스트루멘탈이 아닌 노래로 나올 수 있었을 때 좋았아요. ‘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도시/ 저녁 찬거리에 팔아버린 자존심이 울먹이는 곳’ 이런 가사가 들어갔는데, 들뜬 88년 올림픽 시점에서 일반적인 서울 정서와는 반대되는 곡이었죠. 하지만 음악가로서 제일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어서 좋았죠.

미국에 다녀와서 낸 앨범들은 어떤 게 있죠.
재즈부터 펑크(Funk), 라틴까지 들어있었고, 인스트루멘탈 곡도 3~개가 있는 2000년의 < Imagine >이 있고요. 그 다음에 제가 다 노래한 < Sings >, ‘두개의 시계’ 정도가 있겠네요.

기본적으로 이번에 다섯 손가락이 다시 만나게 된 이유를 뭐라고 할까요.
형순이 얘기로는 사람이 이 나이를 먹으면서 반목하지 않고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한 모습인데, 아직까지 (연주할) 손이 죽지 않고 있을 때 하나 정도 남겨야 하지 않겠냐고 얘기하더라고요.

교편은 언제부터 잡은 거죠.
귀국하자마자 2000년에 신설된 경희대학교 포스트모던 음악학과의 겸임교수를 맡았고 지금까지도 하고 있습니다. 근데 사실 교수가 잘 맞지는 않아요. 시간도 그렇고 정치의 세계 느낌도 들고. 2019년부터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실용음악과 주임교수로 활동하고 있어요. 다음 학기부터 초빙으로 바뀌는데 그렇게 되면 이제 경희대는 정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죠.

중학교 때 음악에 꽂혀서 40년 가깝게 활동을 하고 있네요. 미국 가서 공부도 하고 돌아와서 어떤 형태든 기쁨도 좌절도 겪었는데 음악은 도대체 이두헌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제 몸을 구성하는 유기물 중 하나로 봐요. 뚜렷한 의미가 있지는 않은 거죠. 사람들이 숨을 잘 쉬려고 애를 쓰잖아요. 숨이야 그냥 붙어있는 건데 호흡법 강좌를 배워가면서 하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의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거죠.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서 너무 좋네요. 코로나 팬더믹이 해제되어 더 재미있게 활동했으면 좋겠네요.
저희 멤버들도 바라고 있어요. 특히 작은 공연을 많이 하고 싶어 해요. 원래도 그랬지만 이태윤이나 다른 친구들이 100석, 200석 규모의 공연장을 너무 그리워해요.

인터뷰: 임진모, 임동엽, 정다열
정리: 임진모
사진: 임동엽

Categories
Album POP Album

메탈리카 ‘Master Of Puppets’ (1986)

상업적 팝 메탈을 강타한 후련한 탱크 사운드

“그때 사람들이 들었던 음악은 스틱스나 REO 스피드웨건, 뭐 그런 것들이었어. 우리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대부분 ‘이게 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 전에 못 들어본 거잖아?’라고들 했지. 왜 그랬겠어? 이런 음악은 안 팔린다고 메이저 레코드사들이 내지 않으니까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야.”

라스 울리히(Lars Ulrich)와 메탈리카는 야들야들한 록과 메탈이 판치던 당시 음악계의 풍토를 ‘능멸’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선 엄청난 볼륨의 폭발음이라야 했다. 그들은 80년대 메탈의 새 물결 이른바 NWOBHM에 기초해 70년대 펑크의 파괴력과 연주의 단순한 배킹(backing) 요소를 흡수한 새로운 틀의 음악을 주조해냈다. ‘세게 때린다’는 뜻의 스래시 메탈(thrash metal)이었다. 라스 울리히는 자신들의 83년 첫 앨범 <싹 죽여버려>(Kill’em All)를 ‘스래시 메탈 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앨범’이라고 자랑했다.

Fans Vote "Master of Puppets" Best Metallica Song in Band-Endorsed Poll |  Consequence of Sound

<마스터 오브 퍼피츠>는 본 조비의 ‘팝메탈의 흥행대작’ <슬리퍼리 웬 웨트>가 나온 85년 같은 해에 발표되었다. 결과는 뻔해 보였지만 팬들의 반응은 예상외로 좋았다. 미국 차트 29위, 영국에선 41위에 오르는 준히트를 기록했다. 팝 메탈과 같은 ‘투우장의 황소’가 아닌 ‘전시의 탱크’ 사운드를 열망하고 있는 메탈 마니아들이 보낸 성원이었다.

메탈리카는 이 앨범의 스래시 탱크 사운드로 얼마 후 록과 메탈 음악계 최고 반열에 올랐다. 사실 84년 발표한 그들의 전작 <번개를 타라>(Ride The Lightning)에서 과격한 스래시는 이미 형식미가 구현된 바 있다. 그런데 <마스터 오브 퍼피츠> 앨범이 그것보다 우대되는 이유는 스래시 메탈의 원시성에 ‘예술성’을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앨범의 수록 곡들에는 스래시의 전형적인 폭음(爆音)이 질펀하다. 그러나 그 단계에 그치지 않고 파괴적 사운드에 ‘대오정렬’을 꾀하고 질서 있는 곡조를 확립함으로써 전무후무한 ‘아트 메탈’을 창조해낸 것이다.

이 음반은 LP 시절 국내에서는 불행히도 ‘정신요양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home, sanitarium) ‘처분할 영웅들'(Disposable heroes) ‘데미지 주식회사'(Damage Inc) 등 3곡이 금지 판정을 받아 팬들의 불만을 샀다. 누락된 곡을 대신해 영국 록 그룹 버지(Budge)의 ‘브리드팬'(Breedfan)과 모터헤드의 ‘왕자'(The Prince)가 메탈리카 버전으로 실렸다.

Metallica Archives | RVA Mag

라스 울리히는 앨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메탈리카에게는 어쩔 수 없는 약점이 있다. 곡을 짧게 하려고 무진 노력을 해도 도무지 짧은 곡을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곡의 스타일이나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보자면 1집이나 2집에 비해 더욱 성숙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프로그레시브라고 할 대곡 지향적 구성은 물론이고 ‘주름진’ 스래시가 약간 다림질된 듯 펴졌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최고의 스피드를 자랑하는 첫곡 ‘배터리'(Battery)는 커크 해밋(Kirk Hammett)과 제임스 헤트필드(James Hatfield)의 공격적인 기타 피킹과 라스 울리히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드러밍이 압권이다. 이 곡은 동시에 메탈리카 공연문화의 핵을 이루는 ‘헤드뱅잉’ 열풍을 몰고왔다(98년 4월 내한 공연 당시 이 곡이 앙코르되었을 때 고개를 마구 흔들어대는 ‘헤드뱅어’들에 의해 공연장의 다수 의자가 부서졌다)

타이틀 곡 ‘마스트 오브 퍼피츠’는 메탈리카 최고의 걸작이라고 할만큼 기승전결이 뚜렷했다. 제임스 헤트필드의 ‘보컬 카리스마’를 확인할 수 있는 이 곡은 ‘스래시의 찬가’로 꼽힌다. ‘정신요양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는 멤버들이 일컫는 ‘메탈리카식 발라드’의 미학이 꽃을 피우는 곡으로 자신은 멀쩡하다고 여기지만 주위에서는 정신병자로 인식해 병원에 갇히게 된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다뤘다.

미드템포로 시작되어 점점 속도감을 붙여 가는 ‘처분할 영웅들’은 전쟁터에 끌려간 한 소년에 대한 스토리이며 ‘나병환자의 메시아'(Leper messiah) 역시 사회에대한 항변으로 텔레비전이 주도하는 주류의 폭압적 문화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긴장감과 서정성이 동거하는 곡 ‘오리온'(Orion)에서 베이스주자 클리프 버튼(Cliff Burton)은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무겁고 차분한 진행 속에서 절정의 테크닉을 과시하고 있다. 그는 86년 투어도중 버스 전복사고로 사망했고 그 자리에 제이슨 뉴스테드(Jason Newsted)가 들어왔다.

이 앨범은 메탈리카를 메탈을 넘어 록 전체의 신화적인 존재로 비상시켜주었다. 그러나 그룹은 스래시의 틀에 자신들이 함몰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한 때 스래시의 창조자라는 자부심을 피력했던 라스 울리히는 이 음반을 만들고 난 후 스래시란 말은 이제 그룹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확실히 우린 스피드 에너지 그리고 혐오감 제공이란 측면에서 스래시의 원조였다. 하지만 항상 우린 그러한 한정된 틀을 넘어서 왔다. 메탈리카는 항상 진보한다.”

진정한 메탈 음악을 추구하겠다는 의지로 만든 그룹명과 달리 그들은 90년 거의 ‘메탈 발라드집’을 방불케 한 앨범 <메탈리카>에 이어 5년 공백을 깨고 발표한 <로드>(Load)로는 당시의 록 조류인 얼터너티브 록 리프를 과감히 수용, 스래시 마니아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나중에는 “현재 바하 브람스를 비롯한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은 하고싶은 바대로 음악을 하는 자유를 위해 팬들의 스래시 소아병(小兒病)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팬들이 자신들로부터 스래시만을 원하게 만든 이 작품을 과감하게 역사 속에 안치(安置)시켜버렸다. 이 앨범을 만든 후 진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메탈리카가 조정한 목표는 바로 ‘<마스터 오브 퍼피츠>로부터의 해방’이었다. (2001/03)

Categories
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6 윤항기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련한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열여섯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한국 록 밴드의 레전드 ‘키보이스’ 출신의 톱가수 윤항기다.

‘한국의 비틀스’라는 수식이 말해주듯 국내 초창기 최고의 인기를 자랑한 밴드 ‘키보이스’는 1960년대 부평의 미군수지원사령부 애스컴(ASCOM) 등 미군 부대의 클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국내 무대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키보이스하면 떠오르는 이름 윤항기. 그는 이후에도 자신의 이름을 딴 ‘윤항기와 키브라더스’ 활동, 솔로 히트 넘버인 ‘별이 빛나는 밤에’‘나는 어떡하라고’‘장밋빛 스카프’ 등으로 한국 대중음악계에 굵직한 획을 남겼다.  

동생 윤복희가 불러 국민 위로곡이 된 ‘여러분’의 작곡자도 바로 윤항기다. 선친의 재능을 물려받아 그는 작사, 작곡, 노래, 연기 뿐 < 춤추는 함대 > 등의 뮤지컬 기획자로도 두각을 나타내 ‘만능 엔터테이너’로서의 위상도 구축했다. 한국 록의 씨앗을 뿌린 공로를 인정받아 최근에는 정부가 주는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윤항기는 애스컴을 가리켜 팝음악에 꿈을 갖고 있던 젊은이들이 모여 다양한 우리 대중음악을 일궈낸 ‘K팝의 중심지’라고 정의했다. 여기 미군 클럽무대를 선회하며 뿌린 당대 뮤지션들의 열정을 현 대중음악의 씨앗으로 일컫고 있는 것이다. 패기 넘치던 당대의 가수 생활과 목회자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된 ‘여러분’을 포함해 장대한 60년 음악 인생의 추억을 풀어놓았다.

이번‘2020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은관문화훈장을 받으셨어요. 축하드립니다.
옛날에 장관상을 받은 적은 있었는데 훈장은 처음이다. 요즘 활동을 많이 안 하다 보니 전혀 예상을 못 했는데 대한가수협회 이자연 회장이 나한테 얘기도 안 하고 추천했다고 한다. 고맙다. 수상자 연락을 받고 깜짝 놀랐다.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웃음)

은관문화훈장을 받으시게 된 역사적 공로를 뭐라고 생각하셨나요.
그날 수상 소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데뷔 60년 차고 처음 1959년에 미8군에서 김희갑 선생님 밑에서 공부하며 가요계에 데뷔했다. 그때 나는 남석훈이라는 가수하고 로큰롤 가수로 활동했다. 남석훈은 나중 완전히 빅스타가 되었고. 그때 미8군에서부터 음악활동을 시작해서 드럼도 배우면서 1963년에 한국의 최초의 록 밴드 ‘키보이스’를 결성했다. 그걸로 한국 대중음악의 한 장르를 우리가 만들어놓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로 인해서 한국에서도 1960, 70년대에 록의 전성기가 생기고. 그게 공로이자 자랑거린 것 같다.

키보이스 결성과정을 알려주세요. ‘한국의 비틀스’로 불리며 엄청난 인기를 누렸는데요..
키보이스가 1963년에 데뷔해서 1964년에 ‘정든 배’가 나왔다. 그게 나왔을 무렵이 한창 비틀스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때다. 우리도 악기를 다루는 팀인데 비틀스도 그러니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처음 우리가 그룹을 만들었을 때는 비틀스를 모방한 게 아니라 실은 비치 보이스(Beach Boys)에 많은 영향을 받았었다. 비치 보이스를 보고 한국에서도 저런 그룹을 만들어보자 해서 만든 그룹이 키보이스다.

선생님은 나중 솔로 활동을 하면서 ‘별이 빛나는 밤에’‘장밋빛 스카프’‘나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등 잊을 수 없는 노래를 많이 만드셨어요. 그런데 왜 그룹 활동을 할 때는 자작곡을 안 만드신 거예요?
좀 전 얘기한 것처럼 내가 데뷔했을 때가 1950년대 후반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위대한 작곡가이신 이봉조 선배님 등이 다 미 8군 쇼에서 활동하실 때였다. 그런데 사실 그 당시에는 그분들도 작곡 활동을 안 하셨다. 나중에 1960년대 중반에 들면서부터 이봉조 선생님도 작곡을 하셨고 김희갑 선생님도 뒤에 시작하셨다.

그 시절 작곡을 하겠다는 생각을 못 했던 것 같다. 1964년에 낸 키보이스의 ‘정든 배’라는 노래를 쓴 것도 김영광이라는 작곡가다. 그 친구가 우리랑 친구다 보니 우리한테 이 노래 같이해보자 그런 식으로 시작을 해서 덕분에 앨범도 내게 됐다. 물론 당시 김영광이라는 친구가 작사 작곡을 할 때 ‘왜 우리는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하는 약간의 아쉬움도 있다. 분위기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내가 처음 만든 곡은 1969년에 쓴 ‘별이 빛나는 밤에’였다. 이어서 나온 곡이 ‘목이 메어’였고… 같이 1969년에 나왔다.

자작곡을 만드시게 된 계기는요?
사실 한국 뮤지션을 보고 작곡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당시는 송창식, 윤형주 등 포크 가수들도 번안 가요를 많이 할 때였다. 우리도 김영광 곡을 빼면 다 번안곡이었고. 그래서 차츰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이제는 우리 곡을 조금 해야 하지 않나’, ‘외국 곡 못지않은 우리 곡을 한번 써보자!’라는 생각. 왜냐하면 나는 또 시작이 외국 노래를 부른 팝 싱어였고 록 가수였으니까. ‘별이 빛나는 밤에’나 ‘목이 메어’는 그런 외국 밴드의 곡을 많이 커버하면서 이제는 번안곡에서 벗어나 우리 곡을 써야겠다는 마음가짐에서 쓴 곡이었다.

키보이스 활동하실 때도 이미 솔로로 전향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솔로로 나온 게 몇 년도였나요?
키보이스에서 1969년에 나왔다. 그러고서는 그룹을 하나 따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키보이스로 할 때는 내 이름을 많이 알리지 못해서. 또 그 당시는 월남으로 가는 게 붐이었는데, 나한테도 월남으로 갈 기회가 생겼다. 그래서 거기에 가서 쇼를 하기 위한 팀을 만들었는데 그게 ‘윤항기와 키브라더스’다.

그 팀이랑 함께 1년간 월남에 갔다가 한국 들어와서는 팀으로 처음 발표한 곡이 ‘고고 춤을 춥시다’였다. 그게 1971년이었다. 그게 나중에 희귀음반으로까지 올라갔다. 완전한 로큰롤 송이었다. 한 곡을 가지고 끊지 않고 계속 연결, 연결해서 라이브를 30분인가 연주를 했다. 그게 음반으로 나온 거다.

선생님이 슈퍼스타로 떠오른 때는 1973년의 ‘나는 어떡하라고’였어요. 그 곡도 그렇고 이후 ‘장밋빛 스카프’도 그렇고 분명 록을 하셨는데 당대의 트렌드인 포크송을 의식하셨는지 ‘록 + 포크’ 스타일이었어요. 록을 중심으로 주변 장르와의 퓨전을 생각하셨나 봅니다.
그렇다. 거기에 추가로 트로트도. ‘장밋빛 스카프’가 그렇지 않나. 사실 그때는 본래 윤항기의 음악 스타일보다는 빨리 대중화할 수 있는 걸 원했다. 키브라더스를 하면서 발매한 ‘목이 메어도’나 ‘별이 빛나는 밤에’ 같은 경우에는 마니아들 사이에 알려졌다. 돌아가신 DJ 이종환 선생님이 그 노래를 좋아하셔서 라디오 방송 시그널 음악으로도 쓰시기도 했고 아예 지금도 살아있는 프로그램 타이틀이 됐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 윤항기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세종회관인 시민회관에서 리사이틀도 했다. 그게 방송 < 별이 빛나는 밤에 >의 오픈 기념 축하 공연이었을 거다. 그 덕에 윤항기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다가 키보이스 때부터 인연이 있던 신세계 레코드 간부가 와서 우리가 하는 걸 보더니 ‘이렇게 그룹으로 해서는 안 되겠다. 솔로로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1973년에 ‘나는 어떡하라고’가 나오고 그 후 1975년에 나온 곡이 ‘장밋빛 스카프’였다. 

‘별이 빛나는 밤에’는 키보이스 활동할 때 썼던 곡인가요?
그건 키보이스 때 나온 게 아니라 ‘윤항기와 키브라더스’를 만들고 월남에 가서 만든 곡이다. 월남에서 만들고 한국 와서 키브라더스 음반이 나오기 전에 그걸 고고클럽에서 연주했다. 그 후에 키브라더스 데뷔 앨범, 아까 말한 1971년의 < 고고 춤을 춥시다 >에 수록됐다. 그리고 그 곡이 대중에게 인기를 얻기 시작할 무렵에 펄 시스터즈의 음반을 작업하던 분이 나에게 와서 펄 시스터스가 그 노래를 취입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내 음반이 나오기 전에 펄 시스터즈 버전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먼저 나왔다.

‘장밋빛 스카프’는 어떻게 쓴 곡인가요?
그것도 아주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날이 서울 스튜디오에서 ‘윤항기와 키브라더스’ 앨범 녹음을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앨범에 수록할 곡 수(數)가 딱 한 곡이 모자랐다. 그날 스튜디오로 가서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한 노래가 모자랐던 거다. 가면서 고민을 했다. 그런데 그러다가 갑자기 악상이 떠올랐다. 멜로디가 아닌 가사가. 그게 또 스캔들이라면 스캔들인데, 1960년도 후반에 내가 좋아했던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모티브로 해서 썼다. 당시에 그 여인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한동안 그 여인을 찾아서 전국을 미친 듯이 헤매 돌아다니기도 했다. 술도 많이 마셨고, 스케줄도 펑크 내고 그랬던 적이 있다.

그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내가 그때 갑자기 홍콩으로 사라졌다고 기사가 나고. 당시 스캔들이 많았다. (웃음) 어쨌든 불현듯 그 생각이 난 거다. ‘내가 왜 이럴까/ 오지 않을 사람을/ 어디선가 웃으면서…’ 앞에 그 테마가 잡혔다. 그래서 그냥 부랴부랴 도착하자마자 멤버들은 스탠바이 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잠깐 기다려보라고 하고 소파에 앉아서 가사를 생각나는 대로 정신없이 막 썼다. 그래서 그 곡이 가사가 짧다. 그다음은 이제 멜로디를 써야 하는데, 어떤 고급스러운 멜로디는 상황이 촉박하다 보니 안 나오고, 그냥 급하게 되는대로 가사에다가 써 붙인 멜로디가 그 뽕짝 스타일의 멜로디였다. ‘쿵짜작∼ 쿵짝’. 사실 그 멜로디의 영감을 받은 건 조영남 노래의 ‘불 꺼진 창’(이장희 작사 작곡)이었다. 나중 금지된 곡이다. 그 멜로디랑 리듬이 생각나더니 이 가사에 그런 스타일의 선율을 입혔다. 그게 또 운율에 딱딱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장밋빛 스카프’는 한때 노래방 애창곡 1위를 차지한 적도 있지요. 사람들이 이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가 못 이룬 사랑에 대한 애틋함 같은 것도 있지만 부르기 좋은 곡조이기도 해서인 것 같아요.
아주 쉽다. 키브라더스 앨범으로 나온 곡인데 그 노래가 처음 수록됐을 때는 타이틀이 아니고 밑에 깔려있는 곡이었다. 그런데 그 앨범이 라디오 쪽으로 갔는데, 라디오 측에서 앨범 전체를 들어보더니 타이틀곡보다는 밑에 있던 ‘장밋빛 스카프’가 더 좋다는 거였다. 동아방송(DBS)의 이해성 PD가 찾아내 거기서 틀기 시작하면서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나는 어떡하라고’는 KBS 가수왕상의 영예를 준 곡이죠?
맞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영화로도 나왔었다. 내가 주연을 맡았었고. 그래서 내 경력에 보면 영화배우라고도 나온다. (웃음)

이후 실세를 장악한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나는 행복합니다’가 나왔는데 전두환이 대통령이 됐을 무렵이라 ‘전두환 송’이라고도 불렸지요?
그렇다. 그거는 왜 그러냐 하면 신군부가 그런 밝은 노래, 희망적인 노래가 아니면 다 금지시켰다. ‘장밋빛 스카프’도 한때 금지가 됐었으니. 가사가 ‘오지 않을 사람을…’ 막 그러니깐 전(前) 정권을 이야기하는 거냐는 말도 있었고. 참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1983년 히트곡 ‘이거야 정말’은 걸작이라는 평을 받았어요. 가사도 심상치 않았고.
엄진 작곡가가 만들었다. 가사를 사계절에 빗대서 참 잘 만든 노래였다. 

윤항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가 전 국민 누구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여러분’이지요. 윤복희 노래로 남매의 완벽한 협업을 선사했는데요, 1979년 서울국제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지요. 선생님은 언제부터 목회자의 길을 걸으셨나요?
사실‘여러분’을 만들고 난 후였다. 그전에는 그냥 동생이랑 집사람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깊은 믿음 없이 약간 강제적으로 믿은 거고..  

‘여러분’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신앙에 들어가셨던 거군요. ‘여러분’은 역사적인 명곡입니다. 선생님은 그 곡을 어떻게 생각하시고 평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여러분’이라는 곡만 딱 놓고 보면 어떻게 저런 곡이 나올 수 있을까 싶은데, 사실 그 이전에서부터 내가 닦아온 결과였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1974년에 한국일보에서 주최한 < 제1회 한국 가요제 >에서부터 곡을 출품했었다. 그게 한국 최초로 열린 국내 가요제였는데 그때 곡이 ‘외로운 해바라기’였다. 그때 대상을 박경희의 ‘저 꽃 속에 찬란한 빛이’가 대상을 받고 내 곡이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걸 시작으로 가요제가 유행이 되면서 매년 가요제가 있었다. MBC 가요제, TBC 가요제 등등. 모든 가요제에 빠짐없이 출전 곡을 냈다. 그렇게 해서 ‘나그네’라는 곡도 나오고 ‘바늘과 실’도 나오고, 정은희가 부른 ‘누구 없소’까지. 다 가요제 참가곡이다. 결론해서 내 나름의 내공을 쌓아왔다고 할까. 1979년 ‘여러분’이 그냥 갑작스럽게 나온 게 아니라 그 이전에서부터 축적되어 온 경험의 산물이다.

‘여러분’은 약간 가스펠적인 터치가 있었어요.
멜로디는 그냥 팝 발라드인데 아무래도 가사 때문일 거다. 그 곡은 내가 동생의 아픔을 위로해주기 위해서 쓴 곡이기도 했다. 오빠로서 동생의 아픔을 달래주기 위해 만든 내용이다. 그때 윤복희가 광신자라고 할 정도로 신앙에 빠져있을 때였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내’가 너를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이 너를 위한 것이라는 그런 마음으로 노래를 만들었다고 하면 동생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곡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전체적인 모티브를 미리 동생에게 이야기했는데 아주 좋아했었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줄게 /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그 가사가 그렇게 해서 나온 가사다.

많은 세월이 흘러서 2011년 임재범이 < 나는 가수다 >에서 불러 ‘여러분’이 재(再)유행했지요. 그 곡을 듣고 어떠셨는지?
그 곡이 30년 만에 다시 살아났다. 30년 만에 ‘여러분’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감동적이었다. 윤복희가 부른 것과는 또 달랐다. 한창 ‘여러분’ 터지면서 인기를 얻을 때 임재범이 나를 찾아오기도 했었다. 와서 나한테 간증을, 신앙 고백을 했다. 그러면서 우리 학교(한국예술사관실용전문학교)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면서 한동안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기도 했다.  

선생님 어렸을 적 이야기인데 그때 많이 소개된 것처럼 정말 말을 더듬으셨어요?
엄청 더듬었다. 나중에 커서 활동하면서도 더듬었다. 물론 희한한 게 노래를 할 때는 말을 안 더듬었다. (웃음) 말더듬이가 고쳐진 게 성직자가 되면서부터다. 어떤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치료가 되지 않았는데, 성령에 의해서 나아진 거로 생각한다.

한때 뮤지컬 기획자로 활동하신 것도 기억납니다. 한창 화제였던 < 춤추는 함대 >도 선생님이 기획하셨죠?
그렇다. 그때 내가 키보이스로 미8군에서 패키지 쇼를 할 때는 코미디도 하고 다 했다. 드럼도 치고 노래도 하고. 뮤지컬 기획도 했으니 ‘만능’이란 찬사를 많이 받았다.

음악 인생에서 가장 영예롭고 자랑스러운 노래를 꼽으신다면.
한 곡으로 압축하자면 역시 ‘여러분’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윤항기를 만든, ‘여러분’ 같은 곡을 만들 수 있도록 해준 원동력은 역시 ‘별이 빛나는 밤에’다. 내가 처음 쓴 곡이기도 하고 가장 ‘윤항기다운’ 곡이다. ‘나는 행복합니다’, ‘이거야 정말’ 등등 다른 곡도 많지만 진짜 내 본래 스타일은 ‘별이 빛나는 밤에’ 그리고 ‘목이 메어’, ‘장밋빛 스카프’ 같은 노래들이다. 

키보이스 때부터 전국 미군 부대를 돌아다니셨는데, 부평 애스컴에 대한 기억은 어떠세요?
미 8군 쇼하는 분들에게 애스컴은 가장 큰 무대였다. 가장 클럽이 많은 데이기도 했고. 서울하고도 가까운 데다가 그 당시에 미 8군 기지 보급창이다 보니 거기서 쇼를 하게 되면 먹고 마시는 거는 아주 풍족했다. 그때가 한국에는 콜라도 모르고 햄버거도 없을 때인데 애스컴에서는 물자가 풍부하니 쇼 단체에게 미군들이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줬다. 그러니까 다른 부대 가는 거보다 애스컴 스케줄 잡히는 게 좋았다. 그날은 이제 가방 들고 가는 거였다. 먹을 거 챙기러. (웃음)

한창 애스컴 클럽무대에 서셨을 때가 1964~1966년 즈음일 텐데요.. 당시 멤버가 윤항기, 옥성빈, 김홍탁, 차도균, 차중락이었죠. 그때 선생님은 드럼을 치셨는데 노래는 어느 정도 하셨나요?
그때는 거의 다 같이 했다. 혼자 솔로로 하는 거는 (차)중락이가 한 ‘Mr. Tambourine man’ 정도고 그거 말고 나머지는 다 함께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드럼 치면서 노래한 사람이 나다. 그거를 우리가 ‘쎄시봉’에서 하는 걸 보고 나중에 또 드럼 치면서 노래를 한 가수가 배호다.  

키보이스 때 가장 기억나는 곡은요.
역시‘정든 배’다. 또 아이러니한 게 키보이스는 분명 록 그룹인데 그 곡은 또 완전 뽕이다. 그런데 그때 당시에 그게 뽕이 아니었으면 히트 못 쳤을 거다. 작곡가 김영광이 그걸 노렸다. ‘그녀 입술은 달콤해’도 같은 앨범 수록곡이었는데 실은 그게 타이틀곡이었다. ‘정든 배’는 밑에 깔린 노래였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취입해서 ‘정든 배는 떠난다’로 내기도 했고.  

애스컴 클럽 공연에서 미군들 앞에 노래할 때 레퍼토리는 어떤 곡들이었나요?
다 팝송이었다. 비틀스 초기 곡들은 거의 다 연주했다. ‘I want to hold your hand’, ‘She loves you’, ‘A hard day’s night’ 등등. 비치 보이스도 했고.. 

미군들은 어떤 곡을 가장 좋아하던가요?
그때‘이미테이션’이라고 해서 미국 가수들 모창을 많이 했었다. 그때 내가 레이 찰스(Ray Charles)랑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모창을 하고, 차중락이 엘비스 프레슬리, 차도균이 팻 분을 했다. 특히 내가 레이 찰스랑 루이 암스트롱 모창을 할 때는 미군들이 자지러졌다. 거의 졸도 수준이었다. (웃음) 일어나서 기립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그때 불렀던 노래가 ‘I can’t stop loving you’랑 ‘Hello, Dolly’였는데 다 까무러쳤다.

부평 애스컴의 우리 음악계에 남긴 의미는 뭘까요?
애스컴은 우리 키보이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 록 음악을 추구하고 그 세계에 꿈을 가지고 있던 젊은이들이 가장 쉽게 모이고 그 문화를 접할 수 있던 곳이었다. 왜냐하면 동두천 문산은 멀었고 부평은 서울과 가까웠다. 그래서 더 자주 갔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K팝의 뿌리가 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에서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다양한 팝음악을 시도했던 곳이고 그 음악들이 우리 음악의 다양성에 기여했다고 본다.  

선생님에게 음악은 뭐였을까요, 대중에게 윤항기의 음악은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나는 팝 음악을 할 때는 나 자신에 대해서 ‘앞으로 이렇게 되어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안 했다. ‘그게 아니면 할 게 없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내가 가진 재능이 그거다 보니. 그래서 그냥 음악을 죽기 살기로 하기도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해오다 보니 나중에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부터는 앞으로 내가 음악인으로서 무언가를 남길 수 있는 바를 해봐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곡을 쓰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변화가 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윤항기의 곡은 거의 다 그 당시 나의 삶에 대한 표현이었다. ‘라이프 뮤직(Life Music)’이 아닐까. 그걸 또 대중이 동의를 해주셨다. 그 삶을 인정해주셔서 ‘별이 빛나는 밤에’, ‘장밋빛 스카프’, ‘나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사랑해준 게 아닐까 싶다. 항상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인터뷰 : 임진모, 임동엽, 신현태, 이홍현
사진 : 임동엽
정리 : 임진모, 이홍현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