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일드의 풍자를 응용하면 “대다수 음악인구는 ‘롤링 스톤스’ 사람들이다.” “그들의 생각은 스톤즈의 의견이며, 그들의 삶은 스톤스의 모방이며, 그들의 열정은 스톤스를 인용한 것이다!” 록과 팝 사람들은 다수가 그렇게 자신을 스톤스와 동일시한다. 대중음악의 명제라 할 다양성 지향과 완전 동떨어진 이러한 단일적 범주화는 위험하긴커녕 도리어 자긍을 유발한다.
음악도 그렇다. 팬들의 수절처럼 스톤도 하나의 음악적 정체성에 절개를 바쳐왔다. ‘Angry’ 는 한사코 알앤비로 둘러싸인 록, 삐딱한 록을 고집하는 오래고도 완강한 태도의 산물이다. 솔직히 나이 팔순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에 곡의 질에 대한 감정(鑑定)과 평가는 난감하다. 포에버 영! 우린 그저 놀라움과 감탄 범벅이다.
K팝 타이틀 아래 눈부신 성공과 신기원 쾌척을 거듭하고 있음에도 우리 대중음악에 여전히 심리적 괴리감을 호소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그들은 다른, 새로운 스타일을 고대하지만 ‘천만과 억’의 매몰자본이 기본인 투우장에서 ‘대세’를 무시하기란 어렵다. 대세는 늘 폭압적이다. 이런 개성완박의 소나기를 피해 자신만의 색깔을 도모하는, 이른바 ‘디깅’의 흐름이 수년 전부터 이어진 ‘시티 팝’ 유행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적지 않은 그 소수들은 “이런 음악도 있는데…”는 말을 늘 입에 붙인다.
그들 덕에 오랫동안 수면 아래 있었던 ‘빛과 소금’이 굴착되고 발굴되고 융기되었다. ‘바이닐’ 열풍과 맞물린 그 트렌드는 빛과 소금의 LP가 출시되기만 하면 어김없이 완판의 결과로 이어졌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에게 저 옛날 이렇게 잘 매만진 사운드가 있었나?”하는 경이가 결집해 끝내 빛과 소금을 은둔의 장에서 끌어내 활동의 장으로 불러냈다는 사실이다. 1996년 5집으로 끝난 것 같았던 그들이 다시 신보를 들고 26년 만에 돌아왔다. 반갑다.
장기호의 ‘Blue sky’와 박성식의 ‘오늘까지만’은 그들의 컴백이 결코 이름값이 아님을 실증한다. 선법 작곡에 따른 전자와 모처럼 박성식 본인이 노래한 후자는 과거와 현재 시제의 교배는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 질의에 대한 의욕적 응답이다. 세월의 이끼가 배인 그들만의 아지트 속에서도 지금의 감수성을 응시하고 있음을 축약하는 두 곡 모두 후반부의 연주 하모니는 독자적 미학의 극치를 선사한다. 누가 이런 노래를 만들고 내놓겠는가.
이게 진정 ‘뉴트로’ 아닐까. 실로 시티 팝에 대한 다소 수다스런 관심이 증강해 주조해낸 거대한 성과물이 아닐 수 없다. 본인들도 시티 팝에 신세를 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 붐에 일게 된 재조명 분위기를 인식하고 30주년 기념 신곡을 염두에 두었으니까. 처음에는 서로 한 곡씩 두 곡만을 생각했으나 내친김에 앨범 제작으로 확장한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발매가 지체되었지만 이제라도 접하게 되었으니 천만다행이요, 무한희열이다.
핵심은 ‘대세’와 ‘현실’이란 논리에 기초한 외부의 불편한 추궁을 즐겁게 묵살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처음처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쾌한 ‘필라마네’든, 잔잔한 CCM 트랙인 ‘우리 모두에게'(크리스천인 둘은 앨범에 단 한 번도 가스펠 곡 수록을 뺀 적이 없다)든, 컨트리 냄새가 물씬한 ‘사랑의 묘약’이든, 연주곡 ‘비 오는 숲’이든 언제나 그랬듯 지극히 ‘빛과 소금적’이다. 곡마다 치밀한 사고가 꿈틀거리고 정돈된 울림과 세련된 공기가 넘나든다.
그렇다손 쳐도 일각에서는 대중성 부재에 대한 걱정스런 지적을 들이밀 테지만 두 사람의 오랜 지향에 대한 겸손한 고집은 견고하다. 균질적이고 획일화된 것에 대한 불굴의 거부! 앨범에 대한 “기존의 성향 그대로 유지하려 했고 빛과 소금의 음악을 알고 있는 분들에게 오랜만에 바치는 선물이라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장기호의 소감이나 “’음, 역시 빛과 소금이야!’라며 미소 보내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이라는 박성식의 말에 그게 깔려있다.
두 사람은 트렌드가 아닌 빛과 소금에 봉사했다. 솔직히 그들이 우리에게 건넨 ‘퓨전재즈’도 애초 비인기종목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샴푸의 요정’ ‘아침’ ‘그대 떠난 뒤’로 음악계에 새로운 파도를 불렀다. 음압만 강조하는 듯한 아이돌 팝 댄스, 힙합, 일렉트로니카로 대별되는 지금의 판 속에서 이번 음악도 ‘뉴 웨이브’의 기능을 시범한다. 하지만 ‘희소성’이란 낱말사용은 자제하자. 그것으로 앨범의 의미와 가치를 규정한다면 그건 우리 대중음악이 한두 가지 스타일에 쏠려있는, 병약한 상황인가를 스스로 자인하는 것이니까.
단지 쉬는데 깔리는 위로의 사운드트랙이 아니다. 단지 쉼표가 필요할 때가 아니라 취향 고양에 따른 음악 섭취의 별채를 원할 때 비로소 앨범의 유용성이 확립된다. 빛과 소금은 음악을 ‘듣는 것’보다 ‘찾아 듣는 것’을 원한다. 실로 어떤 이에게는 ‘경이’일 것이고 누군가에는 ‘경외’일 작품이다. 올해의 앨범이 벌써 정해졌다. 흥행의 압박을 넘어 음악 다양성의 영토구축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두 레전드의 노고를 칭송하는 것에 조금도 주저하고 싶지 않다.
– 수록곡 – 1. Blue sky (English ver.) 2. 오늘까지만 (Feat. 서출구, 최현우) 3. 필라마네(Hey! children!) 4. 우리 모두에게 5. 비오는 숲 6. 사랑의 묘약 (Feat. 장재환) 7. Lost days 8. 우리 모두에게 with fans 9. Blue sky (Korean ver.) 10. Reminiscence
새해 벽두에 만난 정동하는 그가 경연 프로그램에서 펼친 다채로운 퍼포먼스만큼이나 유연했다. <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 >에서 승승장구하며 자신을 각인했지만 솔로 명의로 발표한 곡들의 존재감이 옅었던 게 사실. 그러던 그가 경사를 맞았다. 작년 1월께 발표한 싱글 ‘추억은 만남보다 이별에 남아’가 서서히 인기를 높이더니 어느덧 노래방 애창곡이 된 것이다. ‘이 곡을 통해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채웠다.’라고 말하는 그는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진행형 보컬’이라고 했다. 시대가 요구하는 바에 대응해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바꾸어가고 있다는 설명. 팬데믹의 기간 그간의 여정을 되돌아보며 음악적 성숙을 이뤄냈다는 그는 록커의 정체성에 매몰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맡기고 싶다고 말했다. 어느덧 솔로 경력 10년 차에 접어든 정동하는 ‘부활의 보컬’ 다섯 글자가 주는 무게감 혹은 책무감에서 자유로워 보였다.
만나서 반갑다. 근황은 어떠한가? 코로나로 인해 평년보다는 못했지만 그래도 가수 소향과 공연을 계속 진행했습니다. 원래는 KBS2의 예능 프로그램 <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 >(이하: 불후의 명곡) 에 자주 출연했지만, 경연 가수의 이미지가 강해지는 것 같아 요즘엔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2012년 말부터 2013년도까지 고정 출연하다가 그 이후로는 특집 때에만 나갔습니다. (정동하는 우승 트로피 15개를 보유, 2021년 현재까지 < 불후의 명곡 > 최다 우승자다) 2016년에는 MBC 예능 프로그램 < 미스터리 음악 쇼 복면가왕 >에 출연해 36대 가왕이 되었죠.
경연 프로에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은? 경연 프로그램은 마치 F1 레이스 같았습니다. 500명 소규모 대중에게 노래의 매력을 전달하는 게 목표였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실험을 병행할 수 있었습니다.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면서도 전달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어요. 처음 노래를 시작할 때에는 기량을 선보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그 후로는 이야기, 메시지, 감정선의 전달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힘을 빼고 노래하게 되더라고요.
부활 활동을 하면서도 점차 가창에 힘을 빼는 느낌이었다. 예전에 선생님께서 하셨던 ‘목소리에 이끼가 낀 가수’라는 표현을 기억합니다. 예전 가요들을 들으며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하듯이 노래하는 것, 힘을 빼고 자기 안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메시지의 훌륭한 전달자로 성숙해가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이제 나의 대표곡을 얻었다!”
2021년에 나름의 성과가 있었다. 사람들에게 꾸준히 불리는 곡이 탄생했다. 개인적으론 ‘나름’을 넘어선 ‘최고’의 성과였습니다. 2005년 7월 데뷔하여 지금까지 활동하면서 ‘생각이나’, ‘사랑이란 건’ 등 부활 곡으로는 종종 언급되었으나 솔로 경력을 대표하는 곡은 없었어요. 그래서 ‘추억이 만남보다 이별에 남아’가 더욱 소중합니다.
감동적인 가사와 애절한 음색이 잘 어울린다. 소위 말해 ‘부르는 맛이 있는’ 곡이기도 한데, 가수 입장에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작곡자 문성욱이 부활 시절의 ‘생각이나’를 듣고 음악의 꿈을 키웠다고 합니다. 훗날 작곡가로 데뷔해 저와 꼭 작업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고 해요. 그 친구는 꿈을 이룬 셈이죠. 이번 곡에서 ‘생각이나’의 장점과 감성을 재현하려고 했는데 유튜브 댓글을 보면 대중도 그 의도를 파악하셨더라고요. 히트곡을 향한 갈망, 좋은 음악으로 대중에게 다가가고픈 열망이 결합해 좋은 시너지를 낳았습니다. 일종의 노래방 도전 곡처럼 된 것도 성공 요인입니다. 부르기에 너무 어렵지도 않고 그렇다고 마냥 쉬운 곡도 아니라 많은 분께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정동하에겐 여전히 록커의 이미지가 강하다. 저는 록커의 정체성, 록 음악을 해야겠다는 의무감은 크게 없어요. 제 음악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이 상태가 그냥 좋을 뿐입니다. 틀에 갇히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 한몫하는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해 흘러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떠한 길이 생기더라고요.
코로나 시대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가수들이 특히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따지고 보면 가수는 백수와 한 끗 차입니다. 시간이 생긴 김에 대학교 학사 졸업을 하고 대학원 한 학기를 마쳤습니다.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는 생각에서요. 그간 바빠서 하지 못했던 것을 하나둘 채워가는 중입니다. 레이싱도 작년에 단 두 번 나갔지만, 행복한 경험이었습니다.
음악적인 측면에서는 어떤 발전이 있었나? 그간 무대 위에서 노래하기에 바빴지 제 음악을 돌아보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여태까지 발표한 앨범들과 직접 무대 연출을 맡았던 < 불후의 명곡 >을 점검하며 부족한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예전에는 흉성의 구사 빈도가 높았다면, 지금은 비강을 많이 사용하는구나.’라는 식으로 변화 과정이 짚어가며 가창의 이해도를 높인 것 같습니다.
“힘을 빼고 말하듯 노래하며 시대에 맞춰가고 있다!”
정동하 보컬의 핵심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다른 가수들과의 차별점은? ‘진행형 보컬’이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연구하고 발전하려고 해요. 제 가창을 완성형으로 간주하고 연구를 멈추면 시간이 쇠퇴하게 됩니다. 시대마다 음악이 변하잖아요. 옛날 노래를 주로 트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면서 과거 음악이 시대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음향 장비와 연주, 편곡 스타일, 악기 상태 같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당대의 숨결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드라마와 영화 속 연기가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처럼 노래에서도 과한 기교의 사용이 어색해진 느낌이에요. 힘을 빼고 말하듯 노래하는 표현법으로 시대에 부응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부족한 면은 보완하고 장점은 살려야겠죠.
‘진행형’이라는 얘기는 결국 그 시대의 감성과 호흡이 다르기 때문에, 현시대를 더 잘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추억은 만남보다 이별에 남아’가 이런 측면에서 호응을 끌어낸 것인가? 가급적 담백하게 부르려고 노력했습니다. 감정의 과잉이 아닌 담담함은 부활 시절 김태원 형님이 추구했던 바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진한 보컬을 선호하게 된다면 그 흐름을 따르려고 합니다. 저는 아직도 노래에 제 자신을 맞추는 편이고 그래서 곡마다 스타일이 다릅니다. (수줍게 웃으며) 아무래도 저는 < 히든 싱어 >에 나가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정동하의 대표적인 강점은 라이브 실력이 아닐까 한다. 언젠가 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을 생각해봤습니다. 제가 뭘 좋아하는지, 무엇에 가슴이 뛰는지에 대해서요. 그런데 저는 싱글과 앨범 녹음을 지속해서 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무대 자체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더라고요. 평소 다른 뮤지션 콘서트에 초청받아 가면 객석에서 손뼉 치는 것도 어색한 사람인데 제 무대가 되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 순간에 빠져들게 됩니다.
“무조건 많은 무대에 서고자 한다!”
최근 꽂힌 곡은 무엇이 있는가? 사실 요즘 음악을 많이 듣지는 못했습니다. 학구파처럼 음악을 찾아 듣지는 않지만, 소리에 민감한 편이라 한번 들으면 잘 잊지 않고, 그렇게 기억해 둔 음악을 편곡에 활용하곤 합니다. < 불후의 명곡 >에서 부른 ‘거위의 꿈’에서 ‘Over the rainbow’를 삽입한 게 그 예입니다.
최근에는 위켄드의 ‘Blinding lights’를 좋게 들어 < 유희열의 스케치북 >에서 커버했습니다. 예전에는 1980년대 드럼 머신 사운드의 인위성을 싫어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감성이 된 것 같아 오히려 특별하게 다가오더라고요.
위켄드의 강점은 역시나 좋은 송 라이팅일 것이다. ‘추억은 만남보다 이별에 남아’도 곡 자체가 좋다. 성공 가도를 위한 키포인트는 역시나 ‘좋은 곡과 만남’이 아닐까 한다. 그 의견에 공감합니다. 작년 10월에 나온 ‘너의 모습’이 소소하게 사랑받고 있고 바로 지난주에 네이버 웹툰 < 금혼령 >의 OST인 ‘사랑과 이별 사이’를 발표했습니다. 전주가 긴 것을 비롯해서 여러모로 ‘추억은 만남보다 이별에 남아’와 비슷한 결을 가진 곡이에요.
새해 첫 인터뷰인데 올해 계획을 묻고 싶다. 앞서 말한 것처럼 여유가 생긴다면 그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다만 한 해 계획은 8년째 동일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은 무대에 서서 관객 여러분들을 만나는 거예요. 무대가 되었든 유튜브던 팬들과 만날 수 있다면 가리지 않고 찾아가는 게 목표입니다.
오늘날 정동하를 만든 정동하를 만든 곡, 앨범 혹은 가수를 알려달라.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어릴 때부터 소리에 예민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종종 음정이 불안한 보컬 곡보다는 연주곡을 선호했습니다. 그러나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를 듣고 그런 생각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악기로는 표현할 수 없는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음악을 시작하게 만들었던 앨범은 퀸의 < Greatest Hits >입니다. ‘Bohemian rhapsody’, ‘Bicycle race’의 하모니에 감탄했습니다. 학창 시절 하모니 혹은 팀워크를 이룰 무언가를 찾고 있었고 그러다 발견한 게 밴드부였습니다. 처음에는 키보디스트로 들어갔지만 남자 학교에 건반 주자가 워낙 희귀해서 주목도가 높아지더라고요. 그걸 피하려고 오디션을 봤는데 어쩌다 보니 붙어서 보컬을 하게 되었습니다. 밴드부 보컬을 하면서 음악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게 퀸의 앨범입니다.
닮고 싶은 보컬리스트로서는 임재범 선배를 꼽고 싶습니다. 진성과 가성의 경계에 있는 ‘반가성’을 그분처럼 유연하게 쓰는 분이 없죠.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련한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면, 이번에는 오랫동안 업력을 지켜오며 지금의 문화도시 인천을 만드는데 공헌한 장소의 이야기를 담는다.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은 인천의 재즈클럽 ‘버텀라인’ 대표 허정선과 라이브 클럽 ‘락캠프’ 대표 정유천이다.
버텀라인과 락캠프에 대해 간략한 소개를 부탁한다. 허정선 : 버텀라인은 1983년에 연 인천 최초의 재즈 클럽이자 대한민국 3대 재즈 클럽이다. 스무 살 때부터 10년 정도 손님으로 오다 너무 좋아서 단골이 되고, 그러다가 스물아홉 살 때 인수를 해서 지금 27년째 운영하고 있다. 옛날에는 라이브 공연을 보려면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시대였다. 왜 우리가 홍대에 가서만 봐야 하냐 생각이 들기도 했고, 이 곳을 둘러보다 공간의 크기와 분위기가 라이브 공간으로 훌륭하다는 생각에 시작하게 됐다.
정유천 : 락캠프는 1997년 부평삼거리에서 시작한 인천 최초의 라이브 클럽이다. 사실 옛 세대의 밴드는 연주할 수 있는 곳이 나이트클럽이나 고고장 같은 밤업소뿐이었다. 거기선 내 음악이 아닌 손님을 위한 음악을 해야 하다 보니 거의 팝송이나 록 음악을 커버해서 연주해야만 한다. 그러던 이제 1990년대 중반부터 인디 문화가 태동하면서 홍대 쪽에 드럭, 프리버드, 롤링스톤즈, 빵 같은 라이브 클럽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남의 음악을 카피하는 것이 아니라 밴드 스스로가 창작한 곡을 연주할 수 있는 공간이 자리 잡는 걸 보고 인천에도 그런 공간이 필요하겠다 싶어 설립하게 되었다.
인천 재즈클럽 ‘버텀라인’ 대표 허정선
허정선 씨의 경우 버텀라인의 5대 대표로 알고 있다. 뒤의 빼곡한 LP는 초창기부터 보관해온 음반인지. 허정선 : 세어 보니 내가 5대더라. LP의 경우 처음 시작할 때보다도 양이 많이 늘었다. 거쳐 간 주인들이 다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인수 과정에서 개인이 애장하는 3분의 1은 가져가는 것 같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서로가 불문율이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추가하면서 하나둘 모았고 지금 80% 정도가 내가 모은 것들이다.
그렇다면 초창기와 비교해 봤을 때 다른 점이 있을까. 허정선 : 지금은 무대와 악기, 음향 장비가 구비가 되어 있지만 그때는 공연을 안 했기 때문에 무대가 없었다. 그리고 창문도 없었고. 한 10년 정도 운영하다 밖에 눈이 오는지 비가 오는지 보고싶어서 창문을 내었다. 그전까지는 캄캄한 창고 같았다. 처음에는 한쪽에 의자와 피아노를 두고 조그만 무대를 마련해 시작했다. 이후로 피아노는 그랜드피아노로 바꾸고, 테이블을 줄여 무대 공간을 조금씩 넓히고, 단을 올려 지금의 버텀라인을 만들게 되었다. 27년 동안 눈에 띌 만큼은 아니지만 꾸준히 고치고 다듬어 가고 있다.
버텀라인은 장소가 100년이 넘은 근대 건축물인 만큼, 특유의 빈티지한 분위기가 있다.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지. 허정선 : 깜짝 놀란다. 들어오는 입구라던지 바깥에서 외관만 볼 때는 이 공간이 크다는 생각이 안 든다고 한다. 막상 열고 들어왔을 때 뻥 뚫린 공간을 보면 다들 압도되는 분위기가 있다. 처음 여기 손님으로 왔을 때는 창문도 없었기에 아주 깜깜해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음악은 아주 크게 나오는데 천장도 잘 안 보일 정도로 어두웠으니까. 테이블에 촛불 하나씩 두고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점점 시야가 밝아지면서 눈에 하나씩 들어오는 곳이었다. 그때만 해도 오래된 건물에 천장을 높게 뚫어서 만든 공간이 많지 않았다.
인천 라이브 클럽 ‘락캠프’ 대표 정유천
락캠프라는 이름이 궁금하다. 정유천 : 1960년대 중후반, 정확히는 아홉 살 때부터 부평에서 자랐는데, 당시 부평에는 애스컴이란 미군 총괄 기지가 있었다. 그런데 보통 예하에 있는 부대들의 이름 앞에 거의 ‘캠프’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지금 남아있는 ‘캠프 마켓’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다 보니까 지역의 정체성을 담기 위해서 캠프라는 단어를 썼고, ‘락’이야 당연히 밴드들이 주로 하는 음악이 록이라서 붙이게 되었다. 포병 기지, 보병 기지가 있듯이 ‘락캠프’라는 이름엔 ‘록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기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처음 부평삼거리로 거점을 잡은 이유가 있을까. 정유천 : 과거엔 그 동네를 ‘신촌’이라고 불렀다. 보통 ‘신촌’이라고 하면 무언가가 들어오면서 새로 생긴 동네 정도로 해석이 되는데, 부평 신촌 역시 미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이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개발이 시작된 곳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20개가 넘는 클럽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지금은 일반화된 얘기지만 사실 이런 미군 부대와 클럽을 통해 서양식 음악이 점점 우리나라에 자리 잡았고, 당시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부평을 많이 거쳐 갔다. 어떻게 보면 대중음악의 뿌리와도 같은 곳이기 때문에 나 역시 명맥을 이어받아 부평의 지역 정체성을 확고히 다지고 싶었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 같다. 정유천 : 물론 있다. 라이브 클럽이 이익을 바라고 하는 업종은 아니기도 하고, 일단 너무 비싸면 운영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저렴하면서도 넓은 공간을 찾다가 그때만 해도 외진 동네였던 부평삼거리 쪽을 택하게 되었다. 처음에 자리 잡았던 공간이 한 80여 평 되니까 당시 클럽 중에선 아마 제일 컸을 거다. 웬만한 밴드들이 다 와서 자기는 이렇게 큰 공연장을 못 봤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좌) 버텀라인 전경 / (우) 락캠프 전경
버텀라인과 락캠프 두 곳은 모두 전문가와 중소벤처기업부의 심사를 거쳐 ‘백년가게’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이어가게’는 인천시에서 30년 이상 명맥을 유지한 점포에게 주는 명칭이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키는 것과 더불어 손님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인천의 세월을 머금은 두 장소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오랜 시간을 거쳐간 수많은 음악애호가의 발자국과 응원이 새겨져 있다.
가게를 오랜 세월 동안 유지할 수 있던 비결이 뭔가. 허정선 : 비결은 따로 없다. 이건 락캠프 사장님도 마찬가지일거다. 뭐랄까, 정말 자기가 빠져있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못 한다. 사실상 바깥에서 벌어서 여기를 메꿔야 하는 상황이니까. 그래도 이왕 하는 거 즐겁게 하고 싶다. 살아있는 동안 사람들과 행복한 에너지를 나누는 게 인생 모토다. 내가 버텀라인을 운영한 것만 27년이지만, 제가 여기 손님으로 온 것까지 하면은 사실상 인생을 같이 보낸 거다. 이곳에는 음악이 항상 있다. 내가 인수하기 전부터 음악을 좋아하던 사람이 버텀라인을 운영해왔고, 담긴 추억과 이야기가 너무 많다.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오래 하지 못했을 거다.
정유천 : 지금은 책임감이 있다. 락캠프를 지켜야 나와 오랫 동안 함께 해온 후배들이 설 무대가 남는다는 사명감이 있다. 그리고 나 또한 락캠프가 없으면 어디 가서 내 노래로 공연하기 힘들다. 특히 젊은 층을 위한 록 위주의 클럽이 많다 보니까 블루스 밴드가 공연할 수 있는 곳이 많지가 않다. 그래서 내 음악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서라도 락캠프가 꼭 필요하다. 앞서 이야기한 지역적인 이유도 있다. 부평이 클럽의 도시였다는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는 유일한 클럽마저 없어지면 부평은 음악도시도 아니고 문화도시도 아니게 되는 거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지만 결론적으론 내가 지킬 수 있는 데까지는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락캠프는 30년 이상의 업력을 충족하지 않음에도, 그 기준을 20년으로 완화시켜주는 국민추천제를 통해 ‘백년가게’에 선정되었다. 정유천 : 좋아하는 분들이 계셔서 나라에서도 인정해준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라이브 클럽은 업종이 따로 없고 법적으론 일반음식점과 동일하다. 일반 업종이 아니면 아예 유흥으로 받아야 한다. 근데 유흥은 손님이 노래하는 거니까 또 다르다. 그러다 보니까 운영에 관한 어려움을 공공기관에 얘기해도 다른 식당과 똑같이 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해 늘 아쉬움이 컸는데 백년가게에 선정되면서 24년 동안 이색적인 문화 공간으로 활동한 게 헛되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두 곳 다 정말 음악 자체를 사랑하는 분들이 많이 오는 곳 같다. 정유천 : 우선 기본적으로 부평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한테는 음악적인 DNA가 있는 것 같다. 최근에도 ‘에스컴 블루스 페스티벌’에 참여했었는데 공원을 둘러싼 관객 대부분이 50대 이상이더라. 잘 모르는 밴드는 이 사실에 의아해한다. 근데 부평 사람들은 환경적으로 외국의 팝이나 록을 듣고 자랐기 때문에 진짜 좋아해서 오는 분들이다. 정말 순수하게 음악을 즐기는 분이 많기 때문에 락캠프도 꾸준히 찾아주시는 것 같다.
허정선 : 우리는 전문적인 재즈 마니아도 오고, 평범하게 음악 듣는 걸 좋아하는 분도 온다. 특히 버텀라인은 신청곡을 받고 있는데, 이 신청곡이란 말에는 본인도 듣고 싶지만 남한테 들려주고 싶은 설렘과 기분이 담겨있다. 나 또한 다른 곳에 손님으로 갈 때는 난해하고 그런 것보다 이런 분위기에서 다같이 들으면 좋을 것 같은 음악들을 신청한다.
▶인천 재즈클럽 ‘버텀라인’ 대표 허정선
버텀라인에서 흘러나오는 곡을 들으면 비단 재즈만 다루는 공간은 아닌 듯 하다. 허정선 : 최근에는 가요와 팝도 틀어드린다. 물론 모두 틀어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틀어드리려 하고 있다. 예전에는 내가 고집이 굉장히 세서 가요는 절대 틀지 않았다. 그래서 손님과 싸우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화를 내며 나가는 분도 있었다. 지금은 그때 왜 내가 자존심 세우며 그랬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또 한편 생각하면 여태까지 그런 소신과 고집으로 이 가게를 지켜오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혹시 리스트를 살짝 볼 수 있을까. 허정선 : 여기 퓨전 재즈 허브 앨퍼트(Herb Alpert)의 ‘Rise’라는 곡이 있고, (장을 넘기며) 마일즈 데이비드, 쳇 베이커도 있고, 여기에는 콜드플레이와 에드 시런도 있다. 요즘은 크리스마스니까 캐롤도 많이 신청한다. 휘트니 휴스턴도 있고, 이글스의 ‘Hotel California’는 아직도 유명하다.
손님에게 곡을 추천해줄 때도 있는지. 허정선 : 추천은 잘 안 한다. 그냥 틀어놓고, 누가 좋다고 하면 알려드린다. 막 들어보세요 하는 성격은 아니라. (웃음) 나는 장사 스타일은 아니다. 주변 친구나 나를 아는 분은 어떻게 이렇게 오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참 불가사의라고 말한다.
가게가 오래된 만큼 국내외를 막론한 뮤지션들이 많이 거쳐 갔는데, 유독 기억에 남는다거나 재밌던 에피소드가 있나. 정유천 : 지금은 해체했지만 포(POW)라는 밴드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한 달에 1~2번 정도 청주에서 고속버스 타고 올라와서 홍대에서 한 번, 락캠프에서 한 번 공연하고 내려가던 친구들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들이 자기들은 음악을 하기 위해서 막노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해줬다. 일반 직장에서는 공연하게 되면 마음대로 빠질 수가 없으니까 현장에 나가 일을 일주일 동안 하고 그걸 여비로 하는 거다. 봄이나 가을처럼 날씨 좋을 때는 숙소 값도 아낄 겸 그냥 공원에서 노숙하고 오기도 한다고 말하더라. 열심히 하는 밴드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보통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으니까. 그런 열정적인 모습 때문에라도 잊히지 않는다.
허정선 : 한 프랑스 출신의 피아니스트와 트럼페티스트가 기억이 난다. 말은 안 통하더라도 몇 번 오가면서 보다 보니 서로 신뢰가 쌓여서 나중에는 호텔까지 대신 예약해주는 사이가 됐다. 어느 날 끝나고 회식을 하러 근처 감자탕집을 가는데, 같이 갈 건지 물어보니 흔쾌히 좋다고 하더라. 처음에는 걱정했는데 막상 가니 막 뼈다귀를 잡고, 소주를 마시고. (웃음) 그리고 술에 취하면 말이 다 통한다. 처음에는 경직되니 섞이기 힘들어도 어느 순간 믿음이 생기면 많은 것을 공유할 수 있다. 뮤지션들과 커뮤니티가 형성되는 곳인 만큼 얻을 수 있는 색다른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손님뿐 아니라 뮤지션도 단골이 많은 듯하다. 허정선 : 그렇다. 가게 주인과 연주자도 코드가 맞아야 한다. 잘 맞는 뮤지션은 해마다 연락을 주고받는다. 예를 들어 봄에 한 번 했으면 가을에 한 번 하는 식으로.
정유천 : 사실 라이브 클럽이 뮤지션에게 소중한 공간이다. 우리만 봐도 기타, 키보드, 베이스만 들고 오면 사시사철 공연이 되지 않나. 밴드에는 음악 생활의 산소 같은 곳인 셈이다.
혹시 지금의 단골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허정선 : 물론 오래된 공간이다 보니 옛날 단골은 오랜만에 와도 단골이다. 그래도 예전에는 오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통해 찾아왔는데, 요즘은 관광화가 잘 되어 있고 SNS도 활성화돼서 주말에는 젊은 친구들이나 먼 지방에서 새로운 손님이 찾아오곤 한다. 사실 주말에 와서 월미도 갔다가 짜장면만 먹고 가기 너무 아쉽지 않나. 중간에 공연까지 하나 보고 갈 수 있는 곳이 있으니 들리는 것 같다.
허정선 씨와 정유천 씨 두 분 다 부평 출생으로 알고 있다. 부평의 지역적 특성이 삶과 음악에 미친 영향이 있을까. 허정선 : 정말 많다. 내가 막내인데, 언니 오빠까지만 해도 우리 집이 한참 고생을 하다가 나 때부터 조금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집에 전축이 있었고, 또 미군 부대가 바로 옆에 있어서 LP판을 많이 살 수가 있었다. 우리 부모님이 음악을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음악을 끊임없이 듣고 자랐다. 중학교 때는 바로 옆에 ‘유니버셜클럽’이라는 클럽이 있었는데, 낮에는 밴드 연습 소리가 들려서 쉬는 시간에 계단에 앉아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기도 했다. (웃음) 그냥 음악이 삶에 같이 버무려져 생각지도 않게 늘 같이 있던 것 같다.
인천 라이브 클럽 ‘락캠프’ 대표 정유천
실제로 정유천 씨는 ‘정유천블루스밴드’의 이름으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정유천 : 시작은 초등학교 시절 학교 밴드부를 하면서 관심을 가졌지만, 음악이 삶이 되어버린 결정적 계기는 군대다. 밴드 활동을 이어가던 도중 군대에 가야 하는 시기가 왔는데 그때 친구가 해군 군악대에서 기타리스트를 뽑는다는 소식을 알려줬다. 그렇게 합격을 해서 기타리스트로 입대를 하게 됐다. 당시에 복무 기간이 35개월, 거의 3년이었으니까 말 그대로 군대에서 기타만 치다 나왔다. 그러다 보니 음악하고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작년부터 코로나 사태로 인해 많은 공연 공간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 운영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정유천 : 라이브 클럽들은 커 보여도 사실 굉장히 영세하다. 일단 길 가다가 우연히 들어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 락캠프의 경우 주로 방문하는 분들이 소수의 마니아라 영업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게 이익을 보는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24년 동안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장 컸고, 락캠프가 장소를 계속 이전한 것도 어떻게 보면 그때마다 망해서 상황에 맞춰 장소를 옮긴 것뿐이다. 더군다나 장소 이전 사실을 많은 단골분들이 모르기 때문에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허정선 : 백년가게와 이어가게에 선정되긴 했지만, 코로나 시국에서 문을 닫는 거는 한순간이다. 내가 닫고자 해서 닫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늘 조마조마하다. 사실 지금도 현실적으로 힘든 상황이다. 버틸 때까지 버티며 이어갈테지만, 음악도시 인천에 맞게 현실적이고 꾸준한 지원등의 대안이 절실하다.
이런 상황이 참 안타깝다. 정유천 : 일단 코로나 이전과 비교해보면 여러모로 예전 같지가 않다. 어쨌든 관객 수도 많이 줄었고.
허정선 : 그래도 한편으로는 만약 문을 닫게 되면 ‘그래 오래 했다’ 하면서 웃으며 갈 것 같다. 별수없지 않나. (씁쓸한 웃음)
작년과 올해 버텀라인과 락캠프에서 인천 펜타포트 라이브 클럽 파티가 있었는데, 이런 비대면 공연에 대해서 각자의 생각이 듣고 싶다. 정유천 : 솔직히 말하면 마지못해서 하는 일이다. 관객은 공연에서 정말 중요한 요소다. 관객이 많지 않더라도 눈앞에 있어야 서로 교감이 생기는데, 없으면 분위기가 하나도 안 난다. 솔직히 공연자로서도 재미없고 공간을 운영하는 사람으로서도 재미가 하나도 없다. 울며 겨자 먹기로 영상을 남기지만 실제 연주가 주는 울림에 비교하면 10분의 1도 전달이 안 된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라도 해야 밴드나 클럽 둘 다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인다. 대면 공연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취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본다.
허정선 : 사실 공연비나 대관비가 중요한 게 아니지 않나. 버텀라인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공간인데, 사람이 10명이라도 피드백을 주고받아야 한다. 사실 백신 패스나 PCR 검사를 도입하면 되지 않나. 문화예술 방면은 유동적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너무 확고한 면이 있다. 눈앞에서 뮤지션과 호흡할 수 있는 그런 공연을 봐야 한다.
더욱이나 정유천 씨의 경우에는 공연 경험이 많으니 크게 다가올 것 같다. 정유천 : 일단 라이브는 사람이 적어도 너무 재밌다. 공연을 보러 오는 분이라면 무조건 반응이 보이니까 그런 재미가 있는 것 같다. 라이브는 라이브다.
최근 코로나 방역 수칙에 따라 영업 시간이 21시로 제한됐다. 소상공인의 입장에서 어려움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허정선 : 공연이 있던 없던 영업시간에 제약을 받으니 너무 힘들다. 평일은 손님을 받을 시간이 안돼서 힘들고, 9시에 문을 닫으니 7시나 7시 반에 공연을 시작하는데 재즈는 거의 7~80분을 진행하니, 공연이 끝나면 다들 정리하고 가느라 바쁘다. 뮤지션들과는 인사를 나눌 시간도 없다. 공연은 끝나고 그 느낌을 주고받는 피드벡과 여운을 느끼는 게 중요한데 말이다.
정유천 : 최근 코로나 때문에 1년 가까이 영업을 못 했다. 보통 사람들이 저녁 먹고 공연을 보러 오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일찍 시작할 수가 없는 환경인데 영업시간까지 9시로 제한해버리니 정상적인 운영이 불가능하다. 지금 장소로 이전한 건 6월인데 11월까지는 영업도 못하고 임대료와 가게 운영비만 계속 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버텀라인과 락캠프를 찾아올 이들에게 가게를 즐길 수 있는 팁을 준다면. 허정선 : 평상시에는 손님이 많지 않아 오셔서 편하게 음악을 신청하시면 된다. 없는 음악은 틀어줄 수 없지만, 되도록 다 들려드리려고 한다. 서로 소통하면 저 또한 기분이 좋으니까. 요즘에는 CD 없이 음원으로만 발매하는 것도 많아 태블릿을 설치했다. 좀 앉아서 느긋하게 기다리면서 음악을 듣고 또 말을 걸어주시면 음악 이야기나 동네 이야기등을 같이 나눌 수 있다. 주말 공연에는 전국적으로 훌륭한 팀들의 공연이 있다. 또한 공연 소식은 SNS에 늘 올려놓으니 미리미리 예약하시면 된다. 아, 그리고 우리는 철저하게 예매를 기준으로 한다. 예약을 안 해서 오셨다가 그냥 돌아가시는 분들도 계시니 참고해 주시길 바란다.
정유천 : 락캠프는 일단 어떠한 장르에도 제한이 없다. 이름은 록이지만 포크, 블루스, 재즈는 물론이고 전에는 국악 공연을 한 적이 있을 정도다. 상호에 얽매여서 한 장르만을 고집하진 않기 때문에 다채로운 진짜 라이브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MR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옮긴 장소는 관객석하고 무대가 아주 가깝다. 거의 무대가 없다시피 해서 공연자와 관객이 쉽게 교감할 수 있는 장소다. 멀리서 볼 땐 공연을 관람한다는 느낌이 들지만, 가까우면 관객도 같이 공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공간이 작아지면서 생긴 변화도 있어서 이게 현 락캠프 만의 장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인터뷰 : 장준환, 정다열 사진 : 정다열 정리 : 장준환, 정다열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팀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련한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은 하청일과의 콤비로 한국 컨트리 포크 음악의 대중화를 이끈 뮤지션 서수남이다.
큰 키에 서글서글한 미소, 재치 있는 입담을 갖춘 서수남을 방송인으로만 기억하는 젊은이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중심은 음악이다. 하청일과 함께 내놓은 ‘동물농장’, ‘팔도유람’ 등 무수한 히트곡은 세대를 막론하고 널리 사랑 받았고 ‘수다쟁이’는 한국 랩 음악의 시초로 평가받기도 했다. 격동의 1970년대, 서수남 하청일 콤비는 국민들에 웃음과 감동을 선사해준 마술사였다.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옛날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미8군부터 시작해 하청일과 공유한 전성기, 선풍적 인기를 끈 노래 교실까지 쉼 없이 달려온 그의 여정이 펼쳐졌다. 코믹함 속에 숨겨진 다양한 음악적 시도와 멈추지 않는 열정을 확인했다. 연예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아지고 대한민국이 문화강국이 된 것에 감사하다는 그에게서 대선배의 따스함과 인자함이 묻어나왔다.
선생님 요즘 근황이 궁금해요.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우선 코로나 때문에 공연은 못 하고 있다. 지금은 집에서 쉬고 있는 상태다. 주업이 방송과 강연인데 현 상황으로 인해 여러모로 외부 활동이 어려운 실정이다.
최근에 복면가왕에서 만나 봬서 반가웠습니다. 출연하시게 된 계기를 알 수 있을까요? 프로그램 출연진에서 연락이 왔다. 추석 때 나가는 방송이다 보니 고연령 시청자들에게 친숙한 얼굴을 찾고 있던 모양이다. 목 상태가 안 좋아서 기량 발휘를 못 한 게 아쉽다.
음악을 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소년기에 접한 AFKN(주한미군방송)의 영향이 크다. 라디오에서 종일 음악이 흘러나왔는데 특히 컨트리풍 곡들이 인상적이었다. 음악 잡지를 사서 본 것도 큰 영향.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잡지들을 명동 뒷골목에서 팔곤 했다.
그럼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겠다고 마음 먹으신 계기는요? 고등학교 3학년이니 입시 공부를 해야 하는데 나는 계속 라디오만 붙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명동에 있는 쎄시봉이라는 음악감상실에 출입하게 되었다. 거기에 가보니 미 8군 부대에서 나온 컨트리, 팝 음반이 가득했다. 그래도 영어엔 자신이 있던 터라 가사를 나름대로 해석해가면서 음악 탐구에 열정을 쏟았다.
기타는 종로 2가에서 처음 접했다. 세계 음악학원이라는 기타 교습소에서 ‘애수의 소야곡’이나 ‘황성옛터’를 연습했다. 어느 날 원장님께서 ‘베사메 무초’를 연주하시는데 그 룸바 리듬이 너무 강렬해서 ‘아름다운 멜로디 이외에도 또 다른 연주 세계가 있구나’란 걸 실감했다.
그렇게 기타를 잡고 미국 팝송들을 연습하면서 조금씩 실력을 쌓았다.
음악을 한다고 할 때 부모님과 갈등은 없으셨나요? 물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음악 하면 딴따라라고 부르며 경시하는 풍토였다. 어머니가 제 뒷바라지하느라 고생이 많으셨는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기타만 치고 있으니 얼마나 걱정이 심하셨겠는가. 결국 어찌어찌해서 한양대를 입학했지만, 공부는 뒷전이었고 음악 감상실에서 사는 게 일과였다.
그렇다면 영혼의 콤비 하청일 씨는 어떻게 만나시게 된 건가요?대학교 때 음악 동아리 활동하면서 만났고 2학년 때 함께 콩쿠르에 나갔다. MBC가 주관하고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꽤 큰 대회였는데 거기서 돈 깁슨의 ‘Oh lonesome me’를 불러 입상했다. 밴드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혼자 기타 반주와 노래를 곁들인 게 독특했나보다.
그 대회에서 하청일 씨와 일행을 만났다. 자기네들이 지금 ‘아리랑 부라더스’ 보컬 그룹을 조직하려고 하는데 한 명이 모자란다고 나보고 들어와 달라는 거다. 당시에 브루벨스라는 사중창이 있었는데 그들과 비슷한 모습을 생각한 것 같다.
그 이후의 일들도 조금 더 들려주세요. ‘아리랑 부라더스’ 멤버들은 악보도 다들 볼 줄 아는 실력파였다. 나는 멜로디 파트였고. 몇 개월 함께 연습하고 워커힐 호텔의 가야금 식당에서 오디션을 봐 합격했다. 그런데 얼마 후 어처구니없게도 지나치게 큰 키 때문에 그림이 안 좋다고 나만 빠지게 되었다. (서수남은 190cm에 달하는, 당시로선 드문 장신이었다.) 그 길로 미8군 각종 무대에 오르며 전문적인 음악 생활을 시작했다.
미8군 부대에 가보니 윤항기, 차도균이 락앤키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이더라. 나도 오디션을 봐서 호평과 함께 A 등급을 받았다. 웨스턴 쥬빌리 쇼라는 단체에 들어갔는데 나와 음악적 코드가 딱 맞아 만족스러웠다. 1967년부터는 컨트리 음악 방송 그랜드올오프리쇼에 참여했고 비틀스처럼 전기기타가 들어간 록 음악이 득세했던 시절임을 고려했을 때 참 인기가 많았다. 샤우터스, 김치스, 키보이스, 가이즈 앤 돌스 등 각양각색 밴드들이 활약하던 시기다.
서수남의 애스컴 추억은 또렷했다. 그에게 애스컴은 최신 문물에 눈 휘둥그레지는 신천지이자 본인의 끼를 풀어헤칠 안성맞춤 무대였다. 펑크(Funk), 디스코, 재즈 등 다양한 장르로 분화한 블루스에 비해 현대에 미치는 영향이 덜한 감이 있으나, 컨트리 음악을 향한 미국인들의 사랑은 자명하다. 엘비스 프레슬리, 밥 딜런 등 당대의 대표 뮤지션들도 음악 뿌리의 한 축에 컨트리가 있었다.
미군들은 향수를 건드리는 컨트리 곡을 들으며 애상에 젖다가도 서수남의 전매특허 코믹 퍼포먼스에 열광했다. 탄탄한 실력과 빛나는 아이디어로 군부대를 들썩이게 했던 그는 애스컴의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그 당시 어떤 곡을 부르셨나요? 물론 생생하게 기억한다. 항구도시다 보니 모든 물자가 인천으로 들어왔고 보급기지인 애스컴이 자연스레 문화 일번지가 되었다. 나를 비롯한 저희 밴드 멤버들이 다 같이 카우보이 모자 쓰고 AFKN에서 나오는 최신곡을 들려주면 반응이 정말 좋았다. 평소에 라디오 방송으로만 듣던 곡을 라이브로 보니까 얼마나 재밌었겠는가.
그 당시 어떤 곡을 부르셨는지 기억하실까요? 지미 로저스가 부른 ‘뮬 스키너 블루스(Mule skinner blues)’라는 고전 컨트리 곡을 자주 불렀고 요들송도 인기가 많았다. 우리는 컨트리 전문이다 보니 자니 캐쉬나 행크 윌리엄스의 모창을 해서 관중들의 반응을 끌어냈다.
서수남 하청일 콤비로 ‘과수원길’, ‘동물농장’, ‘팔도유람’, ‘수다쟁이’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기셨어요. 현인의 딸 현혜정과 듀엣 활동을 하던 시기에 MBC에서 PD로 활동하던 김경태씨가 코믹한 노래를 부르는 콤비를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곧바로 하청일을 떠올렸고, 이미 아리랑 부라더스의 이름으로 1964년에 녹음했던 ‘동물농장’으로 서수남 하청일 콤비의 서막을 알렸다.
‘동물농장’은 해리 벨라폰테의 ‘I do adore her’의 번안곡이라는 느낌이 안 들 정도로 획기적인 창작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벨라폰테의 곡에서 발상을 얻어서 만든 건 맞지만 번안곡이라기보단 제2의 창작에 가깝다고 본다. 녹음할 당시 암탉 소리 등 실제 동물 소리를 삽입하려 했으나 여건이 어려워 동물 모사를 한 게 외려 큰 인기를 끌었다. 공연할 때는 즉석에서 동물을 바꿔가며 모사를 했고 큰 웃음을 주었다.
‘과수원길’이라는 곡은 교과서에 인기가 워낙 대단하여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우리 콤비는 3개 방송사(KBS, MBC, TBS)의 어린이 프로그램에 출연해 동요를 많이 불렀다. 그래서인지 어린이 팬들이 참 많았다. 어느 날 ‘과수원길’을 듣는데 곡이 너무 좋아서 작곡자인 김공선 당시 신림초 교장에게 ‘이 곡 취입해도 될까요?’라고 여쭤봤다. 그렇게 허락을 받아 오아시스 레코드에서 녹음한 곡이 슈퍼 히트를 기록했다.
코미디언과 뮤지션을 아우르는 정체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그 정체성이 성공 비결이라 고마운 마음이다. 가수가 전업이었지만 구봉서, 곽규석 같은 대선배들이 우리를 참 예뻐해 주셨다. 이홍렬, 임하룡, 이용식 같은 코미디언 후배들과도 친분이 많다. 그리고 사실 진지한 곡도 안 알려졌을 뿐 다수 발표했다. 1970년부터 91년까지 활동했으니 여러 스타일의 곡을 보유할 수밖에 없다.
특히 ‘수다쟁이’는 현재 한국의 랩 음악의 효시라는 평가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동의한다. 그 곡 이외에 ‘버스를 타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설악산 양양 낙산사 대관령 고개 넘어 강릉 경포대 삼척’이라고 줄줄이 읊는 ‘팔도유람’도 랩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빨리 가사를 읽는 노래가 없었으니까.
오리지널 곡에 대한 열망은 없으셨나요? 1985년에 발표한 트로트풍의 ‘친구가 그립구나’가 자작곡이었다. 하청일과 헤어지고 나서도 작곡을 꽤 했다. 1992년엔 < 세상사는 이야기 >라는 독집을 발표했다.
1990년대에 인기를 구가한 노래 교실이 궁금합니다. 사실 그전에도 가곡을 함께 부르는 가곡 교실은 있었다. 반면 나는 일본의 가라오케에서 모티브를 얻은 가요 교실을 도입했다. 작곡가 길옥윤이 노래방의 시초가 된 150곡 정도의 가요 반주를 만들었고 그 곡을 노래 교실에도 사용했다.
꽃꽂이나 붓글씨 같은 정적인 취미생활이 주를 이룰 때인데 노래 교실은 훨씬 동적이지 않은가. 주부들 사이에 인기가 퍼져서 나중에는 회원이 천 명이 넘어갔다. 커다란 강당을 빌려야 했다. 그렇게 10여 년간 노래 교실을 이어갔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선생님을 자주 봐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한동안 노래 교실 활동을 하다가 2천 년도부터 다시 방송을 시작했다. MBC < 브레인 서바이벌 >에 패널로 나가면서 인기를 끌었고 방송 활동을 계속해왔다. 가수와 코미디언, 예능 패널을 아우르는 멀티 엔터테이너의 시초가 아닐까 싶다,
현재의 국내 대중음악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내가 데뷔했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발전했다. 1970년대에도 내가 주로 구사했던 컨트리와 디스코, 록 등 다양한 장르가 있었지만, 지금은 훨씬 다양한 스타일로 대중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어서 후배들이 자랑스럽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음악 인생을 돌아보신다면요? 대중음악은 늘 사랑받아왔지만 사회적으로 대접을 못 받고 무언가 소외되어 있었던 것 같다. 딴따라라고 불리던 시절에 데뷔했는데 언젠가부터 연예인이라는 칭호가 생기고 지금은 어디 가나 사랑받는 직업이 되었으니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상대적으로 짧아진 요즘 가수들의 수명에 비해 꽤 긴 시간을 활동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BTS를 통해 한국이 문화예술 강국임이 입증되었고 국민들의 많은 성원도 큰 힘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론 공연장을 비롯한 대중음악 관련 시설이 많이 부족하다. 국가적인 제도로 이런 부분을 개선한다면 더욱더 단단한 입지를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인터뷰: 손기호, 염동교, 장준환 사진 : 본인 제공 정리 : 임진모, 염동교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