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특집 Feature

IZM 필자가 사랑하는 뮤직비디오 (해외편)

팻보이 슬림(Fatboy Slim) – ‘Weapon of choice’ (2001)
< 007 뷰 투 어 킬 >의 미치광이 빌런을 연기한 크리스토퍼 워컨, 기이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 존 말코비치 되기 >의 감독 스파이크 존즈, 펑카델릭의 베이시스트 부치 콜린스, 그리고 빅 비트의 시대를 주도한 팻보이 슬림의 앙상블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진중하고도 자유로운 뮤직비디오를 탄생시켰다. 정장 차림의 크리스토퍼는 적막과 공허함이 감도는 호텔 로비에 멍하니 앉아 있다. 이윽고 ‘Weapon of choice’의 비트가 울려퍼지자, 호텔은 댄스플로어가 된다. 3분 40초간 리듬을 타고, 움직이고, 점프하고, 회전하고, 날아오르면서 가사처럼 이렇게도 저렇게도 마음껏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삭막한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이자 일탈이다. 2001년, 그렇게 팻보이 슬림은 수많은 샐러리맨 겸 내적 댄서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김태훈)

푸 파이터스(Foo Fighters) – ‘The pretender’ (2007)
파괴는 순간이다. 푸 파이터스의 강렬한 에너지를 분출하는 ‘The pretender’의 뮤직비디오에 복잡한 서사가 등장하지 않는 건 이때의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상징하는 바를 해석하는 게 의미 없을 정도로 직관적인 대립 구도, 저항 정신을 밀도 있게 표현한 음악의 색채, 비트와 밀접하게 닿아 있어 타격감이 넘치는 장면전환 등 영상의 모든 요소가 펑크(Punk) 그 자체다. 이 세상 모든 위선자를 부숴버리는 푸 파이터스의 카운터 펀치가 4분 30초간 신나게 작렬한다. (김호현)

패닉 앳 더 디스코(Panic! At The Disco) – ‘Girls/girls/boys (Director’s cut)’ (2013)
원 테이크의 아슬함을 즐긴다. 수백 번의 리허설을 거친다 해도 기어코 발생하고야 마는 돌발 상황, 그 무한한 변수를 극복한 필름이 포착해 낸 귀한 찰나를 좋아한다. 이 곡 또한 단 한 번의 촬영으로 기세를 이어 나간 원 샷(one-shot) 뮤직비디오다. 이십여 년 전 제작된 미국의 알앤비 가수 디안젤로의 아이코닉한 뮤비 ‘Untitled’를 그대로 리메이크했다. 알몸의 남성 뮤지션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열창하는 와중, 그 신체를 샅샅이 핥아 내리는 카메라가 거침없이 아래로 내려가다 장골 근처, 기막힌 타이밍에 시선을 거둔다. 간단한 촬영 기법만으로도 재치와 긴장감을 더한 것은 물론 주인공의 연기도 강렬하다. 사랑의 애환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프론트맨 브랜든 유리가 피사체의 힘만으로 끌고 가야 하는 원 샷 필름의 약점을 온몸으로 보완했다. 바이섹슈얼을 암시한 가사에 맞춰 디렉터스 컷 클라이맥스에 삽입된 약간의 반전이 곡을 독특한 방식으로 시각화했다. (박태임)

레이디 가가(Lady Gaga) – ‘Born this way’ (2011)
사랑하는 것을 떠나 충격과 깨달음을 안겨준 뮤직비디오다. 다소 기괴하고 충격적인 어쩌면 직접적이고 적나라하게 출산을 묘사한 도입부로 인해 눈을 깜빡이게 하는 시작을 지나면 이후 퍼포먼스는 그야말로 강력 메시지의 집합체다. 속옷 정도만 입고 ‘Don’t be a drag, just be a queen’ 그러니까 ‘행세하지 말고, 그냥 네가 돼라’는 간단하고 위대한 메시지를 계속해서 밀어붙인다. 시선을 뗄 수 없는 영상 속 캐릭터 및 시각 효과도 출중하다. 유니콘을 타고 내려온 레이디 가가가 제목 그대로 ‘태어난 대로 살자’며 전 세계 많이 어른이들의 “마더 몬스터(Mother monster)”가 된 작품. 이 뮤직비디오가 마음에 들었다면 2011년 53번째 그래미 시상식에서 그가 펼친 공연도 추천한다. (박수진)

시저(SZA) – ‘Doves in the wind’ (2017)
화려한 비주얼이나 파격적인 연출로 시선을 끄는 뮤직비디오가 있는가 하면 시각적 쾌감이 부족해도 코믹하고 컨셉츄얼한 시도로 재미를 주는 영상이 있다. 최근 몇 년간 최고의 알앤비 앨범으로 손꼽힌다고해도 손색이 없을 시저의 < Ctrl >에 수록한 ‘Doves in the wind’가 그렇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내세우는 가사와 켄드릭 라마의 컨셔스랩, 서정적인 얼터너티브 알앤비 사운드까지. 음악만들어서는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를 상상하기 힘들다. 무림고수들의 대결이라는 스토리를 짧고 전형적인 연출과 빈티지 질감의 대사, 어설픈 와이어 액션으로 담은 영상은1980년대 무협영화를 고증한다. 굳이 의미를 부여할 필요 없이 시저와 켄드릭 라마의 유쾌한 면모에 집중하자. (백종권)  

케미컬 브라더스(Chemical Brothers) – ‘Star guitar’ (2002)
사람들은 30초 정도 지났을 때 이 뮤직비디오의 패턴을 눈치 챘겠지만 그 시간이 되기 전까지 대부분은 예측 불가능한 시각적인 충격을 기대했을 것이다. 이유는 감독이 미셸 공드리이기 때문. 가사 없는 차갑고 날카로운 일렉트로니카 사운드와 건조한 영상이 만나 제3의 공간을 창조한 이 명작은 돈이 아닌 아이디어의 승리이자 영광이다. 때로는 ‘Star guitar’처럼 음악과 화면이 어울리지 않는 뮤직비디오가 충격과 감탄을 선사한다. (소승근)

맥 밀러(Mac Miller) – ‘Good news’ (2020)

‘Good news’ 뮤직비디오의 맥 밀러는 초연했다. 생애 마지막 작품이 된 < Swimming >에서 비극적 고통을 토해낸 젊은 아티스트에겐 ’삶‘에 대한 미련은 사라졌고, 고민이 떠난 자리엔 < Circles >란 텅 빈 허무가 머물러있다. 타인을 향해 미소 짓던 그였지만 당장 자신의 내일은 캄캄했고 이는 곧 정체를 알 수 없는 형형색색의 형태로 변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혼란을 뒤로하고 도달한 곳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우주. 맞이한 순간이 위안이었을까? 확신할 수 없기에, 우리는 그가 마련한 무(無)의 공간에서 단지 유영할 뿐이었다. 6분 30여 초. 한 사람의 생을 판단하기엔 턱 없이 부족한 시간. 다만 여과되지 않은 고뇌와 해방의 과정이 세상에 묵직이 내려앉았다. 맥 밀러가 견딘 무게가 큰 만큼 모두의 상처도 깊게 파였지만, 그가 느낀 우울의 끝엔 남은 이들을 위해 심은 위로가 작게 싹트고 있었다. (손기호)

에미넴(Eminem) – ‘Stan’ (2000)
누군가의 사랑은 잔인하고 강렬하다.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이 타인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 ‘Stan’은 뮤지션과 그에게 집착하는 팬의 시선을 빌려 비극적인 이야기로 엮었다. 1인 2역을 소화한 에미넴의 랩이 먼저 애증의 분노를 토해내고, 노랫말을 그대로 화면에 옮긴 광적인 스토킹 현장이나 강물에 차가 들이받는 컷이 차례로 입혀지면 이 서사는 곧 생동감 넘치는 현실로 다가온다. 비극으로 치닫는 이 울적한 영상은 감상자들에게 시커멓게 타버린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을 뇌리에 강하게 남겨버린다. 참, 이왕 ‘Stan’을 챙긴 김에 뮤직비디오 디렉팅을 닥터 드레가 맡았다는 사실과 2001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엘튼 존과 함께 한 라이브 버전도 잊지 말길. (손민현)

자넬 모네(Janelle Monae) – ‘Dirty computer’ (2018)
자넬 모네의 4집 < Dirty Computer >와 함께 제작된 동명의 장편 SF 필름은 규범에 맞지 않는 소수자들을 ‘오염된 컴퓨터’로 간주하는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제인 57821’로 분한 자넬 모네 역시 강제로 기억을 삭제 당할 위기에 놓이지만 그의 기억은 오히려 시스템을 교란하는 저항의 도구로 작용한다. 그것이 기억과 꿈, 환상의 경계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며 형식적으로는 다름 아닌 뮤직비디오였기 때문이다. 내러티브 필름과 뮤직비디오의 절묘한 결합, 정점에 오른 모네의 음악적 성취, 새로운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메시지까지. 시학, 미학, 주제 모든 면이 군더더기 없이 완벽하다. (신하영) 

피터 가브리엘(Peter Gabriel) – ‘Sledgehammer’ (1986)
정신 착란적이고 기괴하지만 놀랍고 감탄스럽다. 프레임 단위로 촬영물을 연결해 움직임을 구현하는 픽셀레이션과 점토를 이용한 클레이메이션 등 다양한 기법을 동원한 ‘Sledgehammer’는 가브리엘이 영국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제네시스 시절부터 제공한 시각적 충격파의 연장선상이며, 아하 ‘Take on me’와 더불어 1980년대를 대표하는 음악 영상이다. 아르침볼도의 환상화와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 개구진 동심(머리둘레를 횡단하는 기차)과 고약한 장난(치킨 댄스)이 뒤섞인 유미주의 종합선물 세트는 가브리엘 뇌 속 상상계의 출력물. 곡의 펑키(Funky) 리듬을 살린 스티븐 R. 존슨의 연출력은 < So >의 수록곡 ‘Big time’에서도 이어진다. (염동교)

케로 케로 보니토(Kero Kero Bonito) – ‘Break’ (2016)
음악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음악에는 시공간 이상의 힘이 있다. 평범한 일상의 순간도 음악과 함께 종종 특별한 경험으로 완성되곤 하니 말이다. 케로 케로 보니토의 프론트우먼, 사라 보니토는 과연 음악의 이런 마법같은 힘을 알고 있는 인물이다. 하트 모양 선글라스, 정체 모를 음료 한 잔과 함께 런던 곳곳에 걸터앉은 뮤직비디오 속 사라는 그 존재만으로 주위를 휴양의 한복판으로 바꿔 버리며 이 흥미로운 현상을 몸소 시각화해 보인다. 바쁜 일상 속 찰나의 휴식이 필요하다면, 양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Break’를 재생해 보자. 그곳이 어디든 친절한 가이드 사라 보니토가 당신을 달콤한 휴양지로 안내할 것이다. (이승원)

마이 케미컬 로맨스(My Chemical Romance) – ‘Welcome to the black parade’ (2006)
죽어가는 남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감성적인 피아노 선율. 단숨에 이목을 잡아끄는 오프닝이다. 거기에 아버지에 대한 가사의 언급과 화려한 사후세계가 등장하면 이 뮤직비디오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병원에서 숨을 거둔 환자가 저승으로 연결되어 자신을 격려하고 축복하는 이들을 만나는 장면을 목격하는 순간 죽음이 삶과 별개가 아닌 또 하나의 연장이라는, 노래의 가사 ‘Carry on’의 의미가 가슴에 꽂힌다. 저승의 악단 ‘블랙 퍼레이드’로 분한 멤버들의 격정적인 연기, 돈 냄새 나는 세트와 각종 효과 장치, 배경을 가득 메운 엑스트라 귀신들이 완성한 시각적 아름다움도 압도적인데, 무엇보다 그러한 삶과 죽음을 어루만지는 메시지가 따뜻하다. 마이 케이멀 로맨스의 ‘Bohemian Rhapsody’? 아니, 구태여 어떤 곡과 비교할 필요 없는 2000년대 최고의 록 명곡. (이홍현)

오케이 고(OK Go) – ‘Here it goes again’ (2009)
뮤직보다 뮤비! 음악보다 영상에 더 심혈을 기울이는 오케이 고 덕에 뮤직비디오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다. 무표정으로 진지댄스를 춘 ‘A million ways’, 스톱 모션을 이용한 ‘End love’, 그리고 화룡점정 러닝머신 퍼포먼스를 보여준 ‘Here it goes again’을 대표로 밴드는 지금까지도 기발한 작품을 찍어오고 있다. 뮤직비디오에 정성을 다하는 이미지 탓에 라이브를 못 할 것이라는 편견도 있었지만, 몇 년 전 국내 록 페스티벌에서 본 그들의 실력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오해는 풀렸고, 오케이 고는 음악을 못하는 게 아니라 영상 제작을 더 잘할 뿐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음악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임동엽) 

뱀파이어 위켄드(Vampire Weekend) – ‘Cousins’ (2009)
기발하다. 뱀파이어 위켄드의 커리어 중 가장 통통 튀는 작품으로 평가 받는 < Contra >에서도, 그중 가장 복잡하고 급진적인 곡인 ‘Cousins’의 뮤직비디오는 더할 나위 없이 밴드가 가진 활기와 상상력의 역동성을 내포한다. 골목길 위에 놓인 트레일을 반복 움직이며 간단한 변주를 주는 구조부터 충동적이다. <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의 감독 가스 제닝스가 구현한 독창적 프레임 속 원색 그라피티와 접착 테이프, 각종 저예산 소품들, 꽃가루마저 휘날리는 투박한 판타지가 현실과 화려하게 충돌한다. 큰 의도를 찾을 수 없어도 정신없이 빠져든다. ‘인디’가 가진 불특정 유쾌함을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한다면, 군말없이 이 영상을 보여주지 않을까. (장준환)

차일디쉬 감비노(Childish Gambino) – ‘This is America’ (2018)
팝과 힙합, 어디에도 접점이 없었다. 그럼에도 알고리즘은 이 충격적인 아수라장 한가운데로 나를 안내했다. 합창과 기타 연주가 어우러진 도입부만 들으면 평화로운 찬가에 가깝지만, 주인공이 뒤춤에서 총을 꺼내들어 기타리스트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내 머리도 함께 터졌다. 투신, 총기 난사, 집단 폭동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중에도 ‘이게 미국이야/정신 바짝 차려’라며 뚝심 있게 현장 고발을 이어 간다. 트랩 비트 위에 실제 흑인들이 겪었던 참상을 그린 덕분에 성찰의 탄환 한 발이 즉각 신체를 관통한다. BLM(Black Lives Matter) 운동에 재차 불을 지폈던 차일디쉬 감비노 조차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종종 드러냈다는 게 아이러니. 분개해선 안 된다. 당장 주변의 약자들만 돌아봐도 달라진 게 없다. 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게 모두의 현실이다. (정다열)

펄프(Pulp) – ‘Bad cover version’ (2011)
“네가 누굴 만나든 내 아류일 뿐”이라 말하는 프론트맨 자비스 코커의 심보 고약한 가사와 달리 뮤직비디오의 정서는 사뭇 따뜻하다. 유명 뮤지션을 초빙해 녹음 광경을 포착하는 캠페인 송의 형식을 비틀어 진짜 아티스트 대신 그들의 닮은꼴을 초대했고, 심지어 음원에는 이들의 어설픈 노래까지 담았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지만 이 우스꽝스러움 속에 공동체의 가치가 피어난다. 사실 우리 살아가는 모습이 그렇지 않은가. 각각 불완전한 엉터리, 가짜일 수는 있어도 한데 모여 화합하는 순간 삶은 어느덧 ‘진짜’가 되며 형편없는 모창은 사랑스러운 찬가로 바뀐다. “가짜들의 세상”이어도 아름다울 수 있는 법이다. 마음만 순수하다면. (한성현)

Categories
특집 Feature

서울재즈페스티벌 2023, 최고의 순간들

어느덧 15회를 맞은 서울재즈페스티벌은 올림픽공원의 접근성 높은 위치와 팝과 장르 음악을 아우르는 라인업으로 국내를 대표하는 음악 축제가 되었다. 풍성한 시각적 요소와 활기 넘치는 브랜딩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MZ세대와 맞물려 파급력을 드러냈다. 토요일과 일요일의 폭우 속에서도 관중들은 아티스트들에게 열띤 환호를 보냈다. 팬데믹으로 쌓인 음악 갈증을 맘껏 푸는 시간이었다.

통통 튀는 팝으로 사랑받는 영국 싱어송라이터 미카와 ‘Mas que nada’의 브라질 음악 전설 세르지오 멘데스, ‘쌀 아저씨’의 애칭을 가진 ‘The blower’s daughter’의 데미안 라이스가 헤드라이너로 섰다. 에이제이알과 시그리드처럼 핫한 뮤지션들에 태양과 악동뮤지션의 대중성을 더했고, < 라라랜드 >의 음악 감독 저스틴 허위츠과 신동 조이 알렉산더의 참여로 재즈 팬들까지 만족시켰다. 다채로운 뮤지션들 가운데 이즘 에디터들이 꼽은 공연들로 서울재즈페스티벌 2023을 들여다본다.

그레고리 포터(금요일)
달빛 아래 야외 공연장을 채색하는 이색적인 그루브, 금요일 메이 포레스트(88 잔디마당)의 마무리는 푸근한 인상을 지닌 그레고리 포터 밴드의 웅대한 멜로디가 맡았다. 2017년 그래미 최우수 재즈 보컬 앨범 부문을 수상한 < Take Me To The Alley >의 타이틀 ‘Holding on’과 ‘Hey Laura’ 등의 히트곡이 그의 성대를 지나 한강 둔치를 따라 흘렀고, 관중들은 손뼉을 치고 흥얼거리며 각자의 방식으로 축제의 첫날 밤을 만끽했다. 덥수룩한 수염에 볼까지 덮는 모자를 어김없이 걸친 포터가 자기 인생을 처연하게 노래하면서도 걸출한 무대 매너로 초저녁의 흥을 충분히 돋운 덕분이다. 어릴적 영향받은 냇 킹 콜, 마빈 게이, 그리고 최근 별세한 티나 터너를 향해 존경을 표한 구간은 상승기류의 절정이었고, 한 시간 넘는 공연이 지루하지 않도록 콘트라베이스, 피아노, 오르간, 트럼펫 각 세션도 맛깔난 즉흥 연주로 그를 뒷받침했다. 그레고리 포터의 풍부한 노래들로 페스티벌의 여흥과 재즈의 즉흥적인 낭만까지 듬뿍 챙겼다. (손민현)

로버트 글래스퍼(토요일)
재즈와 힙합, 네오소울을 믹스한 2012년 작 < Black Radio >는 로버트 글래스퍼를 재즈 레이블 블루노트의 대표주자로 올려놓았다. 이 음반의 제55회 그래미 최우수 알앤비 앨범 수상을 두고 크리스 브라운은 “대체 로버트 글래스퍼가 누구야?” 실언했지만 글래스퍼는 ‘Who The Fuck Is Rober Glasper?’ 문구가 적힌 티셔츠 제작으로 받아쳤다. 이 일화처럼 유연한 그의 음악엔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 색채의 재즈 힙합과 하드 밥이 두루 녹아있고, 펜더 로즈와 목소리로 펼치는 블랙뮤직의 몽환계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도 잘 어울렸다. 2022년에 발매한 < Black Radio 3 > 수록곡 ‘Black superhero’와 로버트 글래스퍼 익스페리먼트로 발매한 ‘Find you’를 비롯해 너바나 ‘Smells like teen spirit’와 라디오헤드 ‘Packt like Sardines in a crushed tin box’, 버트 바카락의 명곡 ‘The look of love’를 본인만의 방식으로 풀어냈다. 데릭 호지(베이스)와 마크 콜렌버그(드럼)의 기교 넘치는 연주도 경악스러웠다.(염동교)

바우터 하멜(토요일)
한국인만큼 한국을 잘 아는 밴드가 무대에 설 때의 즐거움. 제3회 서울재즈페스티벌 2009로 첫 길을 튼 뒤 단독 콘서트와 각종 행사를 합해 합해 십여 년 동안 무려 스물네 번 한국을 방문했던 하멜이었다. 팬데믹이 아티스트와 한국 팬 사이의 오랜 연례행사를 지체시켰기에 3년 만에 재개된 이번 페스티벌은 그 어느 때보다 반가운 재회였다. 곁을 떠난 사이 잠시 잊힌 재즈 뮤지션이란 정체성을 각인시키듯 느긋하고 묵직한 ‘In between’으로 공백을 깨더니 빈티지한 스윙 질감의 ‘Legendary’가 이어졌고 대표곡 ‘Breezy’는 즉흥적인 밴드 연주로 색다른 편곡을 선보였다. 공연의 달인답게 자유자재로 분위기를 교체하기도 했다. 서정적인 분위기의 ‘Finally getting closer’나 추억의 첫 자작곡 ‘Nobody’s tune’, 공명의 신비로움을 활용한 신곡 ‘The spell’ 모두 적절하고 아름다운 쉼표였다. 까다로운 운반 문제로 근 몇 년간 지참하지 않았던 콘트라베이스를 가져올 정도로 하멜과 밴드 전부 애정과 성의를 갖고 찾아온 무대였다. 비록 페스티벌 테마곡 ‘Rosy day with SJF’가 ‘Rainy day’로 바뀐 궂은 날씨였지만 비 오는 날의 컴백 또한 무수히 많은 추억 중 소중한 하나가 되지 않을까.(박태임)

250(일요일)
일요일의 서울재즈페스티벌은 뽕으로 시작되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공연을 시작한 250의 모습과 레트로한 비디오 아트와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드는 그의 전신 영상이 대비되어 흥미를 더했다. 그는 시작부터 ’이창‘과 송대관의 ’네박자‘를 섞어 보였다. 처음에는 다소 당황스러워 보였던 사람들도 이내 트로트에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으면서 비트는 점점 휴게소 뽕짝처럼 고조되었고, ‘내 나이가 어때서’가 공연의 정점을 찍었다. 마지막은 어김없이 그의 히트곡 ‘뱅버스’가 장식했다. 40여 분의 질주가 끝나자, 공연장 안의 모두가 그에게 박수와 탄성을 아낌없이 보냈다. 기성세대의 전유물로만 인식되어 온 뽕을 오랫동안 탐구한 그의 장인정신이 라이브에서도 빛나는 순간이었다.(김태훈)

에이제이알(일요일)
마지막 날의 헤드라이너 데미안 라이스만큼이나 사람들의 관심을 모은 이들은 세 명의 멧으로 이루어진 형제 밴드 에이제이알이었다. 최근 애플 광고음악과 다양한 스낵 콘텐츠에서 이들의 음악이 활용되며 국내에서도 큰 화제를 모은 만큼 늦은 시간에도 이들을 반기기 위한 인파가 올림픽체조경기장을 채웠다. ‘Burn the house down’이나 ‘World’s smallest violin’ 등으로 끝까지 페스티벌의 자리를 지킨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한 것은 물론 세트리스트의 마지막인 ‘Bang!’으로 마지막날의 하이라이트를 성공적으로 장식했다. 나름의 스토리라인과 함께 시작한 무대는 이내 사람들의 환호와 떼창을 유도하며 쉽게 보기 힘든 장관을 연출했다. 특별히 더 기억에 남는 점이라면 태극기를 손수 준비해 온 정성. 노래하는 내내 무대 곳곳을 누비며 그날의 가장 파워풀한 퍼포먼스를 선보인 이들은 비 오는 날씨에 메인 스테이지를 충분히 즐기지 못한 이들을 달래기에 충분했다.(백종권)

정리: 염동교
취재: 김태훈, 박태임, 백종권, 염동교, 손민현
사진: 프라이빗커브

Categories
특집 Feature

Love at first sight! 이즘 필자가 사랑하는 데뷔 앨범

누구에게나, 무슨 일에나 ‘처음’은 존재한다. 그리고 소중하다. 뮤지션도 마찬가지다. 한두 개의 앨범을 남기고 사라져간 원 히트 원더든 꾸준한 커리어를 기록한 아티스트든 세상에 내놓은 첫 작품이 가지는 아우라는 분명 남다르다. 설익은 어색함과 미숙함, 가슴을 가득 채운 열정과 풋풋함, 그리하여 신인만의 패기! 데뷔작만이 지닌 특별한 가치다.

이번 특집에서는 IZM 필자들이 사랑하는 데뷔 앨범을 골랐다. 선정작은 EP나 싱글 대신 보다 온전한 ‘작품 단위’로의 격을 갖춘 정규 음반으로 한정했다. 역사가 인정하는 명반과 개인적인 추억 가운데 무게추는 각 필자의 마음에 맡겼다. 한국인에게 주어지는 세 번의 시작 기회(양력/음력 1월 1일, 3월 2일 신학기) 모두 지나 2023년 달력을 반 가까이 넘겼으나, 이번 특집을 통해 잊고 있던 음반과 재회하거나 새로운 음악을 발견하면서 ‘처음’의 싱그러움을 되찾길 소망한다.

스톤 로지스(The Stone Roses) < The Stone Roses > (1989)

내 얕은 역사 지식과 로큰롤 편애 성향을 결부했을 때 1989년의 유럽은 두 가지 사건으로 요약된다. 첫째는 공산주의 체제의 종말을 알린 베를린 장벽의 붕괴이며, 둘째는 매드체스터의 기수 스톤 로지스의 등장이다. 그만큼 숭배를 갈망하며(‘I wanna be adored’) 세상에 나온 네 청년은 꽤 충격이었다. 영국 전통 기타 팝에 미국에서 건너온 애시드 하우스를 융합한 ‘She bangs the drums’, ‘Waterfall’, ‘Fools gold’는 잠들어 있던 댄스 DNA를 자극했고 존 스콰이어의 카멜레온 기타 연주와 탄탄한 리듬 파트, 그리고 이안 브라운의 무미건조한 보컬이 오차 없이 맞물린 ‘This is the one’, ‘I am a resurrection’은 불붙은 록 스피릿에 기름을 부었다. 록과 댄스의 공존을 모색해 기존 관행을 격파한 진짜 ‘저항 음악가’의 데뷔 앨범. 그렇게 < The Stone Roses >는 시대를 초월한 댄스록 교본으로 맨체스터에 가본 적도 없는 나와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김성욱)

리버틴스(The Libertines) < Up The Bracket > (2002)

2001년, 런던은 뉴욕의 스트록스가 < Is This It >으로 가한 일격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에 NME 웹진을 비롯한 영국 언론은 술과 마약에 빠진 젊은이들 리버틴스를 대항마로 세운다. < Up The Bracket >은 스트록스의 허세 섞인 뉴욕식 허무주의와 달랐다. 클래시의 과격함과 스미스의 문학성, 킹크스의 간결함 등을 한데 모으고 강렬한 기타 리프와 우아한 멜로디, 단편소설과도 같은 가사로 무장한 채 맹렬하게 질주한다. ‘Time for heroes’는 계급에 의한 절망 속에서 사랑을 노래하고, ‘Death on the stairs’는 삶의 무료함과 불안한 미래에 대해 절규한다. 앨범의 끝은 ‘나는 잘하고 있다’라며 되뇌는 ‘I get along’이 멋지게 장식한다. 모든 것은 영화 < 라이프 오브 브라이언 >의 에릭 아이들처럼 시궁창 속에서도 밝은 면을 보려는 영국의 정서 그 자체였다. 그들의 전성기는 언론의 과도한 부풀리기와 마약중독 등 여러 문제가 겹치며 빠르게 막을 내렸지만, < Up The Bracket >은 개러지 록의 고전이자 길 잃은 청춘들의 친구로 자리 잡았다. 고등학교 시절, 멘토라기보다는 옆에서 같이 푸념하고 욕해주던 동네 형처럼 다가온 소중한 작품이다. (김태훈)

브라이언 맥나이트(Brian McKnight) < Brian McKnight > (1992)

노래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브라이언 맥나이트는 알앤비 과목의 살아있는 교과서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팝송 ‘One last cry’가 수록된 데뷔 앨범 < Brian McKnight >에서 그는 거의 모든 트랙에 직접 작곡으로 참여하며 음악적 역량을 자랑한다. 데뷔 때부터 이미 완벽에 가까운 실력으로 음악 세계를 정립하였기에 브라이언 맥나이트는 앨범을 낼 때마다 자신의 데뷔작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가창의 측면에서도, 작법의 측면에서도 그건 힘든 일이었다. 그의 다른 음반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첫 작품의 완성도가 워낙 높았기 때문이다. (김호현)

잭 아벨(Zak Abel) < Only When We’re Naked > (2017)

데뷔와 첫 내한이 함께. 영국 현지에서도 이제 막 반응이 오기 시작했던, 먼 나라에서 혼자 품으리라 다짐하며 보고 싶단 마음조차 체념했던 젊은 뮤지션을 한국에서 그렇게 빨리 만나게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잭 아벨의 실물 라이브를 보고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그의 몸에 체화된 그루브가 짧고 강하게 튕기는 탁구공 리듬과 같았다는 것. 유소년 탁구 챔피언 출신인 이 청년에겐 몸으로 한계를 넘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열정과 자신감이 가득했고, 그 기세는 알몸일 때에야만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패기 어린 앨범 < Only When We’re Naked >로 표출됐다. 소울에서 영감을 받고 자란 힘찬 건반과 허스키한 목소리가 청춘의 불안과 의구심을 넘어 존재의 자각과 삶의 긍정을 차례대로 외치고 있었다. 숱하게 리플레이했던 트랙이 화자의 신체에서 형상화되는 걸 목격했던 순간. 작품이 완성되고 무대에서 피어나는 걸 지켜봤으니 이토록 강렬한 추억이 또 있을까. (박태임)

넉살 < 작은 것들의 신 > (2016)

한창 힙합에 심취해 있을 때는 동경하는 아티스트의 노랫말을 삶의 지침서로 삼으며 여러 번 곱씹어 보곤 했다. 그럴만한 가사를 발견하지 못해서인지 혹은 머리가 조금 차가워져서인지는 몰라도 그때의 음악을 들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더 잦은 요즘이지만 넉살의 < 작은 것들의 신 >은 여전히 나에게 강력한 울림을 준다. 2016년 하루 종일 학교 안에 갇혀 있으면서 내가 원하는 일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가장 많았던 시기에 ‘팔지 않아’는 얕지만 강고한 신념을 심어주었고 ‘밥값’은 위로와 함께 묘한 열정을 주입했다. 이제는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듣던 추억까지 안겨준 앨범. 공식적으로 VMC는 해체했지만 딥플로우의 < 양화 >와 함께 그들의 황금기를 열었던 넉살의 데뷔앨범은 아직 내 플레이리스트 안에 살아 숨 쉰다. (백종권)

자우림 < Purple Heart > (1997)

이 음반에 세월의 흔적은 없다. 먼지 쌓일 틈 없이 그만큼 오랜 시간 널리 사랑받은 히트곡이 가득하다. 수많은 뮤지션이 리메이크한 청춘 발랄 명곡 ‘일탈’부터 자우림 특유의 비애감이 넘실대는 ‘파애’, ‘안녕 미미’ 그리고 실험적 사운드로 점철된 끝 곡 ‘Violent violet’까지. 앨범은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자우림 음악이 놓여 있던 것 마냥 시작부터 내 음악을 맛나게 완성해 낸다. 김윤아 솔로 커리어에 빠져 자우림 흔적을 다시 좇았던 사람으로서 이 데뷔 음반이 가져다준 신선한 즐거움을 잊지 못한다. 데뷔 때부터 밴드 음악색을 정확히, 제대로 내뿜은 작품. 산울림 1집 < 아니 벌써 >처럼 이 앨범엔 세월이 지나도 늙지 않을 근사한 젊은 노래들이 놓여 있다. (박수진)

보스톤(Boston) < Boston > (1976)

싱글 히트곡 ‘More than a feeling’과 ‘Peace of mind’, ‘Foreplay/Long time’, 세 곡만으로도 내 구매력을 자극했다. 고등학교 때 산 보스톤의 데뷔앨범에는 이상하게도 낯선 노래가 하나도 없었다. 이유는 AFKN 라디오에서 들어왔던 노래들이 모두 이 한 장에 있는 수록곡이었기 때문이었다. 브래드 델프의 시원하면서 불안하지 않은 고음, 과하지 않은 탐 슐츠의 그루브한 리듬 기타, 신시사이저를 활용한 프로그레시브의 접근법까지 이 첫 음반은 1970년대 록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 Boston >은 이들의 데뷔음반이자 베스트 모음집이다. (소승근)

유엠씨(UMC) < XSLP > (2005)

가리지 않고 음악을 듣던, 흔히 잡식성이라 불리는 취향을 자부했던 어린 작가 지망생에게 유독 힙합만큼은 외면하고 싶은 메뉴였다. 거친 이미지는 물론이며 보다 선율에 귀를 기울인 그때의 감상법에 리듬 중심으로 구성된 랩이 두터운 편견의 벽을 뚫고 안착하긴 무리였으니까. 철저히 주류에서 벗어난 문제작 < XSLP >가 마음을 허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라임 없이 플로우로 메시지에 집중한 이야기꾼 유엠씨가 절대적이었다. ‘Shubidubidubdub’과 ‘Media doll part. 2’ 같은 사회 비판도 서슴없지만 ‘가난한 사랑 노래’, ’91’학번 등 청춘을 노래하는 그의 목소리가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폐부를 찔렀다. 장르란 한정적 분류를 떠나 핵심은 분명 진심이었다. 그것을 증명한 앨범을 접했을 때, 내 인생 또한 명확하게 변곡의 순간을 맞이했다. (손기호)

재지팩트(Jazzyfact) < Lifes Like > (2010)

북악산 자락을 낀 종로의 한 고등학교 동아리에서 출발한 힙합 그룹 재지팩트는 동년배보다 한발 빠르게 인생을 논했다. 랩으로 장난을 일삼던 동네 학생들은 ‘각자의 새벽’이나 ‘Smoking dreams’를 들으며 동향 선배들의 멋에 감화되었고 철없이 이를 모방하곤 했다. 조용히 삶의 지침을 수정했던 학창 시절의 소중한 경험을 반추하며 이 데뷔작을 재차 뜯어봐도 매력은 여전하다. 프로듀서 시미 트와이스가 ‘Moody’s mood for love’를 비롯해 여러 재즈곡을 샘플링해 꾸민 비트엔 세련미가 넘치고, 그 위에 수놓은 빈지노의 날카로운 언어는 동시대의 청춘에 색채감과 기대감을 부여한다. 젊음을 사용할 줄도 모르던 아이의 취향이 정착할 적당한 공간이었다. (손민현)

웬디 왈드먼(Wendy Waldman) < Love Has Got Me > (1973)

1970년 앤드류 골드, 칼라 보노프(Karla Bonoff)와 함께 포크록 밴드 브린들(Bryndle)의 멤버였던 웬디 왈드먼(Wendy Waldman)은 1973년 < Love Has Got Me >를 통해 솔로로 데뷔했다. 당시 < 롤링 스톤 >지가 ‘올해의 싱어송라이터 데뷔’로 그를 선정한 것은 당연했다. < Love Has Got Me >는 삶에 대한 긍정으로 빛나는 포크 앨범이다. 아침 기차와 해적선이 등장하는 모험이 곡마다 낭만적이며 멕시코 전통음악을 차용한 ‘Gringo en Mexico’, 조지 거쉰 스타일로 빗소리를 청각화한 ‘Waiting for the rain’ 등은 데뷔 앨범 특유의 결의로 찬란하다. 세상이 그를 합당한 환영으로 맞지 않았다는 점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안타깝다. 순수를 기억하고 싶을 때, 좌절된 여행에 대해 말하고 싶을 때 나는 이 앨범을 꺼내든다. (신하영)

건스 앤 로지스(Guns N’ Roses) < Appetite For Destruction > (1987)

‘Sweet child o’ mine’과 호주 밴드 오스트레일리안 크롤(Australian Crawl)의 ‘Unpublished critic’ 사이 유사점, ‘Rocket queen’ 속 과한 신음 등 퇴색한 감도 없지 않지만 처음 준 충격파는 못 떨쳐낸다. 검은 탑 햇에 깁슨 레스폴을 애무하는 슬래시와 부담스러운 짧은 바지에 뱀춤 추는 액슬 로즈가 그땐 멋져 보였다. 결정적으로 곡이 좋았다. ‘첫 감상에 세 곡 이상 꽂히면 취향 저격’이란 개인적 규칙은 ‘Mr. Brownstone’과 ‘My Michelle’, ‘Think about you’로 한도 초과했다. 가끔 < Appetite For Destruction >같은 음반을 두세 장 더 발매했으면 록 역사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섰을까 봐 의미 없는 상상을 해본다. 시대는 너바나와 얼터너티브를 원했지만 건즈 앤 로지스가 피운 아메리칸 하드록의 마지막 불꽃도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염동교)

제이클레프(Jclef) < Flaw, Flaw > (2018)

시종일관 흠(flaw)을 탐구하지만 흠잡을 여지가 없다. 벌컥 쏟아내다가도 여유롭게 흘려내는 랩과 보컬, 자극적인 기계음으로 귀를 간지럽히면서도 프로듀싱에는 일말의 느슨함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정형화된 형식을 유연하게 벗어나는 운율 구조와 그 시니컬함 속 짙은 연민까지, 수사마저 짜릿한 충격의 연속이다. 제이클레프(Jclef)와 < Flaw, Flaw >의 이 압도적인 등장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누구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은 물론, 크기를 가늠하기 힘든 재능이 주는 경외감,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했다는 학구적 희열마저 선사했다. 미지의 신대륙에 첫발을 딛는 개척자의 이 설렘, 수많은 음악 팬들이 새로운 얼굴을 그토록 열망하는 이유가 아닐까. (이승원)

칸예 웨스트(Kanye West) < The College Dropout > (2004)

좋은 글을 읽으면 글쓴이가 궁금해지곤 한다. 단순히 ‘글 잘 쓴다’라는 일차원적인 감상을 넘어 ‘이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일까?’ 하는 인간적인 호기심을 유발하는 글이 좋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 >로 칸예 웨스트와 사랑에 빠진 나는 < The College Dropout >으로 그에 대한 수많은 질문들을 느꼈다. 그리고 그 대답까지. 평범하지만 날카롭고, 허세 없이 솔직한 비판, 자기 서사의 메시지가 ‘모두가 예술가가 될 수 있다!’ 말하며 그와 나를 연결했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인간에게 오랜 친구 같은 기분을 느꼈다. 기적처럼. 뛰어난 완성도, 혁신적인 문법, 후대에 끼친 영향력 등 이 앨범이 가지는 가치는 많지만 그런 것들은 나에게 부차적이다. 그저 ‘Through the wire’를 들으며 생각할 뿐이다. 나는 이 인간을 사랑해, 그리고 영원히 그렇겠지. (이홍현)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 < Rage Against The Machine > (1992)

첫 음반의 첫 곡 제목이 ‘Bombtrack’이라니, 반할 수밖에. 불에 타들어 가는 도화선 도입부를 지나면 사운드는 정말로 폭발한다. 앨범 내내, 활동 내내 밴드는 그저 폭발한다. 음악 외에도 이들은 신념, 저항, 정치적 메시지를 강하게 표출하고 있었지만, 미성년의 아이는 음악밖에 들리지 않았다. 기타, 베이스, 드럼의 단출한 구성에 반복적인 리프와 직관적이면서 뒤틀리는 리듬이 이들의 개성이자, 모든 것. ‘기계’처럼 각 잡힌 완성도가 빠져나올 수 없는 마력을 뽐낸다. < 록, 그 폭발하는 젊음의 미학 >에 제대로 걸맞다! 메탈과 랩이 완벽하게 융합한 퓨전의 이상향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은 이 앨범과 함께 탄생했지만, 나는 이 앨범과 함께 죽을 것을 다짐한다. (임동엽)

저스티스(Justice) < Cross > (2007)

온몸이 압도되는 경험을 한 적 있는가. 일렉트로 하우스의 영원한 바이블, 저스티스의 < Cross >는 마치 천명을 따라 마굿간을 찾아온 동방박사처럼, 그리고 심장을 직격한 제우스의 천벌처럼 불현듯 다가와 자연스레 신체의 일부가 되었다. 지금의 음악 취향과 사고 체계가 이 앨범 한 장에 귀속되어 있다 한들 과언이 아니다. ‘Genesis’가 쏘아 올린 웅장하고도 지저분한 전율이 ‘Let there be light’의 불길한 창조 신화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때 한줄기 빛이 내렸고, ‘D.A.N.C.E’와 ‘DVNO’가 MTV와 댄스 플로어 시대의 광채를 완벽히 복원하는 순간 충성을 맹세했다. 지금 당장 신께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면, 이 앨범을 듣는 족족 그때의 그 소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장준환)

티아라(T-ara) < Absolute First Album > (2009)

본격적인 앨범 단위 청취를 넘어 실물 소유에 대한 욕구까지 주입한 티아라의 유일무이한 정규작. 그간 구매의 영역까지 발 들인 이를 만나지 못해 내심 아쉬움을 안고 살던 중 세상 다양한 장르가 뒤섞인 IZM에서 동지 몇몇을 조우했다. 분명 뜻밖이긴 했지만 귀여운 의성어를 앞세운 ‘Bo peep bo peep’의 파급력만 돌이켜 보면 당연한 접점이었다. 개인적으론 ‘처음처럼’, ‘Tic tic toc’, ‘Apple is a’처럼 흥겨움 속에 묘한 아련함을 스며 넣은 트랙에 훨씬 귀가 쏠렸다. 데뷔곡 ‘거짓말’을 만든 조영수의 알앤비와 트로트 질감부터 김도훈, 방시혁의 발라드 감성, 나아가 트렌디한 흥행을 이끈 신사동 호랭이의 펑키(Funky)함까지. 유수 작곡진의 분야별 강점을 ‘댄스’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묶어낸 덕분에 티아라는 다각적이면서도 독보적인 걸그룹 이미지를 취할 수 있었다. 취향을 잡아가던 청소년기에 꽂힌 결정타 한 방이 시대와 나 모두를 뒤흔들었다. (정다열)

브루노 마스(Bruno Mars) < Doo-Wops & Hooligans > (2010)

MP3와 스트리밍에서 다시 먼 시간을 돌아가 LP로 회귀하기까지, 어디에도 어울리고 찾게 되는 앨범이다. ‘Talking to the moon’, ‘Just the way you are’ 등 개별 트랙도 유명하지만 제목 전면에 내세운 두왑(Doo-Wop) 사운드를 바탕으로 알앤비, 소울 등의 흑인 음악을 조화롭게 빚어내어 전체적으로도 부드럽고 유려하다. 멜로디를 중심으로 구성하여 허스키한 보컬을 만끽할 수 있는 것도 < Unorthodox Jukebox >나 < 24K Magic > 등 강렬한 인상의 차기작보다 꾸준히 손길이 가는 이유다. 이 편안함이 < Doo-Wops & Hooligans >를 가끔 추억에서 꺼내보는 음반이 아닌 현재의 음악으로 만든다. (정수민)

위저(Weezer) < Weezer > (1994)

삶이 피곤하면 그냥 음악에 몸을 맡기고 머리를 비우고 싶다. 쉬운 음악이 필요한 순간, 그럴 때 위저의 데뷔 앨범 < Weezer >를 종종 찾게 된다. 멜로디는 직선적으로 착착 감기고, 파워코드 위주의 흥겨운 기타 연주는 다리를 수시로 들썩이게 만든다. 언제 들어도 귀여운 리드 보컬 리버스 쿼모(Rivers Cuomo)의 목소리 또한 빼놓을 수가 없다. ‘No one else’, ‘Buddy Holly’, ‘Holiday’ 류의 명랑한 트랙을 보좌하는 ‘Undone – the sweater song’, ‘Say it ain’t so’, ‘Only in dreams’ 등 살짝 무거운 곡의 존재감도 든든하다. 파란색 배경 앞에 어정쩡한 자세로 선 네 멤버의 모습처럼 음반은 쿨한 록스타보다는 쉽고 친근한 동네 친구에 가깝다. 그래서 정겹고, 사랑스럽다. 객관적으로도 좋은 앨범이지만, 충동적으로 동네 중고 서점을 찾아가 CD를 구매한 날이 알고 보니 발매 25주년이었던 사실은 여기에 각별함을 한 스푼 더한다. (한성현)

정리: 한성현
이미지 편집: 신하영

Categories
특집 Feature

[라디오를 켜봐요] Vol. 5 – 이즘 에디터의 라디오 시그널

전성기는 지났다. 스마트폰의 중심으로 무수히 쏟아지는 영상 플랫폼과 OTT 서비스에 더 익숙한 젊은 층에게 ‘라디오’는 세대를 나누는 낡은 매체의 기준처럼 다가올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 오늘날에도 라디오는 수많은 팬과 함께 굳건히 존재한다. 매일 꾸준하게 습관처럼 챙겨 듣는 마니아부터 문득 향수에 젖어 다시금 찾아오는 방문객 그리고 그 아날로그적인 특색에 반해 접하기 시작하는 호기심 많은 입문자까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작디작은 전파 속 흘러나올 음악과 이야기를 기다린다.

9년 전, 이즘에서 진행한 [라디오를 켜봐요] 시리즈의 마무리를 짓는다. 특집을 처음 시작할 때와는 많은 것이 바뀌었고 필자마저 전부 다르지만 저마다 라디오를 들으며 자라왔다는 사실만큼은 모두 같다. 저마다 추억과 애정이 꼬깃꼬깃하게 담긴 사연과 함께 이즘 필자들이 기억하는 ‘시그널 송’을 조심스레 소개한다. 자, 지금 이 주파수를 고정하기 바란다.

KBS 2FM 나얼의 음악세계 / 나얼 ‘Love dawn’
KBS 2FM에서 진행된 < 나얼의 음악세계 >를 들은 사람은 분명 흑인 음악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은 오래전의 알앤비를 묵묵히 틀어주던 나얼의 진행은 흑인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이라면 버티기 힘들 정도로 지루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새벽엔 좋은 음악이 있었다. 나얼 솔로 정규 1집에 수록된 인스트루멘탈 ‘Love dawn’은 침전하는 기분을 음악으로 집중시키는 시그널이다. 이 곡의 차분한 사운드를 듣고 있으면 순수함을 향한 그날의 동경이 떠오른다. (김호현)

KBS 2FM 볼륨을 높여요 / 바버렛츠 ‘Summer love’
학업에 집중하리라 마음을 먹기만 하면 주변의 온갖 것들이 흥미롭게 느껴지고는 한다. 그래서 그랬을까, 저녁 식사를 마치고 펜을 집어들 때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KBS 2FM의 < 볼륨을 높여요 > 속 악동뮤지션 수현의 목소리는 애석하게도 매일같이 나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그렇게 들뜨는 마음을 애써 외면하다가도 수현과 바버렛츠의 ‘Summer love’가 방송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면 나는 손에 쥔 펜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넷의 산뜻한 하모니가 나의 결심을 번번이 무너뜨릴 만큼 달콤했으니까. (이승원)

MBC FM4U 태연의 친한 친구 / 텐시러브(Tensi love) ‘Cake house’
학창 시절 조용한 자습실에서 두근대며 문자 사연을 보내던 기억은 꽤나 강렬하다. 라디오를 처음 접했던 중학생은 당시 소녀시대 태연이 진행하던 MBC FM의 < 친한 친구 >에 사연을 보냈고 설레는 마음을 안고 MP3 이어폰으로 전파를 찾았다. 흘러가는 야간 자율 학습 중에 3부 오프닝 곡 텐시러브의 ‘Cake house’가 흘러나왔고 무료한 시간을 버티게 해준 청취 이후에도 기계음으로 가득한 초창기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자주 흥얼거리곤 했다. 비록 사연은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라디오가 주는 동시성과 생동감은 특별한 경험으로 남았다. (손민현)

KBS 클래식FM 세상의 모든 음악 / 마이크 배트(Mike Batt) ‘Tiger in the night’
모 뮤직바 사장님의 단골 질문은 “< 세상의 모든 음악 > 알아요?”다. 마침 질문받을 당시 늘 듣던 종류 밖의, 클래식, 재즈 외 다른 여러 나라의 음악이 궁금하던 차였다. 덕분에 그 이후 오후 6시면 KBS 클래식FM을 찾았다. 시그널 음악은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마이크 배트(Mike Batt)가 작곡하여 로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Tiger in the night’. 하프와 오보에, 클라리넷이 두런두런 모이는 모양은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DJ의 변함없는 인사말과 어울린다. 얼마 전, 사장님은 나와는 오래 보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건네왔다. 새삼스러웠다. 같은 주파수로 접어들 때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여러 수단 중에서도 라디오는 밤의 호랑이처럼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다. (신하영)

KBS 2FM 이기광 가요광장 /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 ‘Winter games’
노래 듣는 것에 권태를 느낄 때는 라디오로 기분을 환기하곤 한다. 운이 좋으면 취향을 저격하는 음악을 발견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근황을 듣거나 새로운 정보를 얻기도 한다. < 이기광의 가요광장 >은 점심시간에 편안한 목소리와 트렌디한 선곡으로 라디오로서 역할은 물론 연예계 활동으로 다져온 입담을 통해 재미까지 놓치지 않는다. 하루 중 가장 생기 있는 시간대에 걸맞게 시그널 송은 위대한 작곡가 데이비드 포스터의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 주제가 ‘Winter games’를 사용한다. 시카고의 ‘Hard to say I’m sorry’, 휘트니 휴스턴의 ‘I will always love you’ 등 그의 수많은 대표곡에 비하면 덜 유명하지만 파워풀한 건반은 태양이 가장 높이 떠 있는 시간에 울려 퍼져 활력을 더한다. (백종권)

SBS 러브FM 정엽의 LP카페 / 정엽 ‘회전목마’
레코드판을 수집하는 입장에서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이름이다(DJ와 같은 ‘엽’자를 써서 그런 것도 있지 않을까). 개인 소장 바이닐을 가지고 실제로 공개 방청까지 다녀왔다. 턴테이블을 통해 음악을 틀어준다는 것과 더불어 다양한 라이브 무대가 특징이다. 디제이가 가수인 점을 살려 오프닝 시그널은 정엽의 노래가 SBS 러브FM의 103.5 MHz를 타고 매일 밤 저녁 6시 5분에 흘러나온다. ‘회전목마’라는 제목에 맞춰 놀이공원에서 들릴 법한 도입부 뒤 분위기는 잔잔하게 가라앉으며 진행자의 목소리와 프로그램의 무드에서 일맥상통하는 따스함이 전파를 타고 단번에 퍼진다. 아날로그, 라디오, LP, 음악, 뉴트로, 레트로. 옛것이 현재로 돌아온 지금의 대중문화를 반영해 그 시절의 자글거리는 감성을 간직했다. 오늘도 ‘카페’에 들러 음악 한 모금을 마신다. (임동엽)

KBS 1FM 생생 클래식 / 모차르트(Mozart) ‘The London sketchbook, K.15a’
누군가의 우아함을 사모하다 덩달아 고상해지는 경우가 있다. KBS TV <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 >의 열혈한 애청자인 나는 유려한 말솜씨를 가진 진행자 윤수영 아나운서를 동경하게 됐고 곧 그가 KBS 1FM < 생생 클래식 >의 오랜 MC라는 걸 알게 됐다. 정오를 알리는 이 라디오는 모차르트가 런던에 머물 동안 쓴 스케치 시리즈로서 제목이 없어 a부터 ss번까지 문자로 대신해 부르는 희유곡의 ‘K.15a’를 시그널로 삼았다. 영국의 지휘자 네빌 마리너의 통솔 아래 관현악기가 수다스럽게 빗발치며 한낮의 태양을 환희한다. 가끔 삶을 축복하고 싶을 때 들을 만한 음악이 추가됐다. 타인의 기품, 다정함, 전문성을 닮고 싶어 맞춰 놓은 주파수가 클래식 문외한에게도 취향이란 걸 심어주었다. (박태임)

MBC FM 임국희의 팝스퍼레이드 / 러브 언리미티드 오케스트라(Love Unlimited Orchestra) ‘Love’s theme’
1980년대 중반, 매일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MBC FM에서 방송된 < 임국희의 팝스퍼레이드 >는 나에겐 반 토막 프로그램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1부는 듣지 못했기 때문에. 아나운서 출신인 임국희 디제이의 약간 냉정한 진행과 선곡되는 노래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시원한 현악기로 시작하는 시그널 음악이 마음에 들었다. 이 곡은 저음으로 유명한 소울 가수 배리 화이트가 이끌었던 러브 언리미티드 오케스트라(Love Unlimited Orchestra)의 초기 디스코 스타일의 ‘Love’s theme’이다. 내가 주말을 기다렸던 이유 중 하나는 정각 오후 4시에 세련된 이 음악을 들을 수 있어서였다. (소승근)

MBC FM4U 세상을 여는 아침 최현정입니다 / 타카피 (T.A.-COPY) ‘케세라세라’
새벽 다섯 시. 하루를 온전히 마무리한 퇴근자의 안도와 이른 출근길의 불안과 설렘이 뒤섞이는 지점에 ‘세상을 여는 아침 최현정입니다’가 있었다. 아나운서 최현정은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로 각자가 지닌 선을 이어주며 청취자를 다독였다. 무엇보다 생각이 깊어질 무렵. 펑크 밴드 타카피가 부른 2부의 여는 곡 ‘케세라세라’는 직선적이고도 흥겨운 리듬으로 고민에 빠진 이들을 ‘될 대로 돼라’며 응원했고 작곡 학원에 다니고자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초짜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생에게 더할 나위 없이 큰 격려가 됐다. 오랜 세월이 지나 잠시 잊고 있었지만 불현듯 떠오른 그때의 온도와 풍경이 여전히 생생하다. (손기호)

CBS FM 한동준의 FM POPS / 어 플록 오브 시걸스(A Flock Of Seagulls) ‘Space age love song’
중학교 시절 처음 접한 CBS 음악FM의 < FM POPS >는 도회적이었다. 디스크자키 김형준의 쿨함은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서늘한 시간과 어울렸고 프로그램이 소개한 레벨 포티투(Level 42)의 ‘Love games’ 덕에 퓨전 재즈와 소피스티-팝에 매혹되었다. 나른한 오후 2시를 유쾌 상쾌로 깨우는 < 한동준의 FM POPS >에 이르기까지 방송의 시작을 알리는 노래는 같았다. 리버풀 출신 뉴웨이브 밴드 어 플록 오브 시걸스의 ‘A space age love song’은 신시사이저와 각종 소리 효과, 펑키(Funky) 기타의 합세로 가슴을 두드렸다. 제목처럼 공상과학적 사운드스케이프였다. 리드 보컬 마이크 스코어의 헤어스타일을 비롯해 멤버들의 패션도 시각적이었다. (염동교)

MBC FM4U 배철수의 음악캠프 / 비엔나 심포닉 오케스트라(Vienna Symphonic Orchestra) ‘(I can’t get no) satisfaction’
나에게 ‘Satisfaction’은 롤링 스톤즈가 아니라 비엔나 심포닉 오케스트라의 곡이다. 당연히 < 배철수의 음악캠프 > 때문이다. 해외 음악을 접하겠다는 일념으로 무턱대고 라디오를 듣게 되면서 ‘Satisfaction’은 내 안에 오프닝 시그널 송으로 먼저 뿌리를 내렸다. 마치 ‘헛, 둘, 셋’처럼 들리는 인트로부터 위트 넘치는 베이스, 현란한 현악 연주가 차례로 날리는 일격에 당하고 나니 나중에 찾아 들은 원곡과는 친해질 수가 없었다. 사실 오케스트라 버전도 2분 30초를 넘어가면 마치 마스크 벗은 맨얼굴을 처음 보는 느낌이다. 배철수 DJ의 “출발합니다!” 없이는 영 어색하다. (한성현)

MBC FM4U 푸른밤 종현입니다 / 샤즈(Shazz) ‘Heaven’
자정이 되기 직전 끝난 야간 자율 학습, 지친 하루가 끝나면 기숙사 룸메이트는 MP3로 라디오를 틀었다. 시그널송 샤즈(Shazz)의 ‘Heaven’으로 시작하는 MBC FM4U < 푸른 밤 종현입니다 >. 피아노 선율이 이끄는 포근한 재즈 사운드는 오늘과 내일 사이의 아늑한 공간으로 초대했다. 매일 도착하는 사연들과 그들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목소리는 다정하고 진중했다. 라디오는 늦은 새벽까지 공부할 때면 적막한 틈을 메웠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우리의 또 다른 친구가 되기도 했다. 여전히 ‘Heaven’을 들으면 3년 동안 자정을 지켜줬던 DJ의 사려 깊은 말들이 떠오른다. (정수민)

MBC 표준FM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 / 폴 모리아(Paul Mauriat) ‘Please return to Pusan port’
몇몇 기억은 어렴풋한 흔적으로 시작해 평생을 함께하는 문신이 된다. 어린 시절 차에 타기만 하면 뒷자리로 꾸물꾸물 넘어가 어머니에 기대 누운 채 그 조용한 떨림을 만끽하며 한가로이 졸던 나는 부모님이 즐겨 듣던 라디오 <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 >의 시끌벅적한 만담을 자장가로 삼곤 했다. 1984년 출항을 알린 이 장수 프로그램의 시그널은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폴 모리아가 첫 내한을 앞두고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경음악으로 편곡한 버전이다. 아직도 그 도입부만 들으면 강석과 김혜영의 힘찬 오프닝 멘트와 함께 여러 광경이 산발적으로 떠오른다. 반쯤 감긴 시야 너머로 핸들을 잡고 계신 아버지의 커다란 뒷모습, 앞유리창에 부딪혀 사방으로 퍼져 나가던 햇살, 그 사이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가로수까지. 원곡의 쓸쓸함이나 편곡의 경쾌함보다 내게는 기분 좋은 포근함으로 기억되는 이유다. (장준환)

MBC 표준FM 이윤석, 신지의 싱글벙글쇼 / 코요태 ‘순정’
인생 절반 이상을 < 싱글벙글쇼 >로 써 내려간 강석과 김혜영, 30년 넘는 세월의 호흡을 단숨에 이어받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전설을 고스란히 따라갈 수는 없는 법. 진행자를 교체해가며 방향을 잡아간 지 10개월이 지난 2021년 3월 뜻밖의 시그널이 울려 퍼졌다. 우렁찬 말 울음소리와 함께 ‘디스코 타임’을 알리는 코요태의 명곡 ‘순정’, 혼성 콤비의 부활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원곡자인 신지와 개그맨 정준하는 시트콤 < 거침없이 하이킥 >에서 이미 연기로 합을 맞춰본 만큼 재치 넘치는 만담으로 점심시간을 달궜고 20여 년 전 인기곡까지 소환하며 청취자층을 폭넓게 끌어안을 수 있었다. 2022년 9월부터 정준하 대신 동료 이윤석이 신지와 함께하고 있는 ‘최장수 라디오 프로그램’은 여전히 그 시절 그리고 오늘날의 순정을 담아 유쾌한 전파를 날리고 있다. (정다열)

MBC 표준FM 조PD의 비틀즈 라디오 / 루카 콜롬보(Luca Colombo) ‘Blackbird’
< 조PD의 비틀즈 라디오 >와 함께한 새벽 두 시는 불투명한 미래가 주는 압박에서 잠시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심야 라디오가 지닌 포근함이 심적 안정을 제공했고 우상으로 삼았던 비틀스의 음악에 집중할 수 있어 더없이 아늑했다. 매일 밤 리버풀 청년들의 위대한 유산을 소개해준 조정선 디제이는 최고의 명사였으며 방송의 문을 연 폴 매카트니의 걸작 ‘Blackbird’는 잠 못 드는 새벽 네 명의 비틀과 나를 이어준 징검다리가 되었다. 원곡과 달리 찌르레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프로그램 시그널은 이탈리아 기타 명인 루카 콜롬보의 핑거스타일 커버 곡을 사용했다. (김성욱)

SBS 파워FM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 / 제프 & 마리아 멀더(Geoff & Maria Muldaur) ‘Brazil’
기타 반주가 한쪽 귀를 어루만지며 시작한다. 휘파람과 함께 모든 세션이 합쳐지면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라는 나긋나긋한 오프닝 멘트가 들린다. 기분 좋은 아침을 만드는 음악과 목소리. 테리 길리엄의 영화 < 브라질 >의 삽입곡인 제프 & 마리아 멀더 부부의 ‘Brazil’은 암담한 회색 도시에 내리쬐는 따스한 한 줄기 햇살이 잘 표현된 곡이다. <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 > 또한 빌딩 숲에 둘러싸인 채 바쁘게 살아가는 이들의 편안한 쉼터다. 수더분한 말씨로 사연을 읽어주는 ‘아침창 아저씨’ 김창완과 부드러운 포크 ‘Brazil’의 오랜 동행은 20년 넘게 이어져 지금까지도 순조롭다. (김태훈)

MBC FM4U 4시엔 윤도현입니다 / 윤도현밴드(YB) ‘오늘은’
윤도현의 목소리는 멋지고 입담도 화려하다. 하지만 < 4시엔 윤도현입니다 >를 처음 들었을 때 무엇보다 내가 반긴 건 시그널 송 ‘오늘은’이었다. 11년 전 중학교 시절 처음 듣고 자유분방한 가사에 반한 ‘오늘은’. 경쾌하면서도 어딘가 나른한 데가 있는 이 노래를 하교 후 해가 지기를 기다리며 4시에 들었는데 11년이 지난 지금 똑같은 시간, 우연히 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 4시엔 윤도현입니다 >에서는 노래가 보컬 없이 반주만 나온다. 그래서 열심히 대본을 준비했을 윤도현 디제이와 작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프로그램이 시작할 때면 오프닝 멘트는 깡그리 무시하고 왕왕대는 기타 연주에 맞춰 그저 이 노래의 벌스(Verse)를 읊조리곤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YB의 곡도 ‘오늘은’이지만 윤도현도 가장 아끼는 곡이 ‘오늘은’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묘한 유대감이 든다. (이홍현)

정리 : 장준환
이미지 편집 : 백종권

Categories
Feature

 셀럽이 사랑한 Bag & Shoes 전시회 강연 – 팝 역사의 거목들과 그들의 음악스타일

대중문화는 종종 고급문화와 비교되며 천대받곤 한다. 관련 전시회도 상대적으로 적다. 문화 예술 관련 방대한 컬렉션을 자랑하는 이랜드 뮤지엄의 < 셀럽이 사랑한 Bag & Shoes >는 마이클 잭슨과 마이클 조던 같은 대중문화 기라성의 소장품으로 화제를 모았다. 임진모 음악평론가의 강연< 팝 역사의 거목들과 그들의 음악스타일 >는 < 셀럽이 사랑한 Bag & Shoes >의 대중음악 부문에 깊이를 더했다.

1980년대 대중문화는 두 MJ가 요약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 평론가의 표현대로 마이클 조던은 흑인을 뛰게 했고, 마이클 잭슨은 흑인을 춤추게 했다. 최고의 농구 실력과 카리스마로 GOAT(Greatest Of All Time)가 된 조던은 이름을 딴 브랜드로 파급력을 지속했다. 마이클 잭슨은 전 연령 다인종 팬덤을 이룩했다. 마빈 게이나 스티비 원더도 이루지 못한 성과였다. 두 MJ는 시대를 통합했다.

21세기 미디어는 20세기 명곡에 주목한다. 케이트 부시의 1986년 작 ‘Running up that hill (A deal with god)’은 미드 < 기묘한 이야기 >에 힘입어 빌보드 핫 100 3위를 역주행했고,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 사운드트랙은 아예 7080 팝 명곡을 긁어모았다. 전시회장에도 영화 < 록키 3 > 수록곡인 서바이버의 ‘Eye of the tiger’가 흘렀다. 젊은 세대들에겐 새롭고 기성세대의 향수를 자극했다.

대중음악 노랫말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밥 딜런과 아프리칸 아메리칸의 음악 유산인 가스펠과 블루스를 대중음악에 녹인 레이 찰스. 데뷔 앨범 < Ramones >(1976) 로 펑크(Punk) 록의 상징이 된 라몬즈와 클래식과 재즈를 도입한 프로그레시브 록의 대표 밴드 핑크 플로이드의 손때 묻은 소장품을 만났다. 대중음악의 계보도가 그려지는 굵직한 이름이다.

대중음악은 시대를 읽는 열쇠다. 마빈 게이는 < What’s Going On >(1971)은 베트남전을 논했고 빌리 홀리데이의 ‘Strange fruit’은 인종 차별을 꿰뚫었다. 2000년대 초 라틴 음악의 인기엔 미국의 경제 호황과 히스패닉의 구매력에 연결된다.

핑크 플로이드의 명반 < The Dark Side Of The Moon >(1973)를 좋아한다는 이십 대 청년은 “본 전시회를 통해 대중음악의 폭넓은 이해를 고대한다”라고 했다. 프랭크 시나트라와 아레사 프랭클린부터 올해 그래미 최다수상자에 등극한 비욘세와 21세기의 알파걸 레이디 가가를 아우르는 < 셀럽이 사랑한 Bag & Shoes >는 세대 간 교류를 내포했다.

취재: 염동교, 백종권
사진: 백종권
정리: 염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