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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Ravi) ‘범 (Feat. Chillin Homie, Kid Milli)’ (2021)

평가: 2.5/5

2005년 발매한 가리온의 ‘무투’부터 크루 불한당의 ‘불한당가’, 딥플로우의 ‘작두’ 등 국내 힙합은 꽤 오래전부터 샘플링 혹은 악기의 추가 등 다양한 작법을 통해 국악과의 교감을 모색했다. 라비의 ‘범’ 역시 국가무형문화재 제46호 피리 정악 및 대취타 이수자 곽재혁의 태평소 리드와 방수미 명창의 목소리로 한국적 색채를 더하며 선배들의 실험을 이어간다. 결과적으로 판소리의 구성진 창법으로 범을 반복하는 중독적인 후렴구는 곡의 중요한 지점에 있으며 그 높이가 모나지 않고 다른 소리와 조화롭게 섞여들기에 성공적이다.

다만 라비의 랩이 아쉽다. 안정적인 톤에 비해 부족한 가사 전달력과 의도를 알 수 없는 속사포 파트가 귀에 들어오지 않고 흘러가며, 준수하게 박자를 타는 칠린 호미와 실력을 증명한 키드 밀리에게 주인공 자리를 넘겨준다. 범 챌린지 등 공격적인 소셜 미디어 마케팅으로 성과를 얻고자 하는 ‘범’이지만, 내실 없는 주연 배우가 만드는 억지 흐름에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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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필순 ‘장필순 Reminds 조동진'(2021)

평가: 3.5/5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해진 온기가 마음을 감싼다. 조곤조곤 세상에 위로를 전하던 조동진이 나무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 지도 벌써 4년이 지났다. 오래도록 언더그라운드 포크계의 흔적을 남긴 그가 사라진 후 대부의 발자취를 뒤쫓던 후배들에겐 잔잔한 새벽이 찾아왔고 생전에 선배가 그러했듯 떠들썩하지 않게 슬픔을 견뎌냈다. 누구보다 가까이서 삶을 지켜본 장필순 또한 마찬가지였고 조용히 그의 노랫말을 떠올렸다. 어스름한 추억의 회고, < 장필순 Reminds 조동진 >이다.

조동익이 짚은 한 음에서 시작한 앨범이 점차 공간을 확장한다. 피아노를 중심으로 현악기와 전자음의 아르페지오 등 최소한의 악기로만 층을 쌓는 소리가 거대한 파장이 되어 동이 트기 전 희미한 빛이 물들이는 황홀경을 그려낸다. 끝을 알 수 없는 깊이에 묻었지만 이내 표면에 새겨지는 기억을 노래한 ‘물을 보며’와 낯선 사람의 귀익은 발자욱이 고독한 ‘흰 눈이 하얗게’, 적막한 희망을 드러내는 ‘해 저무는 공원’을 비롯해 앨범의 곡 모두가 몽환적인 엠비언트 사운드로 가득하다. 원곡의 서정을 간직하고 싶은 편곡 의도 아래 조동진의 따스한 메시지가 지금 세대에 은은하게 펼쳐진다.

장필순의 보컬은 감정을 절제하며 메신저에 충실하다. 가사와 멜로디를 표현하는 목소리는 자신을 덜어내기에 어떤 기교도 없이 원래가 하나인 양 음향 세계의 일부분으로서 조화된다. 장필순이 비워낸 틈 사이로 고스란히 채워지는 것은 역시 조동진의 감성이다. ‘제비꽃’, ‘나뭇잎 사이로’ 등 일상적인 소재에서 발현되는 위안이 차분히 청자에게 스며든다.

‘슬픔이 너의 가슴에’ 속 ‘내가 슬픔에 지쳐 있었을 때 그렇게 했던 것처럼’이란 이야기는 순간의 경험으로 타인을 어루만진 담백한 한 마디이며 누군가에겐 큰 버팀목이 된다. 데뷔 전 힘이 들 때마다 조동진의 3집을 들으며 고민을 녹여낸 장필순도 같다. 자신이 의지했던 아름다운 글귀와 선율을 더욱더 놓칠 수 없었기에, 장필순과 조동익은 < 장필순 Reminds 조동진 >이란 느린 호흡으로 따뜻했던 조동진의 숨결에 다시 한번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물 뿐이다.

-수록곡-
1. 물을 보며
2. 슬픔이 너의 가슴에
3. 아침이 오고 다시 저물고
4. 먼 길 돌아오며
5. 제비꽃
6. 흰 눈이 하얗게
7. 내가 좋아하는 너는 언제나
8. 나뭇잎 사이로
9. 해 저무는 공원
10. 그대 창가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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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잎들 ‘책이여, 안녕!’ (2021)

평가: 4/5

기형도의 시 ‘입 속의 검은 잎’에서 따온 이름처럼 청춘의 침묵에서 피어오른 부산 출신의 밴드는 수다쟁이처럼 할 말이 많았지만, 절대 산만하지 않았다. 2016년 데뷔 미니앨범 < 메신저 > 이후 몇 개의 싱글만을 발표하며 가다듬은 지 5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멤버들이 군대를 다녀왔고 나이를 먹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커지기를 거절하며 여전히 창작에 대한 절실한 욕구로 천진난만했다. 그렇게 검은잎들의 첫 번째 정규앨범 < 책이여, 안녕! >이 발매됐다.

앨범은 1980년대 맨체스터 밴드의 발자취를 좇는다. 검은잎들 스스로가 ‘쟁글팝’이라 명칭한 것처럼 중심은 1982년 데뷔한 스미스의 기타리스트 조니 마(Johnny Marr)가 선보였던 청아하게 찰랑거리는 징글 쟁글한 기타 소리이다. 더 나아가 드럼과 베이스를 더해 성숙해진 악기의 운용과 프로듀싱에 참여해 직접 사운드를 다듬은 3호선 버터플라이의 베이시스트 김남윤의 손끝에서 입체감을 부여받은 수록곡들이 비슷한 기조로 진행되는 앨범 내에서도 얽매이지 않고 눈에 띄는 개성을 지닌다.

느린 박자와 관악 세션을 통해 몽환적인 ‘로맨스에게’로 시작되는 파도가 아련한 기타 아르페지오의 ‘캠프파이어’를 지나며 점차 기세를 키운다. 다만 고저를 타며 균형을 유지하는 곡의 구성력과 보컬의 감각으로 멀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벤치에 앉아’까지 고조된 분위기를 1분 30초가 채 안 되는 어쿠스틱 넘버 ‘3:1-26’로 잔잔하게 환기하고, ‘파도소리만 들었어’로 이어가는 듯하더니 곧 격정적인 감정 묘사로 반전을 준다. 다시 한번 속도를 올리는 ‘수다쟁이’ 이후 중반부터 낮게 깔린 절규로 여운을 남기는 마지막 ‘꽃을 주세요’까지 내면의 투영 아래 투박하게 짜인 언어의 서사가 순풍이 되어 청자의 원활한 항해를 돕는다.

검은잎들 자체가 도슨트이자 전시관의 주체이다. ‘Britpop made in Busan’이란 그들의 표어처럼 과거를 재현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메시지를 덧씌운다. 가운데엔 온전히 우리말로 이루어진 가사가 있다. ‘서툰 사람이라 미안해’라며 직설적인 안녕을 고하는 ‘책이여, 안녕!’부터 고민이 주는 소음의 거부를 시적으로 그린 ‘비라도 나리면’까지 서러운 정서에 기반한 고집스러운 선율의 반향 위로 절제된 멜로디가 표현하는 감성을 작은 의도 하나 없이 낯부끄러웠던 기억을 기록했던 일기장처럼 가감 없이 써 내려갈 뿐이다. 30년 전의 확고한 레퍼런스를 끌어왔지만 현재 세대에게도 충분하게 스며들 수 있는 이유이다. 흐릿한 향수가 성장의 한 지점을 되새김한다.

검은잎들은 오에 겐자부로의 동명 소설에서 가져온 제목의 의미를 “소설의 작가는 죽지만 그가 쓴 책의 인물들은 영원히 산다.”라고 밝혔다. 이상향을 원하던 때묻지 않은 행보는 < 책이여, 안녕! >을 가공했고, 모든 곡에 추억이란 생명력으로 숨을 불어 넣었다. 세련 혹은 제시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지만 그들만의 방식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 견고하다. 단지 노래할 뿐인, 너무도 투명해서 서글픈 에세이는 어떠한 욕심도 담지 않기에 단단하게 맺힐 순수의 결정이다.

– 수록곡 –
1. 로맨스에게
2. 캠프파이어
3. 책이여, 안녕!
4. 벤치에 앉아
5. 3:1-26
6. 파도소리만 들었어
7. 수다쟁이
8. 잠든 너
9. 몇 개의 모스를 띄울게
10. 비라도 나리면
11. 꽃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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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BOBBY) ‘Lucky Man’ (2021)

평가: 2/5

바비의 처음은 강렬했다. 내로라하는 경쟁자를 제치고 < 쇼 미 더 머니 3 >를 우승한 것은 소속사의 도움 없이 오로지 자신의 목소리로 이뤄낸 결실이었다. 아이돌 래퍼란 의심을 거두고 실력을 증명한 그는 이내 에픽하이의 ‘Born hater’, 마스타 우의 ‘이리와봐’ 등에 참여하며 기라성 같은 선배들 사이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존재를 드러냈다. 남은 것은 결과물이었다. 다만 스타일의 다양성을 발현한 첫 번째 앨범 < Love And Fall >이후 4년여 만에 발표한 정규 2집 < Lucky Man >은 욕심이 가득하다.

타이틀 ‘야 우냐’는 거칠었던 무대 위 바비의 재현이다. 묵직한 신스와 베이스, 독특한 퍼커션 구성이 돋보이는 비트 위로 촘촘히 짜인 절을 쉬지 않고 내뱉는 트랙이지만 실속 없는 내용과 더불어 부족한 가사 전달력은 시끄러운 주변 소리에서 랩을 꺼내오지 못하고 묻히게 만든다. 후렴구로 흥이란 곡의 목적을 다소 회수하지만, 그마저도 맥락 없이 억지스럽다.

기획력의 부재는 앨범 전체에서도 나타난다. 최소한의 악기로 만들어진 ‘Rockstar’와 긴박한 ‘No time’을 거쳐 ‘Break it down’까지 타이트한 랩을 중심으로 꾸려진 파트를 앞에 두며 의도를 밝히는 듯하더니 ‘새벽에’로 시작되는 중반부터는 싱잉 랩, 이모 힙합 등의 감성으로 채워 넣는다. ‘내려놔’로 낮게 깔린 감정을 정리할 틈 없이 강렬한 록 사운드의 ‘Devil’로 마무리되는 후반을 더해 완급 조절의 실패로 생긴 급격한 온도 차가 매끄러운 감상을 방해한다.

그렇기에 ‘Skit 2’ 다음 등장하는 대중적 접근이 아쉽다. ‘주옥’과 ‘라일락’, ‘Liar’처럼 개별 단위의 매력적인 곡들이 있지만, 구역마다 비슷한 분위기로 뭉친 구조가 개성을 희석한다. 이에 명백하게 앨범을 나누는 스킷의 선택 또한 불가항력이다. 화자의 감정선을 따라 배치된 네 개의 장치는 이야기를 흐르게 하는 유일한 요소이지만 무리하게 갖춘 서사가 부자연스럽다.

방향이 모호하다. 뚜렷한 데뷔로부터 시간이 꽤 지났다. < Lucky Man >엔 자신이 가진 능력만큼이나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많았던 바비의 고민이 다분하게 느껴지지만, 해답은커녕 생각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자신의 장점을 과하게 집어넣은 포트폴리오가 흐릿하다.

-수록곡-
1. 야 우냐 (U mad)
2. Skit 1
3. Rockstar
4. No time
5. Break it down
6. Skit 2
7. 새벽에 (In the dark)
8. 라일락 (Lilac)
9. Ur soul Ur body (feat. DK)
10. Skit 3 (feat. 오마르)
11. 우아해 (Gorgeous)
12. Liar
13. 주옥 (Heartbroken playboy)

14. Skit 4
15. Raining (feat. JU-NE)
16. 내려놔 (Let it go)
17. D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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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하이 ‘Epik High Is Here 上’ (2021)

평가: 3.5/5

“자신의 유년을 에픽하이와 보냈다.”는 어느 팬의 말처럼 2003년 데뷔 이래 그들의 음악이 대중의 기억에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은 그룹이 만들어낸 고유의 감성 때문이다. 한 부분에 매몰되지 않고 문학적으로 풀어내는 감정의 형태는 인간의 체온과 닮아 있었고, 우울과 명랑 등 높낮이를 오가며 위로를 전달했다.

동시에 흐려졌다. 익숙해진 문법은 클리셰가 되어 오히려 과거를 돋보이게 만드는 지점이며, 개인의 상처를 소재 삼아 깎아 내려간 자기 고백의 일지 역시 반복된 난도질로 듣기 싫은 투정이 되어 버렸다. 따스한 온도를 지녔던 에픽하이조차 시간이 지나며 생긴 수많은 생채기에 마음이 마모되었고, 조금은 무표정하게 됐다. 세상과 선을 긋기로 다짐한 어른의 말로. 에픽하이의 열 번째 앨범, < Epik High Is Here 上 >이다.

‘Lesson Zero’가 메시지를 드러낸다. 레슨이라는 제목 아래 꾸준하게 에픽하이의 세계관을 관통하던 시리즈는 천재를 지칭했던 한 아티스트의 시선을 담고 있다. 어쩌면 거만하게 시스템을 비판해왔던 화자는 ‘이제 보여, 모든 답을 향한 내 질문은 나를 무릎 꿇게만 할 것이고 나를 0으로 되돌리기만 할 것을’이라며 패배를 선언했고, 그 무기력증은 앨범의 전반에 걸쳐 주요 서사로 작동한다.

명백한 주제 의식 아래 세련된 신진 세력을 녹여낸 프로듀싱도 주목할 만하다. 씨엘과 지코가 참여한 라틴풍의 ‘Rosario’부터 프로듀서 코드쿤스트가 주조한 ‘정당방위’도 우원재, 넉살, 창모란 신선한 재료에 걸맞은 결과물이 되었고, 이는 낮게 깔린 분위기를 중심으로 꾸려진 비트와 조화를 해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다한 미쓰라 진의 도움이 크다.

특히 ‘수상소감’이 눈에 띈다. 희망, 좌절의 해소 등 유효한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들의 행동은 물거품이 됐고, 타인과 벽을 쌓는 행위로 이제야 진짜 모습을 찾게 된 심경 변화가 흥미롭다. 무엇보다 후렴구에서 비아이가 표현하는 ‘먹구름도 구름이었지, 쓴웃음도 웃음인 거지’란 글귀는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포기에 가까운 심정처럼 여겨져 공허하다. 1인칭부터 3인칭까지 특정 대상을 상대로 했던 그들의 시점이 더는 뚜렷하지 않은 이유다.

그런 점에서 ‘내 얘기 같아’가 아쉽다. ‘연애소설’, ‘우산’, ‘헤픈 엔딩’ 등 서정적인 선율 위로 보컬이 다수의 지분을 차지하는 전형적인 에픽하이의 타이틀로써 이번 곡 또한 헤이즈의 힘을 빌려오지만 선을 이탈한 이별이란 재료에 딱히 몰입할 여지가 없다.

위안의 성질은 아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 Epik High Is Here 上 >의 손끝은 분명 우리에게로 뻗어있다. ‘Leica’의 ‘이러면 어때 저러면 또 어때’란 가사처럼 무감각해진 에픽하이만큼 불투명해진, 흘려보내는 것이 친근한 이 시대의 ‘성인’에게 보내는 편지인 것이다. 당장 현실을 살아가는 모두의 이야기이자 아직 이곳에 살아 있다는 외침이 거대하다.

– 수록곡 –
1. Lesson Zero
2. Rosario (Feat. CL, ZICO)
3. 내 얘기 같아 (Feat. 헤이즈)
4. 수상소감 (Feat. B.I)
5. Leica (Feat. 김사월)
6. 정당방위 (Feat. 우원재, 넉살, 창모)
7. True crime (Feat. Miso)
8. Social distance 16
9. End of the World (Feat. GSoul)
10. Wish you w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