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이 복각해낸 과거는 한낱 모형으로 그치지 않았다. 시티팝으로 시작돼 디스코까지 흘러간 복고의 흐름 중에서도 그가 유독 돋보이는 것은 본격적으로 유행이 시작되기 이전인 2011년도 발매한 첫 앨범 < 그대여 이제 >부터 뚜렷하게 드러낸 지향점 때문이다. 뉴잭스윙을 중심으로 고증해낸 당대의 감각은 찰나의 번뜩임으로 끝나지 않았고, 다양한 작업물을 거치며 확장한 그의 영역과 함께 ‘기린’이란 이름을 고유하게 만들었다.
그런 그가 은퇴를 선언한다. 아쉽지만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며, 1990년대도 앞자리의 숫자가 바뀐 밀레니엄을 앞둔다. 낭만이 가득 찼던 세대에 대한 그의 존중도 이제는 이별을 맞이할 차례다. 사랑해 마지않던 노스탤지어에 대한 뜨거운 안녕. 기린의 세 번째 정규 앨범 < The Town >이다.
‘사치’는 기린이 특별한 이유 중 하나이다. 월세 벌기도 바빠 연애조차 사치가 되는 현대 청년의 고민을 올드스쿨 힙합을 기반으로 한 과거시제로 물들이며, 시대를 관통하는 교차점을 통해 공감의 여지를 만들어낸다. 래퍼 리오 케이코아(Leo kekoa)가 머물렀던 힙합 듀오 2MC가 1999년 발표한 ‘Fantasy’의 후렴구를 따온 동명의 곡 역시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그때의 감성을 가져오는 것에 멈추지 않고 현재로 시점을 옮겨 가공하기에 음악은 세련되게 재생된다.
동시에 세세하다. ‘안돼’에서 녹음한 음성 내레이션과 ‘I belong to you’의 ‘송승헌 눈썹보다 더’란 가사, ‘어떡해’에서 민영이 대희를 찾기 위해 집으로 전화하는 방식 등 디테일한 시대적 해석은 그의 시각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이는 확고하게 뼈대를 잡은 기린의 기획력을 구현해 낸 브론즈와 디제이 유누 등 프로듀서 진의 힘이 크며, 충실한 재현을 바탕으로 드비타를 비롯한 개성 강한 참여 진도 흔들리지 않고 콘셉트에 녹아든다.
프로듀서 모과(Mogwaa)와 함께 한 ‘Town now’는 이정현의 ‘와’ 등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세기말 분위기를 꺼내온다. 미완성이었던 당시의 테크노 장르를 더 완벽하게 갖춰낸 보코더와 전자음의 반복은 ‘Step to you’와 박문치가 편곡한 ‘버스 안에서’ 등으로 발현되는 앨범의 따뜻한 정서와 다소 어긋나지만, 마지막 트랙이자 마스타 우, 원타임으로 대표되는 2000년대 초반 힙합 넘버 ‘Puff Daehee Intro: The Message’로 이어지며 기린의 서사를 구체적으로 암시한다.
이렇게 기린이 제공한 추억이 막을 내린다. 다만 음악 플레이어의 발전 속에서도 라디오가 사연을 타고 아직 개인의 마음에 자리 잡은 것처럼, 변형되지 않은 형태의 순수를 전파하는 < The Town > 또한 소통의 매개체로서 기억에 남을 확률이 높다.
-수록곡- 1. The Town 2. Sachi (Feat. Plastic Kid) 3. 안돼 4. MARGARITA (Feat. 재규어 중사 (SFCJGR)) 5. I belong to you (Feat. Jinbo the SuperFreak) 6. 지금이 중요해 (Feat. zin) 7. Town now (Feat. Mogwaa) 8. 미안해 (Feat. DeVita) 9. Fantasy (Feat. Simon Dominic, Hoody, UNITY Recordz) 10. 버스 안에서 11. 어떡해 (Feat. meenoi) 12. Town on air (Feat. 재규어 중사 (SFCJGR), meenoi, Rekstizzy) 13. Step to you 14. Puff Daehee Intro: The Message
장범준의 대중성은 현실에 밀접하게 파고든 가사로부터 기인한다. 벚꽃, 여수 등 특정한 소재에 구체적인 상황을 얹은 뒤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보편성을 획득하기에 청자는 그의 곡에 공감한다.
JTBC의 예능프로그램 < 히든싱어6 >에서 탈락한 이후 3일 만에 만들고, 발표한 ‘잠이 오질 않네요’ 또한 마찬가지이다. 투박한 어쿠스틱 반주 위로 밤이란 시간대에 녹아내린 다양한 짝사랑의 형태를 담아내는 목소리는 가성과 진성을 오가며 서로 다른 감정을 표현하기에 극적이다. 하나의 브랜드처럼 굳혀진 곡의 구성은 단조로우나 음의 매 순간 기억을 각인하며 뚜렷한 이미지로 주조해내는 장범준의 능력 역시 고유하다.
윤석철은 일렉트로니카, 힙합 등 다양한 음악적 요소를 재즈 중심으로 결합하며 꾸준하게 지평을 넓혀왔다. 2016년 윤석철 트리오로 발매한 < 자유리듬 > 이후 4년 만에 만난 그는 어느덧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브랜드를 런칭할 만큼 성장해 있었다. 재즈 뮤지션으로서 모습은 간직한 채 다른 아티스트에게 꼭 맞는 옷, 다만 세상에 하나뿐인 유일한 옷을 만들 수 있는 재단사가 된 것이다.
그의 빈 공간은 한계가 없었고, 음악에 대한 열정과 순수가 채워지며 끝없이 팽창하고 있었다. < Tailor >란 앨범 제목처럼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더 블랭크 숍을 빅퍼즐에서 만났다.
< Tailor >는 내러티브를 가진 콘셉트 앨범이다. 고등학교 때 배운 피아노가 재밌어서 재즈 피아니스트로 음악을 시작했지만 사실 ‘음악을 해봐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된 건 작곡자가 되고 싶어서였어요. 윤석철 트리오로 활동하며 여러 아티스트를 만나 꾸준히 인연을 만들었고, 가요의 작법을 경험하며 ‘이곳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음악이 뭐가 있을까?’란 긴 시간 동안의 구상과 고민을 거쳐 가요 프로듀서로 나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앨범을 구상하기 시작한 때는 언제인가? 2, 3년 전쯤? 하지만 먼저 나 자신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재즈 피아니스트로서는 언제든지 앨범을 낼 수 있었지만, 프로듀서로선 아직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거든요. 더구나 그 때 당시에는 제가 기획한 여러 아티스트 분들을 모아서 컨트롤 할 수 있는 상황도 여의치가 않았어요. 모든 면에서 ‘이제는 할 수 있겠다, 해도 되겠다.’란 확신이 들었을 때 제작을 진행하게 됐습니다.
앨범의 중점은 다양성과 확장이다. 그런데 진보적인 목표와 다르게 < Tailor >란 단어는 사실 고전적인 느낌이 있다. < Tailor >란 단어 자체가 고전적이긴 하지만, 이름보단 재단사의 행위에 집중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람의 체형과 치수를 정확하게 재고, 딱 맞지만 단 한 번 도 입어본 적은 없는 개성 있는 옷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재단사의 일이거든요. 이 모습을 콘셉트로 정하고 앨범 제목을 짓게 됐습니다.
다양한 활동을 이어왔지만 프로듀서 더 블랭크 숍은 새로운 페르소나다. 정체성을 발현하는 데에는 중심적 자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더 블랭크 숍은 결국 윤석철이에요. 제가 재미있게 느낀 음악을 배우고 또 교감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장르가 뒤죽박죽 섞여서 나온 형태죠. 하지만 그걸 표현하고 세상 밖으로 내놓으려니 많은 연습과 경험이 필요했고요. 그렇게 이해도가 높아지고 경험치가 쌓였을 때, 제 음악의 100% 중 재즈가 가진 50%, 그리고 나머지 장르를 합치는 것이 다른 프로듀서들과 구별되는 중심적 자아라고 할 수 있겠네요. 윤석철이 재즈 뮤지션이라면 더 블랭크 숍은 재즈를 배경으로 하되 조금 더 가요에 가까운, 다양한 장르를 할 수 있는 프로듀서로 설정했습니다.
실제로 앨범은 가요이면서 재즈적 터치가 완연하다. 의도라기보단 제가 만들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것 같아요. (웃음) 사실 ‘게으른 아침들’은 앞에 한 마디에서 두 마디 정도가 팻 메스니(Pat Metheney)가 만든 ‘James’의 인트로 기타 중 ‘미솔라’ 로 같은데, 꽤나 많은 분들이 비슷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아모네대츠카포네’의 경우는 아프리칸 리듬인 아프로 비트를 차용했어요. 뉴욕의 흑인 재즈 뮤지션들이 아프로 비트 기반으로 연주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저도 그런 음악을 좋아해서 시도해 본 곡이에요.
선우정아, 십센치, 데이식스의 원필, 안녕하신가영, 하헌진, 이진아 등 정말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앨범이다. 섭외나 진행 과정에서부터 오래 걸렸을 것 같다. 정말 오래 걸렸어요 (웃음). 다만 이번 앨범에 참여한 대다수의 분들이저와 인연이 있었어요. 그래서 작업은 특정 아티스트 분의 성향과 특징을 먼저 생각해서 곡을 만들고, 그 다음 참여를 부탁했어요. 다들 흔쾌히 승락해주셔서 생각보다 진행 과정 자체는 쉬웠습니다.
트위터 ‘슈밴’ 님의 질문이다. “피하고 싶을 때 외우는 주문, 라디오 PD, 곰팡이, 하품 등 흔히 보지 못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곡을 써서 흥미롭다. 일상 속에서 상상 이상으로 곡 영감을 받는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가 있을까?” 보통 사랑이 공감을 많이 일으키는 주제이지만, 제가 잘 못 쓰겠더라고요. (웃음) 오히려 일상을 보는 한 사람의 시각을 노래로 표현하는 게 가장 저 다우면서, 보편적인 일이라 생각했어요. 그런 부분이 대중분들께서 들었을 때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인 것 같아요.
가사 쓰는 게 어렵진 않았나? 정말 어려웠어요. 사실 저는 연주자여서 < Tailor >를 작업하기 전에는 가사를 써본 적이 없었어요. 보통 힙합은 본인들의 파트를 나눠 직접 작업을 해서 이 앨범도 가사는 ‘참여진이 써주진 않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모두 제가 해야 되는 일이더라고요. (웃음)
작사로 생각했을 때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랜선탈출’ 가사를 가장 좋아해요. 보편적인 이야기가 아닌 판타지 세계 속 이진아라는 캐릭터를 사용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 체험이었습니다. 사실 ‘랜선탈출’을 썼을 때부터 무조건 이 곡은 이진아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고전 게임에 자주 활용되는 칩튠을 주로 사용했는데 리듬은 스윙이에요. 스윙 리듬과 곡의 사운드가 잘 어울릴 거 같았죠.
‘합주중’이란 스킷과 이어지는 곡인데, 스토리 라인은 어떻게 짰나? 전작 ‘렛슨중’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거 같아요. ‘렛슨중’은 연주곡 중심의 지난 앨범에서 이 노래가 ‘즐거운 이유’와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 지’ 등 연주로만 들으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친절하게 설명하기 위해 만든 거예요. 동시에 제가 음악을 일로써 대하게 될 때 재미없어지는 순간을 위한 개인적인 곡이기도 하고요.
‘렛슨중’은 지금까지 두 곡이 나왔는데, 세 번째가 되면 지루할 거 같아 ‘합주중’으로 바꿔 봤어요. ‘합주중’은 ‘랜선탈출’으로 이어지기 위한 완전한 콘셉트 곡이지만요. 디지털화된 데이터 이진아 씨가 합주하고 싶은 마음에 랜선을 돌아다니다가 한 연습실에 다다르게 되고, 그곳에서 나오는 우리의 음악을 들었을 때 ‘나도 같이해보고 싶다’라고 생각하기 까지의 과정을 스토리라인으로 짜봤어요. 그러니까 ‘합주 중’도 설명이 되고, ‘랜선탈출’까지 이어지는 가사를 쓰게 됐죠.
‘사랑노래’를 부른 데이식스의 원필은 더 블랭크 숍과 같은 건반 주자다. 솔로 활동이 잦은 멤버는 아닌데, 어떻게 함께하게 된 건지 궁금하다. 노래 제목과 가사를 생각했을 때 젊은 남자 가수가 불렀으면 했어요. 평소 모니터링하는 차원에서 아이돌 음악도 많이 듣는 편인데, 여러 분을 후보로 추려 뒀고 그 중 1순위가 데이식스의 원필 님이었죠. 데이식스가 대형 기획사 소속이긴 해도 ‘라이브 클럽 데이’ 등 데뷔 초 실제로 공연을 자주 하면서 성장한 밴드잖아요. 그 사실도 알고 있었고, 원필 님은 같은 건반 주자이기도 해서 제가 만든 음악에 더 이해가 있을 것 같았어요.
원필의 독특한 보컬 톤이 곡과 잘 맞아떨어졌다. 음색이 특이하죠. 미성에 가까우면서, 가성도 잘하고 완전 고음도 저음도 아닌 담백한 목소리가 매력적이에요. 실제로 보니 음악에 대한 열정이 정말 많았습니다. 녹음할 때 처음 만났는데 작업하는 내내 좋은 인상을 받았어요.
이번 앨범 자체가 연주 곡, 보컬 곡이 서로 번갈아 가면서 진행되는 느낌이다. 요새는 앨범을 통째로 듣는 경우가 별로 없죠. 하지만 저는 CD로 듣는 분들에게 노래와 노래 사이 구간마다 쉬어 가는 전환점을 넣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제가 잘 할 수 있는 게 연주곡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장면 전환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LP의 A, B면처럼 분위기가 비슷한 연주곡을 넣어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으로 곡 리스트를 선정하게 됐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헌진과 함께 한 ‘사랑 없이 어떻게 살아’ 경우는 노래가 일종의 스킷(Skit) 기능을 수행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 ‘사랑 없이 어떻게 살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피아노 루프에요. 이 곡은 특성상 버스(Verse)가 있고, 브릿지(Bridge)가 있는 정형화된 곡의 형태가 될 순 없었어요. 본격적인 피아노 루프 연주가 들어가기 전, 앞 부분에 노래에 대한 설명을 담은 나레이션을 넣었고, 이어지는 진행을 일종의 훅(Hook)과 일렉트로니카 음악의 드랍처럼 구성해 완전히 주목할 수 있게 만들었어요. 언젠간 하헌진 씨와 꼭 재밌는 걸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결과물이 나온 뒤 만족했습니다. (웃음)
전자 음악에 대한 관심도 꾸준히 밝혔다. 코나(Kona)와 함께 한 ‘옷장에 곰팡’은 어떻게 진행하게 된 건가? 원래 ‘옷장에 곰팡’은 앨범에 수록될 계획이 없었어요. 그런데 코나가 대략적인 구상을 들고 찾아왔고 이후에 제가 연주하고 멜로디를 쌓으며, 가사를 붙이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앨범에 넣어도 어울리겠다고 느꼈어요. 굉장히 생뚱맞을 수 있는 곡이지만 저의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품하게 되는 노래’, ‘옷장에 곰팡’은 직접 노래를 불렀다. 어렵지 않았나? 안녕의 온도란 팀에서도 몇 번 불렀기 때문에 별로 힘들지 않았어요. 그리고 내가 부를 수 있는 곡만 만들기 때문에 · · · 제 영역을 넘어가는 무리한 노래는 만들지 않아요. (웃음)
마지막 곡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이다. ‘이 곡은 왜인지 가사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간단하게라도 설명을 할 수가 없네요.’라 썼다. 이 곡도 제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곡인데, 너무 솔직한 가사는 쓰지 못하겠더라고요. 작사로 많은 경험을 하게 되는 거 같은데, 개인적으론 제가 쓰는 가사가 비유를 비롯해 어떤 뜻을 내포하는 의미를 담는 방법이 아직 서투른 거 같아 1차원적이라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안녕의 온도에서 드럼을 치고 작사를 했던 소월이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부터 많이 느꼈지만, 가사를 정말 잘 써요.
윤석철은 왜 다양한 음악을 좋아하고 또 다루려고 할까? 재즈를 해서 그런 거 같아요. 예전부터 지금까지 재즈는 정말 많은 뮤지션이 여러 가지 장르와 리듬을 융합하면서 발전시켜왔어요. 현재 나오는 앨범만 봐도 국적과 문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존재하고요. 우리나라도 국악과 재즈의 결과물이 굉장히 주목받고 있잖아요?
허비 행콕(Herbie Hancock)같은 경우도 모던 재즈를 선호하지만, 펑크(Funk)와 일렉트로니카 앨범도 내고, 이스라엘의 베이시스트인 아비샤이 코헨(Avishai Cohen) 같은 경우도 지역의 토속적인 분위기를 녹인 문화적 색깔이 있어요. 파나마 출신의 다닐로 페레즈(Danilo Perez) 역시 고유의 색을 가지고 있어요. 재즈 뮤지션에겐 각각의 아이덴티티가 있고 저도 그런 것을 흡수하는 걸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양성을 갖기 위해 노력한 것 같아요.
더 블랭크 숍이 재단한 옷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곡 혹은 아쉬운 곡이 있을까? 만들면서 가장 재밌었던 곡은 ‘아모네대츠카포네’입니다. 스트링을 제외한 모든 녹음을 제 작업실에서 진행했는데, 직접 짠 브라스 라인을 다섯 명의 주자가 연주하며 제가 상상하던 그대로의 형태로 구현하는 것을 보고 ‘와 이게 되는구나’라고 생각했죠. 희열을 느꼈어요.
아쉬운 건 드럼도 같은 작업실에서 녹음했는데, ‘녹음실에 컴프레서만 하나 있으면 드럼 사운드를 조금 더 이해하고 더 재밌게 만들 수 있었을 텐데.’란 생각이 들었어요. (웃음) 조만간 사지 않을까요?
‘아모네대츠카포네’는 제목도 독특하다. 작사를 할 때 멜로디를 만들고 난 이후에 가사를 붙이는데, 음절을 알기 위해 가이드 녹음을 하며 중얼거렸던 단어가 바로 ‘아모네대츠카포네’였어요. 녹음 한 걸 들어보니 재밌더라고요. (웃음) 그렇게 제목을 정하면서 아모네대츠카포네를 주문이라고 생각해본 뒤 이어지는 이야기를 적으면서 작업했습니다.
윤석철이 만약 앨범의 참여 가수였다면, 프로듀서 더 블랭크 숍은 어떤 곡을 제안했을까? (인스타그램 @hee___1.05pm님 질문) 앨범의 마지막 곡인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지 않을까요? 녹음하기 전 제가 부른 가이드 곡을 들은 몇 명의 연주자와 보컬 분들이 ‘이 곡은 직접 불러요 형, 이건 형이 불러도 좋겠는데요.’란 의견을 넌지시 전달했어요. (웃음) 개인적인 경험을 담은 노래이기도 하고요.
더 블랭크 숍으로 어떤 커리어를 쌓고 싶은가? 더 블랭크 숍이 발현할 다양성 중에서도 실력 있는 연주자들과 함께 선보이는 칠(Chill)한 스타일의 음악을 하고 싶어요. 대중에게 이런 느낌의 가요가 있다고 소개하면서 좋은 점까지 알려드리고 싶어요.
동시에 신(Scene) 자체가 다양해졌으면 좋겠어요. 최근 프로듀서라고 하면 시퀀서 기반에 EDM, 힙합 장르의 이미지가 많이 떠오르잖아요. 프로듀서의 의미가 악기와 화성을 잘 다루는 연주자로도 확장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음악을 잘하고 실력 좋은 연주자분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 쇼 미 더 머니 >처럼 래퍼가 아닌 연주자 중심의 프로듀서들이 나와서 경쟁하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요? (웃음)
좋은 연주자와 함께 가요를 만들었던 선배님들처럼, 음악 감독이 되고 싶습니다. 목표를 위해 컴프레서도 하나 사고요. (웃음)
4년 전 이즘과의 인터뷰 때 재즈 뮤지션으로서 인생 곡 세 개를 추천했다. 더 블랭크 숍의 추천 혹은 앨범을 만들었을 때 참고했던 곡을 알려 달라. 자주 듣는 음악으로 말하겠습니다. (웃음) 첫 번째는 브라질 출신 트리오인 아지모스(Azimuth)의 ‘Brazil’이란 곡이에요. 2016년부터 지금까지도 잘 듣고 있어요.
두 번째는 YMCK의 < Family Music >입니다. ‘랜선탈출’에 영향을 준 앨범이면서, 칩튠의 정수이기도 하고요. 실제로 작업을 할 때는 장르의 확장을 통해 YMCK와 다른 표현 지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어요.
마지막은 제프 파커(Jeff parker)의 < Suite for Max Brown >입니다. 아직 우리나라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기타리스트인데 힙합, 모던 재즈도 있으면서 아프리카의 바이브가 느껴지는 게 몽환적이에요. 정말 좋아요. (웃음)
분명 갑작스러운 변화는 아니다. 2012년 데뷔부터 록과 랩의 결합을 시도하며 음악적 지향을 밝힌 래퍼 머신 건 켈리는 3집 < Bloom >의 ‘Let you go’ 등 계속된 실험을 통해 구체적인 미래를 제시했지만, 기대치보다 부족했던 결과물은 그가 나아가는 방향에 의문을 품게 했다. 무엇보다 카밀라 카베요와 함께 부른 팝 넘버 ‘Bad things’와 에미넴과의 디스전으로 얻은 유명세는 그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유보하며 이슈, 발언 등 대외적인 요소에 집중하게 했다.
실망스러운 상황에도 머신 건 켈리는 멈추지 않았다. ‘Floor 13’의 묵직한 뉴 메탈 등 낮게 깔린 사운드가 가득 찬 2019년 작 < Hotel Diablo >는 빌보드 앨범 차트 5위를 기록하며 나름의 성과를 얻었고, 앨범 내 유일한 팝 펑크(Punk) ‘I think I’m okay’가 예상외의 호평을 끌어내며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는 충분한 지지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록커로의 노선 변경을 선언했고, 출사표이자 다섯 번째 정규 < Tickets To My Downfall >로 반전을 노린다.
‘title track’부터 의지를 다진다. 잔잔한 기타 연주로 시작하는 곡은 곧바로 강렬한 변주로 추락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개인의 시선을 표현해낸다. ‘Kiss kiss’ 역시 불안을 술, 마약으로 해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단순하게 반복되는 후렴구와 밝은 분위기의 반주로 포장하며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를 가볍게 덜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팝 펑크(Punk)를 중심으로 한 형태의 작법은 앨범 대다수를 지배하며 상처와 회복의 과정을 다루기에 일련의 유기성을 지닌다.
다만 그 짜임새가 견고하진 않다. 구조가 비슷한 곡들의 되풀이는 감상을 방해하며 청자를 피로하게 하는 요인이다. ‘bloody valentine’과 할시와 함께 부른 ‘forget me too’ 등 싱글 단위의 트랙은 매력적이지만, 장르의 재현이란 목적 안에 배치된 수록곡 구성은 이어 들었을 때 서로의 개성을 흐릿하게 만들기에 단조롭다. 환기의 역할을 맡아야 할 ‘kevin and barracuda (interlude)’도 유치하고 의미 없는 역할극으로 흘러갈 뿐이다.
작품 전체에 밴 프로듀서 트래비스 바커의 흔적도 짙다. 밴드 블링크 182의 드러머가 주도한 < Tickets To My Downfall >은 낯익은 연주와 문법은 탄탄하게 뼈대를 유지하지만, 그 자체로 구속력을 가져 신선하지 않으며 과거시제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시대극에 주인공 머신 건 켈리는 정해진 대본만 읽는 모양새이다.
현 연인에 대한 감사와 딸에 대한 진심을 담은 ‘banyan tree (interlude)’와 ‘play this when I’m gone’으로 마무리되는 < Tickets To My Downfall >은 아티스트의 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인생 첫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오르는 결실을 본다. 하지만 머신 건 켈리가 기존을 답습하며 제안한 펑크(Punk)는 추억을 자극할지언정 극적인 대안은 되지 못한다. 몰락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롭게 새긴 캐릭터는 선명하지만, 그 깊이가 아직 얕다.
-수록곡- 1. title track 2. kiss kiss 3. drunk face 4. bloody valentine 5. forget me too (Feat. Halsey) 6. all I know (Feat. Trippie Redd) 7. lonely 8. WWIII 9. kevin and barracuda (interlude) 10. concert for aliens 11. my ex’s best friend 12. jawbreaker 13. nothing inside (Feat. iann dior) 14. banyan tree (interlude) 15. play this when I’m gone
빅 션은 랩 스타다. 라디오에 출연하는 카니예 웨스트를 무작정 찾아가 열여섯 마디 랩을 뱉으며 데뷔했던 그의 이야기는 곧 모두를 주목시켰다. 그에 호응하듯 빅 션 역시 히트 싱글을 주조하는 능력과 외향적 요소를 앞세우며 새로운 주인공의 탄생을 증명했다. 부족하다고 지적받은 앨범 단위의 완성도도 꾸준히 다듬었고, 2017년 < I Decided >란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상업적 성공, 연애 등 모두가 그의 화려한 사생활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그의 이면은 보이는 것과 정확히 반대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겪었던 우울과 불안은 빛나는 그의 모습을 잠식했고 급기야 가해지는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짧은 시간 활동을 멈추기에 이르렀다. 치유란 담론 아래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빅 션은 2019년 발표한 싱글 ‘Single again’에서 실마리를 발견했고, 이번 앨범으로 구체적인 해답을 찾는다. 2012년 발매한 믹스테이프의 후속작이자 자신을 낳고, 품어냈던 고향의 이름을 빌려 철저하게 본인만을 담아낸 이기적인 작품. < Detroit 2 >다.
앨범의 진중한 분위기 아래 첫 번째 곡 ‘Why would I stop?’부터 다섯 번째 ‘Body language’까지의 가감 없는 드러내기는 강한 흡인력 가지며 청자를 집중시킨다. ‘Lucky me’는 단어 그대로의 행운과 반어적 표현으로 인생을 두 갈래로 읽어낸다. 마치 기도를 하듯 경건하게 진행되는 첫 번째 절과 중간지점부터 강한 트랩 사운드로 변모하는 비트 구성을 따라 피치를 올리는 빅 션의 래핑이 절정이다.
역경을 이겨낸 개인의 시선은 더 큰 테마로 나아간다. 소셜 미디어와 왜곡된 정보란 사회적 이슈부터 애인의 유산을 암시하는 등 다양한 상처를 되새기며, 극복하기까지의 과정에서 깨달은 삶에 대해 공표하는 ‘Deep Reverence’이다. 2019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불합리로부터 LA 빈민가를 지킨 닙시 허슬의 목소리를 빌린 다짐은 디트로이트의 거리에 영감을 뿌리며 다시 채색될 빅 션의 청사진이다. 이후 관악 세션과 콰이어 위로 드웰의 보컬이 매력적인 ‘Everything That’s missing’에서 재차 뜻을 밝히며 서사를 이어간다.
에리카 바두, 스티비 원더의 음성을 통해 출신에 대한 애정을 표출한 빅 션은 ‘Friday night cypher’로 하나의 연대를 만든다. 프로듀서 힛 보이의 주도 아래 펼쳐진 변주 속 에미넴을 비롯한 디트로이트 출신 래퍼들의 외침이 거대하다.
스물한 곡이 수록된 긴 호흡이니만큼 어쩔 수 없지만, 중반부에 느껴지는 피로감은 감상을 방해하는 요소이다. 영 떡과 함께 한 ‘Respect it’, 트래비스 스캇의 ‘Lithuania’로 이어지는 트랩 넘버의 세련된 소리를 앞세워 노린 반전은 자기과시로 점철된 가사가 앨범의 유기성을 무너뜨리며 실패한다. 다만 이탈한 궤도는 바로 등장하는 ‘Full circle’로 회복되고 < Detroit 2 >가 마무리되는 순간까지 안정성을 부여한다.
샘플의 선택도 흥미롭다. 마이클 잭슨의 ‘Human nature’를 기반으로 한 ‘Don life’는 전자음과 묵직한 베이스의 활용, 무엇보다 릴 웨인의 참여가 더해져 만족스러운 재해석을 끌어낸다. 노 아이디(No I.D.)가 발굴한 1992년 개봉작 < Godzilla vs. Mothra >의 OST는 ‘The Baddest’의 실험적인 비트로 재탄생한다. 빅 션은 브라스와 잘게 나뉜 하이햇 위로 그려지는 비상식적인 선율과 경쟁하듯 주도권을 주고받으며 앨범 내 긴장을 유지한다. 뚜렷한 주제를 녹여낼 밑바탕을 고르는 안목이 뛰어나다.
자신의 치부를 들춰내길 마다하지 않는 점에서 이미 < Detroit 2 >는 생동하다. 빅 션 스스로가 구원받기 위해 기록한 일지(日誌)는 아이러니하게도 대중을 움직일 확실한 근거가 될 것이다.
-수록곡- 1. Why would I stop? 2. Lucky me 3. Deep reverence (Feat. Nipsey Hussle) 4. Wolves (Feat. Post Malone) 5. Body language (Feat. Ty Dolla $ign & Jhené Aiko) 6. Story by Dave Chappelle 7. Harder than my demons 8. Everything That’s missing (Feat. Dwele) 9. ZTFO 10. Guard your heart (Feat. Anderson .Paak, Earlly Mac & Wale) 11. Respect it (Feat. Young Thug) 12. Lithuania (Feat. Travis Scott) 13. Full circle (Feat. Key Wane & Diddy) 14. Time in 15. Story by Erykah Badu 16. FEED 17. The Baddest 18. Don life (Feat. Lil Wayne) 19. Friday night cypher (Feat. Tee Grizzley, Kash Doll, Cash Kidd, Payroll, 42 Dugg, Boldy James, Drego, Sada Baby, Royce Da 5’9″ & Eminem) 20. Story by Stevie Wonder 21. Still I rise (Feat. Dom Kenne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