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인 송라이터나 음악 감독이 아닐지라도 신스팝밴드 건반 주자의 리프와 톤메이킹은 음악색을 결정한다. 이레이저와 야주를 이끈 천재 뮤지션 빈스 클라크와 밴드의 두뇌 마틴 고어, 보컬리스트 데이브 개헌 만큼의 주목은 못 받았으나 키보디스트 앤디 플레처는 디페시 모드의 어두운 음색을 주조했다. 2022년 5월 작고한 플레처와의 작별은 팬데믹과 더불어 밴드의 새출발을 계시했다. 개헌은 NME와의 인터뷰에서 신보에 플레처의 연주가 담기지 않았다고 밝혔다.
상실을 시적 가사로 풀어낸 선공개 싱글 ‘Ghosts again’은 초기작 ‘Just can’t get enough’과 ‘New life’ 처럼 비교적 밝은 사운드로 원년 멤버의 첫만남을 반추하나, 밴드는 이내 본색을 드러낸다. 선언적인 인더스트리얼 록 ‘My cosmos is mine’과 치밀한 편곡에 약물 중독을 암시한 ‘Caroline the monkey’로 예리한 감각을 유지했다. 영적 기운의 ‘Soul with me’과 침잠하는 ‘Don’t say you love me’는 데이브 개헌의 크루너적 매력을 드러냈다.
배경 정보를 읽지 않아도 자연스레 형상화되는 영화 < 12 몽키즈 > 풍 디스토피아와 섹슈얼 코드, 종교적인 분위기가 음반을 관류한다. 디페시 모드의 인장이며 40년간 닦아온 정체성이다. 프랑스 패션 잡지에서 따온 밴드명처럼 시각적 사운드스케이프는 ‘Before we drown’과 ‘My favourite stranger’에서 과거 명작 < Violator >(1989)와 < Music For The Masses >(1991)를 복원했다.
디페시 모드는 1980년대 뉴웨이브 밴드들의 단명을 극복했다. 인더스트리얼과 고딕 록을 실험했고 부피감 있는 신시사이저 사운드스케이프로 스타디움을 호령했다. ‘Personal jesus’나 ‘Enjoy the silence’는 전 세계 버스커들에 의해 울려 퍼지며 클래식으로 자리매김했다. 대상을 향한 페티시와 무신론적 세계관이 관류하는 < Memento Mori >는 여전히 감각적이고 섹시한 사운드로 플레처의 상실을 위로했다.
-수록곡-
1. My cosmos is mine
2. Wagging tongue
3. Ghosts again
4. Don’t say you love me
5. My favourite stranger
6. Soul with me
7. Caroline’s monkey
8. Before we drown
9. People are good
10. Always you
11. Never let me go
12. Speak to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