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램 록(Glam rock)의 화신, 무차별한 변신의 귀재라지만 일흔을 바라보는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에게 더 이상 또 다른 페르소나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1970년대의 지기 스타더스트(Ziggy Stardust)라는 외계인과 씬 화이트 듀크(Thin White Duke)와 같은 이미지가 있다 해도 언제까지 그때와 같은 메이크업과 염색을 시키고 치마와 롱부츠를 착용시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변화의 첨단을 걷던 그도 생각해보면 1947년생이다. 할아버지 소리를 들어가며 경로 우대를 받을 그런 시기에 있는 것이다.
오히려 새 앨범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지 모르겠다. 대부분의 아티스트들이 수집가들을 위한 베스트 앨범과 박스 세트로 황혼기를 마무리하지 않던가. 그 와중에 신곡이라도 같이 끼워 나오면 그보다 더 감격스러운 일은 없다. 게다가 데이비드 보위는 심장 수술을 받았던 2004년부터 긴 휴지기에 들어갔다. 디스코그래피의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 < Reality >도 그보다 1년 전에 발매되었으니 정규 음반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만 같은 아쉬운 예측도 영 설득력이 없던 낭설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올해 초 등장한 뉴스는 이러한 예상을 단번에 뒤엎었다. 10년 만에 발매하는 앨범은 신곡으로만 온전하게 채운 27번째 스튜디오 음반이 될 계획이라는 것. < Young Americans >, < Low >, < Heroes > 등 명반 행진은 물론, 가장 최근의 앨범들까지에도 연을 잇고 있는 토니 비스콘티(Toni Visconti)가 프로듀서로 내정되었으며 앨범 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소식이 빠르게 SNS를 타고 팬들에게 전파되었다. 60대 중반의 움직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왕성한 활동이 이어졌다. 들뜬 소식이 채 가기도 전에 리드 싱글 ‘Where are we now’와 두 번째 싱글 ‘The stars (are out tonight)’을 차례로 발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 Heroes > 자켓 위에 제목을 덧씌운 앨범 커버도 공개되었다.
시대감각에 뒤떨어져도 어색하지 않을 나이이건만 데이비드 보위는 여전히 처지지 않는 매끈한 음악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훑어 내렸던 로큰롤 사운드를 구사하니 음반에 자리하는 것은 단연 관록 있는 옛 실력과 현대적 감각의 조화다. 인트로 ‘The next day’에서부터 그 결과가 단숨에 드러난다. 2010년대에 쓰인 곡은 1973년에 발매되었던 작품 < Aladdin Sane >에 끼워 넣는다 해도 큰 어려움이 없다. 러닝 타임 내내 로킹한 기타 연주가 끊이질 않고, 고저를 오가는 롤러코스터 보컬이 빠르게 분위기를 쥐락펴락한다.
다음이 바로 문제다. 두 번째 트랙 ‘Dirty boys’ 이후부터는 그야말로 킬링 트랙들의 향연이 이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언급해야할 곡은 바로 세 번째 곡 ‘The stars (are out tonight)’다. 기타와 현악기가 뽑아내는 흡인력 있는 음색에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가사, 그리고 이를 닮아 정점에 서서히 올라가는 데이비드 보위의 보컬은 음반을 듣는 팬들에게 최고의 모멘트를 선사한다. 더불어 트랙은 이전의 작품들에서는 접할 수 없는, 2013년에 가장 잘 어울리는 현재의 사운드를 담고 있다. 앞선 ‘The next day’에서 드러난 복고풍과는 어느 정도 대조되는 컨템포러리 넘버랄까. 아티스트로서의 감각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위의 곡들이 록 사운드로 강렬하게 귀를 지배했다면 ‘Where are we now?’와 ‘Valentine days’와 같은 곡들은 발라드의 멜로디로 달콤하게 소구력을 끌어 모은다. 특히 두 트랙에서는 데이비드 보위의 능란한 보컬이 큰 빛을 발한다. 느릿한 전개 위에 피아노와 현악 편곡이 조화를 이루는 ‘Where are we now?’에서는 중후한 목소리를, 뒤를 잇는 경쾌한 이미지의 ‘Valentine’s day’에서는 특유의 톡톡 튀는 창법을 활용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 한 포인트. 음반이 다채로울 수 있는 이유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접근법에 차이를 두었던 이 트랙들에 있다.
후반부의 곡들도 놓칠 수 없다. 기타 리프가 돋보이는 ‘I’d rather be high’와 빠른 템포의 ‘Dancing out in space’는 한 차례 숨을 골랐던 로큰롤의 레이스를 다시 펼치고 ‘Boss of me’는 < Station To Station > 시절을 연상시키는, 그러나 사운드의 텍스쳐에 있어서는 그와 다른 2013년의 펑크(funk) 사운드를 보여준다. 1980년대 팝의 느낌이 묻어나는 ‘How does the grass grow?’와 어쿠스틱 기타와 일렉 기타, 현악기의 레이어를 차례로 쌓아올려 아방가르드를 연출한 ‘Heat’ 또한 우열을 가리기 힘드니 그 어떤 트랙을 틀어놓아도 작품은 강한 매력을 흘려낸다.
곳곳에서 보이는 팝적인 센스는 단연 탁월하고 이를 토대로 가지 뻗은 수록곡들의 결과물 또한 흠잡을 곳이 없다. 물론 전성기를 수놓은 화려함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 빈자리를 연륜이 말끔하게 메웠다는 것이다. 1970년대에도, 1980년대에도 디스코그래피의 어떤 시기에 가져다 놓아도 음반은 밀리지 않으며 데이비드 보위의 대표작으로 손꼽아 내놓는다 해도 아쉬움이 없다. 종합해 보면 아티스트 개인의 성과는 결코 이전에 못지않다.
10여년 만에 등장한 그는 한층 더 과감해졌다. 보위 사운드의 또 다른 변신이라 봐도 무방하다. 이전부터 가져온 특유의 감각도 물론 중요하지만 현대적인 터치를 앨범 전체에 구사해 오늘날에 걸 맞는 작품을 만들었다는 사실 역시 쉽게 무시할 수 없다. 찬사를 보내고자 하는 이유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여전히 훌륭하고 여전히 매혹적이다. 빛깔을 바꿔오며 20세기를 장식한 아티스트는 지금도 시대를 밝게 비추고 있다. 멈추지 않는 변신의 귀재가 던진 새로운 컬러는 바로 < The Next Day >에 있다.
-수록곡-
- The next day
- Dirty boys
- The stars (are out tonight)
- Love is lost
- Where are we now?
- Valentine’s day
- If you can see me
- I’d rather be high
- Boss of me
- Dancing out in space
- How does the grass grow?
- (You will) Set the world on fire
- You feel so lonely you could die
- He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