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의 가을에 우리는 투쟁했다. 폭력과 무지, 탄압과 왜곡을 일삼던 구체제에 맞서기 위해, 척박한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끌어당기고 스스로를 융해하여 단단한 강철로 굳어진 후 격렬하게 부딪쳐야 했다. 그렇게 록 신의 다섯 베테랑은 슈퍼밴드 ABTB를 결성해 정제하지 않은 분노와 본능을 터트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전국 거리로 뛰쳐나와 촛불을 들었다. 하나의 ‘시대정신’이 이끈 ‘국면전환’이었다.
그렇게 바꾼 세상에선 모든 것이 선명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밴드는 그 후 약 4년 동안의 시간을 백일몽이라 명명한다. 거대한 투쟁 후에도 우리는 거듭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해왔다. 나아갈 것인가 머무를 것인가, 열 것인가 닫을 것인가, 품을 것인가 뺄 것인가…. ABTB는 그 현재 진행형의 혼란을 직시한다. 무기력으로부터 온 절규와 분노로 뜨거웠던 전작의 언어는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을 자주 언급하며 상대적으로 가라앉아있다. 이를 감싸는 사운드 또한 10곡 48분의 콘셉트 앨범에 걸맞게 공격성을 유지하면서도 현실의 경험을 더하고 완급조절로 무장했다.
작품은 광화문 군중을 차 안에서 내려다본 꿈속의 ‘nightmare’로 출발해 신윤철과 함께 기억의 단편을 하나로 모아내는 ‘daydream’으로 완성된다. 전자는 1990년대 얼터너티브와 그런지로 잔잔히 출발하다 ‘깨어날 수가 없는 꿈’에 갇혀 방황하는 자아의 당혹을 펄 잼의 ‘Once’가 연상되는 기타 리프와 광포한 기타 솔로, 보컬 샤우팅의 십자포화로 퍼붓는다. 반대로 신윤철의 블루지한 기타 플레이로 과거의 기억을 주마등처럼 전개하는 ‘daydream’에선 ‘내가 믿던 모든 것들이 멀어지네 / 사라지네 지금까지 나에게만 있던 것들이’라는 가사로 고통스럽지만 필수적인 자각과 진화의 과정을 목도한다.
그 시간의 터널 속 주인공은 독백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말을 듣기도 한다. 1970년대 파워 팝 스타일의 ‘a-void’의 ‘이제 남은 시간이 없어’라는 무거운 코러스 아래 밤거리를 배회하다가 소리 지르기로 일관하는 어떤 꼰대의 발언에 ‘인정투쟁’의 욕구를 느끼기도 하고, 펑키(Funky)한 리듬의 ‘My people’에선 ‘세상은 바란다고 바뀌지 않아’라 외치는 기득권의 느긋한 미소를 마주하기도 한다. 어느 하나 확실하지 않은 혼돈 속 ‘paradox’에 빠져 ‘날 그냥 내버려 둬’라 주저앉고 마는 것 같지만, 밴드는 강렬한 전자음과 함께 휘몰아치는 ‘neurosis’로 극의 반전을 이룬 후 ‘무리수’와 ‘tainted’에 이어 ‘daydream’의 깨달음을 향해 한 발씩 걸어간다.
이 지점에서 < daydream >이 마냥 어지러운 관찰기 혹은 체험기를 뛰어넘는다. 여전히 정답을 알 수 없고 거대한 카르텔이 존재하는 사회임에도 그를 목도하는 주인공은 몰락하지 않는다. 화자의 카오스는 질서가 허물어지고 새 문화가 일상이 되어가는 가운데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이고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고뇌의 길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밴드는 본래의 거친 소리 아래 핑크 플로이드와 퀸스라이크(Queensrÿche) 등 프로그레시브를 가져왔고 다채로운 곡 전개와 과감한 실험으로 도전을 천명한다. 특히 14분에 달하는 상술한 두 곡이 압도적이다. 고수의 정교한 세공이다.
ABTB의 백일몽은 희미한 꿈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격동하고 그 속의 어떤 것은 답답하리만치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혼란 속에서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바람하고 꿈을 꾸며 전진한다. 고집스럽게 지켜온 음악과 단단한 내공의 < daydream >이 이런 굳건한 믿음을 증명한다. 2020년 지금도 우리는 투쟁하고 있다.
-수록곡-
1. nightmare
2. a-void
3. 인정투쟁
4. my people
5. paradox
6. neurosis
7. 무리수
8. tainted
9. daydream (feat. 신윤철)
10. 가이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