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시드 폴이 사랑에 빠졌다. 그간 개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으로 다양한 주제를 노래한 그는 정규 9집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이에 눈길을 둔다. 제목인 < 너와 나 >에서의 ‘너’는 연인도, 친구나 가족도 아닌 반려견 ‘보현’이다. 앨범 커버에는 그의 사진, 설명에는 그의 소개, 작곡 크레딧에까지 그의 이름이 올라와 있다. 반려견과 동등한 위치에서 음악을 협업하겠다는 의미. 본작은 사랑하는 한 여인을 위해 빚은 유재하의 < 사랑하기 때문에 >처럼, 루시드 폴과 그의 강아지 둘만의 세계를 그려낸다.
애정의 낱말을 꾹꾹 눌러 담은 노랫말이 우선 청취를 집중시킨다. 오롯이 ‘보현’을 향해있는 문장들이지만 다수가 겪어봤을 보편적인 감성이라 청자의 공감을 어렵지 않게 끌어낸다. 말할 수 없어 마음을 알 수 없는 강아지에 대한 애착을 담은 ‘읽을 수 없는 책’의 가사 ‘읽을 수 없어도 괜찮아 / 함께 있잖아’는 사랑에 불안해하는 연인들의 심정을 풀어내고, ‘나도 그래 / 가끔은 이 세상이 너무 어지러워’라며 씁쓰레한 위로를 건네는 ‘불안의 밤’은 일상에 지친 사람들을 어루만진다. 느린 리듬, 느긋하게 읽히는 단어 하나하나에 곁에서 함께 호흡하는 듯한 포근함이 담겨있다. 그와 피처링에 참여한 가수들도 가창력의 비중을 줄이고 담담하게 노래해 언어의 강점을 부각한다.
여러 문법을 차용한 프로듀싱도 인상적이다. 생동감 있는 리얼 세션과 선명한 선율이 조화를 이루는 ‘두근두근’, 현악기와 간주의 신시사이저가 교차해 극적인 구성을 지니는 ‘또 한 번의 크리스마스’가 확실한 흡인력을 발산하며 앨범의 생기를 끌어올린다. 후반 분위기를 환기하는 펑키 리듬의 ‘I’ll always wait for you’와 목가적인 피아노 연주곡 ‘눈 오는 날의 동화’도 트랙 간의 경계를 뚜렷하게 가른다. 색다르지 않은 악기라도 필요한 요소를 적재적소에 담아 쓰는 감각이 밑그림의 완성도를 높인다.
반면 그가 새롭게 관심이 생겼다는 전자 음향의 활용은 활약이 다소 미미하다.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자연의 소리를 합성한 ‘산책 갈까?’와 넓은 공간감을 품은 ‘너와 나’는 확실한 음감 없이 분위기에 의도가 쏠려 듣는 쾌감이 부족하다. 보현이 콜라비를 씹는 소리를 녹음한 ‘콜라비 콘체르토’도 변칙적이기는 하나 일시적인 흥미에 머무른다. 오묘한 기운이 쭉 흘러가는 데다 중독을 보장하는 요소의 부재. 뒷심이 달린다. 이처럼 자극 없이 귀를 스치기만 곡들이 여럿 자리해 13개의 수록곡으로도 앨범이 꽉 찬 인상을 주지 않는다.
다만 그 단점이 음반의 콘셉트까지 해치는 것은 아니다. 효과는 약하다지만 전자음들은 테마에 맞게 번잡함 없이 연주되어 작품의 온기는 유지한다. 데뷔 22년 차에 접어든 그는 내공을 바탕으로 바라보는 대상과 그에 느끼는 감정을 자유롭게 오선지에 담아 개성이 확실한 음반을 낳았다. 사랑의 온도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머무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편에 위안을 주는 루시드 폴과 보현의 낙원이다.
– 수록곡 –
1. 산책 갈까? (Feat. Ludvig Cimbrelius)
2. 길 위
3. 두근두근 (Feat. CHAI)
4. 콜라비 콘체르토
5. 봄의 즉흥
6. 읽을 수 없는 책
7. 눈 오는 날의 동화
8. 또 한 번의 크리스마스 (Feat. 정승환)
9. 불안의 밤
10. I’ll always wait for you (Feat. Deepshower, MiiZUKi)
11. 뚜벅뚜벅 탐험대
12. 너와 나
13. ∞ (exclusively in C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