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욱한 연기, 담배 한 개비와 함께 잔잔히 피어오르는 공허함. 셀프 타이틀 < Cigarettes After Sex >는 연인들을 위한 새벽의 교향곡이자 슬프고도 황홀한 오르가슴이었다. 절정과 고요. 엉겨 붙을 정도로 강렬하면서도 동시에 극도로 침착한, 그런 사랑이 지닌 이형의 성질을 절절히 소묘해낸 앨범은 무채색임에도 뇌리에 각인될 만큼 선명한 색채와 치명적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시거레츠 에프터 섹스는 부드러운 질감의 ‘Heavenly‘를 시작으로 후속작 < Cry >의 정체를 공개했다. 밴드의 프런트 맨, 그렉 곤잘레스(Greg Gonzalez)가 애플 뮤직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작품은 여러 각국의 투어를 진행하며 만난 풍경들과 그 속에서 느낀 감정, 감동을 기반으로 필름 형태의 사운드를 구축한다. 영감은 좋았지만, 문제는 결과물이다. 검정으로 빼곡히 칠해진 전작의 앨범 커버에서 수차례 이염을 거친 사운드는 너무나도 흐린, 불분명한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로우(Low)와 갤럭시 500(Galaxie 500)로 유명한 장르, 슬로우코어(Slowcore)를 구사하는 시거레츠 에프터 섹스는 자극적 요소를 철저히 거세한 최소한의 골조와 느린 템포가 기반인 담백한 사운드를 표방한다. 변조가 거의 없는 그들의 스타일 특성상 자가복제를 피하기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만, 문제는 간신히 뼈대만 갖추고 있던 록의 요소를 조금 더 덜어내고 앰비언트 효과를 더욱 부각하자 생겨난 부유감과 단순화 현상이다. 멜로디를 먼저 제시하며 구조를 파악하도록 돕는 ‘Don’t let me go’와 하이라이트 부분으로 선명한 그림을 그린 ‘Heavenly‘를 제외하고는, 앨범 전체에 팽배한 구름이 모든 곡의 기조와 형태를 비슷하게 만든다.
전작과 비교해보자. 비슷함 속에서도 다른 템포와 미묘한 강약 포인트로 분명한 차이를 보이던 ‘Sunsetz’와 ‘Apocalypse’. 빠르지는 않아도 슬금슬금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K.’, ‘Sweet’, 그리고 ‘Opera house’가 중간중간 포진되어 앨범의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반면, < Cry >는 곡간 형태가 너무나도 단순한 탓에 킬링 트랙은 덤이요, 즐길 대목조차 찾기가 힘들다. 혼탁한 안개로 뒤덮인 숲은 그 존재만으로도 비밀스럽고 매력적이지만, 적어도 중간중간 길목을 드러내며 나아갈 방향을 알릴 표지판은 필요하다.
둔탁한 록 요소가 청취를 방해하던 EP < I. >에서 자신들의 강점을 빠르게 파악하며 귀에 안착하는 정제된 사운드로 발전하는 데 성공한 < Cigarettes After Sex >. 그들은 전작의 성공을 의식하며 그 부드러움을 상징하는 부피감에 연장선을 그리려 했지만, 과한 몽환경과 지워진 밴드 사운드의 흐릿함에서 더는 가치를 찾기 힘든 상황에 부닥쳤다. 외설을 예술로 그려내려 한 그의 발걸음이 앨범의 진부함이라는 교착점에 다다랐다.
– 수록곡 –
1. Don’t let me go
2. Kiss it off me
3. Heavenly
4. You’re the only good thing in my life
5. Touch
6. Hentai
7. Cry
8. Falling in love
9. Pure